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거룩하신 왕 앞에서 듣지 않을 백성에게 보내지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시는 일은 예상과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되, 그들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도 알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사야를 깨끗하게 하셨을까요?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말씀을 전하도록 부르셨다면, 왜 그 말씀이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둔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리고 거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심판의 끝에 왜 작은 그루터기 하나를 남겨 두셨을까요?
이사야 6장은 예언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을 얻는가뿐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거부당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장은 그렇게 한 사람의 열린 입술과 한 백성의 닫힌 귀를 대조하면서, 마지막에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까지 독자를 데려갑니다.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본 왕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주가 높이 솟은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이사야 6:1 · 본디새김
웃시야는 유다를 오랫동안 다스린 왕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5:1–7과 역대기하 26장에는 그의 통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역대기하 26장은 그가 군사력과 농업 기반을 확장하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교만해져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침범했다고 전합니다.
웃시야의 죽음은 유다의 오랜 통치 시대가 끝났음을 나타내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바로 그해에 보는 것은 또 다른 왕입니다.
땅의 왕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환상 속에서 주는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세상의 왕권은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나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보는 왕은 사람의 죽음으로 자리를 비우지 않으십니다.
5절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본 분을 ‘왕인 만군의 여호와야훼’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1절의 보좌는 단순한 높은 의자가 아니라, 그분의 왕권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왕의 얼굴이나 모습부터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가 보좌에 앉아 계신 모습만으로도 압도적인데, 그분의 옷자락만으로 성전이 가득합니다. 인간이 가장 거룩한 공간으로 여기는 성전조차 하나님의 위엄을 담기에 얼마나 작은 장소인지를 보여주는 환상적 표현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이지만,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열왕기상 8:27에서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하나님을 다 모실 수 없는데 자신이 지은 성전이 어떻게 그분을 모실 수 있겠느냐고 고백합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을 가득 채웁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높이 솟은’이라는 표현은 보좌 자체를 수식할 수도 있고, 보좌에 앉으신 주의 위엄을 강조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모든 인간 권세보다 높으신 분으로 나타나신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 환상이 실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일어났는지, 하늘의 왕좌를 성전의 이미지로 본 것인지는 본문이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확실히 전하는 것은 자신이 주의 왕권과 임재를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얼굴을 가린 존재들이 온 땅의 영광을 외치다
세라프들이 주 위쪽에 서 있었다. 저마다 날개가 여섯씩 있었다. 둘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이사야 6:2 · 본디새김
세라프들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 가까움 때문에 하나님을 거리낌 없이 대하지는 않습니다.
이사야가 강조하는 것은 날개의 세부적인 상징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들조차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외쳐 말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이사야 6:3 · 본디새김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은 그 의미를 강하게 강조합니다. 이사야가 듣는 찬양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압도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죄를 짓지 않으신다는 도덕적 의미를 포함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같은 수준으로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모든 존재를 넘어서는 위엄과 권위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광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이사야가 전해야 할 말씀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지만,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왕들보다 높으시며, 유다의 경계 안에 제한되지도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외침에 성전이 반응합니다.
외치는 이의 목소리에 문지방의 기초가 흔들렸고, 그 집은 연기로 가득 찼다.이사야 6:4 · 본디새김
그러나 보좌에 앉아 계신 주가 흔들리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람이 견고하다고 여기는 건축물조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소리에 흔들리지만, 하나님 자신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여기서 연기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를 두렵고 신비롭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이사야는 이 광경을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세라프들의 찬양과는 전혀 다른 말을 입 밖에 냅니다.
조금 더 깊이
발을 가리는 행위는 몸을 공손하게 가리고 자신을 낮추는 자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발이 여기서 신체의 은밀한 부분을 완곡하게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이 장에서는 그런 뜻을 확정할 만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분의 거룩하심을 세 번 외치는 찬양은 훗날 그리스도교 예배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세 번의 반복을 이사야가 처음부터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설명한 것으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이 장에서 반복의 직접적인 역할은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거룩하심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문지방의 기초’라는 표현이 정확히 어느 건축 부위를 가리키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중요한 것은 건물의 입구를 지탱하는 부분까지 진동한다는 것입니다. 이 연기는 출애굽기 19:18에서 여호와야훼가 시나이산에 내려오실 때 산을 뒤덮었던 연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전의 제의와 관련된 향 연기를 연상할 수도 있지만, 본문은 연기의 정확한 발생 원인을 밝히지 않습니다.
거룩한 찬양 앞에서 터져 나온 부정한 입술의 탄식
나는 말했다. 「아, 내게 화가 닥쳤구나. 나는 망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고,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는데, 내 눈이 왕인 만군의 여호와야훼를 보았기 때문이다.」이사야 6:5 · 본디새김
앞에서 세라프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외쳤습니다. 이사야는 그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부정함을 발견합니다.
이사야는 자신을 백성에게서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는 백성의 죄를 고발하는 예언자가 될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지금은 자신도 그 백성 가운데 한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세라프들은 입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역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전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입술은 단순히 말을 만들어 내는 신체 기관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 다른 사람을 향한 태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앞서 이사야 3:8에서 유다는 ‘혀와 행실’로 여호와야훼를 거역했다고 고발되었습니다. 말은 사람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말하고 살아온 방식 전체가 정결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일은 특별한 은혜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 그것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출애굽기 33:20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장에서 예언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화를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6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향해 ‘내게 화가 닥쳤구나’라고 말합니다.
