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평화의 왕과 서로를 집어삼키는 나라

이사야 9장은 놀라운 희망으로 시작하여 끔찍한 절망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의 어깨에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이 놓입니다. 그가 세울 나라에는 끝없는 평화가 약속됩니다.

그런데 7절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백성은 거만해지고,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악은 불처럼 번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집어삼킵니다.

어떻게 한 장에 이토록 다른 두 세계가 함께 등장할 수 있을까요?

앞선 8장 마지막 절에서 고통받던 북쪽 땅에 어둠이 물러갈 것이라는 선언이 등장했습니다. 9장은 그 희망을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노래가 끝나자 예언자는 다시 이스라엘의 현실로 시선을 돌립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9장 본문 읽기 →

빛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이사야 9:1–2 본문 →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습니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땅에 살던 사람들 위로 빛이 비쳤습니다.이사야 9:1 · 두루새김

이사야는 어둠 속의 사람들에게 먼저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문장을 자세히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쪽은 어둠 속을 「걷던」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땅에 「살던」 사람입니다.

걷는 사람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살고 있는 사람은 한곳에 머뭅니다. 그러나 그가 머무는 땅 자체가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움직이든 머무르든 사람들의 처지는 다르지 않습니다. 어둠은 그들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일시적인 장애물보다 훨씬 커 보입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빛이 사람들에게 찾아옵니다.

「큰 빛을 보았습니다」라는 표현과 「빛이 비쳤습니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경험한 변화가 강조되고, 뒤에서는 그 변화를 일으킨 빛이 찾아온 일이 강조됩니다.

나는 주님께 아룁니다. 「주님께서는 이 민족을 크게 늘리시고, 그들에게 기쁨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 전쟁에서 빼앗은 물건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주님 앞에서 기뻐했습니다.」이사야 9:2 · 두루새김

앞에서는 백성에 관해 이야기하던 예언자가 이제 주님께 직접 말을 건넵니다. 기쁨의 원인은 백성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일입니다.

하나는 곡식을 거두는 기쁨입니다. 오랫동안 땅을 일구고 기다린 사람이 마침내 곡식을 거두는 장면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쟁에서 빼앗은 물건을 나누는 기쁨입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이 얻은 것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이 두 비유는 평화롭게 농사짓는 생활과 전쟁의 세계를 함께 불러옵니다. 당시 백성에게 풍성한 수확과 적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일은 모두 절실했습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기뻐합니다.

풍요와 승리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은 이 일을 이미 일어난 사건처럼 표현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등장하는 아이의 다스림과 끝없는 평화를 고려하면, 이것을 예언자가 장차 이루어질 일을 확실한 사건처럼 바라보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절의 기록된 자음 형태인 로는 「아니다」라는 부정을 뜻하지만, 전통적으로 읽도록 전해진 형태인 로는 「그에게」라는 뜻입니다. 두루새김은 뒤의 읽기를 따라 민족이 늘어나고 기쁨이 더해지는 긍정적인 선언으로 옮겼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기쁨의 반복도 이 읽기와 잘 어울립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4:14–16이 이사야 8:23–9:1의 빛에 관한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적용합니다.

멍에가 부서지고 군화가 불태워진다

이사야 9:3–4 본문 →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를 누르던 막대기, 그들을 몰아붙이던 자의 몽둥이를 부수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9:3 · 두루새김

멍에는 짐승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도구이지만, 성경에서는 사람이나 민족이 지배와 억압 아래 놓인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막대기와 몽둥이는 강제로 노동을 시키거나 사람을 억압하는 권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그들을 몰아붙이던 자」라는 표현은 출애굽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3:7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는 고통과 억압하는 자들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억누르고 지배하던 실제적인 힘이 부서지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해방을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에 비유합니다.

이는 사사기 6–8장에 기록된 기드온의 승리를 가리킵니다. 당시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농작물을 빼앗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 과정은 인간이 예상하는 군사적 승리와 달랐습니다.

사사기 7:2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의 군사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승리했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삼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미디안의 진영을 무너뜨립니다.

