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사랑의 노래가 심판의 노래로 바뀔 때

이사야 5장은 뜻밖에도 사랑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누군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노래하겠다고 나섭니다. 노래의 주인공은 정성껏 포도원을 가꾼 사람입니다.

그는 좋은 땅을 골랐고, 돌을 걷어 냈으며,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포도를 수확할 준비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그런데 포도원에서는 냄새 고약한 포도가 열렸습니다.

이 노래의 핵심은 포도원이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인이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열매를 맺었다는 데 있습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75장 본문 읽기 →

포도원 주인은 무엇을 더 할 수 있었는가

이사야 5:1–7 본문 →

사랑받는 포도원에서 시작된 노래

첫 문장은 친밀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의 포도원에 관한 내 사랑하는 이의 노래를 부르겠다.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포도원이 있었다. 기름진 언덕 위에 있었다.이사야 5:1 · 본디새김

여기서 노래하는 사람은 포도원 주인 자신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처음 청중에게 들리는 것은 예언자의 고발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포도원을 소개하는 노래입니다.

그는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고 좋은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포도즙을 담을 통도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포도가 맺히기를 기대했으나 냄새 고약한 포도가 맺혔다.이사야 5:2 · 본디새김

돌을 걷어 내는 일은 포도나무가 자랄 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망대는 포도원을 지키고 살피기 위한 시설입니다. 바위를 파서 만든 통은 수확한 포도로 포도즙을 만들 준비가 이미 끝났음을 보여 줍니다.

주인이 얻은 것은 기대보다 적은 수확이 아니라 기대와 어긋난 수확이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고발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실제로 만들어 낸 열매가 잘못되었다고 고발하십니다.

청중이 재판관이 되는 순간

3절에서 갑자기 노래의 목소리가 바뀝니다.

「이제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부디 나와 내 포도원 사이의 시비를 가려 다오.」이사야 5:3 · 본디새김

지금까지 포도원 주인을 이야기하던 목소리가 이제는 주인 자신의 목소리가 됩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피고석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노래를 듣는 청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 사이의 다툼을 판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해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 더 있느냐? 나는 포도가 맺히기를 기대했는데 어찌하여 냄새 고약한 포도가 맺혔느냐?」이사야 5:4 · 본디새김

이 질문에는 이미 앞에서 서술한 모든 행동이 담겨 있습니다. 좋은 땅, 좋은 묘목, 돌을 제거하는 수고, 망대, 포도즙을 담을 통까지, 주인은 자신이 했던 일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청중은 이제 포도원 주인에게 책임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집안이며, 유다 사람들은 그가 기뻐하는 나무다. 그는 정의를 기대했으나, 보라, 피 흘림이었다. 의를 기대했으나, 보라, 울부짖음이었다.이사야 5:7 · 본디새김

그들이 판정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포도원은 바로 자신들이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전에,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알아보게 하십니다.

포도원을 황무지로 만드는 심판

주인은 이제 포도원을 어떻게 처리할지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엇을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그 울타리를 걷어 내어 먹어 치우게 하고, 그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겠다.」이사야 5:5 · 본디새김

가지치기를 멈추시고 땅을 일구지 않으십니다. 구름에게도 명령하여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앞에서 포도원을 세우고 가꾸던 행동들이 이제 하나씩 거꾸로 진행됩니다.

처음에는 돌을 걷어 내시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이제는 가시와 가시덤불이 자라게 됩니다. 처음에는 보호 시설을 세우셨습니다. 이제는 보호 시설이 사라집니다.

포도원에 대한 돌봄이 중단되자 포도원은 황무지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방치가 아니라 의도적인 심판입니다. 주인은 자신이 제공하시던 보호와 돌봄을 거두겠다고 선언하십니다.

6절에서 그가 구름에게 명령하신다는 말은 이 주인이 평범한 농부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포도원을 가꾸신 이가 날씨까지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청중은 비유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볼 준비를 하게 됩니다.

여호와야훼가 기다린 열매의 이름

7절은 포도원 노래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찾으신 것은 단순한 종교적 열심이나 국가의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정의롭게 대하는 사회, 억울한 사람이 부르짖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였습니다.

