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두려움 속에 주어진 임마누엘의 표징

이사야 7장에서 하나님은 두려움에 빠진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두 나라가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려 하고, 유다의 왕은 왕위를 빼앗길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자신이 하신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표징까지 구하라고 권하십니다.

그런데 왕은 거절합니다.

아하스는 「저는 구하지 않겠습니다. 여호와야훼를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대답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하나님을 존중하는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자신의 안전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에 맡길 수 있습니다.

이 역전의 한가운데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놓여 있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7장에서 이 말씀은 위로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경고입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7장 본문 읽기 →

숲의 나무처럼 흔들리는 다윗 집안

이사야 7:1–2 본문 →

웃시야의 손자이며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시대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야의 아들인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예루살렘을 치려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 성을 쳐서 이기지는 못했다.이사야 7:1 · 본디새김

이사야 7장은 이전의 시적 예언과 달리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 시대에 북쪽의 두 나라가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하나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는 아람이고, 다른 하나는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이스라엘입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구성한 주요 지파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북왕국 전체를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8세기 중반의 아람·에브라임 전쟁으로 불립니다. 당시 앗시리아 제국은 서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했고, 유다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7장은 그들의 외교적 동기를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아하스를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사실입니다(7:6).

그런데 1절은 이미 이야기의 결과를 간략하게 알려 줍니다.

독자는 결과를 먼저 듣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그 공격이 닥치기 전 왕과 백성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다윗 집안에 이런 소식이 전해졌다. 「아람이 에브라임과 합세했습니다.」 아하스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바람 앞에서 숲의 나무들이 흔들리듯 흔들렸다.이사야 7:2 · 본디새김

한 그루만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면 숲의 나무들이 함께 흔들립니다.

왕의 두려움이 백성 전체의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절은 소식이 아하스 개인에게 전해졌다고 하지 않고, 다윗 집안에 전해졌다고 말합니다. 아하스는 단순히 현직 유다 왕이 아닙니다.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후손과 왕권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람과 에브라임은 그 왕위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을 세우려 합니다. 따라서 이 위기는 한 왕의 개인적인 생존 문제를 넘어, 다윗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신뢰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정작 그 약속을 이어받은 왕은 숲의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에게 이사야를 보내십니다.

연기가 나는 두 장작 끄트머리

이사야 7:3–9 본문 →

여호와야훼가 이사야에게 말했다. 「자,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위쪽 못의 수로 끝으로 아하스를 만나러 나가거라. 그곳은 빨래하는 이의 밭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이사야 7:3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사야를 막연히 왕궁으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수로는 성읍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과 관련됩니다. 성이 공격받을 때 물 공급은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아하스가 이런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은 전쟁에 대비하여 물 공급 시설을 살피고 있었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본문은 아하스가 그곳에서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혼자 가지 않습니다.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갑니다. 히브리어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심판을 겪더라도 남은 자가 있다는 뜻으로, 또는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이름의 중심 의미인지는 이 장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굳이 이사야의 아들을 데려가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존재와 이름이 예언의 장면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볼 근거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남은 자는 파괴를 전제하는 표현입니다. 무엇인가가 사라졌기 때문에 남은 자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말하여라. 『조심하고 차분히 있어라. 연기 나는 이 두 장작 끄트머리 때문에, 르신과 아람과 르말야의 아들의 타오르는 분노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이 약해지지 마라.』」이사야 7:4 · 본디새김

왕의 눈에는 강력한 두 군대가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의 다 타고 남은 장작의 끝부분을 보여주십니다.

그 장작에서는 아직 연기가 납니다. 뜨겁고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며 주변을 삼킬 만큼 강한 불길은 이미 사그라드는 중입니다.

아하스는 두 왕의 분노가 자신을 삼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결국 사라질 권력임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5–6절에서는 적들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그들은 유다를 공격하여 공포에 빠뜨리고, 아하스를 대신해 타브알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합니다. 타브알의 아들이 누구인지는 본문에 더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다윗의 왕위를 대신 차지하도록 계획된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짧게 대답하십니다.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그 계획은 서지 못하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7:7 · 본디새김

이어지는 8–9절에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수도와 왕이 나열됩니다. 아람의 머리는 다마스쿠스이고 다마스쿠스의 머리는 르신입니다.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이고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수도와 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윗 집안의 운명까지 결정할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8절에는 에브라임이 예순다섯 해 안에 산산이 부서져 더는 한 백성으로 남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9절의 결정적인 경고로 이어집니다.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이고,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참으로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할 것이다.」』」이사야 7:9 · 본디새김

그는 나라를 굳게 세우고 싶어 합니다. 왕위를 잃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게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적들이 세우려는 계획은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 역시 굳게 서지 못할 것입니다.

