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하나님이 다시 세우려 하시는 성읍
이사야서는 한 가지 뜻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여전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물이 부족하지도 않고, 절기가 중단되지도 않았습니다.
성전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기도하는 손들이 하늘을 향해 펼쳐집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1장의 중심에는 죄 많은 백성을 어떻게 벌할 것인가보다, 신실함을 잃어버린 백성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다
1절은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음을 알려 줍니다. 네 왕의 이름이 이어지는 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한순간의 사건에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가 활동한 기원전 8세기 유다는 외부 강대국의 위협과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장의 모든 말씀이 이 가운데 정확히 어느 해에 선포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7–8절의 황폐한 땅은 실제 전쟁과 침략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장면을 특정 전쟁 하나에만 묶을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1절은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 본 것을 ‘환상’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정작 환상이 시작되자 처음 나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광경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여호와야훼가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자식들을 기르고 키웠지만, 그들은 나를 거슬러 반역했다.」이사야 1:2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신명기 32:1의 모세의 노래를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31:28에서도 모세는 하늘과 땅을 이스라엘을 향한 증인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지켜졌는지를 온 피조세계 앞에서 밝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왕이나 재판관의 자격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식들을 길러 낸 아버지로서 말씀하십니다.
‘기르고 키웠다’는 표현에는 오랜 돌봄의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어떤 추상적인 사상을 배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고, 광야에서 먹이셨으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란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반역했습니다.
여기서 ‘반역했다’는 말은 단순히 규칙 몇 가지를 어겼다는 뜻보다 강합니다. 자신을 돌보고 관계를 맺어 온 이에게서 돌아서서 그 권위를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발견하신 것은 몇 가지 잘못된 행동만이 아니라 관계 자체의 파괴입니다.
「소는 자기를 소유한 이를 알고, 나귀는 제 주인의 먹이통을 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이사야 1:3 · 본디새김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인정한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지식이나 활동이 전혀 없는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알아보는 삶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예언자는 이 백성을 향한 탄식을 이어 갑니다. 하나님이 ‘자식들’이라고 부르셨던 이들은 이제 ‘타락시키는 자식들’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이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신 말이 반역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말로 바뀐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업신여겼다고 고발됩니다. 이 호칭은 이후 이사야서에서 중요하게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유익을 주시는 후원자가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삶의 방식까지 거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버렸다는 말은 종교적 소속을 바꾸었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백성이 그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나라
5절에서 예언자는 이상한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더 맞느냐? 어째서 거듭 배반하느냐? 머리 전체가 병들었고, 마음 전체가 쇠약해졌다.이사야 1:5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선언과 다릅니다. 이미 충분히 맞았는데도, 그 고통 속에서조차 배반을 멈추지 않는 백성을 향한 물음입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은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온통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상처는 짜내거나 싸매지도 않았고,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상처를 싸매고 기름을 바르는 것은 상처를 돌보는 행위였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최소한의 처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몸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7절에 이르면 상처 입은 몸의 이미지가 갑자기 나라 전체의 모습으로 확대됩니다.
너희 나라는 황폐해졌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다. 너희 땅은 너희 눈앞에서 외지인들이 먹어 치우고 있다. 외지인들이 뒤엎은 것처럼 황폐해졌다.이사야 1:7 · 본디새김
앞에서는 몸에 성한 곳이 없었는데, 이제는 나라 안에 온전한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사야가 다루는 죄는 공동체 전체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안전과 경제적 기반까지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비유를 모든 재난과 질병이 개인의 잘못에 대한 벌이라는 보편적인 원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는 지금 언약을 저버린 유다라는 특정 공동체의 역사와 위기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딸 시온은 포도밭의 초막처럼, 오이밭의 움막처럼, 포위된 성읍처럼 남았다.이사야 1:8 · 본디새김
포도밭의 초막이나 오이밭의 움막은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세우는 임시 시설입니다. 사람이 머물 수는 있지만, 견고한 집이나 성벽처럼 안전을 보장해 주는 장소는 아닙니다.
‘딸 시온’은 예루살렘을 사람처럼 부르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 이름에는 친밀함이 있지만, 현재의 모습은 처량합니다. 도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외롭고 위태롭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예언자의 말투가 바뀝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우리에게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않았다면, 우리는 소돔처럼 되었을 것이고, 고모라와 같아졌을 것이다.이사야 1:9 · 본디새김
앞에서 예언자는 백성을 향해 ‘너희’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우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고발하는 백성과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는 심판받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들에게 남겨진 생존을 이야기합니다.
