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1–12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도끼의 자랑
이사야 10장에는 이상한 도끼가 등장합니다.
그 도끼는 나무를 쓰러뜨린 뒤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자랑합니다. 자기 힘으로 숲을 정복했다고 말하고, 자신을 휘두르는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려 합니다.
당시 아시리아는 여러 나라를 정복하며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그 군사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시리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인데, 어째서 하나님께 심판받습니까? 하나님이 아시리아를 보내셨다면, 아시리아가 저지른 폭력도 모두 정당합니까?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그 안에서 행동하는 인간과 제국의 책임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누가 더 강한가가 아닙니다. 누가 자기에게 주어진 힘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가입니다.
불의를 법으로 만드는 사람들
이 장은 짧지만 무서운 고발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 악한 법을 만들고, 사람들을 짓누르는 규정을 써 놓는 자들아!」이사야 10:1 · 두루새김
보통 불의한 사람을 생각하면 법을 어기는 사람을 먼저 떠올립니다. 남의 재물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여기서 고발하는 사람들은 법을 어기는 자들이 아니라 법을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법 밖에서 몰래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권한을 이용하여 불의를 법과 규정으로 써 놓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일이 개인적인 범죄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가 따라야 할 제도로 자리 잡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법을 만드는 행위와 사람들을 짓누르는 규정을 기록하는 행위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되는 기록의 이미지가 악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말은 기록되는 순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법이 되면 더 많은 사람에게 적용되고,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까지 움직입니다.
이사야가 고발하는 불의는 한 사람의 탐욕이 아니라 탐욕을 제도로 만든 권력입니다.
「힘없는 사람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게 하고, 내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빼앗는 자들아!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먹잇감으로 삼고, 고아들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들아!」이사야 10:2 · 두루새김
이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나 경제적 기반을 잃은 여자들과 고아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기 쉬웠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단지 충분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권리가 적극적으로 빼앗겼다고 말합니다.
재판이 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을 밀어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원문에서는 전쟁에서 이긴 군대가 적에게서 빼앗아 오는 전리품과 약탈의 말로 이 모습을 그립니다. 이사야는 자기 백성 가운데 있는 남편을 잃은 여자들과 고아들이 마치 적국의 재산인 것처럼 취급된다고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들은 자기 백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고발이 아닙니다. 이사야 1:23에서도 지도자들이 뇌물을 사랑하고 고아를 위해 정의를 행하지 않으며 남편을 잃은 여자들의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백성에게 요구하셨던 정의를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십니다.
전리품을 모으던 사람들이 전리품이 된다
3절에서는 말투가 달라집니다.
「벌을 받는 날에, 멀리서 멸망이 닥쳐올 때 너희는 무엇을 하겠느냐? 도움을 얻으러 누구에게 달아나겠느냐? 너희 재물을 어디에 남겨 두겠느냐?」이사야 10:3 · 두루새김
이 질문들은 그들이 평소 의지하던 힘을 하나씩 무너뜨립니다. 법을 만들던 사람들은 자신의 권한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좌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군대가 밀려오면 그 법은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재판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밀어내던 사람들은 이제 도움을 받을 곳을 찾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던 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재물을 지킬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불의하게 얻은 재물이 영원히 안전을 보장하리라는 믿음을 깨뜨립니다.
「포로들 사이에 웅크리고, 죽임당한 자들 사이에 쓰러지는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일에도 그분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그분의 손은 여전히 뻗어 있습니다.이사야 10:4 · 두루새김
그들이 빼앗던 사람들의 처지가 이제 그들 자신의 처지가 됩니다.
4절 끝에는 앞 장에서 반복되었던 선언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문장은 9장에서 이어진 일련의 심판 선언을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심판이 왜 끝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듯, 바로 다음 절에서 아시리아가 등장합니다.