유다가 자신의 존속을 무엇에 맡길 것인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17:6에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주민들이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아하스 시대의 위기에서 예순다섯 해가 지나기 전인 기원전 722년 또는 720년 무렵의 정복 과정에 속합니다. 따라서 예순다섯 해를 단순히 사마리아의 첫 함락까지 걸린 시간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군사적 패배뿐 아니라, 그 후 앗시리아가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옮겨 정착시키면서 기존의 민족적·정치적 정체성이 더욱 해체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라 4:2에는 앗시리아 왕 에살핫돈이 주민들을 이주시킨 일이 언급됩니다. 또 다른 읽기는 예순다섯 해에 관한 문장이 본래의 짧은 위기 선언에 나중에 덧붙여진 설명일 가능성을 고려합니다. 이 문장이 두 왕국의 수도와 왕을 병렬로 나열하는 흐름을 끊고 있다는 점이 그 근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본문만으로 어느 설명이 옳은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믿다’와 ‘굳게 서다’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동사로 표현됩니다. 앞의 동사는 믿고 신뢰한다는 뜻이며, 뒤의 동사는 굳게 세워지거나 확고하게 유지된다는 의미를 담습니다. 말하자면 믿음과 존속이 하나의 언어적 관계로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왕의 불신앙

이사야 7:10–13 본문 →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약속을 주신 뒤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너를 위해 네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표징을 구하여라. 스올 깊은 곳에까지든, 저 높은 곳에까지든 구하여라.」이사야 7:11 · 본디새김

아하스가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표징을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표현은 표징을 구할 수 있는 범위에 제한을 두지 않는 과장된 대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래의 가장 깊은 곳과 위의 가장 높은 곳이 나란히 등장하면서,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얼마나 넓은 선택의 여지를 주시는지 강조합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하스가 말했다. 「저는 구하지 않겠습니다. 여호와야훼를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이사야 7:12 · 본디새김

신명기 6:16에는 여호와야훼를 시험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아하스의 말은 그 계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대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아하스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에게 능력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표징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하스의 거절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려는 경건한 행동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라고 마련하신 길을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이사야가 말했다. 「다윗 집안이여, 부디 들으십시오.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것으로는 여러분에게 부족해서, 나의 하나님까지 지치게 합니까?」이사야 7:13 · 본디새김

아하스의 결정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을 주신 왕조 전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야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이사야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두 표현을 비교하면 아하스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대해 얼마나 심각한 질문을 받고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하나님이 이미 아하스를 영원히 버리셨다는 확정적인 선언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왕과 예언자의 태도 차이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6:7–8에서 아하스는 앗시리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전과 왕궁의 은금까지 예물로 보냅니다. 물론 이사야 7장 자체는 이 대화의 어느 시점에 아하스가 앗시리아와 접촉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아하스의 문제는 자신을 구해 줄 힘을 전혀 찾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을 자신의 구원의 근거로 선택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하스가 표징을 구하지 않겠다고 했음에도 직접 표징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표징은 한 아이의 탄생입니다.

조금 더 깊이

스올(⁨שְׁאוֹל⁩)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실제로 체력이 부족해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그분의 인내를 시험하는 행동을 강하게 꾸짖는 표현입니다.

'그 젊은 여자'와 임마누엘의 표징

이사야 7:14–16 본문 →

「그러므로 주가 직접 여러분에게 표징을 줄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 젊은 여자가 임신해 있고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여자는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입니다.」이사야 7:14 · 본디새김

임마누엘의 탄생은 우선 이 역사적 위기 가운데 주어진 표징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왜 ‘임마누엘’인가

이 이름은 추상적인 종교적 위로를 넘어, 하나님이 다윗 집안에 하신 약속과 연결됩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은 다윗의 왕위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그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표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는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아이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 계시는 일을 이루게 할 미래의 통치자일까요?

이사야 7장 자체에서는 그 아이가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설명도 없고,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이라는 사명도 구체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7장의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아이의 이름과 성장 과정이 위기에 처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는 표징으로 기능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다만 이사야 8:8에서는 유다 땅을 두고 임마누엘을 부르며, 8:10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는 선언이 이어집니다. 이 이름은 7장의 한 장면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예언의 중요한 주제로 발전합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일어날 일

「그는 나쁜 것을 거절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게 될 때에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입니다.」이사야 7:15 · 본디새김

여기서 ‘나쁜 것을 거절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게 되는 때’는 아이가 분별력을 갖추기 시작하는 시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정확히 몇 살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아이가 나쁜 것을 거절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기 전에, 당신이 그 두 왕 때문에 두려워하는 땅이 버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야 7:1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임마누엘 표징이 아하스의 당면한 위기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먼 미래에만 실현될 막연한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하스가 살아 있는 시대에 확인할 수 있는 변화를 예고하고 계십니다.