남은 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었을 것’이라는 말은 창세기 19장의 멸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유다가 소돔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나라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멸망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름이 다음 장면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손을 펼쳐 기도하지만,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9절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뻔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예언자는 실제로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을 소돔과 고모라라고 부릅니다.
소돔의 통치자들아,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이사야 1:10 · 본디새김
유다와 예루살렘의 도덕적 상태를 소돔과 고모라에 빗대어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어지는 말씀은 성적인 죄나 우상숭배의 구체적인 사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문제 삼으십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너희의 그 많은 희생 제물이 내게 무슨 소용이냐?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가 불렀다. 수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를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이사야 1:11 · 본디새김
레위기 1–7장에는 여러 제사의 규정이 있고, 레위기 23장에는 정해진 절기들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1장을 하나님이 원래부터 희생 제사나 절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선언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것은 제사라는 행위 자체보다, 지금 그 제사를 드리고 있는 백성의 삶과 분리된 예배입니다.
11–14절은 당시의 종교 활동을 폭넓게 열거합니다. 희생 제물, 향, 초하루, 안식일, 각종 집회와 절기가 등장합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종교적 삶 전체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15절 마지막에서 밝혀집니다.
「너희가 손바닥을 펼칠 때, 나는 너희에게서 내 눈을 가리겠다. 너희가 기도를 많이 하더라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이사야 1:15 · 본디새김
기도할 때 손을 펼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구하고 자신을 내어 보이는 몸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손에서 보시는 것은 간절함이 아니라 피입니다.
여기서 피는 실제 살인뿐 아니라 생명을 해치는 폭력과 불의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뒤이어 21절에서 예루살렘은 살인자들이 가득한 성읍이라고 불립니다. 앞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백성의 예배를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입술과 이웃을 대하는 행동이 서로 모순될 때, 제사의 양을 늘리는 것으로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 5:21–24에서도 하나님은 백성의 절기와 노래를 거부하시고 정의가 흐르기를 요구하십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는 정의를 분리할 수 없다는 같은 문제를 다룹니다.
'씻어라'에서 '눈처럼 하얗게 될 것이다'까지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백성을 영원히 쫓아내겠다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씻어라. 너희 자신을 깨끗하게 해라. 너희 행실의 악을 내 눈앞에서 치워라. 악행을 그쳐라.」이사야 1:16 · 본디새김
앞에서 문제 되었던 것은 피 묻은 손이었습니다. 따라서 ‘씻어라’는 명령은 바로 그 장면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말하는 씻음은 의식적인 세정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뒤따르는 명령들이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선행을 배워라. 정의를 구해라. 포악한 자를 바로잡아라. 고아를 위해 재판해라. 과부를 위해 다투어라.」이사야 1:17 · 본디새김
선을 행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완성되는 일이 아닙니다. 배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행동해 온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고아와 과부는 경제적·사회적 보호 기반이 취약해지기 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족과 재산, 법적 대리인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할 경우 그들의 권리는 쉽게 무시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아를 위해 재판하고 과부를 위해 다투라는 명령에는 그들의 권리가 공적인 판단 과정에서 실제로 인정받게 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 10:18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요구하는 삶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회적 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그분의 백성이 자기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드러내라는 요구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자, 와서 서로 따져 보자. 너희 죄가 진홍빛 같더라도, 눈처럼 하얗게 될 것이다. 주홍빛처럼 붉더라도, 양털처럼 될 것이다.」이사야 1:18 · 본디새김
‘서로 따져 보자’는 말은 친구끼리 의견을 교환하자는 가벼운 제안이 아닙니다. 앞서 시작된 고발과 판결의 맥락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불러 그들의 상태와 앞으로의 길을 분명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 있고 깊이 물든 듯한 죄라도 깨끗해질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16절에서는 백성에게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그들의 죄가 눈처럼 하얗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앞의 명령이 악한 행실을 버리는 책임을 강조한다면, 뒤의 약속은 죄로 더럽혀진 백성에게도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둘을 떼어 놓으면 본문의 균형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해 주시니 삶은 바뀌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반대로 사람이 선을 행하여 스스로 모든 죄를 지워 버린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너희가 기꺼이 응하고 듣는다면, 그 땅의 좋은 것들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거역한다면, 너희는 칼에 먹힐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입이 말했기 때문이다.이사야 1:19–20 · 본디새김
7절에서는 외지인들이 유다의 땅을 먹어 치우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 장에서 ‘먹는다’는 표현은 누가 땅의 풍요를 누리고 누가 파괴의 대상이 되는가를 드러냅니다. 신명기 28장에서도 언약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은 땅의 풍요, 외적의 침략, 나라의 존속 문제와 연결됩니다.