특히 「울부짖음」은 추상적인 악의 이름이 아닙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이사야 1:21–23에서도 같은 문제가 나타납니다. 한때 정의가 가득했던 성읍에서 살인과 뇌물, 고아와 과부를 외면하는 불의가 발견됩니다. 3:14–15에서는 지도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것을 자신의 집에 쌓아 놓았다고 고발합니다.

그렇다면 그 울부짖음은 누가 만들어 낸 것입니까?

8절부터 이사야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행동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쌍에서 미스파흐의 정확한 뜻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의 미슈파트와 의도적으로 비슷한 소리를 내며 대조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둘째 쌍에서는 의를 뜻하는 체다카 대신 울부짖음을 뜻하는 체아카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나단이 다윗에게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빼앗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준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사무엘하 12:1–7). 이야기 속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알아보는 일은 쉽지만, 그 이야기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판단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이사야서 안에는 또 하나의 포도원 노래가 있습니다. 27:2–6에서는 여호와야훼가 포도원을 지키고 물을 주며 돌보십니다. 그 포도원은 마침내 열매로 세상을 채우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5장에서는 포도원에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하셨지만, 27장에서는 포도원에 물을 주십니다. 물론 27장의 약속을 가져와 5장의 심판을 가볍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사야서 전체에서 포도원의 이미지는 심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마가복음 12:1–12)는 이사야 5장의 포도원과 시설들을 분명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직접 인용보다는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에 해당합니다. 다만 예수의 비유에서는 포도원의 열매 자체보다 열매를 받으러 온 사람들을 거부하는 농부들의 행동이 중심이 됩니다.

집은 늘어나는데 사람이 살 자리는 사라진다

이사야 5:8–10 본문 →

아, 집에 집을 이어 붙이고 밭에 밭을 맞붙이는 자들아. 더는 자리가 없을 때까지 그렇게 하여 너희만 그 땅 한가운데 살게 되었구나.이사야 5:8 · 본디새김

첫 번째 고발은 우상숭배나 형식적인 종교생활이 아니라 토지와 주택의 독점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땅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성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성공을 다른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이 차지한 공간이 넓어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살아갈 자리가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에서 땅은 단순한 투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은 가족의 생계와 공동체 안에서의 자리를 지탱했습니다. 레위기 25:23에서 여호와야훼는 땅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속한다고 말씀하시며, 25:25–28에서는 가난 때문에 땅을 잃은 사람이 그것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같은 문제를 미가도 고발합니다. 미가 2:1–2에서는 사람들이 남의 밭과 집을 탐내어 빼앗고, 그 결과 한 사람과 그 집안의 상속 몫을 침해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내 귀에 말했다. 「반드시 많은 집이 황폐해질 것이다. 크고 좋은 집들도 사는 이가 없을 것이다.」이사야 5:9 · 본디새김

사람들을 밀어내면서까지 넓혀 놓은 집들이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됩니다.

10절에서는 땅의 생산성도 무너집니다.

「열 체메드의 포도원이 한 바트를 내고, 한 호멜의 씨앗이 한 에파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5:10 · 본디새김

다음 농사를 위한 씨앗조차 충분히 마련할 수 없는 수확입니다. 토지를 계속 늘리면 생산과 부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뒤집힙니다.

다른 사람을 밀어내며 넓힌 땅이 결국 아무도 배불리지 못하는 땅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체메드는 소가 짝을 이루어 일하는 데서 나온 토지 면적의 표현입니다. 바트는 액체를 재는 단위이고, 호멜과 에파는 여기서 곡물의 양을 나타냅니다. 에스겔 45:11에 따르면 한 에파는 한 호멜의 10분의 1입니다. 따라서 한 호멜(⁨חֹמֶר⁩)의 씨를 뿌렸는데 한 에파(⁨אֵיפָה⁩)밖에 거두지 못한다는 것은 뿌린 씨앗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곡물밖에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잔치의 소리는 가득한데 여호와야훼가 하시는 일은 보이지 않는다

이사야 5:11–17 본문 →

두 번째 고발은 술과 잔치에 관한 것입니다.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중심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이 장면만 보면 풍요롭고 즐거운 사회입니다. 음악이 흐르고 잔치가 계속됩니다.

