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높아지는 산과 낮아지는 인간
이사야 2장에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무리가 등장합니다.
한쪽에서는 온 세상의 민족들이 산을 올라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고, 전쟁을 멈추며, 무기를 농기구로 바꿉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와 바위 틈과 땅속으로 숨어듭니다. 그들은 한때 귀하게 여기던 금과 은의 우상마저 내던집니다.
같은 하나님을 향해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 달아납니다.
미래에는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길을 배우러 찾아오지만, 정작 여호와야훼를 아는 야곱의 집안은 다른 곳에서 안전과 번영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높이고 누구를 의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산을 거슬러 흘러 올라가는 민족들
1절은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 본 말이라는 새로운 표제로 시작합니다. 앞 장이 예루살렘의 부패와 회복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시야가 유다를 넘어 온 세상으로 넓어집니다.
마지막 날들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집이 있는 산이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을 것이다. 모든 민족이 그곳으로 흘러들 것이다.이사야 2:2 · 본디새김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한 산은 실제 지형상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산이 모든 산보다 높이 솟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데, 이사야가 보는 민족들의 흐름은 낮은 곳에서 높은 산을 향합니다.
민족들이 시온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강물이 흘러드는 모습처럼 묘사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움직입니다. 그곳을 향해 가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가 3절에서 밝혀집니다.
많은 민족이 가서 말할 것이다. 「자, 가자. 여호와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그가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칠 것이니, 우리는 그 길을 걷자. 가르침은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야훼의 말은 예루살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이사야 2:3 · 본디새김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닙니다. 여러 민족이 서로에게 건네는 초대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칠 것이니, 우리는 그 길을 걷자’라는 말에서는 배움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목적은 지식을 쌓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길을 실제로 걷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는 땅의 모든 가족이 그를 통해 복을 얻으리라는 전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2장은 그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한 백성과 맺으신 관계의 의미가 결국 여러 민족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사야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약속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을 정복하여 여호와야훼를 섬기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들이 스스로 여호와야훼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특정 민족만의 보호자로 머무르시지 않고, 세상의 여러 민족에게 삶의 길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을 미래에 지각변동이 일어나 예루살렘의 산이 실제로 가장 높은 산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의 시적 문맥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다스리시는 곳의 위상이 모든 권력의 중심보다 높아진다는 상징적 의미가 특히 두드러집니다. 본문은 실제 지형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2:2–4와 거의 같은 예언이 미가 4:1–3에도 나옵니다. 두 본문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 이 말씀을 전했는지, 또는 두 예언자가 공통으로 전해지던 말씀을 사용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날들’이라는 표현도 정확히 어느 해나 어떤 시점부터 시작되는지를 알려주는 연대표는 아닙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이루실 앞으로의 시대를 바라보게 합니다.
칼이 사라지는 이유는 재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가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재판하고, 많은 백성에게 판결을 내릴 것이다. 그들은 자기 칼들을 두드려 보습으로 만들고, 자기 창들을 가지 치는 칼로 만들 것이다. 민족이 다른 민족을 향해 칼을 들지 않고, 더는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4 · 본디새김
이사야가 꿈꾸는 평화는 갈등을 덮어 둔 상태가 아니라, 분쟁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게 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3절에서 민족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판단만을 고집하는 대신, 하나님께 무엇이 옳은지를 배우려 합니다.
보습은 땅을 갈아엎는 농기구의 날입니다. 가지 치는 칼은 나무와 포도나무 등을 손질하는 데 쓰이는 도구입니다. 칼과 창은 사람을 죽이거나 위협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입니다. 반면 보습과 가지 치는 칼은 땅을 경작하고 열매를 얻는 데 사용됩니다.
같은 금속이 전혀 다른 목적에 쓰이게 됩니다.
이사야는 무기를 모두 땅에 묻거나 녹여 없앤다고 하지 않습니다. 두드려 다른 도구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가진 기술과 자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왜 전쟁을 ‘배운다’고 했을까요?
전쟁은 군사 기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전쟁하는 방법을 배우고, 다음 세대에 가르칩니다. 무기를 만들고, 병사를 훈련하고, 적의 움직임을 예상하는 법을 익힙니다.
사람들이 배우는 것이 달라집니다.
전쟁을 배우던 민족들이 하나님의 길을 배우게 됩니다. 서로를 이기는 방법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길을 익히게 됩니다. 평화는 단지 전쟁이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지속해 온 삶의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 뒤, 예언자는 갑자기 현재의 야곱 집안에게 말을 겁니다.
이방 민족에게서 들려온 초대가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다
야곱 집안아, 오라. 여호와야훼의 빛 속에서 걷자.이사야 2: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여러 민족이 서로에게 ‘자, 가자’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예언자가 야곱 집안을 향해 ‘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민족들이 하나님의 길을 걷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빛 속에서 걸으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미래에 다른 민족들까지 하나님의 길을 배우려고 나아온다면,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야곱의 집안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는 물음이 됩니다.
