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초막 위에 드리우는 하나님의 보호

이사야 4장은 불과 여섯 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안에서 예루살렘의 운명은 극적으로 뒤바뀝니다.

처음에는 여자 일곱 명이 남자 한 명을 붙잡고 자신의 수치를 거두어 달라고 애원합니다. 전쟁이 남긴 상처가 사람들의 가장 사적인 관계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시온 위에 구름과 불을 만드시고,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구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덮어 주십니다.

읽는 시간 15분소단락 74장 본문 읽기 →

자기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

이사야 4:1 본문 →

그리고 그날 여자 일곱이 남자 하나를 붙잡고 말할 것이다. 「저희 양식은 저희가 먹고, 저희 옷은 저희가 입겠습니다. 다만 저희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해 주십시오. 저희의 수치를 거두어 주십시오.」이사야 4:1 · 본디새김

이사야 4장은 새로운 장이지만, 1절은 앞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3:25에서는 예루살렘의 남자들이 전쟁에서 쓰러졌고, 3:26에서는 성읍이 텅 빈 채 땅바닥에 앉았습니다. 4:1은 그 전쟁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이 하는 말이 뜻밖입니다.

자기 양식은 자기가 먹고, 자기 옷은 자기가 입겠다고 합니다. 남자에게 경제적인 부양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6–7에서 사람들은 겉옷을 가진 남자를 붙잡아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집에 양식도 겉옷도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두 장면에서 양식과 옷이 함께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을 돌볼 능력이 없는 남자에게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자에게 아무런 부양 부담도 지우지 않겠다며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람들이 정상적인 관계에 따르는 책임과 조건을 포기하면서까지, 무너진 삶을 붙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혼인과 가족 관계는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소속과 생계, 자녀와 상속, 공동체 안에서의 지위가 함께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1:10에도 혼인 관계 안에서 음식과 의복에 관한 책임이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4:1에서 여자들이 양식과 옷을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통상적인 부양의 기대를 내려놓는 발언으로 들립니다.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 하나를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맺어진 관계를 통해 자신의 소속과 지위가 인정된다는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혼인 관계를 맺어 사회적인 지위를 얻고자 하는 요청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수치’ 역시 당시 사회에서 혼인하지 못하거나 자녀를 두지 못하는 여성이 겪을 수 있었던 사회적 수치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일곱 여성이 모두 자녀가 없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사야는 공동체의 붕괴가 사람들의 정체성과 존엄, 소속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들의 간절한 요청 직후에 전혀 다른 말씀이 시작됩니다.

2절도 똑같이 ‘그날’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 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실제 남녀 인구 비율이 정확히 7대 1이 되리라는 예측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는 한 남자에게 여러 여자가 매달려야 할 만큼 남자들이 부족해진 극심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폐허에서 돋아나는 여호와야훼의 싹

이사야 4:2 본문 →

그날 여호와야훼의 싹은 아름다움과 영광이 되고,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자랑과 영화가 될 것이다.이사야 4:2 · 본디새김

1절의 그날은 전쟁으로 무너진 공동체의 상처가 드러나는 날입니다. 2절의 그날은 아름다움과 영광이 나타나는 날입니다. 예언자는 ‘그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심판의 결과와 회복의 전망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구체적인 시간 간격이나 연대는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실 예루살렘을 묘사하면서 왜 싹이 등장할까요?

이사야는 무너진 성벽이 다시 높아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새 왕이 즉위하거나 군대가 다시 강해진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땅에서 자라나는 생명을 보여줍니다.

싹은 작은 것입니다. 아직 나무도 아니고, 풍성한 열매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전에 보이지 않던 생명이 땅을 뚫고 나타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보여줍니다.

싹과 열매는 서로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하나는 새로 자라나는 생명을, 다른 하나는 그 생명이 맺는 풍요로운 결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 남자들이 전쟁에서 쓰러진 성읍, 식량과 의복조차 부족한 사람들의 세계에 다시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 풍요는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살아남은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아름다움과 영광’, ‘자랑과 영화’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짝을 이룹니다. 앞 장에서는 시온의 딸들이 화려한 장신구와 의복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아름다움이 수치와 상실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름다움과 영광이 다시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장식하여 아름다움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야훼의 싹과 땅의 열매가 아름다움과 영광이 됩니다.

