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내 백성 이집트」라고 부르시는 하나님

이사야 19장을 읽다가 마지막 절에 이르면, 독자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았던 나라입니다.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다까지 위협했던 제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 나라를 이스라엘과 나란히 세우시고, 모두를 향해 복을 선언하십니다.

이사야 19장의 가장 놀라운 변화는 이집트가 심판을 피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심판받던 이집트가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린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본문은 이집트가 의지하던 모든 기반을 하나씩 무너뜨립니다. 우상과 정치권력, 나일강의 풍요, 오랜 지혜의 전통이 차례로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이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19장 본문 읽기 →

구름을 타고 오시는 여호와야훼 — 이집트의 신들이 떨다

이사야 19:1–4 본문 →

이집트에 관한 신탁. 보라, 여호와야훼가 날랜 구름을 타고 이집트로 온다. 이집트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고, 이집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아내릴 것이다.이사야 19:1 · 본디새김

이사야는 이집트에 관한 신탁을 전하면서 먼저 군대를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이집트는 여러 신을 섬기던 나라였습니다. 파라오의 왕권과 국가의 질서도 종교적 세계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신전과 제의는 단순히 개인의 신앙생활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상들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떱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과 이집트의 신들이 대등한 권력을 가지고 경쟁한다는 생각을 허물어뜨립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등장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우상들이 떨고’와 ‘마음이 녹아내린다’는 표현이 서로 대응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의지하던 종교적 대상이 흔들리자, 그 나라 전체도 두려움에 빠집니다.

이러한 묘사는 출애굽기의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2:12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심판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곳에서는 이집트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붕괴가 이어집니다.

「내가 이집트 사람들을 부추겨 서로 맞서게 하겠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형제와, 저마다 자기 이웃과 싸울 것이다. 도시는 도시와, 왕국은 왕국과 싸울 것이다.」이사야 19:2 · 본디새김

개인과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된 분열이 도시와 정치 공동체 전체로 확대됩니다. 이집트는 하나의 강력한 나라처럼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여러 세력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는 서로 다른 지역의 통치자들이 경쟁했던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 구절을 특정한 내전 하나에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어느 도시가 어느 도시와 싸우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외부의 강대한 적이 성벽을 공격하기 전에, 나라를 하나로 묶어 주던 관계들이 먼저 무너집니다.

「이집트의 기운이 그 속에서 빠져나가고, 내가 그 계략을 삼켜 버리겠다. 그들은 우상들과 주문을 중얼거리는 자들, 죽은 자의 영들과 점치는 영들에게 물을 것이다.」이사야 19:3 · 본디새김

‘기운이 빠져나간다’는 표현은 단순한 일시적 낙담보다 깊은 무력감을 전달합니다. 이집트를 움직이던 의지와 활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집트는 정치적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주변 나라의 움직임을 살피고, 외교적 협상을 진행하며, 군사적 전략을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계략을 삼켜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은 계획이 실패하자 우상과 점술에 의지합니다. 자신들이 믿어 온 종교적 권위에서 다시 답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이집트가 여러 곳에서 답을 구하지만, 정작 여호와야훼가 계획하신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집트를 가혹한 주인의 손에 넘기겠다. 사나운 왕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이사야 19:4 · 본디새김

한때 다른 민족을 억압하던 강대한 나라가 이제 가혹한 주인에게 넘겨집니다.

20절에서 이집트 사람들은 억압하는 자들 때문에 여호와야훼께 부르짖게 됩니다. 지금은 가혹한 주인에게 넘겨지는 나라가, 나중에는 그 억압에서 구출해 달라고 여호와야훼를 부르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구름을 타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시편 104:3과 같은 본문에서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구름이라는 운송수단을 이용하신다는 설명이 아니라, 자연의 힘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날랜’이라는 말은 이집트가 위기를 알아차리고 대응할 시간을 계산하기 전에 여호와야훼가 오시는 듯한 긴박함을 만듭니다. 여기서 ‘죽은 자의 영들’과 ‘점치는 영들’이라는 표현은 실제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지, 그러한 존재와 접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해석이 갈립니다. 구약에서는 관련 표현이 영매를 가리키는 용법으로도 나타납니다(레위기 19:31; 신명기 18:11). ‘가혹한 주인’과 ‘사나운 왕’은 같은 지배자를 두 방식으로 묘사한 것일 수도 있고, 억압적인 지배의 성격을 거듭 강조하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역사적 왕을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앗시리아의 지배를 비롯한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연결할 수는 있지만, 특정 인물의 이름을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나일강이 마르면 — 한 나라의 삶이 무너지는 과정

이사야 19:5–10 본문 →

바다에서 물이 말라 없어지고, 강은 메말라 바싹 마를 것이다.이사야 19:5 · 본디새김

이집트에 대한 심판은 이제 나일강으로 향합니다.

