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평화의 왕과 서로를 집어삼키는 나라
이사야 9장은 놀라운 희망으로 시작하여 끔찍한 절망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억압의 멍에가 부서지고, 전쟁에 사용하던 군화와 피 묻은 옷이 불에 태워집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의 어깨에 통치권이 놓입니다. 그가 세울 나라에는 끝없는 평화가 약속됩니다.
그런데 7절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백성은 교만해지고,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악은 불처럼 번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집어삼킵니다. 마침내 같은 조상에게서 나온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서로를 공격합니다.
어떻게 한 장에 이토록 다른 두 세계가 함께 등장할 수 있을까요?
앞선 8장 마지막 절에서 고통받던 북쪽 땅에 어둠이 물러갈 것이라는 선언이 등장했습니다. 9장은 그 희망을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노래가 끝나자 예언자는 다시 이스라엘의 현실로 시선을 돌립니다.
빛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땅에 살던 이들 위로 빛이 비쳤다.이사야 9:1 · 본디새김
이사야는 어둠 속의 사람들에게 먼저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문장을 자세히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쪽은 어둠 속을 ‘걷던’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땅에 ‘살던’ 사람입니다.
걷는 사람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살고 있는 사람은 한곳에 머뭅니다. 그러나 그가 머무는 땅 자체가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움직이든 머무르든 사람들의 처지는 다르지 않습니다. 어둠은 그들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일시적인 장애물보다 훨씬 커 보입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빛이 사람들에게 찾아옵니다.
‘큰 빛을 보았다’는 표현과 ‘빛이 비쳤다’는 표현은 단순히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경험한 변화가 강조되고, 뒤에서는 그 변화를 일으킨 빛의 도래가 강조됩니다.
2절에서는 그 변화가 사람들의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당신은 이 민족을 늘리셨고, 그들에게 기쁨을 크게 더하셨습니다. 그들은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환호하듯 당신 앞에서 기뻐했습니다.」이사야 9:2 · 본디새김
앞에서는 백성에 관해 이야기하던 예언자가 이제 여호와야훼께 직접 말을 건넵니다. 기쁨의 원인은 백성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일입니다.
하나는 수확하는 기쁨입니다. 오랫동안 땅을 일구고 기다린 사람이 마침내 곡식을 거두는 장면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리품을 나누는 기쁨입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이 얻은 것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이 두 비유는 평화로운 농경 생활과 전쟁의 세계를 함께 불러옵니다. 당시 백성에게 풍성한 수확과 적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일은 모두 절실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풍요와 승리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세 절은 그 이유를 차례로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은 이 일을 이미 일어난 사건처럼 표현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등장하는 아이의 통치와 끝없는 평화를 고려하면, 이것을 예언자가 장차 이루어질 일을 확실한 사건처럼 바라보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문법만으로 예언의 모든 내용이 이미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2절의 히브리어에는 작은 차이지만 해석에 영향을 주는 본문 문제가 있습니다. 기록된 자음 형태인 로는 ‘아니다’라는 부정을 뜻하지만, 전통적으로 읽도록 전해진 형태인 로는 ‘그에게’라는 뜻입니다. 본디새김은 뒤의 읽기를 따라 민족이 늘어나고 기쁨이 커지는 긍정적인 선언으로 옮겼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기쁨의 반복도 이 읽기와 잘 어울립니다.
멍에가 부서지고 군화가 불태워진다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그들의 어깨에 놓인 막대기, 그들을 몰아붙이는 자의 몽둥이를 당신이 미디안의 날처럼 부수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9:3 · 본디새김
멍에는 짐승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도구이지만, 성경에서는 사람이나 민족이 지배와 억압 아래 놓인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막대기와 몽둥이는 강제로 노동을 시키거나 사람을 억압하는 권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그들을 몰아붙이는 자’라는 표현은 출애굽기의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출애굽기 3:7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는 고통과 억압하는 자들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억누르고 지배하던 실제적인 힘이 부서지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해방을 ‘미디안의 날’에 비유합니다.
이는 사사기 6–8장에 기록된 기드온의 승리를 가리킵니다. 당시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농작물을 빼앗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 과정은 인간이 예상하는 군사적 승리와 달랐습니다.