이제 이사야는 법을 통해 약자를 약탈하는 권력에서, 군대를 통해 나라들을 약탈하는 권력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시리아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 내 분노의 몽둥이인 아시리아! 그 군대의 손에 들린 막대기는 나의 격한 분노다.」이사야 10:5 · 두루새김
아시리아는 단순히 하나님이 막지 않으신 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분노를 나타내는 도구로 불립니다.
「나는 아시리아를 나를 거스르는 민족에게 보낸다. 내 분노를 산 백성에게서 물건과 재물을 빼앗고, 그 백성을 길바닥의 진흙처럼 짓밟으라고 명령한다.」이사야 10:6 · 두루새김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아시리아보다 군사력이 약해서 패배하는 것만으로 사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른 백성이 심판받는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나를 거스르는 민족」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문맥상 이스라엘과 유다를 포함하는 언약 백성의 불신앙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의 뜻과 생각은 다르다. 그는 마음속으로 많은 민족을 멸망시키고 없애 버리려 한다.」이사야 10:7 · 두루새김
「그러나」.
이 한 단어가 하나님의 목적과 아시리아의 목적을 갈라놓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이루기 위해 아시리아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아시리아의 욕망은 같은 사건 속에서 움직이지만,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시리아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아시리아의 폭력을 모두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리아가 하나님의 심판에 쓰였다는 사실이 그 제국의 교만과 탐욕에 대한 책임을 없애 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동시에 인간과 제국은 자신이 품은 의도와 행사한 권력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철학적으로 어떻게 양립하는지를 완전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 문제의 모든 원리를 제시하기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두 관점을 나란히 놓습니다.
모든 나라를 똑같이 보는 제국의 눈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지휘관들은 모두 왕들이 아니냐?』」이사야 10:8 · 두루새김
이것은 아시리아의 압도적인 힘을 표현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왕이라고 불리는 수준의 권력도 아시리아 제국에서는 왕 아래의 지휘관이 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갈노도 갈그미스와 같지 않으냐? 하맛도 아르팟과 같지 않으냐? 사마리아도 다마스쿠스와 같지 않으냐?』」이사야 10:9 · 두루새김
이 지명들은 대부분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정치적 거점들입니다. 갈그미스는 유프라테스강 주변의 중요한 도시였고, 하맛과 아르팟은 시리아 지역의 주요 도시국가와 연결됩니다. 다마스쿠스는 아람의 수도였으며,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는 나라들을 하나씩 비교하면서 말합니다. 저 나라도 무너졌다. 이 나라도 무너졌다. 그렇다면 다음 나라도 무너질 것이다.
각 나라가 가진 고유한 역사와 정체성은 그의 눈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정복한 나라들과 아직 정복하지 않은 나라들의 차이뿐입니다.
10–11절에서는 이 논리가 종교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나는 우상을 섬기는 왕국들까지 내 손에 넣었다. 그 나라들이 새겨 만든 우상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것들보다 더 대단했는데도 말이다.』」이사야 10:10 · 두루새김
「『내가 사마리아와 그 우상들에게 한 것처럼, 예루살렘과 그 새긴 우상들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이사야 10:11 · 두루새김
그는 예루살렘의 하나님도 자신이 정복한 나라들의 신들과 같은 범주에 넣습니다. 이스라엘이 고백하는 여호와야훼의 정체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적 상징과 군사적 승리만을 기준으로 모든 나라를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논리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한 민족의 영토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하시는 지역 신이 아니십니다. 아시리아의 군사력조차 자신의 심판을 위해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아시리아 왕은 자신이 여러 나라의 신들을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관점에서는 그 왕 자신도 여호와야훼의 주권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나라를 정복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도끼가 자신을 휘두르는 분에게 자랑하다
12절은 아시리아의 권력이 무한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주께서 선언하십니다. 「내가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모두 마치면, 아시리아 왕의 거만한 마음이 맺은 열매와 그의 뽐내는 눈길을 벌하겠다.」이사야 10:12 · 두루새김
아시리아가 하나님의 심판에 쓰이지만, 그 세력이 영원히 심판의 도구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정해진 역할을 넘어 자신을 절대적인 권력으로 생각하는 순간, 아시리아는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시리아의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한 마음의 태도까지 판단하십니다. 13–14절은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보여 줍니다.
