호세아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4–8장 · 백성을 향한 고발
새벽처럼 오시는 하나님과 이슬처럼 사라지는 사랑
호세아 6장은 아름다운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서로를 부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으며, 그분을 아는 데 힘쓰자고 권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오심을 새벽과 비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곧바로 하나님의 대답이 들립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오심이 새벽처럼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사랑이 아침 이슬처럼 사라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는 것과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제사보다 사랑을, 번제물보다 자신을 아는 것을 바라십니까? 그리고 그 사랑과 지식은 이스라엘이 이미 말하고 있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돌아가자” — 누가 이 말을 하고 있는가?
호세아 6장의 첫 세 절은 한 공동체가 서로를 권면하는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야훼에게 돌아가자. 그가 찢었지만 우리를 고칠 것이고, 그가 쳤지만 우리를 싸매 줄 것이기 때문이다.」호세아 6:1 · 본디새김
말하는 사람들은 일인칭 복수를 사용합니다. 혼자 하나님을 찾겠다고 하지 않고, 함께 돌아가자고 부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말을 누가 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회개의 기록인지, 앞으로 백성이 해야 할 말을 예언자가 미리 제시한 것인지, 아니면 백성이 흔히 사용하는 회복의 고백을 인용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미 이루어진 회개의 말이라면, 하나님은 그 회개가 얼마나 깊은지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예언자가 제시한 회개의 권면이라면, 4절 이하는 그 권면에 아직 미치지 못하는 백성의 현실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찢으신 하나님이 고치신다
여기서 ‘찢다’라는 표현은 앞 장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자에 비유하며 이스라엘을 찢고 가겠다고 하신 말씀과 직접 연결됩니다(5:14).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하나님과 무관한 불행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치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분이 고쳐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신명기 32:39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고 고치기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의 고백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말로 들립니다.
이틀 뒤, 셋째 날 — 회복은 얼마나 가까운가?
「이틀 뒤에 그가 우리를 살릴 것이다.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킬 것이고, 우리는 그의 앞에서 살 것이다.」호세아 6:2 · 본디새김
‘이틀 뒤’와 ‘셋째 날’은 긴 시간이 아닌 비교적 짧은 시간이 지난 뒤 회복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냅니다. 호세아 6:2에서도 ‘살리다’와 ‘일으키다’는 서로 대응합니다. 이 표현은 심판으로 쓰러진 공동체가 다시 생명을 얻고 회복되는 모습을 그립니다.
백성은 단순히 전쟁이나 재앙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 ‘그의 앞에서(פָּנִים)’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분의 얼굴 앞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임재를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 힘쓰자
「알자, 여호와야훼를 아는 데 힘쓰자. 그가 나오는 것은 새벽처럼 확실하다. 그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늦은 비처럼 올 것이다.」호세아 6:3 · 본디새김
이 절의 앞부분은 같은 동사를 반복합니다. ‘알자, 알기 위해 힘써 추구하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분을 알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아가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새벽과 비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 두 이미지는 하나님의 오심을 자연계의 반복되는 질서에 비유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위험한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오심을 자신들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새벽처럼 다시 나타나셔서 자신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문장 자체가 반드시 그러한 오만한 확신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30:5에서도 밤새 울음이 머무를 수 있으나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새벽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대를 들으신 뒤, 전혀 다른 아침의 풍경을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앞 장의 끝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고통 속에서 자신을 간절히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15). 따라서 6:1–3을 그 말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으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2절의 이러한 숫자의 병행은 구약 시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잠언 30:18–19에서는 세 가지와 네 가지가, 아모스 1:3 등에서는 세 가지 죄와 네 가지 죄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다만 이 구절이 실제로 죽은 개인들이 사흘 만에 육체적으로 부활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맥에서 말하는 주체는 이스라엘 공동체이며, 앞선 심판 이후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4에서 그리스도가 셋째 날에 살아나셨다는 선언과 이 구절을 연결하여 읽을 수 있지만, 신약이 그 구절에서 호세아 6:2를 직접 인용하거나 명시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호세아의 본래 의미와 후대의 그리스도교적 부활 이해를 구별해야 합니다. 늦은 비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농경 주기에서 봄철 곡식의 성숙을 돕는 중요한 비였습니다(신명기 11:14; 예레미야 5:24).
