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잔잔한 물을 버린 사람들

이사야 8장에는 두 종류의 물이 흐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실로아에서 조용히 흐르는 물이고, 다른 하나는 강둑을 넘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강물입니다. 사람들은 잔잔한 물을 거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거센 강물을 불러오십니다.

유다를 위협하던 적들을 무너뜨릴 앗시리아가 이제 유다까지 삼키려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적으로부터 구원받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장은 바로 그 간격을 파고듭니다.

앞선 7장에서 아하스는 다가오는 전쟁 앞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보다 정치적 계산에 의지했습니다. 8장에서는 그 선택의 결과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왕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들어가 묻습니다. 나라 전체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누구의 말을 듣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디에서 미래를 찾을 것입니까?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88장 본문 읽기 →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기록된 미래

이사야 8:1–4 본문 →

이 장은 왕궁이나 전쟁터가 아니라 하나의 큰 판에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큰 판을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사람이 쓰는 철필로 『마헬살랄하스바스에 관하여』라고 써라.」이사야 8:1 · 본디새김

마헬살랄하스바스.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 가운데서도 유난히 길고 낯섭니다. 문장의 정확한 구문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핵심은 분명합니다. 전쟁의 약탈이 지체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을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기록하게 하십니다.

이어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크야후의 아들 스가랴후를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단순히 예언자의 말을 듣는 청중이 아닙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과 이미 기록된 선언을 대조할 수 있게 하는 증인들입니다.

먼저 말씀이 기록됩니다. 그다음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국제 정세가 변합니다.

예언이 사건 뒤에 덧붙여진 설명이 아니라, 사건보다 앞서 주어진 말씀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그 기록이 한 가정의 일상으로 들어옵니다.

나는 그 여자 예언자에게 다가갔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불러라.」이사야 8:3 · 본디새김

여기서 이사야의 아내는 단순히 ‘예언자의 아내’가 아니라 ‘여자 예언자’로 불립니다. 그녀가 독자적으로 어떤 예언 활동을 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남편의 직함에 따라 그렇게 불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실제로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녀의 출산이 하나님의 표징에 참여하는 사건임을 분명히 합니다.

아이의 출생과 함께 판에 기록되어 있던 말이 실제 사람의 이름이 됩니다.

「그 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마스쿠스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약탈물이 앗시리아 왕 앞으로 옮겨질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8:4 · 본디새김

다마스쿠스는 아람의 수도이고,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두 나라가 유다를 위협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두려워해야 할 상대는 오히려 앗시리아였습니다.

여기서 아이의 성장은 일종의 시계가 됩니다.

몇 년 뒤라는 추상적인 시간표가 아니라, 부모가 매일 지켜볼 수 있는 아이의 성장으로 사건의 시점이 제시됩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사야의 메시지는 비교적 단순해 보입니다. 유다를 위협하던 두 나라가 곧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단락이 이 단순한 기대를 뒤집습니다.

적들이 무너진다는 예언은 유다가 안전하다는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16:9에는 앗시리아가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일이 기록되어 있고, 열왕기하 15:29에는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의 여러 지역을 점령한 일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성 자체가 최종적으로 함락되는 사건은 열왕기하 17:3–6에 별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8:4의 약탈을 반드시 사마리아의 최종 함락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잔잔한 물을 거절하자 거센 강물이 왔다

이사야 8:5–8 본문 →

5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사야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이름이나 인물이 아니라 물을 통해 심판을 설명하십니다.

「이 백성이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거절하고, 르신과 르말야의 아들과 함께 기뻐했으므로,」이사야 8:6 · 본디새김

실로아는 예루살렘의 수원과 연결된 물길입니다. 화려하거나 압도적인 힘을 드러내지 않는 물입니다. 예루살렘에 속한 실로아의 물은 이 문맥에서 시온에 거하시는 여호와야훼의 돌보심과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길을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당시 국제 정세에서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힘은 강대국의 군대에 있었습니다. 작은 물길보다는 거대한 강이 훨씬 강력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라, 주가 그들 위로 거세고도 많은 그 강물을 밀려오게 한다. 곧 앗시리아 왕과 그의 모든 영광이다. 그 물이 모든 물길 위로 불어나고, 모든 강둑을 넘어 흐를 것이다.」이사야 8:7 · 본디새김

‘그 강물’은 특정한 강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앗시리아와 연결되는 유프라테스강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로아는 예루살렘과 연결된 생명의 물입니다. 앗시리아는 모든 것을 침범하는 파괴의 물입니다.