백성을 몰아붙이던 자의 몽둥이를 부수시는 분은 백성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데는 또 이유가 있습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을 밟던 모든 군화와 피에 젖은 겉옷은 불에 타 땔감이 될 것입니다.이사야 9:4 · 두루새김

군화는 전쟁터를 행진하는 군대의 발걸음을 떠올리게 하고, 피에 젖은 겉옷은 전투가 남긴 폭력의 흔적을 보여 줍니다. 이 장면을 전쟁에서 빼앗은 무기를 처리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그보다 큽니다. 전쟁의 흔적을 지닌 물건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세계가 펼쳐집니다.

미가 4:3에서는 칼을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드는 평화가 약속됩니다. 그곳에서는 전쟁 도구가 생산의 도구로 바뀝니다. 이사야 9장에서는 군화와 피에 젖은 겉옷이 아예 불에 태워집니다.

2절에서 백성은 전쟁에서 빼앗은 물건을 나누듯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4절에 이르면 그 기쁨의 가장 깊은 이유가 전쟁을 계속하여 더 많은 물건을 빼앗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전쟁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모든 군대가 사라지는 자리에 한 아이가 등장한다

이사야 9:5 본문 →

한 아이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이 그의 어깨에 놓였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조언자, 강한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고 불렸습니다.이사야 9:5 · 두루새김

그런데 구원의 결정적인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강력한 군대의 등장이 아닙니다.

이 아이는 분명 다윗 왕조의 다스림과 연결되는 인물입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다윗의 왕좌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왕을 전쟁터의 영웅으로 먼저 소개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백성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그 아이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하나님이 기쁨을 베푸시고 억압을 부수셨다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왕의 등장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일로 제시됩니다.

멍에를 지던 어깨에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이 놓인다

3절에서는 백성의 「어깨」를 억압자의 막대기가 누르고 있었습니다. 5절에서는 아이의 「어깨」 위에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이 놓입니다.

이전의 다스림은 백성의 어깨에 짐을 얹었습니다. 새로운 다스림은 왕 자신의 어깨에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을 얹습니다.

네 가지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놀라운 조언자」

왕에게 조언은 단순히 좋은 말을 하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위기를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정책을 선택하며, 무엇을 추구할지 결정하는 지혜와 연결됩니다.

앞선 이사야 7장에서 아하스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정치적 계산에 의지했습니다. 새로운 왕은 그와 대조되는 지혜로운 다스림을 보여 줄 인물로 제시됩니다.

「놀라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영리함을 넘어서는 특별한 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28:29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뛰어난 지혜가 함께 언급됩니다.

「강한 하나님」

한 읽기는 이 네 호칭을 모두 아이에게 주어진 왕의 이름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아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특별히 나타내는 왕으로 묘사됩니다. 다른 읽기는 긴 이름 전체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나 선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도 하나님이 이 왕의 권한의 근원이시며, 새로운 왕의 다스림이 하나님의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영원한 아버지」

고대 왕의 다스림을 말하는 문맥에서 아버지라는 표현은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는 통치자의 역할을 가리킬 수도 있었습니다. 이사야 22:21에서는 한 관리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안에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백성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왕의 다스림이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이라는 표현은 그 보호와 다스림이 쉽게 무너지거나 끝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후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왕의 다스림을 말하는 본문의 문맥을 건너뛰는 읽기가 됩니다.

「평화의 통치자」

마지막 호칭은 앞선 모든 약속을 하나로 묶습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뿐 아니라 삶의 질서와 관계가 온전하게 유지되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화가 가능하려면 왕이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라가 어떤 원리로 세워지고 유지되는지가 달라져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강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인간 왕에게 사용하기에는 매우 높은 호칭입니다. 이사야 10:21에서는 남은 사람들이 강한 하나님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선언하며, 문맥상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인명에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처럼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문장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 역시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평화의 다스림을 이루신다는 선언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아이의 정체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한 구절만으로 모든 신학적 문제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11:1–5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고,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무르며,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의롭게 판단하고 땅의 온유한 사람들을 위해 정직하게 결정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특히 9장의 「놀라운 조언자」와 11장의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능력의 영은 서로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끝없는 평화를 지탱하는 것은 정의와 의로움이다

