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조용히 지켜보시는 여호와야훼

이사야 18장에는 특이한 침묵이 있습니다.

먼 나라에서 사절들이 배를 타고 움직입니다. 온 세상에는 산 위의 깃발을 보고 뿔나팔 소리를 들으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무언가 중대한 일이 곧 벌어질 듯합니다.

이 짧은 일곱 절에는 세 가지 시간이 겹쳐 있습니다. 사절들이 서둘러 움직이는 인간의 시간, 하나님이 조용히 지켜보시는 시간,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이사야 18장의 중심 질문은 하나님이 왜 침묵하시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을 인간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무관심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보지 못하는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일까요?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718장 본문 읽기 →

강들 너머의 나라에서 온 움직임 — 쿠시의 사절들

이사야 18:1–2 본문 →

아, 날개들이 윙윙거리는 땅이여, 쿠시의 강들 건너편에 있는 땅이여.이사야 18:1 · 본디새김

이사야는 먼저 먼 나라를 부릅니다.

쿠시는 고대에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 지역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오늘날의 수단을 중심으로 나일강 상류 일대와 연결됩니다. 기원전 8세기 후반에는 쿠시 출신 왕들이 이집트를 장악하여 제25왕조를 이루었고, 앗시리아가 서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시대에 중요한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히브리어 칠찰 케나파임은 날개와 관련된 윙윙거림 또는 떨리는 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날아다니는 곤충들의 소리로 이해할 수도 있고, 배의 돛이나 물 위를 오가는 선박의 움직임과 연결하여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칠십인역은 이 표현을 배의 날개와 관련된 말로 옮깁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은 그 날개가 어떤 생물이나 사물에 속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반드시 모기 떼나 특정 곤충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독자는 먼 땅에서 들리는 윙윙거림을 듣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물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사절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다로 사절들을 보내고, 파피루스 배로 물 위에 보내는 땅이여. 날랜 사자들아, 가라. 키가 크고 몸이 매끈한 민족에게로, 그곳에서부터 저 멀리까지 두려움의 대상인 백성에게로, 강하고 짓밟는 민족, 강들이 그 땅을 가르는 민족에게로.이사야 18:2 · 본디새김

파피루스는 나일강 주변의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그 줄기를 묶어 가벼운 배를 만드는 일은 고대 이집트와 나일강 유역의 생활에서 알려진 기술입니다. 여기서 ‘바다’라고 옮긴 말은 큰 수역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반드시 오늘날 우리가 구분하는 바다를 건너는 항해만을 뜻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는 그 배를 타는 사절들의 구체적인 임무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절을 보낸다는 것은 나라들 사이에 전달해야 할 중요한 소식이나 요청이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사야 시대에는 앗시리아의 팽창에 맞서 여러 나라가 서로 협력하거나 저항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30:1–5과 31:1에는 유다 사람들이 이집트의 도움과 군사적 힘을 의지하려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18장의 사절들도 그러한 국제적 외교활동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사절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와 어떤 조약을 맺으러 갔는지, 혹은 유다에 어떤 제안을 전달했는지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장을 특정한 외교 협상의 기록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몸이 매끈한’이라는 표현은 피부가 매끄러운 모습이나 털을 깎은 외양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신체적 특징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멀리 떨어진 민족의 독특한 외양을 묘사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의 ‘강들이 그 땅을 가르는 민족’이라는 표현도 나일강과 여러 지류가 흐르는 지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이 민족을 쿠시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쿠시의 땅에서 사절들이 보내졌는데, 다시 쿠시 사람들에게 가라고 명령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파견된 쿠시의 사절들에게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는 명령일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파견된 사절들이 쿠시로 가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2절의 첫 부분과 뒤의 명령이 서로 다른 방향의 사절 활동을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원문은 그들의 출발지와 목적지를 모두 확정할 만큼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또한 ‘강하고 짓밟는 민족’이라는 표현 가운데 카브카브의 뜻은 불확실합니다. 힘이 세거나 강한 민족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만, 그 뜻이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쿠시를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나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멀리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민족으로 소개합니다.