사사기 7:2에서 여호와야훼는 기드온의 군사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승리했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삼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미디안의 진영을 무너뜨립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압도적인 군사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무리를 통해 강한 적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압제자의 몽둥이를 부수시는 분은 백성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요란하게 내딛는 모든 군화와 피 속에서 뒹군 겉옷은 불에 타 불의 먹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9:4 · 본디새김
군화는 전쟁터를 행진하는 군대의 발걸음을 떠올리게 하고, 피 묻은 겉옷은 전투가 남긴 폭력의 흔적을 보여 줍니다. 이 장면을 전쟁에서 노획한 무기를 처리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그보다 큽니다. 전쟁의 흔적을 지닌 물건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세계가 펼쳐집니다.
미가 4:3에서는 칼을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드는 평화가 약속됩니다. 그곳에서는 전쟁 도구가 생산의 도구로 바뀝니다.
이사야 9장에서는 군화와 피 묻은 옷이 아예 불에 태워집니다.
2절에서 백성은 전리품을 나누듯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4절에 이르면 그 기쁨의 궁극적인 이유가 전쟁을 계속하여 더 많은 전리품을 얻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전쟁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3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억압의 도구를 부수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평화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 것인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5절이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모든 군대가 사라지는 자리에 한 아이가 등장한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통치권이 그의 어깨 위에 놓였고, 그의 이름을 놀라운 조언자, 강한 하나님, 영원의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 불렀다.이사야 9:5 · 본디새김
이 아이는 분명 다윗 왕조의 통치와 연결되는 인물입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다윗의 왕좌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왕을 전쟁터의 영웅으로 먼저 소개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백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하나님이 기쁨을 베푸시고 억압을 부수셨다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왕의 등장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일로 제시됩니다.
멍에를 지던 어깨에 통치권이 놓인다
3절에서는 백성의 ‘어깨’ 위에 억압자의 막대기가 놓여 있었습니다. 5절에서는 아이의 ‘어깨’ 위에 통치권이 놓입니다.
이전의 통치는 백성의 어깨에 짐을 얹었습니다. 새로운 통치는 왕 자신의 어깨에 통치의 책임을 얹습니다.
네 가지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놀라운 조언자’
왕에게 조언은 단순히 좋은 말을 하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위기를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정책을 선택하며, 무엇을 추구할지 결정하는 지혜와 연결됩니다.
앞선 이사야 7장에서 아하스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정치적 계산에 의지했습니다. 새로운 왕은 그와 대조되는 지혜로운 통치를 보여 줄 인물로 제시됩니다.
‘놀라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영리함을 넘어서는 특별한 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28:29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놀라운 계획과 뛰어난 지혜가 함께 언급됩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11:1–5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고, 여호와야훼의 영이 그 위에 머무르며,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판단하고 땅의 온유한 사람들을 위해 정직하게 결정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특히 9장의 ‘놀라운 조언자’와 11장의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능력의 영은 서로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강한 하나님’
특히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장인 이사야 10:21에서 동일한 표현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곳에서는 남은 자들이 ‘강한 하나님’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선언하며, 문맥상 여호와야훼를 가리킵니다.
‘영원의 아버지’
그러나 고대 왕권의 문맥에서 아버지라는 표현은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는 통치자의 역할을 가리킬 수도 있었습니다. 이사야 22:21에서는 한 관리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안에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백성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왕권이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원’이라는 표현은 그 보호와 통치가 쉽게 무너지거나 끝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후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왕권 문맥을 건너뛰는 읽기가 됩니다.
‘평화의 통치자’
그런데 그런 평화가 가능하려면 왕이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라가 어떤 원리로 세워지고 유지되는지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 답이 6절에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한 읽기는 이 네 호칭을 모두 아이에게 주어진 왕의 이름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아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특별히 나타내는 왕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강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인간 왕에게 사용하기에는 매우 높은 호칭입니다. 다른 읽기는 긴 이름 전체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나 선언으로 이해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인명에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처럼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문장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 역시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평화의 통치를 이루신다는 선언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히브리어 본문의 네 호칭 그대로 옮기지 않고, ‘큰 계획의 사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고대부터 이 긴 이름의 의미와 구성에 다양한 이해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는 아이의 정체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한 구절만으로 모든 신학적 문제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도 하나님이 이 왕권의 근원이시며, 새로운 왕의 통치가 하나님의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끝없는 평화를 지탱하는 것은 정의와 공의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 위에서 통치권의 확장과 평화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 나라를 이제부터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굳게 세우고 지탱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열심이 이것을 이룰 것이다.이사야 9:6 · 본디새김
‘정의와 공의’라는 두 단어는 서로 밀접하지만 완전히 같은 뜻은 아닙니다. 함께 사용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정하고 올바른 통치 질서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1장에서 이미 중요한 주제로 등장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예배와 제물을 비판하시며 정의를 찾고 억압받는 사람을 바로잡아 주며 고아와 과부를 위해 공의를 행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1:16–17).