이사야 9:6 본문 →

그의 다스림은 끝없이 넓어지고 평화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왕좌에서 그 나라를 이제부터 영원히 정의와 의로움으로 굳게 세우고 지탱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열정을 다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이사야 9:6 · 두루새김

「정의」는 올바른 재판과 공정한 질서, 각 사람에게 마땅한 권리가 보장되는 일을 포함합니다. 「의로움」은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 올바름이 실현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두 단어는 서로 밀접하지만 완전히 같은 뜻은 아닙니다. 함께 사용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정하고 올바른 다스림의 질서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1장에서 이미 중요한 주제로 등장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예배와 제물을 비판하시며 정의를 찾고 억압받는 사람을 바로잡아 주며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위해 의로운 일을 행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1:16–17).

그런데 9장에서는 그 요구가 왕의 다스림의 중심에 놓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왕은 강력한 국가를 세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이 공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주어진 왕조의 약속과도 연결됩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뒤를 이을 왕과 그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 왕위를 굳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9장은 단순히 다윗 왕조가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왕조가 어떤 성격의 다스림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시편 72편 역시 왕의 다스림을 설명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공정하게 재판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는 일을 강조합니다(72:2–4). 이러한 구약의 왕권 전통에서 평화는 정의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정의가 무너지면 겉으로는 질서가 유지되어도 사람들은 억압받을 수 있습니다. 의로움이 사라지면 나라는 오래 지속되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이 왕은 이사야 시대의 특정 왕을 가리킵니까, 아니면 장차 올 이상적인 왕을 가리킵니까?

이사야 7–9장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다윗 왕조의 후계자로서 히스기야를 떠올리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특히 아하스의 다스림과 대조되는 새로운 왕의 다스림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아이의 개인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더욱이 다스림과 평화가 끝이 없다는 표현은 어느 한 왕이 실제로 다스린 기간만으로 충족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을 당시 다윗 왕조에 대한 기대 속에서 이해하는 읽기와, 그 기대를 넘어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이상적인 왕의 다스림을 바라보는 읽기를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아이의 개인적인 능력에 두지 않습니다.

새로운 나라는 인간이 충분히 훌륭한 왕을 찾아내기 때문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1:32–33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받고 그의 나라가 끝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이사야 9장의 왕의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기독교에서 성경 전체를 함께 읽는 방식은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는 먼저 다윗 왕조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정의와 평화를 세우실 왕을 약속하신다는 사실이 중심에 있습니다.

무너진 벽을 더 좋은 돌로 세우겠다는 사람들

이사야 9:7–11 본문 →

주께서 야곱에게 말을 보내셨고, 그 말이 이스라엘에 닥쳤습니다.이사야 9:7 · 두루새김

이 절은 새로운 심판 선언의 시작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아이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을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말이 이스라엘에 「닥쳤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단순히 어떤 말이 전달되었다는 설명보다 강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현실에 도달했고, 그 말씀이 심판의 사건으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첫 심판 선언은 북이스라엘의 중심 지역인 에브라임과 사마리아를 향합니다. 그들은 재난을 경험하면서도 거만하게 말합니다.

「벽돌이 무너졌지만, 우리는 다듬은 돌로 다시 세우겠다. 돌무화과나무들이 잘렸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백향목으로 바꾸겠다.」이사야 9:9 · 두루새김

얼핏 보면 훌륭한 결심처럼 들립니다.

문제는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8절에서 예언자는 이 말을 「거만하고 뽐내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규정합니다.

백성은 무너진 현실을 보고도 자신들의 길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이전보다 더 강하고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나오는 12절과 연결됩니다. 백성은 「만군의 여호와야훼를 찾지도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비판하는 것은 재건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회개 없는 재건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정의와 의로움으로 굳게 세워집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더 좋은 건축 재료로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르신의 적들을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에 맞서게 하셨고,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부추기셨습니다.이사야 9:10 · 두루새김
동쪽의 아람과 서쪽의 블레셋 사람들이 입을 한껏 벌려 이스라엘을 삼켰습니다. 이 모든 일에도 그분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그분의 손은 여전히 뻗어 있습니다.이사야 9:11 · 두루새김

여기서 뻗어 있는 손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구원하려고 내미는 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손입니다. 같은 표현이 이사야 5:25에서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 반복은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외부의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삼킵니다. 그러나 장의 끝에 이르면 이스라엘은 서로를 삼키게 됩니다.