온 세상을 향한 신호 —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이사야 18:3 본문 →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아, 땅에 거주하는 이들아, 산들 위에 깃발이 들릴 때 보아라. 뿔나팔이 울릴 때 들어라.이사야 18:3 · 본디새김

2절까지는 쿠시의 땅과 사절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대상이 갑자기 확장됩니다.

고대의 전쟁에서 높은 곳에 세운 깃발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신호를 전달할 수 있었고, 뿔나팔 역시 군대를 소집하거나 위험을 알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5:26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먼 민족들에게 깃발을 세워 그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13:2에서도 산 위에 깃발을 세우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사야 18장의 깃발과 뿔나팔도 중대한 사건을 알리는 공개적인 신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절은 누가 깃발을 드는지, 뿔나팔을 부는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사절들이 먼 나라에 소식을 전달하러 갔습니다. 이제는 온 세상이 하나의 신호를 기다립니다.

개별 국가의 외교활동이 세계 전체가 지켜보아야 할 사건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깃발과 뿔나팔이 등장했으므로 곧바로 군대를 움직이거나 강대국을 공격하시는 장면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조용히 지켜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햇빛과 이슬 구름처럼 — 조용히 지켜보시는 하나님

이사야 18:4 본문 →

여호와야훼가 내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햇빛 속의 이글거리는 열기처럼, 추수의 열기 속 이슬 구름처럼 내 처소에서 조용히 지켜보겠다.」이사야 18:4 · 본디새김

히브리어 원문에는 가만히 있겠다는 동사와 바라보겠다는 동사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만 읽기보다, 서둘러 개입하지 않으면서 상황을 계속 살피시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햇빛의 열기는 전쟁터의 군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은 분명합니다. 햇빛이 계속 내리쬐면 땅이 데워지고, 식물이 자라거나 마르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환경이 변화합니다.

열기는 조용하지만 무력하지 않습니다.

반면 이슬 구름은 뜨거운 추수철에 나타나는 습기의 이미지입니다. 그늘과 서늘함, 수분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을 각각 심판과 자비의 상징으로 구분하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본문은 그렇게 명시하지 않습니다. 두 비유가 정확히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나누어 나타내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현상은 모두 사람들이 즉각적인 명령으로 만들어 내거나 멈출 수 없는 자연의 움직임이라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뜨거운 햇빛이 비추고, 때가 되면 이슬 구름이 나타납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조급함과 상관없이 자기 시간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해서 생기는 침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때를 기다리시는 침묵으로 그려집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지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마지막 7절에서는 시온산을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부르지만, 4절의 ‘내 처소’를 반드시 시온의 특정 건물과 동일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의 3절에서 온 세상 사람들은 깃발을 보고 뿔나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인간에게는 상황이 불확실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소식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움직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익어 가는 포도송이를 잘라 내다 — 하나님의 때는 인간의 기대와 다르다

이사야 18:5 본문 →

추수 전에, 꽃피기가 끝나고 꽃송이가 익어 가는 풋포도가 될 때, 그가 가지치기 칼로 덩굴손들을 잘라 내고, 뻗은 가지들을 없애고 쳐 낼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18:5 · 본디새김

이 절에서 장면은 다시 바뀝니다.

외교 사절도 사라지고, 깃발과 뿔나팔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독자는 포도밭에 서 있습니다.

꽃이 피는 것만으로 수확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꽃이 열매로 바뀌기 시작하면 농부는 앞으로 거둘 포도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가지치기 칼이 등장합니다.