앗시리아 왕은 자신의 군사력과 영광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예언의 시점에서는 여호와야훼가 그 강물을 밀려오게 하십니다. 이사야는 앗시리아의 침공을 단순한 국가 간 힘겨루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거절한 사건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열왕기하 16:7–9에 따르면 아하스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앗시리아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실제로 앗시리아는 아람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8장의 강물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유다로 밀려들어 넘치고 휩쓸며, 목까지 이를 것이다. 그가 펼친 날개가 네 땅의 온 너비를 채울 것이다. 임마누엘아.」이사야 8:8 · 본디새김

목까지 차오르는 물은 거의 모든 것을 잠기게 합니다. 그렇지만 머리까지 완전히 잠긴 모습과는 다릅니다. 심판이 극심하지만 그 묘사 자체가 완전한 소멸을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8절은 갑자기 누군가를 부릅니다. ‘네 땅’이라는 표현 다음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앞선 7:14에서 주어진 표징의 이름이 다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의 이름이 선포되는 순간, 정작 그 땅은 앗시리아의 물에 잠기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전쟁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백성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안전하다는 보증도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7–8장의 문맥에서 그 이름은 하나님의 약속과 심판이 동시에 드러나는 자리에서 울립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으시지만, 그 백성의 불신앙까지 무조건 승인하지는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런데 6절의 마지막 표현에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백성이 르신과 르말야의 아들과 함께 기뻐했다고 옮겼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을 그대로 살린 읽기입니다. 이 경우 이 백성을 북이스라엘과 아람 쪽으로 이해하거나, 유다 내부에 두 왕의 편에 선 세력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 전체가 두 왕의 침공을 두려워했다는 7:2와는 긴장이 생깁니다. 다른 읽기는 그 표현을 ‘두 왕 앞에서 두려움에 녹아내렸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유다가 실로아의 물을 거절한 것은 적들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여호와야훼에 대한 신뢰를 버렸기 때문이 됩니다. 다만 이 해석은 히브리어 표현을 다르게 읽거나 본문을 수정할 근거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8:9–10 본문 →

8절까지 온 땅을 집어삼킬 것처럼 보이던 강물은 9절에서 갑자기 멈춥니다. 예언자의 말투도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심판이 예고되었지만, 이제는 민족들을 향한 명령이 쏟아집니다.

민족들아, 부서져라, 산산이 부서져라. 땅의 먼 곳들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 허리를 동여매어라, 산산이 부서져라. 허리를 동여매어라, 산산이 부서져라.이사야 8:9 · 본디새김

군대가 전쟁을 준비할 때 허리를 동여매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준비할수록 실패의 선언이 반복됩니다.

싸울 준비를 하십시오. 그래도 부서질 것입니다.

다시 준비하십시오. 그래도 부서질 것입니다.

계획을 세워라. 그 계획은 깨질 것이다. 말을 해 보아라. 그 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이사야 8:10 · 본디새김

여기서 8절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한 문장으로 풀립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앗시리아의 힘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동안에도 열방의 권력에 역사를 넘겨주지 않으십니다.

이사야는 여기서 현실의 위험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뒤, 그 위험보다 더 큰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관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눈앞의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말씀은 전쟁 전략이 아니라 두려움의 문제를 다룹니다.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이사야 8:11–15 본문 →

11절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백성과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가 강한 손으로 내게 이렇게 말하며, 이 백성의 길로 걷지 말라고 나를 훈계했기 때문이다.이사야 8:11 · 본디새김

‘강한 손’은 이 말씀이 가벼운 권유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자신도 백성의 두려움과 정치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운 관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같은 위기 속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 위기 앞에서 다른 길을 걷도록 훈계받았습니다.

「이 백성이 모반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을 너희도 모반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앞에서 떨지 마라.」이사야 8:12 · 본디새김

당시에는 실제로 왕권을 위협하는 국제적 모의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7:6에 따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유다를 공격하여 다윗 왕가를 대신할 왕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12절은 정치적 위협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모든 사건을 두려움의 언어로 해석하는 백성의 태도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모반이라고 부르면, 이사야도 똑같이 말해야 한다는 압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세력을 두려워하면, 그 역시 함께 두려워해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그런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바로 그를 거룩하게 여겨라. 너희가 두려워할 이는 그이며, 그가 너희를 떨게 하는 이다.」이사야 8:13 · 본디새김

두려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바뀝니다.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이 통제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판단을 인간의 이해관계보다 높은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앗시리아를 더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앗시리아의 요구가 최종적인 기준이 됩니다. 반대로 여호와야훼를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앗시리아조차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가 성소가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고,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덫과 올무가 될 것이다.」이사야 8:14 · 본디새김

성소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보호를 구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부딪치는 돌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의 두 집안’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함께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심판의 대상은 아람이나 앗시리아처럼 외부의 세력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와 언약 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두 왕국 모두가 그분 앞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하심 앞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에 따라 경험하는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피할 곳이 되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하나님이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십니다.

