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겉옷 하나로 나라를 맡기려는 사람들

나라가 무너질 때 사람들은 누구를 지도자로 세우려 할까요?

이사야 3장에는 기이한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어느 집안의 형제를 붙잡고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를 선택한 이유는 능력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그에게 겉옷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지도자가 부족한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무엇이 사람들을 지탱하는지 잊어버린 사회가 얼마나 깊이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을 지켜야 할 이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무엇으로 버틸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라의 지도자들만 살피지 않습니다. 굶주린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의 얼굴, 부유한 이들의 옷과 장신구, 텅 빈 성문까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의 중심에, 자기 백성의 억울함을 직접 심판하러 일어나시는 여호와야훼를 세웁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73장 본문 읽기 →

나라를 지탱하던 것들을 거두어 가시다

이사야 3:1–3 본문 →

이사야 3장은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주시는 장면이 아니라 거두어 가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버팀목과 의지할 것, 곧 그들을 지탱하는 모든 양식과 그들을 지탱하는 모든 물을,이사야 3:1 · 본디새김

첫 구절은 끝나지 않은 문장입니다. 무엇을 거두어 가시는지 나열되기 시작하고, 그 목록은 3절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힘을 생각할 때 왕이나 군대, 성벽, 재산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에서 시작합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이 있어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버팀목이 이어집니다.

용사와 전사, 재판관과 예언자와 점쟁이와 장로를, 오십 명을 거느리는 지휘관과 존중받는 사람, 조언자와 주술에 능숙한 사람과 주문에 정통한 사람까지 거두어 가려 하기 때문이다.이사야 3:2–3 · 본디새김

군사력을 담당하는 용사와 전사가 있고,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할 재판관이 있습니다. 예언자와 장로, 조언자도 등장합니다.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이 목록은 선한 지도자와 나쁜 지도자를 구분하여 칭찬하는 명단이 아닙니다. 당시 사회가 권위와 전문성,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여기던 여러 부류를 폭넓게 나열하는 것입니다.

3절의 ‘주술에 능숙한 사람’으로 옮긴 표현은 ‘숙련된 장인’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하라쉼(⁨חֶרֶשׁ⁩)의 의미를 어떤 낱말과 연결하느냐에 따라 기술적 전문성과 주술적 전문성 가운데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사회가 의존하던 전문가들마저 사라진다는 큰 흐름은 같습니다.

양식과 물이 사람의 몸을 지탱한다면, 지도자와 재판관과 조언자는 공동체가 질서를 유지하도록 지탱합니다.

이사야는 이 두 종류의 버팀목을 하나의 목록에 놓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가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앞 장에서 유다는 은과 금, 말과 병거로 가득 찬 나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그 풍요와 힘이 나라의 존속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문제는 단순히 나라가 외부의 적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회를 사회답게 유지해 주던 기능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나라

이사야 3:4–7 본문 →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린 사람들을 그들의 지도자로 세우고, 변덕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겠다.」이사야 3:4 · 본디새김

이사야가 문제 삼는 것은 지도자의 실제 나이보다 미숙함과 무책임함입니다. 뒤에 나오는 ‘변덕’이라는 표현이 그 점을 뒷받침합니다.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안정된 판단과 일관성이 없고, 순간적인 감정과 충동이 통치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는 이러한 통치의 결과가 백성의 일상에까지 퍼집니다.

「백성은 서로 억누를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저마다 이웃을 억누를 것이다. 어린 사람은 노인에게, 천대받는 사람은 존중받는 사람에게 거만하게 덤빌 것이다.」이사야 3:5 · 본디새김

이는 공적인 질서가 약해질 때 폭력이 사회 곳곳으로 번져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정하게 다툼을 해결할 수 있는 권위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직접 압박하여 자기 뜻을 관철하려 들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연장자에 대한 존중과 사회적 지위에 따른 질서가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당시 독자에게 기존의 사회적 관계가 뒤집히는 혼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사람은 언제나 옳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그들에게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 자신이 곧이어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장로들과 지도자들을 고발한다는 사실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문제는 정당한 권위와 책임이 무너져,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질서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혼란은 6–7절에서 한 편의 짧은 이야기처럼 구체화됩니다.

「사람이 자기 아버지 집안의 형제를 붙잡고 『네게 겉옷이 있으니, 우리 지도자가 되어라. 이 무너진 더미를 네 손으로 맡아라.』 하고 말하면,」이사야 3:6 · 본디새김

이사야의 장면에서는 겉옷을 가진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나라를 이끌 능력이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겉옷이 있으니 지도자가 되라고 합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에게 맡기려는 것이 ‘무너진 더미’라는 사실입니다.