백성을 고발할 사람이 먼저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본래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정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행동으로 깨끗해지는 사람이 됩니다.
불이 입술에 닿았지만 이사야는 살아남았다
이사야는 자신이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즉각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세라프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날아왔다. 그의 손에는 달아오른 돌이 있었는데, 집게로 제단 위에서 집어 온 것이었다.이사야 6:6 · 본디새김
이사야가 자신의 부정함을 해결하기 위해 제단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가 제단에서 가져온 것을 들고 그에게 다가옵니다.
그는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했다. 「보아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다. 네 죄책은 사라지고, 네 죄는 속죄된다.」이사야 6:7 · 본디새김
제단에서 가져온 것이 입술에 닿는 행위는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속죄와 정결을 나타냅니다.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 입술에 제단에서 가져온 뜨거운 것이 닿습니다.
이사야가 망했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를 없애지 않으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죄인을 반드시 파괴하는 것으로만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이사야에게는 죄가 제거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사야는 아직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사명도 받지 않았고,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먼저 죄책이 제거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사람임을 증명했기 때문에 정결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를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리츠파(רִצְפָּה)는 여기서 불에 달아오른 돌이나 숯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칠십인역은 이를 숯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달아오른 돌’로 옮긴 것처럼, 히브리어 표현 자체가 그 재질을 명확하게 지정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대답에 담긴 변화
나는 주가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 내가 말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이사야 6:8 · 본디새김
8절에서 이사야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사야의 이름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그 질문을 듣고 스스로 나섭니다.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질문은 이사야가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독자는 아직 이사야가 무엇을 하러 가야 하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는 사명의 결과를 미리 알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정결하게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먼저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시는 일은, 그가 기대했을 법한 성공적인 사명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조금 더 깊이
단수 ‘내가’와 복수 ‘우리’가 한 발언 안에 등장합니다. 이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보좌를 둘러싼 하늘의 존재들을 포함하여 말씀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2:19–22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보좌에 앉아 계시고 하늘의 무리가 그 곁에 서 있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장엄한 발화 방식이나 신적인 논의를 나타내는 복수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그 대상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누가 이 백성에게 갈까?’라는 방향으로 옮겨, 히브리어의 복수 표현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만으로 하나님의 내부 존재 방식에 관한 구체적인 교리를 확정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듣고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말씀
그가 말했다.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여라.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이사야 6:9 · 본디새김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보고도 알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명령의 형태로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10절은 더욱 강합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살찌게 하고, 그 귀를 무겁게 하고, 그 눈을 가려,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치유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이사야 6:10 · 본디새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사람들의 이해와 회복을 가로막는 일이 되어야 할까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원래 잘 듣고 이해하려던 무고한 사람들을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눈멀게 하셨다고 읽는 것도 이사야서의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1:3),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5:12),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빨리 실행해 보시라고 조롱했습니다(5:19).
이사야 6장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 온 백성의 현실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심판이 된 말씀
이는 말씀을 통한 치유가 아니라 말씀을 통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은 사람들의 실제 상태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거부하는 백성에게는 그 말씀이 회복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완고함이 더욱 분명해지고, 그 결과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중립적인 정보가 아닙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사람의 상태가 드러나고, 그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실행됩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회개를 막으셨는가, 아니면 백성이 자유롭게 거부한 결과만을 말씀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이 구절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 둘 사이의 철학적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백성은 이미 하나님을 거역해 왔고, 이제 그 말씀을 듣는 일조차 심판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눈과 귀가 뒤집히는 이야기
1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정결함을 경험했으며,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가서 전해야 할 백성은 보고도 알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사야도 처음에는 부정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정결하게 하시는 행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는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요?
이사야도 그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의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은 단지 백성이 완고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을 뿐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히브리어 본문의 강한 명령형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10절의 ‘살찌게 하고(שָׁמַן)’, ‘무겁게 하고(כָּבַד)’, ‘가려(שָׁעַע)’에 해당하는 표현은 실제로 명령형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사명에 백성의 완고함이 심화되는 결과를 포함시키십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은 백성의 마음이 이미 둔해졌고, 그들이 귀로 무겁게 들었으며, 자기 눈을 감았다는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이사야에게 주어진 심판의 명령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칠십인역에서는 백성이 보인 완고한 반응에 무게가 실립니다. 또한 칠십인역은 마지막의 치유를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말로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13:14–15에서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하시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십니다. 사도행전 28:26–27에서도 바울이 자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같은 본문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6장의 본래 상황은 먼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신약의 인용은 그 본문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지, 이사야가 처음부터 신약의 특정 사건만을 직접 설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언제까지입니까?' — 끝이 보이지 않는 사명
내가 말했다.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그가 말했다. 「성읍들이 무너져 사는 이가 없어지고, 집들에도 사람이 없어지고, 땅이 황폐해져 황무지가 되고,」이사야 6:11 · 본디새김
하나님의 대답은 날짜나 기간이 아닙니다.