이사야가 고발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 자신을 걸림돌로 여기게 되었다는 현실입니다. 그들은 외적을 가장 큰 위험으로 생각했지만, 이사야가 보기에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여호와야훼와의 관계였습니다.

백성 전체가 이 길을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남게 될 것입니까?

조금 더 깊이

먼저 8:14의 걸림돌과 바위의 이미지는 베드로전서 2:8에서 직접 인용됩니다.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 걸림돌은 여호와야훼 자신이지만, 베드로전서는 그 이미지를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이는 원래 본문을 단순히 다른 인물에 관한 예언으로 치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주제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신약의 읽기입니다.

말씀이 봉인되고, 예언자는 기다린다

이사야 8:16–18 본문 →

16절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증언을 묶어 두어라. 가르침을 내 제자들 가운데 봉인하여라.」이사야 8:16 · 본디새김

처음에 큰 판에 글을 쓰게 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그 말씀을 보존하게 하십니다. 봉인은 반드시 내용을 영원히 비밀로 감추는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문서의 내용을 확정하고 보존하며 함부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도 갖습니다.

여기서 ‘증언’과 ‘가르침’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을 판단할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백성이 지금 듣지 않는다고 해서 그 말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의 즉각적인 호응과 별개로 보존됩니다.

누가 이 명령을 하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선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이어지는 것으로 읽으면 ‘내 제자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사야의 말로 읽으면 예언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은 말씀을 받아 보존하는 사람들이 백성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나는 야곱 집안에게서 얼굴을 숨기는 여호와야훼를 기다리겠다. 그를 바라며 기다리겠다.이사야 8:17 · 본디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임재와 호의를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민수기 6:24–26의 제사장 축복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얼굴을 비추시는 일이 은혜와 평강의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얼굴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상황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내리는 결론은 다른 신을 찾아가거나 다른 권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겠다.’

이사야는 이미 말씀을 전했고, 표징을 기록했으며, 백성이 걸어가는 길을 거절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때를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즉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이 얼굴을 숨기시는 때에도 그분의 말씀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보라, 나도 여호와야훼가 내게 준 아이들도 이스라엘 가운데 표징과 징조가 된다. 그 표징과 징조는 시온산에 거주하는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서 온 것이다.이사야 8:18 · 본디새김

앞선 7:3에서 등장한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의미를 지닌 이름입니다. 8장의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빠르게 닥칠 약탈을 알립니다.

이사야의 가정 안에 심판과 희망을 함께 담은 표징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자신도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백성의 길을 거절하고,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지키며, 얼굴을 숨기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삶 자체가 백성 앞에 놓인 표징이 됩니다. 한편 이 표징들은 ‘시온산에 거주하는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서 옵니다. 나라가 침략당하고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상황에서도 본문은 여호와야훼를 시온에 거하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계시지 않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서 2:13 역시 이사야 8:17–18의 기다림과 자녀들에 관한 표현을 인용합니다. 이사야의 가족이 이스라엘 가운데 표징이 된 장면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에게 묻다

이사야 8:19–22 본문 →

이사야가 기다리겠다고 선언한 바로 다음에, 다른 종류의 기다림과 탐색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지저귀고 중얼거리는 영매들과 점쟁이들에게 물어라.」라고 말할 때, 백성이 자기 하나님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 산 이들을 위해 죽은 이들에게 물어야 하겠느냐?이사야 8:19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 주변 세계에는 죽은 자의 영이나 영적 존재에게 미래의 일을 묻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신명기 18:10–12는 그러한 행위를 금지합니다.

전쟁이 다가오고 나라의 미래가 불확실해지면 사람들은 확실한 답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는 기다림보다 다른 방법으로 미래를 알아내는 일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묻는다’는 행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 묻느냐가 문제입니다.

1절에서는 큰 판에 기록된 말씀이 있었습니다. 16절에서는 그 말씀이 보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알아듣기 어려운 중얼거림 속에서 미래를 찾습니다.

이 대비가 의도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어도 본문은 서로 다른 두 길을 분명히 세웁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과, 다른 영적 통로를 찾아 헤매는 길입니다.

가르침과 증언을 찾아라. 그들이 이 말에 따라 말하지 않는다면, 그런 이에게는 새벽이 없다.이사야 8:20 · 본디새김

여기서 16절의 두 낱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가르침’과 ‘증언’. 앞에서는 봉인하여 보존하라고 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말씀이 봉인된 것은 쓸모없어져서 버려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성이 길을 잃을 때 돌아가야 할 기준으로 보존된 것입니다.

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새벽은 어둠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리는 첫 변화입니다.