하나님의 대답 — 너희 사랑은 왜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가?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의 한결같은 사랑은 아침 구름 같고, 일찍 사라지는 이슬 같다.」호세아 6:4 · 본디새김
그런데 하나님의 첫마디는 즉각적인 용서의 선언도, 새로운 형벌의 선고도 아닙니다. 반복된 불성실함을 향해 하나님이 제기하시는 탄식과 책망의 말입니다.
이사야 5:4에서도 하나님은 포도원을 돌보신 일을 말씀하신 뒤, 그 포도원을 위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호세아 6장의 질문에도 비슷한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너무 쉽게 사라집니다.
새벽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3절에서 백성은 하나님의 오심을 새벽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사랑을 아침 구름과 이슬에 비유하십니다. 둘 다 아침의 풍경입니다. 하지만 지속성은 정반대입니다.
새벽은 어김없이 밝아 오지만, 아침 구름과 이슬은 햇빛이 강해지면 사라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확실하게 오실지를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나 쉽게 떠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고백에는 분명 옳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고, 하나님이 고치실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아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옳은 내용을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신실함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결같은 사랑”인데 왜 사라지는가?
지속되어야 할 사랑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일시적인 종교적 감정이나 잠깐의 결심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신실함입니다. 따라서 이 장의 관심은 회개의 순간에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보다, 그 관계가 실제 삶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유지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왜 계속 예언자들을 보내 말씀하셨는지 설명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1–3절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한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백성의 고백이 처음부터 피상적이었다는 이해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하나님이 곧 자신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죄를 구체적으로 인정하거나 삶을 바꾸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4절 말씀은 그런 성급한 회복 기대에 대한 응답입니다. 다른 하나는 1–3절을 진정한 회개의 권면으로 보면서, 4절이 그 권면과 달리 살아온 이스라엘의 현실을 드러낸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문제는 회개의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에 합당한 삶이 지속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본문은 첫 세 절의 화자와 그들의 내적 동기를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으로만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왜 사람을 쪼아 내고 죽이는가?
「그러므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을 쪼아 냈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다. 너에 대한 판결들이 빛처럼 나올 것이다.」호세아 6:5 · 본디새김
본문 자체가 그 수단을 “예언자들”과 “내 입의 말”이라고 밝힙니다.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의 죄를 드러내고 심판을 선언했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왜 부드러운 말만 하지 않았는가?
단단한 돌을 깨뜨리고 잘라 내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그런 도구처럼 묘사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하면서도 자기들의 불성실함을 직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위로만 전달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확신을 깨뜨리고, 감추어진 불의를 드러내며, 언약을 배반한 삶에 심판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 23:29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판단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호세아 6:5의 표현을 단순히 상처를 주는 말도 결국 유익하다는 일반적인 원리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예언자의 말씀은 그 심판을 알리고 집행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묘사됩니다.
아침의 빛이 다시 등장하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오심이 새벽처럼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이제 판결이 빛처럼 나온다고 합니다. 백성은 새벽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죄를 밝히 드러내는 판결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판결은 백성의 상태를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희생제물이 아니라 한결같은 사랑을 바라고, 번제물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호세아 6:6 · 본디새김
레위기 1–7장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 제사의 규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사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어의 “아니라”와 “보다”를 결합한 표현은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더 근본적인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의 중요성을 부정하시기보다, 제사가 무엇을 대신할 수 없는지를 밝히십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15:22와 연결됩니다. 거기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희생 제사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미가 6:6–8에서는 수많은 제물을 바치는 문제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공정과 사랑과 겸손한 동행으로 관심이 옮겨 갑니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관계를 저버린 삶을 종교적 행위로 보상하려는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왜 사랑과 지식이 나란히 등장하는가?