그 왕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해냈다. 내게 판단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민족들의 국경을 없애고, 그들이 모아 둔 재물을 빼앗았으며, 용사처럼 주민들을 굴복시켰다.」이사야 10:13 · 두루새김
이 말에서 반복되는 것은 「나는」과 「내」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온전히 자기 능력의 결과로 해석합니다.
그가 위대함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한 일들입니다.
이사야는 그의 자랑을 반박하기 위해 아시리아의 군사적 성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 자신의 말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그 성공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가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더 효과적으로 나라를 무너뜨리는 능력입니다.
그가 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마음대로 바꾸는 권력입니다.
「나는 새 둥지를 찾아내듯 민족들의 재물을 손에 넣었다. 버려진 알을 주워 모으듯 온 땅을 모아들였다. 날개를 파닥이는 자도, 입을 벌리는 자도, 지저귀는 자도 없었다.」이사야 10:14 · 두루새김
둥지에서 알을 가져간다는 것은 그 둥지에 속한 생명과 미래를 빼앗는 일입니다. 왕의 눈에 전리품은 버려진 알처럼 보이지만, 정복당한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일구어 온 삶의 기반일 수 있습니다.
왕은 그 침묵을 자기 힘의 증거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침묵이 정당한 통치의 증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으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없애 놓고 그것을 자랑하는 왕의 오만함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15절에서 하나님의 반문이 등장합니다.
도끼가 자기를 쓰는 사람에게 뽐내겠느냐? 톱이 자기를 움직이는 사람보다 스스로를 높이겠느냐? 마치 몽둥이가 자기를 들어 올리는 사람들을 휘두르고, 나무 막대기가 오히려 사람을 들어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이사야 10:15 · 두루새김
이것은 의도적으로 뒤집힌 장면입니다. 도구가 자신을 사용하는 사람을 지배하려 합니다. 이사야는 아시리아 왕이 바로 그런 모순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더 큰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도끼 비유는 인간이 도구에 불과하므로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이라고 착각하는 인간의 교만을 고발합니다.
아시리아 왕의 죄는 힘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힘이 최종적인 권위라고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빛이 아시리아를 태우는 불이 된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아시리아의 건장한 사람들을 야위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 화려함 아래에서는 불길이 일어나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이사야 10:16 · 두루새김
「건장한 사람들」은 제국의 강하고 풍요로운 세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야위게」 만드십니다. 「화려함」 역시 왕이 자랑하던 위엄과 부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을 지탱하던 바탕이 불타기 시작합니다.
이사야는 아시리아의 쇠퇴를 단순히 다른 제국에게 패배하는 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힘과 영광 자체가 무너지는 사건으로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빛께서는 불이 되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께서는 불꽃이 되셔서, 아시리아의 가시덤불과 가시를 하루 만에 태워 삼키실 것입니다.이사야 10:17 · 두루새김
빛은 앞서 어둠 속의 백성을 비추는 구원의 이미지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빛이 불이 됩니다. 같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는 빛이시지만, 교만한 아시리아에게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꽃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근거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화려한 숲과 기름진 밭을 남김없이 없애 버릴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쇠약해지듯 아시리아는 쇠약해질 것입니다.이사야 10:18 · 두루새김
울창한 숲은 강력한 제국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이미지입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고, 높이 솟은 가지들이 하늘을 가립니다. 멀리서 보면 숲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힘처럼 보입니다.