회복된 시온의 자랑은 사람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자신을 꾸몄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생명을 다시 자라나게 하셨는가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4:2의 ‘여호와야훼의 싹’을 미래에 나타날 특별한 통치자, 곧 메시아적 인물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이사야 11:1에서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고 그의 뿌리에서 가지가 나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23:5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다윗에게 의로운 싹을 일으키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스가랴 3:8과 6:12에서도 ‘싹’이라는 표현이 특별한 인물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4:2 자체에서는 그 싹이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도 없고, 왕이나 통치자라는 명칭도 없습니다. 오히려 ‘땅의 열매’와 나란히 놓여 있기 때문에 식물과 풍요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이 절을 처음 읽는 단계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라나게 하시는 생명과 회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장과 다른 예언서까지 함께 읽을 때는 그 싹을 장차 나타날 통치자와 연결하여 이해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 두 읽기를 무조건 하나로 합칠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 4장 자체의 표현과 이후 성경에서 발전하는 싹의 이미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불리다

이사야 4:3 본문 →

시온에 남은 이와 예루살렘에 남겨진 이, 곧 예루살렘에서 살아갈 이로 기록된 사람은 모두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다.이사야 4:3 · 본디새김

여기에는 ‘남은 이’, ‘남겨진 이’, ‘살아갈 이로 기록된 사람’이라는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이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세 무리를 뜻한다기보다, 심판 이후에도 예루살렘에서 살아가게 된 사람들을 여러 방향에서 묘사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생존자라는 이름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1절의 여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 이름을 통해 자신의 수치가 거두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3절의 사람들에게는 ‘거룩하다’는 새로운 호칭이 주어집니다. 두 구절이 사용하는 ‘불리다’라는 표현은 서로 연결됩니다.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규정됩니다.

이들은 어떻게 거룩하게 되었을까요?

심판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룩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적었기 때문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절에서, 그들이 거룩하다고 불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예루살렘에서 살아갈 이로 기록된 사람’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2:32–33에서 하나님께 속한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장면이나, 다니엘 12:1에서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표현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4:3은 누가 어떤 책에 기록하는지, 그 기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특정한 천상의 명부 체계를 자세히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명이 우연히 남겨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시온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씻으시는 하나님, 태우시는 하나님

이사야 4:4 본문 →

주가 심판의 영과 태우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오물을 씻어 내고, 예루살렘의 피를 그녀 안에서 씻어 없애면,이사야 4:4 · 본디새김

이사야는 회복의 전망을 보여주면서도 예루살렘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지 잊지 않습니다.

그 성읍은 씻겨야 합니다.

‘시온의 딸들의 오물’은 앞 장에서 드러난 교만과 불결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의 피’는 성읍 안에서 벌어진 폭력과 죽음, 생명을 해친 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1:15에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백성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6에서는 그들에게 씻고 깨끗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4:4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씻으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앞에서는 백성이 자신의 악한 행실을 버리고 깨끗해져야 한다는 책임이 강조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시온의 더러움과 예루살렘의 피를 제거하시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시온의 딸들의 오물’을 실제로 여성들만이 예루살렘을 더럽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3장에서는 지도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서 빼앗은 것과 그들을 짓밟은 행위가 고발되었습니다. 따라서 4:4의 씻음은 시온 전체가 지닌 죄와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더러움을 씻어 없애십니다. 그런데 그 씻음은 단순히 표면을 닦아 내는 부드러운 행위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심판과 태움이 함께 등장합니다.

씻는다는 말은 오물이 제거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태운다는 말은 불순물이 소멸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두 이미지는 서로 다른 방법을 기계적으로 나열한다기보다, 하나님이 죄를 철저히 제거하시는 행동을 강렬하게 묘사합니다. 앞서 이사야 1:25에서 하나님은 찌꺼기가 된 은을 제련하여 불순물을 없애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제련은 성읍을 회복하기 위한 심판의 이미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씻으시는 것은 잘못을 보이지 않게 덮어 두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더럽힌 악을 실제로 제거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심판과 구원이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행동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폭력과 불의를 심판하시는 바로 그 일이, 폭력과 불의로 병든 공동체가 새롭게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더러움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성읍 위에 단순히 아름다운 덮개만 씌우지 않으십니다.

먼저 씻으십니다.