처음에 하늘과 땅을 향해 ‘들어라’라고 시작된 말씀은 이제 백성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지, 아니면 계속 거역할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포악한 자를 바로잡아라’는 번역에는 한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슈루 하모츠는 본디새김처럼 ‘포악한 자를 바른길로 이끌어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눌린 이를 도와라’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 두 해석은 동사와 그 대상에 해당하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갈립니다.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하나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바로잡는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를 당한 사람을 돕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뒤의 고아와 과부에 관한 명령과 함께 읽으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불의를 방치하지 않는 공동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어떻게 신실했던 성읍이 이렇게 되었는가
18–20절에서 죄가 깨끗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들었지만, 이사야는 아직 회복된 예루살렘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현재 상태를 더욱 깊이 들여다봅니다.
어찌하여 신실했던 성읍이 창녀가 되었는가? 정의로 가득했고, 의가 그 안에 머물곤 했는데,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다.이사야 1:21 · 본디새김
이것은 예루살렘을 여성에 빗대어 성적인 수치를 주려는 표현이 아닙니다. 한때 맺었던 관계에 신실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예언자적 비유입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이전에는 종교의식이 풍성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로 가득했고 의가 그 안에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의가 잠깐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손님이 아니라,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살인자들뿐입니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술은 물에 희석되었다.이사야 1:22 · 본디새김
은과 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본래 지니고 있어야 할 품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은은 불순물이 섞여 가치가 손상되었고, 술은 물에 희석되어 본래의 진한 맛을 잃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예루살렘입니다. 지도자들도 있고, 성전도 있으며, 종교적인 활동도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 성읍을 신실하게 만들었던 정의는 사라졌습니다.
네 지도자들은 반역자들이며 도둑들의 동료다. 하나같이 뇌물을 사랑하고 사례금을 뒤쫓는다. 그들은 고아를 위해 재판하지 않고, 과부의 소송은 그들에게 이르지 못한다.이사야 1:23 · 본디새김
하나님은 고아를 위해 재판하고 과부를 위해 다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 지도자들은 고아를 위해 재판하지 않으며, 과부의 소송은 그들에게 이르지도 못합니다.
지도자들의 잘못은 단순히 돈을 사랑한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뇌물과 사적인 이익에 마음을 빼앗긴 결과,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정의가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재판과 통치가 존재하지만, 그것이 마땅히 보호해야 할 사람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죄는 몇몇 개인의 은밀한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중요한 기능이 잘못 작동하는 데에도 나타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익을 나누는 동안 힘없는 사람들의 억울함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기 위해 행동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왜 은을 제련하시는가
24절은 유난히 장엄한 하나님의 호칭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강한 이의 선언이다. 「아, 나는 내 대적들에게 분을 풀고, 내 원수들에게 복수하겠다.」이사야 1:24 · 본디새김
여기서 독자는 앞에 등장했던 외국 군대나 침략자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맥은 더 불편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대적하시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 백성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드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이 맞서시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불의가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정면으로 충돌하는지를 드러냅니다.
25절에서 심판의 이미지가 바뀝니다.
「내 손을 돌려 너를 치고, 잿물로 하듯 네 찌꺼기를 제련해 내며, 네 불순물을 모두 없애겠다.」이사야 1:25 · 본디새김
앞서 22절에서 예루살렘의 은은 찌꺼기가 되었습니다. 은을 제련하는 목적은 가치 있는 은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은에 섞인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본디새김이 살려 놓은 ‘잿물로 하듯’이라는 표현도 정화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단순한 파괴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무엇을 제거하고 무엇을 남기려는지 보여줍니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은 은이 현재 상태 그대로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루살렘의 부패한 질서 역시 그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네 재판관들을 예전처럼, 네 조언자들을 처음처럼 되돌려 놓겠다. 그 뒤에 너는 의로운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 불릴 것이다.」이사야 1:26 · 본디새김
심판을 향해 움직이던 하나님의 손이 회복을 이루는 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하필 재판관들일까요?