위협은 바깥에서 시작하여 공동체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벽돌보다 다듬은 돌이 더 값지고 튼튼할 수 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목재를 제공했지만, 백향목은 귀하고 위엄 있는 건축 재료로 여겨졌습니다. 10절은 히브리어에서 대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아 읽기가 갈립니다. 르신의 적들이 누구를 공격하도록 강해졌는지, 이어지는 원수들이 누구의 원수인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두루새김은 이들이 이스라엘에 맞서게 되었으며, 이어지는 원수들도 이스라엘의 원수들이라고 옮겼습니다. 특히 아람 왕 르신이 앞서 북이스라엘과 연합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아람이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진술의 정확한 역사적 순서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을 하나의 특정한 전쟁 장면에 모두 대응시키기보다는, 이스라엘이 주변 세력의 공격을 받으며 몰락하는 상황을 그린 심판 선언으로 읽는 것이 신중합니다.

지도자가 길을 잃으면 백성도 삼켜진다

이사야 9:12–16 본문 →

첫 심판 선언이 외부의 공격을 보여 주었다면, 두 번째는 이스라엘 내부의 지도력을 다룹니다.

백성은 자신들을 치신 여호와야훼께 돌아오지 않았고, 만군의 여호와야훼를 찾지도 않았습니다.이사야 9:12 · 두루새김

백성은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자신들이 가던 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대신 자기들의 힘으로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한 보복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심판을 경험한 백성이 어떻게 응답했는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하루 만에 이스라엘의 머리와 꼬리, 종려나무 가지와 골풀을 잘라 내셨습니다.이사야 9:13 · 두루새김

머리와 꼬리는 앞과 뒤를, 높은 종려나무 가지와 낮은 골풀은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14절에서 직접 설명합니다.

장로와 존중받는 사람이 머리이고, 거짓을 가르치는 예언자가 꼬리입니다.이사야 9:14 · 두루새김

예언자도 종교적 지도자이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공동체를 바르게 이끌기는커녕 잘못된 말을 가르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여기서 정치적 지도력과 종교적 지도력이 함께 실패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장로와 존중받는 사람이 공동체를 이끕니다. 거짓 예언자는 그 공동체의 잘못된 방향을 옳은 것처럼 말합니다. 한쪽은 권력을 행사하고, 다른 쪽은 거짓된 말을 통해 그 권력이 만들어 내는 현실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을 이끄는 이들이 백성을 헤매게 했고, 그들에게 이끌리던 사람들은 삼켜졌습니다.이사야 9:15 · 두루새김

외부의 적이 나라를 파괴하는 것과 내부의 지도자가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이 같은 파괴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이사야가 보기에 거짓된 지도력은 적의 침략만큼이나 공동체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이는 「놀라운 조언자」로 불립니다. 그러나 실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헤매게 합니다.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의 젊은이들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며, 고아들과 남편을 잃은 여자들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거스르며 악을 행하고, 입마다 부끄러운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에도 그분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그분의 손은 여전히 뻗어 있습니다.이사야 9:16 · 두루새김

신명기 10:18은 하나님께서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22:22–24는 그들을 괴롭히는 일을 엄중하게 금지합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을 거스르며 악을 행하는 데서 찾습니다. 이것을 모든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이 개인적으로 동일한 죄를 지었다는 판정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읽기는 이사야가 앞에서 일관되게 강조해 온 정의의 요구와도 충돌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의와 보호를 당연하게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관계가 하나님의 심판을 무조건 피하게 해 주지는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공동체 전체가 악에 빠진 현실 앞에서, 원래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기대할 수 있었던 사람들까지 심판의 참혹한 결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젊은이들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2절에서 백성이 주님 앞에서 「기뻐했습니다」라는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심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공동체의 붕괴는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에까지 이릅니다.