이집트의 삶에서 나일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었습니다. 농업과 어업, 운송과 여러 생산 활동이 강의 물에 의존했습니다. 특히 강이 가져오는 물과 퇴적물은 주변 땅에서 농사를 짓는 데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고, 이집트의 수로들은 물이 줄어 말라 버릴 것이다. 갈대와 골풀은 시들 것이다.이사야 19:6 · 본디새김

물이 정체되거나 부족해지면 수질이 악화될 수 있고, 습지의 식물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갈대와 골풀은 물가의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강의 황폐함이 주변 생명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나일강 가에, 나일강 어귀에 벌거벗은 터들이 있을 것이다. 나일강의 모든 씨 뿌린 땅은 말라, 날려 가고 없어질 것이다.이사야 19:7 · 본디새김

‘벌거벗은 터들’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식물이 덮고 있지 않은 땅을 떠올리게 합니다. 앞서 갈대와 골풀이 시들었다면, 이제 씨를 뿌렸던 땅 자체가 말라 버립니다.

여기서 황폐함은 물에서 땅으로 이동합니다.

어부들이 탄식하고, 나일강에 낚싯바늘을 던지는 이들이 모두 슬퍼하며, 물 위에 그물을 펼치는 이들이 쇠약해질 것이다.이사야 19:8 · 본디새김

이사야는 낚싯바늘을 쓰는 사람과 그물을 쓰는 사람을 함께 언급합니다. 한 종류의 어업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닙니다. 물고기를 잡는 여러 방식이 모두 영향을 받습니다.

빗질한 아마를 다루는 이들과 흰 천을 짜는 이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다.이사야 19:9 · 본디새김

아마는 섬유를 얻기 위해 재배하는 식물이며, 이집트에서는 오래전부터 아마로 만든 리넨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아마를 가공하는 사람들과 천을 짜는 사람들은 농경 생산물을 직물로 만드는 일에 종사합니다.

나일강의 물이 줄어드는 것은 단순히 농부에게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물에 의존하는 생태계와 여러 산업,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계까지 흔듭니다.

이집트의 버팀목들이 짓부서지고,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이들은 모두 마음이 슬플 것이다.이사야 19:10 · 본디새김

여기서 ‘버팀목들(⁨שָׁתָ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사회를 떠받치는 기초나 지지대를 뜻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앞선 아마와 직물 생산의 문맥을 따라 특정한 노동·생산 집단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버팀목들’로 읽으면 앞의 여러 경제적 활동이 무너지는 모습을 포괄하는 표현이 됩니다.

이사야는 나라의 심판을 왕의 궁정에서만 보지 않습니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밭에 씨를 뿌리고, 천을 짜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그 재앙을 보여 줍니다.

이 대목을 실제로 이집트 전역의 나일강이 어느 시기에 완전히 말랐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은 나라의 생존 기반이 파괴되는 모습을 강렬한 시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물이 사라지고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동안,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지혜롭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길을 잃다

이사야 19:11–15 본문 →

참으로 소안의 고관들은 어리석다. 파라오의 지혜로운 조언자들이 내놓는 조언은 우둔하다. 너희가 어떻게 파라오에게 「저는 지혜로운 이들의 아들입니다. 옛 왕들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이사야 19:11 · 본디새김

이제 장면은 이집트의 정치적 중심으로 이동합니다.

소안은 이집트 동북부의 중요한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정치와 행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노프’는 일반적으로 멤피스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이해됩니다. 멤피스 역시 오랜 역사를 지닌 이집트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11–13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지방 관리가 아니라, 나라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거나 파라오에게 조언하는 고위 지도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이들의 아들’, ‘옛 왕들의 아들’이라는 말은 선조의 지혜와 왕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는 오랜 문자 문화와 행정 전통을 지닌 사회였습니다. 궁정의 관리와 조언자들에게는 전통적인 지식과 판단 능력이 중요한 자산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그들이 얼마나 오랜 지혜의 계보를 가지고 있는지보다, 지금 무슨 일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네 지혜로운 이들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제 네게 알려 주게 하여라.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집트를 두고 무엇을 계획했는지 그들이 알게 하여라.이사야 19:12 · 본디새김