한때 백성이 살아가던 공동체가 이제는 누군가 떠맡아야 할 폐허처럼 묘사됩니다.

그 사람은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날 그 형제가 목소리를 높여 말할 것이다. 『나는 상처를 싸매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겉옷도 없다. 나를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지 마라.』」이사야 3:7 · 본디새김

지도자의 역할이 상처를 싸매는 일에 비유된 것입니다.

앞서 이사야 1:6에서는 유다가 온몸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를 싸매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3장에서는 그 상처를 싸맬 사람을 찾지만,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지만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인지, 실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지는 본문이 완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나라를 책임지기 어렵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나라 전체가 지도자를 찾고 있지만,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을 세울 기반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책임과 신뢰가 함께 무너진 상황입니다.

조금 더 깊이

겉옷은 사람이 몸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소유물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2:26–27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그에게 겉옷은 잠잘 때 몸을 덮는 데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증인이 되는 사람들

이사야 3:8–12 본문 →

8절은 앞에서 묘사한 붕괴의 이유를 직접 밝힙니다.

예루살렘은 비틀거렸고 유다는 쓰러졌다. 그들의 혀와 행실이 여호와야훼를 거슬러 그의 영광스러운 눈을 거역했기 때문이다.이사야 3:8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말과 행동이 나란히 놓입니다. 말과 행동 모두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의 영광스러운 눈’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들의 행실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그들은 소돔처럼 자기 죄를 드러내 말하고 숨기지 않았다. 아, 그들에게 화가 있다.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이사야 3:9 · 본디새김

‘얼굴 표정’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모습이 내면의 태도를 드러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얼굴 생김새만 보고 사람의 죄를 판별할 수 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을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린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사야 1장에서 소돔은 유다의 상태를 고발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3장에서도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죄를 감추려 하지 않는 태도가 강조됩니다.

죄를 짓는 것과 죄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어떤 기준을 어겼다는 인식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도 문제 삼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기준 자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일이 자신들에게 돌아옵니다.

의인에게 잘될 것이라고 말하라. 그들이 자기 행실의 열매를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악인에게 화가 있다. 그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자기 손이 한 일의 보응이 그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3:10–11 · 본디새김

여기서 이사야는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묘사하다가 잠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합니다. 같은 사회에 살아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재난을 겪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 재난을 일으킨 죄에 동일하게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 차이를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열매를 먹는다’는 표현은 사람이 행한 일과 그 결과 사이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이 표현을 모든 의인이 언제나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모든 악인이 즉시 불행해진다는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행한 일에 따라 판단하십니다.

12절에서는 다시 지도자들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내 백성을 억누르는 자들은 어린애처럼 굴고, 여자들이 내 백성을 다스렸다. 내 백성아, 너를 이끄는 자들이 너를 헤매게 하고, 네가 다니는 길을 삼켜 버렸다.」이사야 3:12 · 본디새김

본문의 ‘어린애처럼 굴고’에 해당하는 표현은 실제 어린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철없는 행동이나 가혹하게 사람을 다루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여자들이 내 백성을 다스렸다’는 표현 역시 여성들이 실제로 권력을 행사했다는 묘사로 읽을 수 있지만, ‘채권자들’ 또는 ‘빚을 받아내는 사람들’이 지배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여성의 통치가 그 자체로 악하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이 구절에서 끌어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통념을 반영한 표현으로 읽더라도, 비난의 중심은 지도자의 성별이 아니라 백성이 제대로 인도받지 못하는 현실에 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단지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길 자체를 삼켜 버렸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 이들이 오히려 그 길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 재판의 자리로 나오십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나쉼(여자들)을 모음만 달리하여 노쉼(채권자들)으로 읽을 수 있느냐가 쟁점입니다. 칠십인역의 읽기도 이 대안과 연결해 논의됩니다.

포도밭을 먹어 치운 사람들

이사야 3:13–15 본문 →

13절에서 장면이 바뀝니다.