나라가 어떤 상태에 이를 때까지인지를 설명합니다. 성읍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장소이고, 집은 가족의 생활이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땅은 농사를 짓고 생계를 유지하는 기반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모두 무너집니다.
이사야가 앞서 들었던 완고함에 대한 말씀은 단순한 내면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공동체의 역사적 파괴와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가 사람들을 멀리 보내고, 그 땅 한가운데 버려진 곳이 많아질 때까지다.」이사야 6:12 · 본디새김
이는 전쟁과 함께 일어날 수 있는 강제 이주나 유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6:12는 특정 제국의 이름이나 포로 이송의 연도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어느 한 차례의 유배 사건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시고 그들을 인도해 들어가게 하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이 버려집니다.
이는 신명기 28:36–37, 63–64에서 경고된 언약의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린 백성이 자기 땅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사야는 그 경고가 유다의 역사에서도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듣습니다.
이사야는 이제 자신의 사명이 사람들의 환영이나 눈에 보이는 변화로 평가되기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됩니다. 그가 전할 말씀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곧바로 변화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사야의 사명은 사람들이 기꺼이 듣는 동안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듣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읍이 텅 비고 땅이 황폐해지는 장면에서 말씀을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 뒤에 하나의 숫자와 두 종류의 나무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의 ‘언제까지입니까?’라는 질문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본문이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백성이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는지를 묻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말씀을 전해야 하는 기간을 묻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둘은 이 문맥에서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십분의 일이 남아도 다시 불타는 땅
「그 땅에 아직 십분의 일이 남아 있어도, 그것마저 다시 불에 탈 것이다. 잘릴 때 그루터기가 남는 테레빈트나무와 참나무처럼 될 것이다.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다.」이사야 6:13 · 본디새김
전체 가운데 일부가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 남은 부분까지 심판을 겪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오히려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제는 잘린 나무가 나타납니다.
나무가 잘리면 줄기와 가지가 사라집니다. 그늘도 사라지고 잎도 없어집니다. 멀리서 보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나 땅에 그루터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루터기는 나무가 잘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이면서,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면 다시 자랄 가능성을 품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그 그루터기를 ‘거룩한 씨’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성전을 흔들고 이사야를 두려움에 빠뜨렸습니다. 마지막에는 황폐한 땅에 남은 그루터기에 ‘거룩하다’는 말이 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루터기의 거룩함이 완전히 같은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래 거룩하신 분이지만, 이스라엘의 남은 씨는 그분께 속하도록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불립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유다의 교만과 죄를 드러내시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도 자신의 백성에 속한 어떤 것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서둘러 ‘결국 아무 문제 없이 다시 회복된다’고 결론 내리면 본문이 남긴 긴장이 사라집니다.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는 말은 이미 나무가 잘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심판은 실제입니다. 상실도 실제입니다.
그루터기는 심판이 가볍다는 증거가 아니라, 심판이 철저한 가운데서도 모든 가능성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표지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는 슈브(돌아오다·다시 하다)와 바아르(불태우다·소모하다)와 관련된 표현이 이어집니다. 본디새김은 이를 반복되는 소각의 이미지로 이해하여 ‘다시 불에 탈 것이다’라고 옮겼습니다. 이는 문맥에 잘 어울리는 읽기입니다. 다만 첫 번째 동사를 남은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의미로 이해하거나, 뒤의 동사를 다른 방식의 소모와 파괴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거룩한 씨’를 읽는 데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심판을 거친 뒤에도 남아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는 이해입니다. 이사야 4:3에서도 시온에 남은 이들이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라고 선언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거룩한 씨’를 장차 나타날 특별한 인물이나 왕의 계보와 연결하여 읽기도 합니다. 이사야 11:1에서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오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6:13 자체는 ‘거룩한 씨’가 특정한 한 사람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먼저 하나님께 속한 남은 씨라는 집합적인 의미를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 본디새김이 따르는 히브리어 전승에는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다’라는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에는 이 문장이 나타나지 않으며, 잘린 나무의 이미지에서 구절이 끝납니다. 따라서 마지막 구절의 희망을 얼마나 명시적으로 읽을 수 있는가에는 고대 본문 전승 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잘린 나무 아래 남은 것
하나님은 인간이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는 거룩하신 왕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시면 부정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여 자신의 일을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자신의 말씀을 거부하는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면서도, 심판 이후의 미래를 완전히 닫아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오늘의 모든 종교적 활동에 그대로 적용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이 완고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사야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복종을 요구한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직접 그를 정결하게 하시고 보내시는 특별한 예언자적 부르심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이 장을 읽는 사람은 자신을 무조건 이사야의 자리에 놓기보다, 먼저 자신이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황폐한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자라나는 모습을 아직 보여주지 않습니다. 나무가 다시 무성해지고, 새가 둥지를 틀며, 열매가 맺히는 장면도 없습니다.
이사야 6장의 마지막에는 다시 세워진 성전도, 회복된 성읍도 없습니다. 잘린 나무의 밑동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남은 것을 이름 없이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