앞에서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르치신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빛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빛은 길을 드러냅니다.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 앞에 있는지 분별하기 어렵지만, 빛이 있으면 가야 할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백성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함께 그 빛 속을 걷자고 초대합니다.
그러나 그 초대 직후에 나오는 현실은 참담합니다.
야곱 집안은 하나님의 빛 속에서 걷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길을 찾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득하지만, 정작 없는 것
6절부터는 하나님을 향해 올리는 말이 시작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백성, 야곱 집안을 버리셨습니다. 그들이 동방에서 온 것들로 가득하고, 블레셋 사람들처럼 점을 치며, 외국인의 자식들과 손뼉을 맞대기 때문입니다.」이사야 2:6 · 본디새김
여기서 ‘동방에서 온 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모두 포함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뒤에 점치는 행위가 등장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유입된 종교적 관습이나 점술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외국인의 자식들과 손뼉을 맞댄다’는 표현도 뜻이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거래나 동맹을 맺는 행위를 나타낼 수도 있고, 외국의 관습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말하는지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이 다른 민족과 교류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이사야는 모든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산으로 나아오는 미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께 배우고 따르기보다, 하나님이 금하신 방식으로 미래를 알아내고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명기 18:9–14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의 점술과 주술 행위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들의 땅은 은과 금으로 가득 찼고, 그들의 보물은 끝이 없습니다. 그들의 땅은 말들로 가득 찼고, 그들의 병거는 끝이 없습니다.」이사야 2:7 · 본디새김
여기서 신명기 17:16–17의 왕에 관한 규정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말을 지나치게 늘리지 말아야 하고, 자신을 위해 은과 금을 과도하게 쌓아 두어서도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명령은 부와 군사력이 언제나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이 그것들을 자신의 힘과 안전을 보장해 주는 궁극적인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2:7에 나오는 은과 금, 말과 병거의 조합은 바로 그 경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8절에서 더욱 심각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땅은 우상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에 엎드려 절합니다.」이사야 2:8 · 본디새김
동방에서 온 것들로 가득합니다. 은과 금으로 가득합니다. 말들로 가득합니다. 우상들로 가득합니다.
그 나라에는 없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사야가 묘사하는 위기는 무엇이 부족한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 대신 의지할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진 위기입니다.
만든 사람이 자기가 만든 것에 지배받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을, 마치 자신을 지켜 줄 더 높은 존재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수그러들었고, 인간은 낮아졌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지 마십시오.」이사야 2:9 · 본디새김
여기서 ‘수그러들었다’와 ‘낮아졌다’는 표현은 우상 앞에 몸을 굽힌 행위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것 앞에 자신을 낮추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이미 사람의 존엄이 훼손되었거나 낮아진 상태를 묘사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11–17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교만이 낮아지는 일이 나타납니다.
9절의 ‘그들을 용서하지 마십시오’는 죄를 용서하지 말라는 청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어 동사에는 ‘들어 올리다(נָשָׂא)’라는 뜻도 있으므로, 낮아진 자들을 다시 높이지 말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앞의 우상숭배에 대한 고발을 강하게 마무리합니다.
앞에서는 여러 민족이 하나님께 배우기 위해 그분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 집안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 앞에 몸을 낮추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 차이를 통해 사람이 무엇을 예배하는가의 문제가 결국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는가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든 높은 것을 낮추시는 날
10절부터는 장면이 급격하게 바뀝니다.
바위 속으로 들어가라. 흙 속에 숨어라. 여호와야훼가 일으키는 공포와 그의 위엄의 광채를 피해서.이사야 2:10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산 위로 올라가지만,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땅 아래로 숨습니다.
인간의 거만한 눈길은 낮아지고, 사람들의 오만함은 수그러들 것이다. 그날에는 여호와야훼만 홀로 높아질 것이다.이사야 2:11 · 본디새김
2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집이 있는 산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인간의 거만한 눈길이 낮아집니다. 하나님이 높아지시는 일과 인간의 교만이 낮아지는 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날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하고 높은 모든 것을 덮치고, 높이 솟은 모든 것을 덮칠 날이다. 그것들은 낮아질 것이다.이사야 2:12 · 본디새김
여기서는 하나님이 일어나시어 인간의 교만과 자만을 심판하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날은 높고 우뚝 솟은 레바논의 모든 백향목도, 바산의 모든 참나무도, 높은 모든 산도, 우뚝 솟은 모든 언덕도, 높은 모든 망대도, 튼튼하게 요새화한 모든 성벽도, 타르시스의 모든 배도, 탐낼 만한 모든 볼거리도 덮칠 것이다.이사야 2:13–16 · 본디새김
처음에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자연물이 나옵니다. 그다음에는 사람이 세운 군사 시설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배와 같은 인간의 활동과 번영을 보여주는 물건들이 나타납니다.