18절의 「남김없이 없애 버릴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파괴의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겉으로 강해 보이던 제국이 병든 사람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숲에 남은 나무는 수가 적어, 아이 하나가 그 수를 적을 것입니다.이사야 10:19 · 두루새김
여기서 「적을 것입니다」라는 말은 실제로 글을 쓴다는 뜻입니다. 처음 1절에서는 권력자들이 사람들을 짓누르는 규정을 써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한 아이가 남은 나무의 수를 적습니다.
이 두 장면을 반드시 의도적인 단어 대응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같은 장의 처음과 중간에서 기록하는 행위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처음에는 권력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기 위해 기록했습니다. 이제는 제국의 남은 힘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아이 하나가 그 수를 적을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제국의 위대함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하나님이 아시리아를 심판하시는 일이 끝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남은 자는 무엇을 버리고 어디로 돌아오는가
그날에는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들, 곧 야곱 집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더는 자기들을 치던 아시리아를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인 여호와야훼를 참으로 의지할 것입니다.이사야 10:20 · 두루새김
그동안 아시리아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협하는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아하스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로 그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열왕기하 16:7–9). 자신을 때릴 수도 있는 강대국에게 의지하여 다른 위협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입니다.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과 의지한다는 말이 대조를 이룹니다. 따라서 변화는 단순히 외교 정책을 바꾸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지탱해 줄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형식적인 신앙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누구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가를 문제 삼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궁극적인 안전을 아시리아의 군사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본문이 다른 나라와 협력하거나 현실적인 도움을 받는 일 자체를 모두 거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린 채 강대국의 힘을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켜 줄 안전의 근거로 삼는 태도입니다.
문제는 도움을 받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느냐입니다.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이 다시 울린다
남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야곱 집안의 남은 사람들이 강한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이사야 10:21 · 두루새김
히브리어로 「남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입니다」는 셰아르 야슈브(שְׁאָר)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7:3에 등장했던 이사야의 아들 이름 스알야숩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 이름에는 심판과 희망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돌아올 것입니다」라는 말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20절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한다고 말한 것과 연결되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신앙의 방향 전환이 분명히 포함됩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살아남고 회복된다는 의미도 제외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앞선 9:5에서 새 왕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왕의 다스림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돌아와야 할 대상인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 동일한 표현은 9장의 왕에 대한 약속과 10장의 회복 선언을 서로 연결합니다. 백성의 미래는 인간 왕의 힘 자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왕의 권한도, 남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회복도 결국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남은 자만 돌아온다
그런데 22절은 그 희망을 쉽게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만들지 못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당신의 백성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도, 그 가운데 남은 사람들만 돌아올 것입니다. 정해진 멸망이 의로운 심판의 홍수처럼 밀려올 것입니다.이사야 10:22 · 두루새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도」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22:17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바로 그 표현을 심판 선언에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후손이 많아지리라는 약속이 이스라엘의 불의를 옳다고 할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약속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심판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심판이 닥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남은 사람들」을 단순히 원래부터 특별히 믿음이 깊었던 소수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들이 어떻게 남게 되었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문맥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 가운데 남은 사람들을 두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정해진 멸망이 의로운 심판의 홍수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멸망과 의로운 심판이 한 문장에 함께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멸망이 정의와 무관한 폭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 속에서 일어난 모든 파괴를 곧바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장에서 아시리아의 잔혹함과 교만이 심판받는다는 사실이 그 구별을 요구합니다. 23절은 그 심판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통이 자동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선 심판 선언에서 백성은 고통을 겪고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남은 사람들의 희망은 심판을 부정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아시리아가 몽둥이를 들지만, 하나님은 다른 막대기를 드신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온에 사는 내 백성아, 아시리아가 너를 몽둥이로 때리고, 이집트가 하던 것처럼 너를 향해 막대기를 들어 올릴 것이다. 그래도 아시리아를 두려워하지 마라.」이사야 10:24 · 두루새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위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위험이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결정할 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고 억눌렀던 나라입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에서 이집트의 권력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했습니다. 이사야는 이제 아시리아가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출애굽의 또 다른 장면이 등장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치셨듯이, 아시리아를 치려고 채찍을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그분의 막대기는 바다 위에 있을 것이며, 그분께서는 이집트에서 하셨던 것처럼 그 막대기를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이사야 10:26 · 두루새김
사사기 7:25에서는 미디안의 지도자 오렙이 오렙 바위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이 기록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이스라엘을 통해 미디안의 억압을 무너뜨리신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 바다 위로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가로막던 바다는 갈라지고, 뒤쫓던 이집트의 군대는 무너집니다. 이사야는 두 사건을 불러내어 아시리아의 미래를 설명합니다.