포도나무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풍성한 수확이 가까워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열매를 실제로 거두기 전에 가지가 잘립니다.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완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쿠시는 먼 곳까지 사절을 보내는 강력한 나라로 등장했습니다. 여러 나라의 외교활동은 어떤 정치적 결과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를 정치적 상황에 적용하면, 인간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하나님이 그 계획의 결실을 막으실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려 나가는 포도나무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한 가지 읽기는 앗시리아의 군사적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려 나가는 포도나무가 쿠시의 군사적 야망이나 국제적 동맹의 계획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또는 특정한 한 나라보다 인간의 세력과 계획이 무너지는 모습을 폭넓게 나타내는 비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포도나무의 주인을 밝히지 않고, 그 가지들이 어느 나라를 나타내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앗시리아나 쿠시 가운데 어느 하나를 확정적인 심판 대상으로 지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시간이 끝나면, 인간이 이미 성공을 기대하고 있던 성장과 계획이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은 인간이 만들어 낸 성취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동일시하지 않도록 합니다.

열기와 이슬 구름은 시간을 따라 움직이는 자연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지치기 칼은 그 시간이 어느 순간 결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끝이 없는 방관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7:12–14에서는 여러 민족의 군대가 물결처럼 몰려오다가 하나님의 꾸짖음 앞에서 흩어집니다. 이 흐름을 이어 읽으면, 18장에서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잘라 내시는 모습도 주변 나라들을 위협하던 강대국의 야망을 꺾으시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앗시리아의 팽창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 읽기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읽기도 가능합니다. 18장의 앞부분은 쿠시를 직접 부릅니다. 이사야 10:12에서 여호와야훼는 시온과 예루살렘에 관한 자신의 모든 일을 마치신 뒤 앗시리아 왕의 교만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절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습니다. 앗시리아가 한동안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행동을 모두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역할과 행동을 판단하시며, 자신의 일이 이루어진 뒤 그 교만을 심판하십니다. 이사야 18장의 침묵도 그와 비슷한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을 지나도록 남겨진 것들 — 심판의 무게

이사야 18:6 본문 →

그것들은 함께 산의 맹금들과 땅의 짐승들에게 버려질 것이다. 맹금들은 그 위에서 여름을 보내고, 땅의 모든 짐승은 그 위에서 겨울을 보낼 것이다.이사야 18:6 · 본디새김

이 장면에서 비유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를 먹는 일반적인 동물들만을 생각한다면, 특별히 맹금이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맹금과 들짐승에게 버려지는 이미지는 전쟁이나 심판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들에 방치되는 장면과 자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사야 18:6은 포도나무의 가지치기라는 비유에서 심판 이후의 참혹한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옮겨 간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것들이 반드시 실제 시신이라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맹금들이 여름을 보내고, 짐승들이 겨울을 보냅니다. 이는 심판의 결과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오래 지켜보시지만, 그분이 행동하시는 때가 오면 그 결과는 가볍지 않습니다.

1절에서는 날개들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활발한 움직임이 있는 먼 나라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6절에서는 다시 날개 달린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맹금들입니다.

첫 장면의 날개가 생동하는 땅의 소리였다면, 마지막의 맹금은 심판 이후의 황폐함을 연상시킵니다. 이것을 반드시 의도적인 언어유희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만들어 내는 두 장면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18장은 이 파괴의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8:26에서는 적에게 패배하여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예레미야 7:33에서도 비슷한 심판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겨울을 보내다’라는 표현은 원어상 겨울철이나 수확 이후의 계절과 관련하여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처럼 여름과 겨울을 대비하여 읽으면 한 해의 시간이 지나도록 버려진 것들이 남아 있는 장면이 됩니다.

처음에는 사절을 보내던 나라가, 이제는 예물을 가져오다

이사야 18:7 본문 →

그때 키가 크고 몸이 매끈한 백성에게서, 그곳에서부터 저 멀리까지 두려움의 대상인 백성에게서, 강하고 짓밟으며 강들이 그 땅을 가르는 민족에게서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 예물이 옮겨져 올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있는 곳, 시온산으로.이사야 18:7 · 본디새김

2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민족이 등장했습니다. ‘키가 크고 몸이 매끈한 민족’, ‘저 멀리까지 두려움의 대상인 백성’, ‘강들이 그 땅을 가르는 민족’입니다. 7절에서는 그 묘사가 거의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등장하는 방식은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먼 나라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그 먼 나라로부터 여호와야훼께 드릴 예물이 도착합니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지만, 그 움직임이 향하는 최종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시편 76:11–12에서도 여러 민족이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18:7의 예물은 단순한 개인적 선물이 아니라, 강력한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권위를 인정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군사적 패배 이후의 강제적인 조공인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뒤 드리는 감사의 예물인지, 혹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나타내는 자발적인 행동인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7절은 그 민족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민족이 이제 여호와야훼와 관계를 맺는 장면 속에 들어옵니다.