그런데 9장에서는 그 요구가 왕권의 중심에 놓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왕은 강력한 국가를 세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이 공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주어진 왕조의 약속과도 연결됩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뒤를 이을 왕과 그의 왕국을 세우시고 그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9장은 단순히 다윗 왕조가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왕조가 어떤 성격의 통치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시편 72편 역시 왕의 통치를 설명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공정하게 재판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는 일을 강조합니다(72:2–4).
이러한 구약의 왕권 전통에서 평화는 정의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정의가 무너지면 겉으로는 질서가 유지되어도 사람들은 억압받을 수 있습니다. 공의가 사라지면 왕국은 오래 지속되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새로운 왕국은 인간이 충분히 훌륭한 왕을 찾아내기 때문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는 매우 뜻밖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환합니다.
이제 예언자는 실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앞서 그린 나라와 거의 정반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7–9장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다윗 왕조의 후계자로서 히스기야를 떠올리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특히 아하스의 통치와 대조되는 새로운 왕권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아이의 개인 이름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통치와 평화가 끝이 없다는 표현은 어느 한 왕의 실제 통치 기간만으로 충족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을 당시 다윗 왕조에 대한 기대 속에서 이해하는 읽기와, 그 기대를 넘어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이상적인 왕권을 바라보는 읽기를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4:14–16이 이사야 8:23–9:1의 빛에 관한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적용합니다. 누가복음 1:32–33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받으시고 그의 나라가 끝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이사야 9장의 왕권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기독교의 정경적 읽기는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는 먼저 다윗 왕조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정의와 평화를 세우실 왕을 약속하신다는 사실이 중심에 있습니다.
무너진 벽을 더 좋은 돌로 세우겠다는 사람들
주가 야곱에게 말을 보냈고, 그 말이 이스라엘 위에 떨어졌다.이사야 9:7 · 본디새김
이 절은 새로운 심판 선언의 시작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아이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떨어졌다’고 표현합니다.
단순히 어떤 메시지가 전달되었다는 설명보다 강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현실에 도달했고, 그 말씀이 심판의 사건으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첫 심판 선언은 북이스라엘의 중심 지역인 에브라임과 사마리아를 향합니다. 그들은 재난을 경험하면서도 교만하게 말합니다.
「벽돌이 무너졌지만 우리는 다듬은 돌로 세우겠다. 돌무화과나무들이 잘렸지만 우리는 백향목으로 바꾸겠다.」이사야 9:9 · 본디새김
얼핏 보면 훌륭한 결심처럼 들립니다.
문제는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8절에서 예언자는 이 말을 ‘교만과 오만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규정합니다.
백성은 무너진 현실을 보고도 자신들의 길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이전보다 더 강하고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이사야가 비판하는 것은 재건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회개 없는 재건입니다.
백성은 파괴된 것을 고칠 생각은 했지만, 자신들의 삶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 좋은 건물을 세우려고 했지만, 이전과 다른 백성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정의와 공의로 견고하게 됩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더 좋은 건축 재료로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10–11절에서는 실제로 그들의 자신감이 무너지는 상황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가 르신의 적대자들을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에게 맞서게 했고,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부추길 것이다.이사야 9:10 · 본디새김
동쪽에서는 아람이, 서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입을 한껏 벌려 이스라엘을 삼켰다. 이 모든 일에도 그의 분노는 물러가지 않았고, 그의 손은 여전히 뻗어 있다.이사야 9:11 · 본디새김
여기서 뻗어 있는 손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구원하려고 내미는 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손입니다. 같은 표현이 이사야 5:25에서도 등장합니다.
이후 20절까지 이어지는 심판 선언은 세 번 같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따라서 이 반복은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외부의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삼킵니다. 그러나 장의 끝에 이르면 이스라엘은 서로를 삼키게 됩니다.