그들의 잔치에는 수금과 하프,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야훼가 하는 일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그의 손이 한 일은 보지 않았다.이사야 5:12 · 본디새김

앞 절에서 드러난 사회적 불의와 연결하면 이들의 문제가 더 선명해집니다. 잔치를 누릴 여유가 있지만, 그들이 사는 공동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는 살피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알지 못하여 유배를 갔다. 그 백성의 귀한 이들은 굶주린 사람들이 되었고, 그 무리는 갈증으로 바싹 말랐다.이사야 5:13 · 본디새김

「알지 못하여」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했다는 뜻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바로 앞에서 여호와야훼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신들의 삶을 여호와야훼의 행동과 뜻에 비추어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을 삼키는 스올

이어지는 장면은 한층 어둡습니다.

그러므로 스올은 식욕을 키우고 한없이 입을 벌렸다. 예루살렘의 영화와 무리와 소란, 그 안에서 흥겨워하는 자가 그리로 내려갈 것이다.이사야 5:14 · 본디새김

스올은 히브리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거대한 입을 벌리고 사람들을 삼키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11–12절에서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입니다. 14절에서는 스올이 식욕을 키워 그들을 삼킵니다.

잔치를 즐기던 사람들은 이제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됩니다.

이사야는 도시의 화려함을 이루던 요소들을 하나씩 열거한 다음 그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했던 도시가 죽음의 세계에 삼켜집니다.

여기서 심판은 개인의 음주 습관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몰락으로 확대됩니다.

누가 높아지는가

15–16절에서는 반복되는 방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굽혀집니다. 인간은 낮아집니다. 거만한 자들의 눈도 낮아집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높아지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는 정의로 높아졌고, 거룩한 하나님은 의로 거룩함을 드러낸다.이사야 5:16 · 본디새김

7절에서 여호와야훼가 기다리셨던 두 열매, 곧 정의와 의가 여기서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그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야훼는 심판 가운데 자신의 정의와 의를 드러내십니다.

거룩함은 단지 세상과 구별되어 있다는 추상적인 성질만이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 여호와야훼의 거룩함은 불의한 사회를 그대로 승인하지 않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17절에서는 인간의 자랑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납니다.

어린 양들은 제 목장에서처럼 풀을 뜯고, 살진 자들의 폐허에서는 나그네들이 먹을 것이다.이사야 5:17 · 본디새김

한때 집과 밭을 독점하던 이들이 사라지고, 그들의 땅은 더 이상 그들의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반드시 평화로운 회복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장의 흐름에서는 번영하던 도시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바뀌었다는 심판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도시의 화려한 잔치가 사라진 곳에서 어린 양들이 풀을 뜯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는 유배를 이미 일어난 일처럼 표현합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유배를 갔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완료형(⁨גָּלָה⁩)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 말이 반드시 역사적으로 유배가 일어난 뒤에 기록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의 문맥에서는 앞으로 닥칠 심판을 이미 확정된 일처럼 묘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진 자들」이 부유한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살진 짐승들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뒤의 나그네들도 사람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전체를 가축의 방목 장면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폐허가 된 땅에 다른 존재들이 들어와 먹는다는 기본 장면은 같습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사회

이사야 5:18–23 본문 →

18절부터는 다시 「아」라는 탄식과 함께 고발이 이어집니다.

앞에서 땅과 향락의 문제가 드러났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당화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죄를 끌고 가는 사람들

아, 헛됨의 끈으로 죄악을 끌고, 수레 밧줄 같은 것으로 죄를 끄는 자들아.이사야 5:18 · 본디새김

보통 짐승이 수레를 끌고 갑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사람들이 죄악을 끌고 간다고 말합니다. 죄가 단순히 그들에게 우연히 닥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헛됨의 끈」과 「수레 밧줄」의 표현도 눈에 띕니다. 죄악을 끌고 가는 끈과 밧줄이 나란히 놓이면서, 그들이 죄에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말한다. 「그가 서둘러 자기 일을 빨리 해 보라지. 우리가 보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계획이 가까이 와서 닥쳐 보라지. 우리도 알아보자.」이사야 5:19 · 본디새김

이것은 겸손하게 여호와야훼의 뜻을 구하는 기도라기보다 그분의 심판을 비웃는 말로 읽힙니다. 그들은 예언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행동이 실제로 일어날지 의심하며, 한번 보여 달라고 도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백성의 거룩하신 분을 입에 올리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장 끝에서 여호와야훼가 부르시는 군대는 실제로 「빠르게, 날쌔게」 옵니다(5:26).