쿠시는 멀리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민족입니다. 강들이 그 땅을 가르고, 나라의 사절들이 먼 곳을 오갑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는 ‘만군의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이 호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작은 지역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신학적 이해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강력한 민족이 여호와야훼께 예물을 가져온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보다 크고 궁극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지리적 시선이 먼 강들의 나라에서 하나의 산으로 집중됩니다. 강대한 민족의 힘이 펼쳐지는 공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공간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사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마스쿠스와 모압을 다루시는 분이고, 강들 너머의 쿠시도 그분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통치는 단지 다른 민족을 무너뜨리는 것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있는 곳으로 오는 장면까지 포함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소라 본문의 히브리어에서는 첫 번째 ‘키가 크고 몸이 매끈한 백성’ 앞에 출처를 나타내는 전치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두려움의 대상인 백성’ 앞에는 ‘~에게서’를 뜻하는 전치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첫 번째 백성 자체가 예물로 바쳐지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뒤의 전치사 의미를 앞에도 적용하여 그 백성에게서 예물이 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쿰란에서 발견된 대이사야 두루마리(1QIsaᵃ)에는 첫 번째 백성 앞에도 출처를 나타내는 전치사가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본디새김이 택한 ‘백성에게서’라는 읽기가 고대의 본문 전승에서도 확인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소라 본문의 표현 자체가 가진 문법적 여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이사야 2:2–4과 연결되는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마지막 날에 여호와야훼의 집이 있는 산이 굳게 서고, 여러 민족이 그곳으로 몰려와 여호와야훼의 길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이사야 18:7이 그 본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 민족이 시온으로 향한다는 주제는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이사야 19:18–25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여호와야훼를 알고 경배하게 될 것이며, 마지막에는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이스라엘이 함께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따라서 18장의 쿠시가 여호와야훼께 예물을 가져오는 장면은 고립된 특별한 사건이 아닙니다. 여러 민족에 대한 심판의 신탁 가운데서도 그 민족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미래가 열린다는 이사야서의 더 큰 흐름과 연결됩니다. 시편 68:31에도 쿠시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다만 이러한 연결을 근거로 이사야 18:7이 쿠시 민족 전체의 완전한 개종을 직접 예언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과 연결한다면, 여러 민족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모인다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는 흐름과 이어집니다(에베소서 2:11–18). 그러나 이는 정경 전체를 함께 읽을 때 보이는 주제적 연결이지, 이사야 18장이 신약의 특정 사건을 직접 예고하거나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인간의 조급함 — 이사야 18장의 신학적 중심

이사야 18:1–7 본문 →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움직임이나 조급함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이사야 18장은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무능력이나 무관심으로 이해하는 태도에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행동이 없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 그분이 행동하실 때가 오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모든 역사적 재앙과 개인적 고통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오래 지속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반드시 특정한 방식으로 끝내실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18장은 모든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거나 하나님의 개입 시점을 계산하는 방법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쿠시의 사절들이 움직이는 것을 이사야가 직접 죄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나라가 외교활동을 하거나 위험에 대비하는 행동 자체를 비난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먼 나라에서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예물을 옮기는 이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져오는 것은 예물입니다. 그 예물의 목적지는 쿠시의 강들 너머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있는 시온산입니다.

먼 나라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마침내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있는 곳에 이릅니다.

이사야는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의 표정이나 그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물이 옮겨져 온다는 사실만 말합니다.

이사야 18장은 바로 그 시온산의 장면에서 끝납니다. 먼 강들 너머의 민족에게서 온 예물이,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있는 곳에 이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