위협은 바깥에서 시작하여 공동체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벽돌보다 다듬은 돌이 더 값지고 견고할 수 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목재를 제공했지만, 백향목은 귀하고 위엄 있는 건축 재료로 여겨졌습니다. 10절은 히브리어에서 대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아 읽기가 갈립니다. 르신의 적대자들이 누구를 공격하도록 강해졌는지, 이어지는 원수들이 누구의 원수인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특히 아람 왕 르신이 앞서 북이스라엘과 연합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아람이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진술의 정확한 역사적 순서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을 하나의 특정한 전쟁 장면에 모두 대응시키기보다는, 이스라엘이 주변 세력의 공격을 받으며 몰락하는 상황을 그린 심판 선언으로 읽는 것이 신중합니다. 다만 두 부분의 모든 사건을 하나의 연속된 역사적 시간표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첫 부분은 이상적인 왕권의 도래를 선포하는 시이고, 둘째 부분은 북이스라엘의 교만과 붕괴를 고발하는 심판 선언입니다. 이 둘이 한 장에 놓인 구성은 서로를 해석하는 중요한 문학적 관계를 형성하지만, 각 구절의 작성 시기와 최초 선포 상황까지 같았다고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지도자가 길을 잃으면 백성도 삼켜진다
첫 심판 선언이 외부의 공격을 보여 주었다면, 두 번째는 이스라엘 내부의 지도력을 다룹니다.
백성은 자기를 때리는 이에게 돌아서지 않았고, 만군의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았다.이사야 9:12 · 본디새김
백성은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자신들이 가던 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대신 자기들의 힘으로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한 보복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심판을 경험한 백성이 어떻게 응답했는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는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심판이 선언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에게서 머리와 꼬리, 종려나무 가지와 골풀을 하루 만에 잘라 냈다.이사야 9:13 · 본디새김
서로 정반대의 이미지를 나란히 놓습니다. 머리와 꼬리는 앞과 뒤를, 높은 종려나무 가지와 낮은 골풀은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장로와 존중받는 사람이 머리이고, 거짓을 가르치는 예언자가 꼬리다.이사야 9:14 · 본디새김
‘머리’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꼬리’는 가난한 백성이나 힘없는 사람이 아니라 거짓을 가르치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도 종교적 지도자이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공동체를 바르게 인도하기는커녕 잘못된 말을 가르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장로와 존중받는 사람이 공동체를 이끕니다. 거짓 예언자는 그 공동체의 잘못된 방향을 정당화합니다. 한쪽은 권력을 행사하고, 다른 쪽은 거짓된 말을 통해 그 권력이 만들어 내는 현실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을 이끄는 이들이 길을 잃게 했고,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들은 삼켜졌다.이사야 9:15 · 본디새김
11절에서는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삼켰습니다. 이제는 잘못된 지도자들에게 이끌리는 사람들이 삼켜집니다. 외부의 적이 나라를 파괴하는 것과 내부의 지도자가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이 같은 파괴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이사야가 보기에 거짓된 지도력은 적의 침략만큼이나 공동체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이는 ‘놀라운 조언자’로 불립니다. 그러나 실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왕은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지탱합니다. 반면 현재의 지도자들은 나라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16절에서는 심판의 범위가 백성 전체로 확대됩니다.
그러므로 주는 그 백성의 젊은이들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그 백성의 고아들과 과부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불경하고 악을 행하며, 모든 입이 파렴치한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에도 그의 분노는 물러가지 않았고, 그의 손은 여전히 뻗어 있다.이사야 9:16 · 본디새김
하나님은 다른 성경 본문에서 고아와 과부를 특별히 돌보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 10:18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22:22–24는 그들을 괴롭히는 일을 엄중하게 금지합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공동체 전체의 불경함과 악행에서 찾습니다. 이것을 모든 고아와 과부가 개인적으로 동일한 죄를 지었다는 판정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이사야가 앞에서 일관되게 강조해 온 정의의 요구와도 충돌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의와 보호를 당연하게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관계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무조건적인 면제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공동체 전체가 악에 빠진 현실 앞에서, 원래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기대할 수 있었던 사람들까지 심판의 참혹한 결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젊은이들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2절에서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기뻐했다’는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첫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으로 백성이 기뻐합니다.