열왕기하 16:9에는 앗시리아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르신을 죽인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5:29에는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끌고 간 사건이 나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협이 실제로 무너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표징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아이가 먹게 된다는 ‘엉긴 젖과 꿀’은 무엇을 뜻할까요? 풍요와 생존을 강조하는 읽기는 젖과 꿀의 긍정적인 의미에 주목합니다. 반면 황폐한 땅에서 살아가는 생활을 강조하는 읽기는 21–25절과의 연결에 주목합니다.

이 장 전체의 흐름에서는 후자의 의미를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16절은 두 왕의 땅이 버려질 것이라고 말하고, 17절부터는 유다 자신에게도 끔찍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은 임마누엘을 어떻게 읽는가

이사야 7:14는 마태복음 1:22–23에서 예수의 탄생과 연결되어 직접 인용됩니다. 이사야 7장의 본래 상황에서는 아하스가 당면한 정치적 위기 속에 주어진 표징이라는 의미를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그 말씀을 예수의 탄생에 적용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의미가 예수에게서 더욱 깊이 드러난다고 읽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역사적 문맥을 지워 버리거나, 반대로 마태복음의 정경적 읽기를 이사야 7장의 본래 의미와 완전히 같은 방식의 설명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하알마(⁨עַלְמָה⁩)는 ‘그 젊은 여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마는 결혼할 나이의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낱말 자체가 그 여자의 성관계 경험 여부를 명시적으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만으로 그 여자가 반드시 처녀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처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습니다. ‘그’에 해당하는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사야가 완전히 추상적인 어떤 젊은 여자를 말하기보다, 그 상황에서 알아볼 수 있는 여성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여자의 이름이나 가족관계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녀를 아하스의 아내, 이사야의 아내, 또는 다른 특정 여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 하라(⁨הָרֶה⁩)는 임신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를 현재 임신한 상태로 옮기는 읽기도 있습니다. 반면 문맥상 앞으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고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시간 표현만으로 아이의 출생 시점을 정확히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알마’를 그리스어 파르테노스로 옮겼습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처녀를 뜻하며, 마태복음은 그 번역 전승을 사용하여 예수의 탄생을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3:8에서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사야 7장에서는 이 표현이 22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포도밭과 경작지가 가시덤불로 변하고, 땅에 남은 사람들이 가축의 젖과 꿀을 먹으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구원자로 불러들인 앗시리아가 재앙이 되다

이사야 7:17–20 본문 →

「여호와야훼가 당신과 당신의 백성과 당신 아버지의 집안 위로, 에브라임이 유다에서 떨어져 나간 날 이후로 오지 않았던 날들을 불러올 것입니다. 곧 앗시리아 왕을 불러올 것입니다.」이사야 7:17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이야기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열왕기하 16:7에 따르면 그는 앗시리아 왕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앗시리아 왕의 종이자 아들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당시 강대국을 섬기는 종속 관계를 표현하는 외교적 언어였습니다.

아하스가 구원자로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왕이, 하나님이 불러오시는 재앙의 도구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이 유다에서 떨어져 나간 날’이라는 표현은 열왕기상 12장에 기록된 왕국 분열을 떠올리게 합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열 이후로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날들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파리와 벌을 부르시는 하나님

「그날에 여호와야훼가 휘파람을 불어 이집트의 나일 물줄기들 끝에 있는 파리와 앗시리아 땅에 있는 벌을 부를 것입니다.」이사야 7:18 · 본디새김

파리와 벌은 작은 생물입니다. 그러나 떼로 몰려오면 사람에게 큰 불편과 위협을 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강대국들의 군사적 세력을 이런 곤충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사야 5:26에서도 하나님은 먼 곳의 민족에게 휘파람을 불어 불러오셨습니다. 이제 7장에서는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그 부름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유다의 주변 강대국들보다 높은 권위를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하스는 강대국 가운데 누구를 의지할지 고민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보는 세계에서 그 강대국들은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독립적인 구원의 근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와서 벼랑의 골짜기들과 바위틈들에, 모든 가시덤불과 모든 풀밭에 내려앉을 것입니다.」이사야 7:19 · 본디새김

이 목록은 침략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줍니다. 강대국의 영향력이 왕궁과 주요 성읍에만 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의 구석구석까지 미칩니다.

그런데 20절에서 파리와 벌의 비유는 더 모욕적인 이미지로 바뀝니다.