여호와야훼가 송사를 벌이려고 나섰다. 민족들을 재판하려고 서 있다.이사야 3:13 · 본디새김

‘송사를 벌이다’라는 표현에는 다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법적 의미가 있습니다. 13절에서는 민족들을 재판한다고 말하지만, 이어지는 14절에서는 그 재판의 대상이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지도자들로 좁혀집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그 지도자들을 재판하러 올 것이다. 「너희가 포도밭을 먹어 치웠다. 가난한 이에게서 빼앗은 것이 너희 집들에 있다.」이사야 3:14 · 본디새김

사람들을 공정하게 판단해야 할 이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직접 판단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포도밭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닙니다. 농사를 지어 열매를 얻고 생계를 유지하는 장소입니다. 포도나무는 심고 가꾸는 데 시간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포도밭을 망가뜨리거나 그 열매를 빼앗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생활 기반을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지도자들을 포도밭을 돌보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은 백성의 삶을 지키도록 권한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포도밭을 보살피기는커녕 먹어 치웠습니다.

뒤에 나오는 ‘가난한 이에게서 빼앗은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읽으면, 백성을 돌보아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의 소유와 생활 기반을 약탈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지도자들의 집 안에 쌓여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적 불의는 막연한 잘못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가진 것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 사건입니다. 지도자의 부유함과 가난한 사람의 궁핍이 서로 무관한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 사이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밝히십니다.

이어서 15절에서는 고발이 한층 강해집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 백성을 짓부수며,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갈아 뭉개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이사야 3:15 · 본디새김

얼굴은 사람을 알아보고 마주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그 얼굴을 갈아 뭉갭니다. 이사야는 경제적 착취를 단순히 재산이 이동하는 문제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존엄과 삶이 짓밟히는 문제로 보여줍니다.

그들이 억압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입니다.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갈아 뭉갤 때, 하나님은 그것을 자기 백성을 향한 폭력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권위를 충분히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맡겨진 권위를 자기 백성을 해치는 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권위는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는가로만 평가되지 않습니다. 그 권위를 통해 어떤 사람들이 보호받고, 어떤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가가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이 장의 묘사를 모든 사회적 재난과 빈곤에 그대로 적용하여, 고통받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권력자의 탐욕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고통받는 사람과 고통을 가한 사람이 구별됩니다. 하나님은 그 차이를 아십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6:18–20은 재판관들이 공정하게 판단하고, 뇌물을 받지 않으며,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24:17은 이방인과 고아의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사야 3장은 그 요구가 실제 사회에서 무너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화려하게 꾸민 사람들에게서 모든 장신구가 사라지다

이사야 3:16–24 본문 →

16절부터는 갑자기 장면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남성 지도자들과 장로들이 고발되었습니다. 이제는 시온의 딸들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시온의 딸들이 거만해져 목을 길게 빼고 눈짓하며 걸어 다니고, 종종걸음으로 다니면서 발로 발찌를 짤랑거리기 때문에,」이사야 3:16 · 본디새김

‘시온의 딸들’이라는 표현은 문맥상 예루살렘의 부유한 여성들, 특히 화려한 장신구와 의복을 사용할 수 있었던 계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시온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생활 수준에 있지 않았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본문이 직접 고발하는 것은 단순히 꾸미는 행위가 아닙니다.

‘거만해져’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이어지는 몸짓과 장신구는 그 거만함이 밖으로 드러나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사야가 문제 삼는 것은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 자체라기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풍요를 과시하는 태도입니다.

한쪽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억압당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화려함을 과시합니다.

다만 16–23절의 여성들이 14절에서 고발된 약탈에 직접 가담했거나, 그들의 장신구가 모두 착취로 얻어진 것이라고 본문이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두 단락의 연결은 예루살렘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와 거만함에 대한 고발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신중합니다.

「주가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고,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음부를 드러낼 것이다.」이사야 3:17 · 본디새김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몸을 장식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피부에 상처를 입고, 자신의 몸이 드러나는 수치를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수치가 닥칠 것이라고 선언하지만, 여성이 폭력을 당하거나 강제로 몸을 드러내게 되는 행위를 오늘날 정당화할 근거로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예언자가 사용하는 심판의 언어는 고대 사회에서 신체 노출과 수치가 얼마나 강하게 연결되었는지를 반영합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몰락이 단순히 여성들의 사치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읽어서도 안 됩니다. 이사야 3장은 이미 지도자들의 탐욕과 억압,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여성들의 장신구가 사라지는 장면은 그 붕괴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18–23절에는 장신구와 의복이 길게 나열됩니다.

그날 주가 화려한 장신구들을 없앨 것이다. 발찌와 이마 띠와 초승달 장식,이사야 3:18 · 본디새김

발찌와 머리 장식, 목과 팔에 두르는 장신구, 반지와 코고리, 여러 종류의 겉옷과 머리쓰개 등이 이어집니다. 그들이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꾸몄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때문에 목록은 처음에는 풍요의 목록처럼 읽히지만, 끝까지 읽으면 잃어버릴 것들의 목록이 됩니다.