그들이 비웃던 하나님의 행동이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것입니다.

언어가 현실을 뒤집을 때

아,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는 자들아. 어둠을 빛으로, 빛을 어둠으로 삼으며, 쓴 것을 단 것으로, 단 것을 쓴 것으로 삼는 자들아.이사야 5:20 · 본디새김

첫 번째는 도덕적 판단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인간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명백한 차이입니다. 어둠과 빛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쓴 것과 단 것을 혼동한다면 맛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구별을 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름을 바꾸어 부릅니다.

이 표현의 무게는 23절에 가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뇌물 때문에 악인을 의롭다고 판결하고, 의로운 이들에게서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다.이사야 5:23 · 본디새김

20절에서 추상적으로 보이던 말이 23절에서는 구체적인 재판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사야가 고발하는 것은 단지 생각이 잘못된 사회가 아닙니다. 잘못된 판단이 공적인 권력이 되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사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7절에서 들렸던 울부짖음이 발생하는 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

21절은 그들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아, 제 눈에 지혜롭고 스스로 보기에 분별력 있는 자들아.이사야 5:21 · 본디새김

문제는 지혜의 판단 기준이 오직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20절의 가치 전도와 연결됩니다. 자신을 판단할 기준을 잃어버린 사람은 자기 욕망에 맞추어 선과 악의 이름을 바꾸기 쉽습니다.

22절에서는 다시 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 포도주 마시는 데 용사이며 독한 술 섞는 데 장사인 자들아.이사야 5:22 · 본디새김

「용사」와 「장사」라는 말은 본래 힘과 능력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능력을 발휘하는 자리는 술자리입니다.

앞에서 이사야가 묘사한 사회에는 땅을 넓힐 능력도 있고, 풍요로운 잔치를 열 능력도 있으며,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말솜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들은 정의를 세우는 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22–23절을 함께 읽으면 이 풍자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술 마시는 데 뛰어난 사람들이 이어서 등장하는 불의한 판결과 연결됩니다.

그 결과 공동체가 의지해야 할 제도마저 약한 사람들을 해치는 도구가 됩니다.

뿌리에서 꽃까지 무너지는 심판

이사야 5:24–25 본문 →

24절은 앞에서 열거한 죄악들이 왜 심판을 불러오는지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불의 혀가 지푸라기를 삼키고 겨가 불꽃 속에 주저앉듯, 그들의 뿌리는 썩은 것처럼 되고 그들의 꽃은 먼지처럼 날아오를 것이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다.이사야 5:24 · 본디새김

땅을 독점하고, 억울한 사람을 만들고, 악인을 의롭다고 판결하는 행동들은 단순한 사회적 실수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을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삶과 분리된 별도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사람들이 땅을 어떻게 소유하고, 이웃을 어떻게 대하며, 법정에서 어떻게 판결하는가에까지 관계되었습니다.

썩은 뿌리와 먼지가 된 꽃

24절의 심판은 다시 식물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으나 잘못된 열매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열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뿌리가 썩고 꽃이 먼지처럼 날아갑니다. 식물이 살아가는 기반과 앞으로 열매가 맺힐 가능성까지 무너지는 것입니다.

또한 24절 앞부분에서는 불이 지푸라기와 겨를 삼키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포도원의 황폐화, 농작물의 실패, 식물의 부패, 불에 타서 사라지는 모습이 차례로 연결되면서 심판의 범위가 확대됩니다.

25절에서는 그 심판이 도시 한가운데로 들어옵니다.

그 때문에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자기 백성을 향해 타올랐다. 그가 그들 위로 손을 뻗어 그들을 쳤다. 산들이 떨었고 그들의 시체는 거리 한복판의 오물처럼 되었다. 이 모든 일에도 그의 분노는 물러가지 않았고, 그의 손은 여전히 뻗어 있다.이사야 5:2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손이 하신 일을 사람들이 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5:12). 같은 하나님의 행동을 외면했던 사람들이 그분의 심판과 마주하게 됩니다.