24절에서는 아시리아가 막대기를 들어 이스라엘을 때립니다.
26절에서는 하나님이 막대기를 들어 아시리아를 치십니다.
앞에서는 제국이 억압의 도구를 쥐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그 도구를 드십니다.
아시리아의 몽둥이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온의 백성 여러분, 그날 아시리아가 지운 짐이 여러분의 어깨에서 벗겨지고, 그가 씌운 멍에가 여러분의 목에서 벗겨질 것입니다. 목이 굵어져 멍에가 부서질 것입니다.이사야 10:27 · 두루새김
여기서 이사야는 구원을 막연히 자유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이 마침내 그 짐을 내려놓는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본문의 흐름에서 확실한 것은 멍에가 부서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 직후, 이사야는 독자를 매우 불안한 장면으로 데려갑니다. 아시리아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샤멘은 기름이나 살진 상태와 연결되는 말입니다. 두루새김은 목이 굵어지는 것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목이 굵어져 더 이상 멍에가 맞지 않게 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면 이 단어를 기름과 연결하여 기름 부음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름 부음을 받는 인물이 분명히 나와 있지 않으므로, 이것을 특정한 왕이나 메시아의 기름 부음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가오는 군대의 발걸음
아시리아 군대가 아얏에 왔고 미그론을 지났습니다. 믹마스에 장비를 맡길 것입니다.이사야 10:28 · 두루새김
이 대목에서는 예언의 분위기가 다시 바뀝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아시리아를 심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시리아의 군대가 실제로 예루살렘을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지명들이 빠르게 이어집니다.
아얏, 미그론, 믹마스, 게바, 라마, 사울의 기브아, 갈림, 라이샤, 아나돗, 마드메나, 게빔, 놉. 이 지명들은 대체로 예루살렘 북쪽에서 수도를 향해 다가오는 군대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왔고」
「지났습니다」
「맡길 것입니다」
「넘었습니다」
동작들이 짧게 이어집니다. 독자는 군대의 이동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적이 점점 가까워지는 소식을 연달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넘었습니다. 군인들이 말합니다. 「게바가 우리의 숙소다.」 라마 사람들은 떨었고, 사울의 기브아 사람들은 달아났습니다.이사야 10:29 · 두루새김
같은 사건이 정반대의 경험으로 나타납니다. 침략자에게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평범한 군사 작전입니다. 그 길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재난입니다.
딸 갈림아, 목소리를 높여 외쳐라! 라이샤야, 귀를 기울여라! 불쌍한 아나돗아!이사야 10:30 · 두루새김
이사야는 전쟁을 왕과 군대의 이야기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작은 마을들의 두려움과 도망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시리아 왕에게 이 지역들은 정복할 땅의 일부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눈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마을들입니다. 각각 사람들이 살던 곳이며, 두려움 속에서 외치는 공동체입니다.
왕은 나라들의 이름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자랑했습니다.
이사야는 마을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침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줍니다.
마드메나 사람들은 달아났고 게빔 주민들은 몸을 피했습니다. 마침내 32절에서 군대는 놉에 이릅니다.
바로 오늘 그 군대가 놉에 멈춰 서서, 딸 시온의 산, 곧 예루살렘의 언덕을 향해 손을 휘둘러 위협할 것입니다.이사야 10:32 · 두루새김
아시리아는 자기 손의 힘을 자랑했습니다. 그 손으로 여러 나라의 재물을 모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시온을 향해 손을 휘둘러 위협합니다.