3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의 계략을 삼켜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이집트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계획을 알고 있는지 묻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과, 역사가 궁극적으로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오랜 경험과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소안의 고관들은 어리석어졌고, 노프의 고관들은 속아 넘어갔다. 이집트 지파들의 모퉁잇돌인 그들이 이집트를 그릇된 길로 이끌었다.이사야 19:13 · 본디새김

모퉁잇돌은 건축물에서 구조를 잡고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돌입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나라의 주요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비유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이 점에서 10절과 13절 사이에도 연결이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이집트의 버팀목들이 짓부서지고, 13절에서는 나라의 모퉁잇돌인 지도자들이 길을 잘못 인도합니다.

경제를 지탱하던 기반과 정치를 지탱하던 지도력이 함께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가 그 안에 혼란의 영을 섞어 놓았고, 그 고관들은 이집트를 술 취한 사람이 제 토사물 속에서 비틀거리는 것처럼 하는 일마다 비틀거리게 했다.이사야 19:14 · 본디새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서도 계속 움직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갑니다. 그 결과 자신들만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비틀거리게 됩니다.

‘여호와야훼가 그 안에 혼란의 영을 섞어 놓으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나라의 판단력을 무력화하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지도자들의 모든 잘못을 직접 대신 행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이집트를 그릇된 길로 이끌었다는 책임도 분명히 말합니다.

이집트에는 머리나 꼬리, 종려나무 가지나 골풀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이사야 19:15 · 본디새김

머리와 꼬리, 종려나무 가지와 골풀은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입니다. 이사야 9:14–15에서도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머리와 꼬리가 사회의 지도자들과 거짓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19:15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모두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어느 계층도 위기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예언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날에」 — 두려움에서 새로운 관계로

이사야 19:16–18 본문 →

그날에 이집트는 여자들처럼 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집트를 향해 휘두르는 손 때문에 떨며 두려워할 것이다.이사야 19:16 · 본디새김

16절부터는 ‘그날에’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이 표현은 16절, 18절, 19절, 23절, 24절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며, 이집트의 장래를 서로 연결된 여러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이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여자들처럼 될 것이다’라는 표현은 고대 전쟁의 수사적 관습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의 문학에서는 전쟁의 용기를 남성성에, 두려움이나 무력함을 여성성에 연결하여 표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실제 여성들이 본질적으로 용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말이 아닙니다. 고대의 성별 관념을 이용하여 이집트의 군사적 자신감이 무너진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유다 땅은 이집트를 휘청거리게 할 것이다. 누구든 그 땅 이야기를 들으면 두려워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집트를 두고 세우는 계획 때문이다.이사야 19:17 · 본디새김

고대의 정치적 규모만 놓고 보면 이집트는 오랜 역사와 큰 영토를 가진 나라였고, 유다는 그보다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두 나라의 군사력을 직접 비교하지 않습니다. 유다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 이집트를 심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 땅의 이름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알아내지 못한 것은 여호와야훼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 바로 그 계획이 이집트를 떨게 합니다.

하지만 18절에서는 매우 다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날에 이집트 땅의 다섯 도시가 가나안 말을 하며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 맹세할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파괴의 도시라 불릴 것이다.이사야 19:18 · 본디새김

‘가나안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반드시 모든 주민이 일상생활에서 언어를 완전히 바꾸었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뒤에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 맹세할 것’이라는 말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두 표현을 함께 보면, 언어의 변화는 그들이 누구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지와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께 맹세하며, 그분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우상들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떨었습니다.

이제는 이집트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하나님의 등장 앞에서 무너졌던 종교적 세계가, 여호와야훼를 인정하는 새로운 관계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소라 본문은 이르 하헤레스, 곧 ‘파괴의 도시’라는 읽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일부 히브리어 본문 전승에는 한 자음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 ‘태양의 도시’로 읽을 수 있는 표현이 있으며, 칠십인역에는 ‘아세덱’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다른 읽기가 있습니다. 이를 의로움과 연결하여 이해하기도 합니다. ‘태양의 도시’라면 이집트의 태양 숭배 중심지였던 헬리오폴리스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면 ‘파괴의 도시’라는 읽기를 따르면 심판의 이미지가 이집트의 변화된 미래 속에도 남아 있는 듯한 긴장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가 원래의 표현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도시의 이름을 특정한 역사적 도시나 사건에 반드시 대응시켜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다섯 도시라는 숫자가 반드시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지도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집트 한가운데 세워지는 제단 — 옛 압제자가 여호와야훼께 부르짖다