그리고 그 씻음 이후에 놀라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이 구절에서 시온의 아들들과 딸들을 함께 언급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본문의 ‘시온의 딸들’과 차이가 있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을 따르든 예루살렘 공동체의 더러움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여기서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문맥에 따라 바람, 숨, 영을 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영과 태우는 영’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태우시는 영의 작용으로 읽을 수 있고, 심판과 소각을 실행하는 강력한 바람이나 기운의 이미지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문만으로 이 구절이 정확히 어떤 물리적 현상을 묘사하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4절은 ‘씻어 없애면’이라는 조건의 형태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어 임(⁨אִם⁩)은 일반적으로 ‘만일’이라는 조건을 나타낼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씻어 내시는 일이 이루어진 뒤 이어질 결과를 소개하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이 회복하실지 말지를 불확실하게 추측하도록 하기보다, 이어지는 거룩함과 보호가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광야의 구름과 불이 시온 위에 나타나다

이사야 4:5 본문 →

여호와야훼가 시온 산의 모든 터 위와 그녀의 모임들 위에 낮에는 구름과 연기를, 밤에는 타오르는 불의 빛을 창조할 것이다. 모든 영광 위에 덮개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4:5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광야를 지날 때, 여호와야훼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비추셨습니다(출애굽기 13:21–22). 또한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는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습니다. 광야의 여정 동안 낮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 있었고 밤에는 그 구름 가운데 불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40:34–38).

이사야가 보는 미래에서는 구름과 불이 시온 산의 모든 터와 그녀의 모임들 위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 안쪽의 한 장소에만 한정되어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의 여러 장소와 그곳에서 모이는 사람들 위로 넓게 펼쳐집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보호의 현실을 만드십니다.

예루살렘이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임재가 시온의 삶을 새롭게 감싸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안전했던 이유는 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사야는 파괴된 예루살렘의 미래에도 그 하나님이 함께 계실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이 문장의 ‘영광’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온 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킬 수도 있고, 구름과 불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광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앞에서 말씀하신 회복된 시온의 영광과 연결해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가리키든, 여기서 덮개는 그 영광을 보호하고 감싸는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여기서는 영광이 나타난 시온 위에 보호하는 덮개가 드리워지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곳이 동시에 백성이 보호받는 장소가 됩니다. 이사야 2:19에서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위엄의 광채를 피해 동굴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의 영광 아래에서 사람들이 보호받습니다.

같은 여호와야훼의 임재가 죄와 교만을 심판하는 위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정결하게 된 백성을 지키는 보호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달라진 것은 그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백성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심판의 영과 태우는 영으로 씻겨 거룩하다고 불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곧이어 더욱 작고 친숙한 이미지로 이어집니다.

버려졌던 초막이 피난처가 되다

이사야 4:6 본문 →

초막은 낮에 더위를 피할 그늘이 되고, 폭우와 비를 피할 피난처와 은신처가 될 것이다.이사야 4:6 · 본디새김

마지막 절에서 이사야는 구름과 불이라는 장엄한 광경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초막을 이야기합니다.

초막은 견고한 성이나 웅장한 건축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잠시 머물며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소박한 구조물입니다.

왜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시온의 마지막 모습이 이렇게 작은 초막으로 표현될까요?

이사야 1:8에서 딸 시온은 포도밭의 초막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그 초막의 이미지는 외로움과 위태로움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때 번성하던 성읍이 넓은 밭 가운데 홀로 남은 임시 움막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4:6에서는 초막이 다시 등장합니다.

1장에서는 초막이 성읍의 처량한 상태를 보여주었습니다.

4장에서는 초막이 안전과 보호를 보여줍니다.

이 차이는 초막 자체가 이전보다 더 튼튼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시온 위에 구름과 불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그곳에 펼쳐져 있습니다.

낮의 더위와 폭우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위협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그늘을 필요로 하고, 몸을 피할 곳을 필요로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삶을 그런 일상적인 보호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광채로만 남지 않습니다. 더위 속에서 쉴 수 있는 그늘이 되고, 폭우 속에서 몸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5절의 ‘덮개’와 6절의 ‘초막’이 하나의 보호 시설을 이어 묘사하는지, 서로 다른 보호의 이미지를 겹쳐 놓은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구절이 하나의 장면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 위에 나타나고, 그곳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 됩니다.

시온의 회복은 무엇이 달라지는 일인가

이사야 4:1–6 본문 →

하나님은 단지 사람에게 새로운 장식이나 사회적 지위를 더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더럽힌 것을 씻으시고, 새 생명이 자라게 하시며, 자신의 임재 아래 머물 수 있게 하십니다. 이사야가 보는 회복된 시온은 아무런 위험도 없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곳입니다.

이사야 4장은 그 약속을 거대한 궁전이나 성벽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작은 초막 하나를 보여줍니다.

그 초막은 한때 예루살렘이 얼마나 외롭고 위태롭게 남아 있는지를 나타내던 이미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초막 아래에 그늘이 있습니다. 뜨거운 낮에도 쉴 수 있고, 폭우가 쏟아질 때도 몸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 위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구름과 불의 빛이 있습니다.

한때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초막이 이제는 사람들을 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장은 그 초막 위에 드리운 하나님의 보호를 보여주며 조용히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