또한 목록 안에는 향수 용기와 부적 같은 물건도 등장합니다. 부적은 종교적·주술적 보호를 기대하며 지니는 물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신구와 의복 가운데 일부는 정확한 형태를 알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이 ‘향수 용기’와 ‘판’이라고 옮긴 물건도 그 형태를 확정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24절에서는 그 변화를 더욱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향료 대신 썩은 것이, 허리띠 대신 포승줄이, 정성껏 꾸민 머리 대신 벗겨진 머리가, 화려한 옷 대신 허리에 두른 자루천이, 아름다움 대신 불에 지진 자국이 있을 것이다.이사야 3:24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는 ‘대신’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한때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던 것들이 수치와 상실을 나타내는 것들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허리띠는 옷을 단정하게 갖추는 데 쓰이지만, 포승줄은 붙잡힌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정성껏 꾸민 머리는 풍요와 여유를 나타내지만, 벗겨진 머리는 상실이나 굴욕을 떠올리게 합니다. 화려한 옷 대신 등장하는 자루천은 애도와 고통을 표현할 때 사용되던 거친 옷감입니다.

처음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많은 것이 아무것도 지켜 주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음부를 드러낸다’는 부분은 은밀한 신체 부위를 노출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머리나 이마를 드러내어 대머리가 되는 모습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이 드물어 정확한 신체 부위의 이해에 차이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은밀한 신체 부위를 드러내는 것으로 옮겼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몸의 노출을 통한 극심한 수치와 취약함이 강조됩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마지막에는 키 타하트 요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를 불에 지진 자국과 아름다움의 대조로 읽을 수도 있지만, ‘아름다움 대신 수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전승도 있습니다. 쿰란의 이사야 두루마리에는 ‘수치’에 해당하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정확히 어떤 자국이 남는다는 뜻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텅 빈 성문 앞에 앉은 여자

이사야 3:25–26 본문 →

25절에 이르면 앞의 화려한 장신구와 의복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멈춥니다.

너의 남자들은 칼에 쓰러지고, 너의 힘은 전쟁에서 꺾일 것이다.이사야 3:25 · 본디새김

이 짧은 구절이 등장하면서 앞의 상실들이 단순히 개인의 외모가 변하거나 재산을 잃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너의 힘’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신체적 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도시를 지키는 전투력과 강한 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3장 첫머리에서는 용사와 전사,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25절에서는 실제 전쟁에서 그 힘이 꺾이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26절은 이사야 3장에서 가장 쓸쓸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성문들이 탄식하고 슬퍼할 것이다. 그녀는 텅 빈 채 땅바닥에 앉을 것이다.이사야 3:26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성읍은 한 여인처럼 의인화됩니다. 처음에는 ‘너의 남자들’이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그녀’라고 부릅니다.

‘텅 빈 채’라는 말은 단순히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정확한 인구 상태를 설명하는 표현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도시가 사람들과 자원, 안전과 활력을 잃어버린 처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16절에서 시온의 딸들은 목을 길게 빼고 걸었습니다. 발찌를 짤랑거리며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의 시온은 걸어가지 않습니다.

앉아 있습니다.

그것도 높은 자리가 아니라 땅바닥에 앉아 있습니다.

움직이던 사람이 멈추고, 자신을 높이던 사람이 낮은 곳에 놓였습니다. 이사야는 이 대조를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장의 처음과 끝을 함께 보면 그 이미지가 선명해집니다.

이사야는 한 나라의 몰락을 가장 높은 권력자의 죽음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 나라를 이루고 있던 삶 전체가 상실된 모습으로 끝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도시에서 성문은 단순히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드나들고, 거래하며, 공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장소였습니다. 룻기 4:1–12에서는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장로들 앞에서 중요한 법적 절차를 진행합니다. 그러므로 성문은 도시의 사회적 삶이 집중되는 장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무너진 성읍에 남은 질문

이사야 3:1–26 본문 →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겉옷을 가진 지도자 한 사람도, 화려한 재산도, 높은 사회적 지위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 주어야 할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결국 성문마저 슬퍼하게 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성문입니다.

한때 사람들이 드나들고, 거래하고, 판단을 구하며, 서로의 삶을 이어 가던 곳입니다. 그 성문들이 이제 탄식합니다.

그리고 성읍은 텅 빈 채 땅바닥에 앉아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사실을 긴 교훈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저 땅바닥에 앉아 있는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한때 사람들로 가득했던 성읍이,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처럼 앉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