‘한결같은 사랑’은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신실한 행동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관계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과 올바르게 관계 맺는 일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께 신실하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려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호세아 6장의 첫 부분에서 백성은 “여호와야훼를 아는 데 힘쓰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 하나님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말에 ‘한결같은 사랑’을 함께 놓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앎이 신실한 관계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을 아는 것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고, 그분과 맺은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신약과 직접 연결되는 곳은 마태복음 9:13과 12:7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을 인용하여, 사람을 대하는 자비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일 없이 종교적 규범만 앞세우는 태도를 비판하십니다. 이는 호세아가 본래 이스라엘의 제사와 언약적 불성실함을 고발한 말씀을 후대의 상황에 적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시는지 밝히신 뒤, 이스라엘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5절 마지막 문장은 원문상 어려움이 있는 곳입니다. 현재 전해지는 히브리어 본문에는 “너에 대한 판결들”로 읽을 수 있는 이인칭 표현이 있습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내 판결이 빛처럼 나올 것이다”라는 뜻으로 옮깁니다. 칠십인역은 앞부분에서 예언자들이 문장에 연결되는 방식도 달리 읽습니다. 따라서 이 빛을 하나님의 판결 자체로 볼지,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판결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볼지는 번역상 여지가 있습니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 — 배반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그러나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 거기서 그들은 나를 배신했다.」호세아 6: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요구가 불분명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맺은 관계를 지키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아담은 누구인가?
아담을 최초의 인간으로 읽든, 일반적인 인간으로 읽든, 지명으로 읽든 본문이 고발하는 일은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히브리어 표현만으로 어느 해석이 확실한지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세 해석이 공유하는 핵심
하나님은 단지 규칙을 어겼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배신했다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6절의 ‘한결같은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언약은 단순히 지켜야 할 규칙의 목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을 어기는 일은 규정 위반인 동시에 관계의 배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지만, 그분과 맺은 관계를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배반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구체적인 장소를 들어 고발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케아담입니다. 첫째, 창세기 2–3장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금지된 열매를 먹습니다. 이 사건과 이스라엘의 배반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다만 창세기 2–3장에서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직접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6:7이 창세기 3장의 사건을 언약 위반으로 명시적으로 해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아담을 보통명사인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불성실하게 행동했다는 고발로 읽을 수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표현을 「사람처럼」이라는 뜻으로 옮겨, 고대 번역 전통에서도 사람을 가리키는 읽기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셋째, 아담을 장소 이름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호수아 3:16에는 요단강 부근의 아담이라는 성읍이 등장합니다. 이 경우 호세아의 말씀은 아담이라는 장소에서 언약을 어겼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거기서”라는 말이 특정 장소를 가리킨다는 점은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호세아가 그 장소에서 어떤 언약 위반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길르앗과 세겜 — 피가 묻은 땅에서 제사장들이 살인하다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들의 성읍이며, 피 묻은 발자국으로 얼룩졌다.」호세아 6:8 · 본디새김
도시 자체가 피 흘림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다는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이 고발은 4:2에서 “피 흘림이 피 흘림에 맞닿았다”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한결같은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곳에서, 실제로 사람들의 생명이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약탈 무리처럼 행동하다
9절에서 고발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약탈 무리가 사람을 기다리며 숨어 있듯, 제사장 무리가 세겜으로 가는 길에서 살인한다. 참으로 그들은 악행을 저질렀다.」호세아 6:9 · 본디새김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들을 약탈 무리와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맡은 자들이 생명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빼앗는 자리에 서 있다는 고발입니다.
본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어떤 제사장 조직이 누구를 살해했는지 역사적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발을 단순히 영적인 의미의 살인으로만 축소할 근거도 없습니다. 본문은 명시적으로 살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왜 세겜으로 가는 길인가?
창세기 12:6–7에서 아브라함은 세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야훼의 약속을 듣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호수아 24장에서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세겜에 모으고, 그들이 여호와야훼를 섬기겠다고 응답하는 언약 갱신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여호수아 20:7에서 세겜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피의 보복을 피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지정된 성읍 가운데 하나로 등장합니다. 여호수아 21:21에서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읍으로도 기록됩니다.