그런데 아시리아의 손이 시온을 향해 올라간 바로 다음 순간, 하나님의 행동이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모든 지명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을 근거로 아시리아 군대가 실제로 이동한 길을 세세하게 완벽히 되짚기는 어렵습니다. 「딸 갈림」은 마을을 여성에 빗대어 표현한 말입니다. 놉은 예루살렘 가까운 곳과 연결되는 지명입니다. 그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구절에서는 예루살렘을 위협할 만큼 가까이 다가온 장소로 묘사됩니다. 두루새김은 이 행동을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의 몸짓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거만하게 도전하는 모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숲을 베시는 분은 누구인가
보십시오.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무서운 힘으로 가지들을 쳐 내십니다. 키 높이 자란 나무들은 잘리고, 높이 솟은 나무들은 낮아질 것입니다.이사야 10:33 · 두루새김
그분께서 쇠도끼로 빽빽한 숲을 베어 내실 것이며, 레바논은 위엄 있는 분께 쓰러질 것입니다.이사야 10:34 · 두루새김
이제 등장하는 것은 아시리아의 움직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아시리아를 도끼와 톱에 비유하셨습니다. 그 도끼는 자기를 사용하는 분에게 뽐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숲을 베어 내십니다.
도끼라고 자랑하던 제국이 어느새 베어져야 할 숲이 되었습니다.
아시리아 왕은 자신이 민족들의 국경을 없애고 나라들의 재물을 모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아무리 높이 솟아도 결국 꺾일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레바논」은 높고 울창한 숲, 특히 크고 웅장한 백향목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2:12–17에서도 하나님이 높고 교만한 것들을 낮추시는 심판이 선포되며, 레바논의 백향목이 그 대상 가운데 등장합니다. 바로 앞에서 아시리아의 군대가 나아가 왔으므로, 이 숲을 아시리아의 군사력과 제국의 위엄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마지막 두 절은 숲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시리아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문맥상 설득력이 있지만, 높은 권력과 교만이 무너진다는 더 넓은 뜻도 함께 담길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8–19장과 이사야 36–37장에는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위협하다가 물러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 이 장의 예언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10:28–34의 군대 이동 장면을 그 기록의 모든 세부 사항과 하나하나 맞추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11:1에서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나온다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물론 10장의 숲과 11장의 이새의 그루터기를 반드시 같은 나무의 연속된 장면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10장의 중심은 교만한 권력에 대한 심판이고, 11장의 그루터기는 다윗 왕조의 새로운 미래를 가리킵니다. 높이 솟아 자신을 자랑하는 숲은 쓰러집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끝난 듯한 그루터기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사야 10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잘못도 심판하시고, 자신의 목적에 쓰인 제국의 교만도 심판하십니다. 그분의 정의는 어느 한 집단의 이익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의지하던 잘못된 힘을 무너뜨리시면서, 그들이 참으로 의지해야 할 분을 다시 알게 하십니다.
이사야 10장을 오늘의 현실에 적용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장을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심판하는 도구로만 사용하는 일입니다. 이사야는 강대국의 교만을 비판하지만, 그에 앞서 자기 백성 안의 불의를 고발했습니다.
아시리아 군대는 수많은 마을을 지나 예루살렘 가까이까지 왔습니다. 마을들은 떨고 주민들은 도망쳤습니다. 군대는 시온을 향해 손을 휘둘러 위협합니다.
그러나 그 손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간 순간, 이사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높은 나무들이 잘리고, 울창한 숲이 쓰러집니다.
왕은 자신이 도끼를 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보여 주는 마지막 광경에서 숲을 베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손은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이 역사의 마지막 말을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이사야 10장은 그 사실을, 쓰러지는 거대한 숲의 모습으로 남겨 놓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