말씀을 거부하는 이에게 새벽이 없다는 선언은 단순히 미래에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사람은 자신이 기다리는 미래를 밝힐 참된 근거를 갖지 못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곤경에 몰리고 굶주린 채 그곳을 지나갈 것이다. 굶주리면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하고, 위로 얼굴을 돌릴 것이다.이사야 8:21 · 본디새김

이 장면은 굶주림을 겪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저주한다는 일반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본문은 곤경 속에서 분노와 저주로 반응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 냅니다.

땅을 바라볼 것이다. 보라, 고난과 어둠, 곤경의 암흑이다. 그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내몰릴 것이다.이사야 8:22 · 본디새김

이사야도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다립니다.

21–22절의 사람도 밝은 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저주하고 헤맵니다.

두 사람 모두 불확실한 현실 속에 서 있지만, 그 현실을 살아가는 방식은 다릅니다. 한 사람에게는 보존된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말씀을 벗어나 미래를 찾습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말하는 믿음은 현실을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현실이 어두운 동안 무엇을 근거로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여기서 장면을 끝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마지막 표현에는 번역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조건문으로도 읽을 수 있고, 이어지는 말을 강하게 확언하는 구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 새벽이 없다는 조건문으로 옮깁니다.

어둠의 끝에서 불려 나오는 땅 이름들

이사야 8:23 본문 →

22절의 마지막 장면은 거의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런데 23절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고통받던 그 땅에는 어둠이 없을 것이다. 이전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업신여겼지만, 뒤에는 바닷길과 요단 건너편, 민족들의 갈릴리를 영예롭게 할 것이다.이사야 8:23 · 본디새김

이곳들은 예루살렘 왕궁이나 시온 성전의 중심부가 아닙니다. 주로 이스라엘 북쪽 지역과 연결되는 땅들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북이스라엘의 지역이었으며,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겪었습니다. 열왕기하 15:29는 앗시리아 왕이 갈릴리와 납달리의 온 땅을 점령하고 그 주민들을 사로잡아 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땅을 영예롭게 하신다는 말이 나옵니다.

어둠이 물러갈 것이라는 선언은 제일 먼저 왕궁의 안전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고통받았던 북쪽 땅, 그것도 여러 민족과 접촉하는 변경 지역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전쟁의 피해를 먼저 겪었던 땅이, 이제 하나님이 일으키실 새로운 일을 기다리는 자리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8장의 마지막 절이 희망의 전모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일어나서 그 땅이 영예를 얻게 되는지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더 밝혀집니다.

앗시리아가 실제로 침공했고, 사람들이 실제로 고통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결과가 실제로 드러났습니다. 그 모든 일을 지우지 않은 채, 하나님은 고통받던 땅을 다시 바라보게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업신여겼다’에 해당하는 헤칼(⁨קָלַל⁩)은 가볍게 한다는 뜻의 어근에서 나오고, ‘영예롭게 했다’에 해당하는 히크비드(⁨כָּבַד⁩)는 무겁게 한다는 뜻의 어근에서 나옵니다. 가볍게 한다는 말은 낮추거나 하찮게 여긴다는 뜻으로, 무겁게 한다는 말은 존귀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문맥에서는 각각 가벼운 고난과 더 무거운 고난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길도 있습니다. 두 동사의 형태와 문장의 시점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의 번역처럼 이전의 수치와 뒤따르는 영예를 대조할 수 있지만, 다른 독법에서는 고난의 심화를 강조하는 문장이 됩니다. 그럼에도 본디새김이 선택한 읽기는 앞선 어둠에서 희망으로 전환하는 이사야의 이어지는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4:15–16은 8:23에 나오는 스불론과 납달리, 갈릴리의 지명과 이어지는 9장의 빛에 관한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의 갈릴리 사역과 연결합니다. 갈릴리는 단순히 장차 메시아가 활동할 장소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고난을 경험했던 실제 땅이었습니다. 신약의 해석은 그 역사적 배경 위에서 빛과 구원의 의미를 더욱 확장합니다.

잔잔한 물 곁에 서는 일

이사야 8:1–23 본문 →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이 얼굴을 숨기시는 동안에도 기다리는 일입니다. 아하스가 찾은 것은 당장의 위기를 넘길 수단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붙든 것은 위기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장의 첫머리에는 큰 판에 쓰인 이름이 있었습니다. 빠르게 다가올 약탈을 알리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사람들에게 다가올 심판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또 다른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스불론, 납달리, 바닷길, 요단 건너편, 민족들의 갈릴리. 이번에는 한 아이의 이름이 아니라 고통받던 땅들의 이름입니다.

앞의 이름은 약탈이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를 알렸습니다. 마지막의 이름들은 전쟁으로 어두워진 땅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잊히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 사이에 이사야는 얼굴을 숨기시는 여호와야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대한 강물은 이미 밀려왔고, 백성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고통받던 땅의 이름을 다시 부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