이사야 19:19–22 본문 →

그날에 이집트 땅 한가운데 여호와야훼를 위한 제단이 있고, 그 국경 곁에는 여호와야훼를 위한 돌기둥이 있을 것이다.이사야 19:19 · 본디새김

이집트 한가운데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인정되고, 그 나라의 경계에서도 여호와야훼의 권위를 증언하는 표지가 서게 됩니다. 이것은 이집트가 단지 국경 밖에 있는 다른 나라의 신을 인정한다는 뜻보다 깊습니다. 자기 나라 안에서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집트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야훼를 위한 표징과 증거가 될 것이다. 억압하는 자들 때문에 그들이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으면, 그가 그들에게 위대한 구원자를 보내 그들을 건져 낼 것이다.이사야 19:20 · 본디새김

출애굽기 2:23–25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살이 때문에 탄식하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출애굽기 3:7–10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시며, 모세를 보내 그들을 구출하게 하십니다.

한때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이집트가, 이제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과거의 압제자였던 민족에게도 열릴 수 있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여기서 ‘위대한 구원자’가 누구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이집트에 자신을 알리고, 그날에 이집트 사람들이 여호와야훼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희생제물과 예물로 섬기며, 여호와야훼에게 서원을 하고 그대로 이행할 것이다.이사야 19:21 · 본디새김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새롭게 배운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앎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단지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께 한 약속을 지키는 관계가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가 이집트를 칠 것이다. 치고 또 고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에게 돌아올 것이며, 그는 그들의 간구를 받아들여 그들을 고칠 것이다.이사야 19:22 · 본디새김

심판과 치유가 같은 문장에 등장합니다.

그 나라의 힘이 무너지고, 삶의 기반이 황폐해지며, 억압받는 상황에 놓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이집트는 단지 벌을 받아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치유가 필요한 나라로도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사야 19장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이집트를 영원히 멀리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집트가 그분을 알고 그분께 돌아오게 되는 길까지 열어 놓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회복으로 이어진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19장은 이집트에 관한 특정한 예언적 전망을 제시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고통을 통해 사람을 고치신다는 표현을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해도 된다는 정당화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인간에게 타인을 치고 고칠 권한을 주지 않습니다. 심판과 치유의 주체가 여호와야훼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그 변화가 이집트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2:5–14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가 선택하신 장소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왜 이집트 한가운데 여호와야훼를 위한 제단이 세워진다고 말할까요? 두 본문 사이에는 실제로 해석해야 할 긴장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이사야 19장의 제단을 이집트 사람들이 여호와야훼를 경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예언적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이집트 땅에 실제로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제의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생길 것을 내다본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후대에 유대인 공동체와 관련된 성전도 존재했지만, 이사야 19:19가 반드시 그 특정 건축물을 가리키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지역에 임의로 제단을 세워도 된다는 규범을 곧바로 이끌어 내는 것도, 반드시 어느 역사적 제단 하나의 건립을 예고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20절의 히브리어에는 ‘구원자(⁨יָשַׁע⁩)’와 ‘위대한 이(⁨רַב⁩)’ 또는 ‘변호자’를 뜻하는 말이 이어집니다. 그것을 한 구원자에 대한 수식으로 볼 수도 있고, 구원자와 위대한 존재라는 두 표현으로 구분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곧바로 특정한 역사적 왕이나 장래의 메시아를 가리키는 직접적인 예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치다(⁨נָגַף⁩)’와 ‘고치다(⁨רָפָא⁩)’라는 동사가 가까이 반복되며 이 대조를 강조합니다.

적대적인 제국들 사이에 놓이는 큰길

이사야 19:23 본문 →

그날에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이어지는 큰길이 있을 것이다. 앗시리아 사람들은 이집트로, 이집트 사람들은 앗시리아로 들어갈 것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앗시리아 사람들과 함께 섬길 것이다.이사야 19:23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이사야는 하나의 길을 보여 줍니다.

이집트와 앗시리아는 고대 근동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나라들입니다. 특히 기원전 8–7세기에 두 나라의 이해관계는 군사적 충돌과 정치적 경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그리는 길은 단순한 군사도로가 아닙니다.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일방적으로 침략하는 장면이 아니라, 서로의 땅을 오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처음에 이집트는 자기 형제와 이웃, 도시와 왕국이 서로 싸우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랫동안 경쟁 관계에 있던 나라와 길이 연결됩니다.