여기서는 백성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심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공동체의 붕괴는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에까지 이릅니다.
악이 불타오르자 사람들이 서로를 먹기 시작한다
17절에서 이사야는 악을 불에 비유합니다.
악이 불처럼 타올랐기 때문이다. 악은 가시와 가시덤불을 삼키고, 숲의 수풀 속에서 불타올랐다. 수풀은 연기가 되어 휘감겨 솟아올랐다.이사야 9:17 · 본디새김
여기서 악은 단순히 불의 피해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악 자체가 불처럼 타오릅니다.
사람들은 흔히 악을 자신이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그 피해가 자신에게까지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불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시덤불에서 시작된 불은 숲의 수풀까지 번집니다. 불길이 커질수록 무엇이 타고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악은 한 사람의 잘못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퍼지면 공동체 전체를 휩쓸 수 있습니다.
18절은 그 불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격노로 땅이 타 버렸고, 백성은 불의 먹이처럼 되었다. 아무도 자기 형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이사야 9:18 · 본디새김
사람들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현실 자체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서로 무관한 두 사건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폭력이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나는 자리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 폭력에 가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일을 분명한 악으로 묘사합니다.
그 악의 결과가 19절에서 매우 강렬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른쪽에서 뜯어 먹고도 굶주렸고, 왼쪽에서 먹고도 배부르지 않았다. 저마다 제 팔의 살을 먹는다.이사야 9:19 · 본디새김
팔은 자기 몸에 속한 부분입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일하는 데 필요한 지체입니다. 그런데 그 팔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자기 몸을 파괴하는 모순된 행동입니다.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고, 그 둘은 함께 유다를 대적한다. 이 모든 일에도 그의 분노는 물러가지 않았고, 그의 손은 여전히 뻗어 있다.이사야 9:20 · 본디새김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모두 요셉의 아들들에게서 나온 지파입니다.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합니다. 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같은 가족의 뿌리를 가진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로를 먹습니다.
그들이 상대방을 공격하여 얻으려는 것은 힘과 생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자기 공동체의 기반이 무너집니다. 에브라임이 므낫세를 파괴하는 것은 자기 몸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과 같습니다. 므낫세가 에브라임을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두 지파는 서로를 공격하면서도 함께 유다를 대적합니다.
서로를 해치는 사람들도 다른 상대를 공격할 때는 일시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연합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공동의 적이 있다고 해서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가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정의도 공의도 아닙니다. 서로를 향한 증오와 적대감입니다.
20절의 마지막에서도 하나님의 뻗은 손이 다시 등장합니다. 심판의 선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반복은 다음 장의 10:4까지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땅이 타 버렸다’는 표현의 히브리어 네탐은 뜻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불타거나 그슬린 상태로 이해할 수도 있고, 어두워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주변의 불 이미지에 따라 ‘타 버렸다’로 읽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선택이지만, 원문의 의미가 완전히 확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절의 장면을 반드시 실제로 사람들이 서로의 살을 먹었던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극심한 굶주림과 자기 파괴적인 폭력을 겹쳐 보여 주는 시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대하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이사야는 하나님이 세우실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 준 다음,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무너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사야 9장이 보여 주는 가장 깊은 대조는 강한 왕과 약한 왕의 차이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통치와, 사람들의 짐을 벗겨 주는 통치의 차이입니다.
이사야 9장은 두 종류의 불을 보여 줍니다.
처음의 불은 전쟁의 군화와 피 묻은 옷을 태웁니다. 전쟁을 끝내는 불입니다.
마지막의 불은 악이 번지면서 사람들을 집어삼킵니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공동체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불입니다.
이 장의 끝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서로를 먹고 있습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들이 서로를 살리는 대신 파괴합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미 그와 다른 세계를 보았습니다.
전쟁의 군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어깨에서 억압의 막대기가 벗겨지며, 정의와 공의로 세워진 왕국에서 백성이 기뻐하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의 중심에는 군대를 거느리고 등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백성에게 주어진 한 아이가 있습니다.
장이 끝날 때까지 이스라엘은 아직 그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형제들은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손도 여전히 뻗어 있습니다.
그러나 9장의 첫머리에는 그 모든 폭력과 다른 미래가 이미 선포되어 있습니다.
전쟁의 군화가 불길 속에서 사라지고, 한 아이의 어깨에 통치권이 놓이는 미래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