이사야는 인간이 높다고 여기고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것들을 폭넓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높은 망대와 튼튼한 성벽은 도시의 방어력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있으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러한 것들에 부여하는 궁극적인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견고한 성벽과 막강한 군사력, 풍부한 재산과 화려한 문명을 보며 자신들의 위대함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그 모든 것이 상대적인 크기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거만함은 수그러들고, 사람들의 오만함은 낮아질 것이다. 그날에는 여호와야훼만 홀로 높아질 것이다.이사야 2:17 · 본디새김
두 번 반복되는 이 선언이 10–17절 전체를 감쌉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심판의 목적은 하나님이 자신의 위대함을 사람들에게 과시하시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는 세계가 무너지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와야훼의 날이라는 표현이 언제나 동일한 역사적 사건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서들은 이 표현을 다양한 심판의 상황에서 사용합니다. 따라서 2절의 ‘마지막 날들’과 12절의 ‘여호와야훼의 날’을 반드시 같은 하루나 하나의 연대기적 사건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크고 곧게 자라는 나무로 알려졌고, 바산 지역의 참나무 역시 견고하고 인상적인 나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타르시스의 배는 먼바다를 항해하는 큰 선박이나 장거리 교역과 관련된 선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르시스의 정확한 위치를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배가 상업적 부와 원거리 교역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탐낼 만한 모든 볼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불확실합니다. 선박과 관련된 물건이나 아름다운 장식물, 눈길을 끄는 귀중품 등으로 읽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특정 물건을 단정하기보다 사람들이 탐내고 자랑하는 것들을 나타내는 넓은 표현으로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귀한 우상을 어두운 굴에 내던지는 사람들
우상들은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이사야 2:18 · 본디새김
이 선언 뒤에서 이사야는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땅을 떨게 하려고 일어날 때, 그들은 여호와야훼가 일으키는 공포와 그의 위엄의 광채를 피해 바위 동굴과 흙 구덩이로 들어갈 것이다.이사야 2:19 · 본디새김
10절에서 이미 사람들에게 바위 속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는 그들이 실제로 숨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이 무력해지는 상황에서 더는 설 곳이 없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날에 사람은 자기가 절하도록 사람들이 만들어 준 자기 은 우상들과 자기 금 우상들을 두더지들과 박쥐들에게 내던질 것이다.이사야 2:20 · 본디새김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대상이 위기가 닥치자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상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은 우상을 파괴하시는 하나님의 행동만이 아닙니다. 우상에게 절하던 사람이 자기 손으로 우상을 내던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였겠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땅속과 어두운 틈에 사는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한때 사람들이 높이 받들던 우상이 이제는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내던져집니다.
그리고 우상을 버린 사람들 자신도 그곳으로 숨어듭니다.
여호와야훼가 땅을 떨게 하려고 일어날 때, 여호와야훼가 일으키는 공포와 그의 위엄의 광채를 피해 바위 틈과 절벽의 갈라진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이사야 2:21 · 본디새김
그들이 우상을 버리는 이유는 그 순간 하나님을 기꺼이 섬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본문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버립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자발적인 회심의 묘사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처음에 등장한 민족들은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하려고 멀리 달아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더지들’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정확히 어떤 동물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땅을 파고 사는 동물과 관련된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동물의 종류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코끝의 숨에 불과한 인간을 의지하지 마라
이사야 2장은 놀라울 만큼 간결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콧속에 숨이 있는 사람을 너희는 더는 의지하지 마라. 그가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이사야 2:22 · 본디새김
인간은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고, 도시를 건설하며, 성벽을 세우고, 무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주인처럼 보이는 사람조차 코끝의 숨이 멈추면 더 이상 자신의 힘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가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는 질문은 인간이 그 자체로 사랑이나 존중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이 문맥에서 문제 되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큰 신뢰를 두어도 되는가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거나 서로 협력하는 일을 금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과 지혜를 하나님 대신 궁극적으로 신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7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사야 2:22는 창세기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인간의 생명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숨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이사야 31:1–3은 군사적 도움을 얻으려고 이집트를 의지하며 말과 병거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며, 그들의 말은 영이 아니라 육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높아지심이 세상을 바꾸는 방식
하나님이 높아지시는 세상에서는 민족들이 서로 배우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산으로 올라갑니다. 반면 인간이 자기 힘을 높이는 세상에서는 부와 병거와 성벽을 끝없이 쌓아 올립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쌓아 올립니다.
마지막에 예언자는 우리를 다시 한 인간 앞에 세웁니다.
그 사람은 많은 재물을 가졌을 수도 있고, 강한 군대를 거느렸을 수도 있습니다. 높은 성벽을 세우고 귀한 물건들을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라보면, 그는 그저 코끝으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숨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길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실을 잊고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만든 것들 가운데서 안전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예언자는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만을 남깁니다.
인간의 코끝에는 숨이 있습니다.
그 숨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높아질 수 있는가보다, 누구의 길을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가가 훨씬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