「그날에 주가 강 건너편에서 빌린 면도칼, 곧 앗시리아 왕으로 머리털과 음모를 밀어 버릴 것입니다. 그 면도칼은 수염까지 쓸어 없앨 것입니다.」이사야 7:20 · 본디새김

강한 제국의 힘을 빌려 위험을 피하려 했는데, 그 제국이 오히려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미는 일은 고대 사회에서 굴욕과 수치의 표현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한 나라가 가진 위엄과 자존심을 모두 벗겨 버리는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백성의 일상적인 삶을 바꾸는지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7장 자체에는 아하스가 면도칼을 빌렸다는 직접적인 설명이 없으므로, 그 말을 앗시리아에 대한 아하스의 의존과 연결하는 것은 문맥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16장의 아하스의 행동을 함께 읽으면 이 비유가 지니는 반어적인 의미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본문은 음부 주변의 털까지 밀어 버리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머리와 수염뿐 아니라 은밀한 신체 부위까지 노출되는 철저한 굴욕을 암시합니다.

엉긴 젖과 꿀, 그리고 사라진 포도밭

이사야 7:21–25 본문 →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가축 몇 마리를 기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전쟁과 침략의 결과를 궁전이나 전쟁터에서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암송아지 한 마리와 작은 가축 두 마리가 남습니다. 그는 그 가축을 기르며 살아갑니다.

「그것들이 젖을 많이 내므로 그는 엉긴 젖을 먹을 것입니다. 그 땅 가운데 남은 사람은 모두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야 7:22 · 본디새김

처음에는 이것이 풍요로운 삶의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들이 그 장면의 의미를 바꿉니다.

「그날에는 은 천 세겔의 값이 나가는 포도나무 천 그루가 있던 곳마다 가시와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이 될 것입니다.」이사야 7:23 · 본디새김

사람들은 농사를 통해 얻던 곡식과 포도 대신, 남은 가축의 젖과 얻을 수 있는 꿀에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생활 방식은 이전의 번영과 다릅니다.

포도밭은 오랜 시간 돌보고 가꾸어야 하는 경작지입니다. 좋은 포도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으려면 땅을 관리하고 가지를 치며 지속적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농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안정적인 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사람은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곳에 갈 것입니다. 온 땅이 가시와 가시덤불로 뒤덮일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야 7:24 · 본디새김

이 장면은 경작지가 사람들이 안심하고 드나드는 농지가 아니라, 사냥이나 방어를 위한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야 할 만큼 황폐한 장소로 변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어떤 동물을 사냥하게 되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괭이로 일구던 모든 산에도 당신은 가시와 가시덤불이 두려워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은 소를 풀어놓는 곳, 양이나 염소가 짓밟는 곳이 될 것입니다.」이사야 7:25 · 본디새김

이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농업에서 목축으로 산업이 전환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꾸고 돌보던 땅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음식이 두 번 등장하는 이유

임마누엘이라고 불릴 아이는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그 땅에 남은 모든 사람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이의 성장과 연결되어 등장했던 음식이, 마지막에는 심판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일상과 연결됩니다.

그 아이가 성장하는 시대의 땅과 생활환경까지 포함하는 표징입니다.

젖과 꿀은 좋은 음식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그것을 먹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은 생존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음식을 먹게 된 배경은 경작지의 황폐함입니다.

먹을 것이 남아 있지만, 그들이 누리던 삶은 무너졌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은 천’이라고 되어 있고 세겔이라는 단위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확한 현대 화폐 가치나 토지 가격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경제적 가치가 높은 땅이 더 이상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수로에서 시작되어 가시덤불로 끝나는 이야기

이사야 7:1–25 본문 →

이사야 7장의 처음과 마지막을 나란히 놓아 보면 한 나라의 운명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하스의 두려움보다 확실했지만, 아하스가 선택한 안전의 길이 유다를 지켜 줄 수는 없었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거절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조심하고 차분히 있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왕이 나라의 안전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는 결정을 내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을 개인의 일상적인 선택에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모든 위험에 대비하는 일을 불신앙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표징까지 제안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거절한 왕입니다. 오늘의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무조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는 마지막에 앗시리아 왕의 화려한 군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군대가 지나간 뒤의 땅을 보여줍니다.

값비싼 포도나무가 자라던 곳에 가시덤불이 무성합니다. 농부들이 괭이로 일구던 산에는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나라를 지키려 했던 왕에게 남겨진 미래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황폐한 땅을 바라보는 독자는 처음부터 주어진 한 이름을 잊지 못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이름은 아하스가 원했던 손쉬운 안전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우리를 지켜 줄 다른 힘을 찾아 나설 것인가?

이사야 7장은 그 질문을 가시덤불로 뒤덮인 유다의 땅 위에 남겨 둡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