이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강한 역설이 생깁니다.
생명을 보호하는 제도가 있었던 성읍으로 향하는 길에서, 생명을 돌보아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호세아가 실제로 도피성에 피신하려던 사람들을 제사장들이 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구체적인 상황은 본문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원하신다는 말씀의 실제 의미
하나님은 희생제물보다 한결같은 사랑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제사장들의 살인이 고발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선언한 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제로 그 요구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 줍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서로 무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담당하는 사람의 삶이 그 예배가 지향해야 할 하나님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란 단순히 종교적 감정이 아닙니다. 적어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거부하고, 이웃을 신실하게 대하는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셨는가?
10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안에서 나는 끔찍한 일을 보았다. 거기에 에브라임의 음행이 있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다.」호세아 6:10 · 본디새김
여기서 ‘음행’은 호세아서에서 반복되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배반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다른 신들을 따르는 종교적 불성실함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 실제 살인이 등장한 만큼, 이 고발을 단순히 우상숭배라는 한 가지 종교적 문제로만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은 예배와 공동체의 윤리, 사람의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걸쳐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회개의 고백만 듣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실제로 행한 일도 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제사와 회개의 언어 뒤에 감추어진 폭력과 배반을 보십니다.
조금 더 깊이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지역 이름으로, 구약에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길르앗이 지역 전체를 대표하는지, 특정 성읍을 가리키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유다야, 너에게도 추수가 정해졌다” — 끝나지 않은 문장
「유다야, 너에게도 추수가 정해졌다.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힌 처지를 돌이킬 때에,」호세아 6:11 · 본디새김
호세아 6장의 마지막은 특별합니다.
문장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듯한 상태에서 장이 마무리됩니다. 이 절에는 두 가지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에게 정해진 추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사로잡힌 처지를 돌이키시는 때입니다.
그런데 두 표현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추수는 심판인가, 회복인가?
추수는 구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농작물을 거두는 기쁨과 풍요를 나타낼 수도 있고, 때가 차서 심판이 이루어지는 일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9:3에서는 추수하는 기쁨이 등장하지만, 예레미야 51:33에서는 바벨론을 향한 심판이 타작과 추수의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다만 바로 앞에서 북왕국의 불성실함과 폭력이 고발되었고, 유다도 앞서 심판의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다에게 정해진 심판의 때를 가리킨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회복의 수확을 떠올리는 읽기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호세아는 여기서 추수의 성격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구절을 “유다도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라는 하나의 의미로만 고정하거나, 반대로 “유다에게 풍요가 약속되었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뒤에 남겨진 시간절
처음에는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을 말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처지를 돌이키시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시간절이 바로 앞의 추수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히브리어 절 구분에서는 이 문장이 6장 끝에 놓이지만, 다음 장 첫 절과 이어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실제로 호세아 7:1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치려 하실 때 에브라임의 죄악이 드러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6:11의 마지막 시간절을 7:1에 연결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키려는 순간 그들의 죄악이 드러나는 흐름이 됩니다.
반면 6:11을 독립적으로 읽으면 유다에게 정해진 추수와 하나님이 백성의 처지를 돌이키시는 때가 서로 연결된 말씀으로 남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번역 전통에서도 이 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상태를 돌이키는 말과 연결되어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정확한 절 경계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장래의 회복을 말씀하실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회복을 너무 빨리 완성된 이야기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호세아 6장은 아직 그 끝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두 종류의 아침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백성이 자기 죄를 직면할 필요를 없애 주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할 것은 제사 의식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길르앗에는 피 묻은 발자국이 남아 있고, 세겜으로 가는 길에서는 제사장들의 살인이 고발됩니다. 유다에게도 추수가 정해졌다는 말이 들립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사로잡힌 처지를 돌이키실 때가 언급되지만,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오심은 새벽처럼 확실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백성.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한결같은 사랑과 자신을 아는 것을 바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벽이 밝아 오는 때에 이스라엘이 정말 붙들어야 할 것은, 그 새벽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 하는 기대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린 하나님을 과연 알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