예루살렘의 가장 깊은 병이 공적인 정의의 붕괴였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이 뇌물을 받고, 고아의 권리를 외면하고, 과부의 호소를 막아 버리는 상태에서 성읍이 진정으로 회복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회복은 개인의 죄책감만 해결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방식까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은 정의로 속량되고, 그곳의 회개하는 이들은 의로 속량될 것이다.이사야 1:27 · 본디새김
여기서 ‘속량된다’는 말은 구원받고 해방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속량을 위한 구체적인 몸값이나 지불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정의와 의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가리키는지, 회복된 공동체에 실현될 정의로운 삶을 가리키는지, 또는 양쪽을 함께 포함하는지에 대해서는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문의 흐름에서는 두 측면을 분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정의로운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백성 가운데에는 그분께 돌아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하시려는 것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성읍이 아니라, 죄로 무너졌지만 다시 정의와 신실함이 머무는 성읍입니다.
이 약속은 이사야서 전체를 읽는 중요한 실마리이기도 합니다. 2:2–4에서는 시온이 여러 민족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장소로 묘사됩니다. 1장에서 정의를 잃어버린 성읍이 어떻게 하나님의 길을 드러내는 곳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전개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예전처럼’, ‘처음처럼’이라는 말은 과거의 특정 정치 체제를 그대로 복원한다는 상세한 계획으로 읽기보다, 성읍이 마땅히 지녀야 했던 공정함과 신실함을 회복한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27절의 정의와 의에 관해, 24–26절의 하나님의 행동은 전자를 뒷받침하고, 17절과 23절의 사회적 요구는 후자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회개하는 이들’은 ‘돌아오는 이들’이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다른 곳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원문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을 버린 자들이 소멸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본디새김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로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선택한 나무와 동산의 결말
회복의 약속이 나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아무 구별 없이 회복된다고 선언되는 것은 아닙니다.
28절은 반역자들과 죄인들이 함께 부서지고, 여호와야훼를 버린 자들이 소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너희가 탐내던 테레빈트나무들 때문에 부끄러워할 것이고, 너희는 너희가 선택한 동산들 때문에 수치를 당할 것이다.이사야 1:29 · 본디새김
이사야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나무들을 ‘탐냈고’, 그 동산들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매력적이라고 여겨 선택한 것들이 결국 자신을 부끄럽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잎이 시드는 테레빈트나무처럼, 물이 없는 동산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1:30 · 본디새김
테레빈트나무와 동산은 살아 있고 풍성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잎이 시들고 물이 사라지면 그 생명력도 유지되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의지하던 대상이 결국 그들을 지탱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31절에서는 그 이미지가 불로 바뀝니다.
강한 자는 삼 부스러기가 되고, 그가 한 일은 불꽃이 될 것이다. 그 둘은 함께 타오르고, 꺼 줄 자가 없을 것이다.이사야 1:31 · 본디새김
삼 부스러기는 쉽게 불붙는 섬유 찌꺼기입니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마른 삼 부스러기처럼 불타 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이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꺼 줄 자가 없다’는 말은 심판의 철저함을 나타냅니다. 본문이 묘사하지 않는 죽음 이후의 상태까지 이 표현 하나로 확정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과 그 주변에서는 나무와 숲, 동산 같은 자연환경이 종교 활동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호세아 4:13에는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나오고, 이사야 65:3과 66:17에도 동산에서 이루어지는 부적절한 종교 행위가 언급됩니다. 따라서 이사야 1:29의 나무와 동산 역시 하나님을 떠난 종교적 선택과 관련된 것으로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식이 행해졌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특정 우상이나 제의 방식을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한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여지는 있지만, 그것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1장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은 백성의 불의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그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목적을 마지막까지 좌절시키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잘못된 삶을 멈추라는 명령과, 하나님께서 직접 불순물을 제거하시겠다는 약속이 함께 주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탐내던 나무의 잎이 시들고, 스스로 선택한 동산에서 물이 말라 버립니다.
그러나 독자는 그보다 앞서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도 들었습니다. 「그 뒤에 너는 의로운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 불릴 것이다.」
한쪽에는 물이 끊긴 동산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이 다시 세우실 신실한 성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세우려 하시는 성읍은 제물이 더 많은 성읍이 아닙니다. 정의가 다시 머물고, 사람들의 억울함이 외면받지 않으며, 자신들을 길러 내신 하나님을 참으로 알아보는 백성이 살아가는 성읍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