시체가 거리 한복판에 있다는 묘사는 특히 끔찍합니다.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죽은 사람의 몸조차 합당하게 수습되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판이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먼 곳에서 군대를 부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모든 일에도 그의 분노는 물러가지 않았고, 그의 손은 여전히 뻗어 있다」는 문구는 이사야 9:12, 17, 21과 10:4에서도 반복됩니다. 심판이 한 차례의 재난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확대될 수 있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사자의 포효

이사야 5:26–30 본문 →

그가 먼 곳의 민족들에게 깃발을 들고, 휘파람으로 그를 땅끝에서 부를 것이다. 보라, 그가 빠르게, 날쌔게 올 것이다.이사야 5:26 · 본디새김

이사야 5장의 마지막 장면은 전쟁의 위협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처음부터 적국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대신 여호와야훼가 깃발을 드시고 먼 곳의 민족들을 불러들이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심에 있는 분은 침략군의 왕이 아니라 그들을 부르시는 여호와야훼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가 다른 민족들을 불러 자기 백성을 심판하십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심판을 면제받는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정의와 의를 기대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야훼였기 때문에, 그 기대를 배반한 행동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지치지 않는 군대

27–28절에서는 군대의 움직임이 세밀하게 묘사됩니다.

지치는 사람도 없고 넘어지는 사람도 없습니다. 졸거나 잠드는 사람도 없습니다. 허리띠는 풀리지 않고 신발 끈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화살은 날카롭고 활은 당겨져 있습니다. 말발굽은 부싯돌처럼 단단하며 바퀴는 회오리바람처럼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묘사는 1–2절의 포도원 주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포도원 주인도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땅을 가꾸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세우고, 포도즙을 담을 통까지 만들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철저한 준비를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처음에 여호와야훼의 준비는 열매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여호와야훼의 준비는 심판을 실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달라진 것은 여호와야훼가 무엇을 기대하셨는지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그 기대에 대한 백성의 응답입니다.

아무도 구해 낼 수 없는 먹이

29절에서 군대는 사자에 비유됩니다.

그의 포효는 사자 같고, 그는 젊은 사자들처럼 포효할 것이다. 으르렁거리며 먹이를 붙잡아 무사히 끌고 가니, 구해 낼 자가 없다.이사야 5:29 · 본디새김

이 장의 처음에서 포도원은 울타리와 담으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그 보호를 걷어 내겠다고 하신 뒤, 마지막에는 먹이를 붙잡아 가는 사자로부터 아무도 구해 낼 수 없는 상황이 나타납니다.

다만 이 비유를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은 사랑의 부재보다 사랑받은 백성이 보인 응답의 문제를 강조합니다. 여호와야훼가 포도원을 자신의 기쁨이라고 부르셨던 사실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심판의 비극성이 더 커집니다.

빛이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

30절은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로 끝납니다.

그날 그 군대가 그 백성을 향해 바다가 으르렁대듯 으르렁댈 것이다. 땅을 바라보면, 보라, 어둠과 고통이다. 빛도 그 땅의 구름 속에서 어두워질 것이다.이사야 5:30 · 본디새김

바다는 인간이 쉽게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군대가 밀려오는 모습을 거센 물결에 비유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위협을 느끼게 합니다.

이 장 앞부분에서 악을 선이라 하고 어둠을 빛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5:20). 그들은 말로 빛과 어둠의 이름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로 찾아온 어둠은 이름을 바꾼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낸 도덕적 혼란은 이제 공동체 전체가 겪는 재난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끝내 어떻게 반응하는지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장면도, 구원받는 장면도 여기에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서의 뒤 문맥을 고려하면 아시리아의 군사적 위협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사야 10:5에서는 아시리아가 하나님의 분노의 막대기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5장 자체는 침략해 오는 세력을 특정 국가의 이름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포도원의 노래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마음

이사야 5:1–30 본문 →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서로 반대되는 속성이 아닙니다. 사랑이 인간의 행동에 아무 관심도 갖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도 무관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장의 여호와야훼는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울부짖음을 만들어 내는 사회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기다리신 것은 정의였지만, 그분이 들으신 것은 울부짖음이었습니다.

노래가 끝날 무렵 포도원의 울타리는 사라졌고, 집들은 비었으며, 먼 곳에서 군대가 밀려옵니다. 마지막으로 땅을 바라보지만 빛마저 어두워져 있습니다.

한때 기름진 언덕에서 시작된 사랑의 노래가 이제 어둠 속에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