안에서는 분열되던 나라가 밖으로는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이집트가 다른 민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도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사야 19장은 이 두 나라 사이의 모든 정치적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전쟁에 대한 책임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현실의 국가 간 갈등을 간단히 해결해 주는 정책이나 공식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보여 주는 최종 장면은 적대와 단절이 아니라 왕래와 공동의 섬김입니다.

이사야 2:2–4에서는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산으로 몰려와 그분의 길을 배우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평화의 미래가 나타납니다. 이사야 11:6–9에서는 서로 해치고 파괴하던 관계들이 달라지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사야 19장은 그와 같은 전망을 실제 역사에서 서로 적대했던 나라들의 이름으로 구체화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마지막 장면에는 아직 한 나라가 남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지막의 ‘함께 섬길 것이다’에는 번역상의 쟁점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에트(⁨אֵת⁩)는 목적어를 표시하는 말로도 사용되고, ‘~와 함께’라는 전치사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이집트 사람들이 앗시리아를 섬긴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본디새김처럼 앗시리아 사람들과 함께 섬긴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두 나라가 서로 오가는 모습과 뒤에 나오는 세 나라의 공동 축복을 고려하면, ‘함께 섬긴다’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이 경우 누구를 섬기는지는 23절 자체에 명시되지 않지만, 앞에서 여호와야훼를 알고 섬기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습이 이어졌으므로 여호와야훼를 함께 섬기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앗시리아를 섬긴다’는 읽기를 택하면 정치적 종속 관계가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바로 뒤의 공동 축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추가로 설명해야 합니다. 두 읽기의 근거는 구분할 필요가 있지만, 24–25절까지 이어지는 문맥은 적대하던 민족들이 함께 복을 받는 방향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내 백성 이집트」 — 선택받은 백성의 의미가 넓어지다

이사야 19:24–25 본문 →

그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함께 셋 중 하나가 되어, 땅 한가운데서 복이 될 것이며,이사야 19:24 · 본디새김

이제 이집트와 앗시리아 사이에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셋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세 나라가 함께 하나의 축복에 참여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2: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고 그가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가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이어집니다.

이사야 19:24가 창세기 12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과 함께 ‘땅 한가운데서 복이 된다’는 모습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갖는 보편적인 방향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 나라가 각각 자신의 이름을 유지하면서 함께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관계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하며 복을 줄 것이다. 「내 백성 이집트와 내 손으로 만든 앗시리아와 내 소유 이스라엘은 복되다.」이사야 19:25 · 본디새김

구약에서 ‘내 백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3:7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한때 ‘내 백성’을 억압했던 나라가 이제 ‘내 백성’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과거의 억압을 무시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집트는 먼저 심판받고, 억압을 경험하며, 여호와야훼께 부르짖고, 그분께 돌아오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여기서 이집트의 과거가 이집트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다음은 ‘내 손으로 만든 앗시리아’라는 표현입니다.

앗시리아는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로 등장하면서도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폭력을 행사한 나라입니다(이사야 10:5–19). 앗시리아의 군사력과 정치적 위세가 아무리 커도, 그 나라 역시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29:23에서는 야곱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손이 이루신 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19:25에서는 앗시리아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불립니다. 이 둘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손’이라는 이미지가 이스라엘 바깥의 민족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마지막은 ‘내 소유 이스라엘’입니다.

이 호칭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이집트를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폐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복이 미치는 범위를 더욱 넓게 드러내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25절 첫머리의 ‘복을 줄 것이다’에는 문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단수 목적어가 붙어 있어, 그 직접적인 대상이 이스라엘인지 세 나라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은 것인지 문법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은 그 대상을 이스라엘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실제 축복의 선언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이스라엘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사야 19장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구원 — 심판받는 나라가 복의 자리에 서다

이사야 19:1–25 본문 →

여기서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적들을 무너뜨리는 분으로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그 적들이었던 나라들까지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과거의 적대 관계가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이집트와 앗시리아 사이에 큰길이 놓였습니다.

그 길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 오가고, 두 나라가 함께 섬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그들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이 모든 장면의 끝에서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 이집트와 내 손으로 만든 앗시리아와 내 소유 이스라엘은 복되다.」

이사야는 이 마지막 선언에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그 세 나라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과거의 갈등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부르시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세 나라 위에 하나의 복이 선언됩니다.

이사야 19장은 이집트의 멸망을 알리는 말씀으로 시작했지만,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이스라엘을 함께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