악이 불타오르자 사람들이 서로를 먹기 시작한다

이사야 9:17–20 본문 →

17절에서 이사야는 악을 불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심판이 이어지는 것은 악이 불처럼 타올랐기 때문입니다. 가시와 가시덤불을 삼키고 빽빽한 숲까지 불태워,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높이 솟아올랐습니다.이사야 9:17 · 두루새김

여기서 악은 단순히 불의 피해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악 자체가 불처럼 타오릅니다.

사람들은 흔히 악을 자신이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그 피해가 자신에게까지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불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시덤불에서 시작된 불은 빽빽한 숲까지 번집니다. 불길이 커질수록 무엇이 타고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악은 한 사람의 잘못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퍼지면 공동체 전체를 휩쓸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거센 분노로 땅이 타 버렸고, 백성은 불의 먹이처럼 되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형제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이사야 9:18 · 두루새김

사람들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현실 자체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서로 무관한 두 사건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폭력이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나는 자리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 폭력에 가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일을 분명한 악으로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오른쪽에서 뜯어 먹고도 굶주리고, 왼쪽에서 먹고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 팔의 살을 먹습니다.이사야 9:19 · 두루새김

팔은 자기 몸에 속한 부분입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일하는 데 필요한 몸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그 팔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자기 몸을 파괴하는 모순된 행동입니다.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어 치웁니다. 둘은 함께 유다를 대적합니다. 이 모든 일에도 그분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그분의 손은 여전히 뻗어 있습니다.이사야 9:20 · 두루새김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모두 요셉의 아들들에게서 나온 지파입니다.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합니다. 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같은 가족의 뿌리를 가진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공격하고 약탈하며 파괴하는 일을 먹는 행위로 표현한 것입니다. 에브라임이 므낫세를 파괴하는 것은 자기 몸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과 같습니다. 므낫세가 에브라임을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두 지파는 서로를 공격하면서도 함께 유다를 대적합니다.

서로를 해치는 사람들도 다른 상대를 공격할 때는 일시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연합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공동의 적이 있다고 해서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가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민족을 늘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파괴합니다.

처음에는 군화와 피에 젖은 겉옷이 불에 태워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 자신이 불의 먹이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평화에서는 전쟁의 물건이 불타지만, 악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사람이 불탑니다.

20절의 마지막에서도 하나님의 뻗은 손이 다시 등장합니다. 심판의 선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반복은 다음 장의 10:4까지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땅이 타 버렸고」에 쓰인 히브리어 네탐은 뜻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불타거나 그슬린 상태로 이해할 수도 있고, 어두워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주변의 불 이미지에 따라 「타 버렸고」로 옮겼습니다. 자연스러운 선택이지만, 원문의 의미가 완전히 확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절의 장면을 반드시 실제로 사람들이 서로의 살을 먹었던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극심한 굶주림과 스스로를 파괴하는 폭력을 겹쳐 보여 주는 시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왜 이사야는 희망을 먼저 말하고 심판을 뒤에 놓았을까?

이사야 9:1–20 본문 →

그 답은 첫 부분과 둘째 부분을 나란히 읽을 때 드러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세우실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 준 다음,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무너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는 단순히 현재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한 그림이 아닙니다. 현재의 나라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지를 비추는 빛이기도 합니다.

이 장의 끝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서로를 먹어 치우고 있습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들이 서로를 살리는 대신 파괴합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미 그와 다른 세계를 보았습니다.

전쟁의 군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어깨에서 억압의 막대기가 벗겨지며, 정의와 의로움으로 세워진 나라에서 백성이 기뻐하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의 중심에는 군대를 거느리고 등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백성에게 주어진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사야 9장이 보여 주는 가장 깊은 대조는 강한 왕과 약한 왕의 차이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다스림과, 사람들의 짐을 벗겨 주는 다스림의 차이입니다.

장이 끝날 때까지 이스라엘은 아직 그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형제들은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손도 여전히 뻗어 있습니다.

그러나 9장의 첫머리에는 그 모든 폭력과 다른 미래가 이미 선포되어 있습니다.

전쟁의 군화가 불길 속에서 사라지고, 한 아이의 어깨에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이 놓이는 미래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