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나를 만든 이와 내가 만든 것

이사야 17장은 다마스쿠스의 멸망을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다마스쿠스에 관한 신탁이라고 해 놓고, 곧바로 에프라임과 야곱의 멸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끝에서는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민족이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의 한가운데에 매우 조용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도시가 무너지고 군대가 사라지는 이야기 속에서, 이사야는 갑자기 한 사람의 시선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어디를 바라보는지가 중요해집니다.

이사야 17장의 심판은 단지 사람들이 의지하던 힘을 빼앗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 힘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이 모든 변화를 통해 무엇이 참으로 강한 것이며, 누구에게 사람의 눈이 향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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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와 에프라임 — 함께 힘을 모았던 나라들이 함께 무너지다

이사야 17:1–3 본문 →

다마스쿠스에 관한 신탁. 「보라, 다마스쿠스는 성읍의 자리에서 사라져 무너진 돌무더기가 될 것이다.」이사야 17:1 · 본디새김

다마스쿠스는 아람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와는 다른 도시이며, 이스라엘 바깥의 왕국에 속했습니다.

이사야 7:1–9에서는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아하스 왕 시대의 일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유다에 큰 위협이 되었고, 다윗 왕조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때 여호와야훼는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이사야 7:4–7).

열왕기하 16:9에는 앗시리아 왕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끌고 갔으며, 아람 왕 르신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 17:1의 선언은 당시 아람 왕국이 맞게 된 군사적 재앙과 연결됩니다.

1절의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다마스쿠스가 단순히 패배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읍의 자리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도시로서 기능하던 질서 자체가 무너져 돌무더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로엘의 성읍들은 버려져 가축 떼의 차지가 될 것이다. 가축 떼가 거기 누워도 겁주어 쫓을 자가 없을 것이다.」이사야 17:2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가축이 평안히 누워 있는 모습은 안전과 평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모습은 도시의 황폐함을 보여 줍니다.

가축이 겁낼 필요가 없는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재앙이었던 사건이, 가축에게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고요함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예언의 대상이 갑자기 넓어집니다.

「에프라임에서는 요새가 사라지고, 다마스쿠스에서는 왕국이 사라질 것이다. 아람의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처럼 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이사야 17:3 · 본디새김

에프라임은 북이스라엘 왕국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에프라임 지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아람과 에프라임은 함께 유다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힘을 합쳤다는 사실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두 나라 모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잃을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아람의 남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처럼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긍정적인 약속처럼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절에서 야곱의 영광이 쇠할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따라서 3절의 표현은 아람에게 이스라엘과 같은 영광을 주겠다는 축복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쇠하는 것처럼 아람의 남은 사람들도 쇠퇴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잘 맞습니다.

이사야는 한 나라의 몰락을 다른 나라의 영광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유다를 위협했던 아람만 심판받는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북이스라엘 역시 그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로엘’의 위치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약에는 아로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둘 이상 등장하며, 대표적으로 아르논 부근의 아로엘과 암몬 지역과 관련된 아로엘이 알려져 있습니다(신명기 2:36; 여호수아 13:25). 이 구절의 아로엘을 다마스쿠스 주변의 알려지지 않은 장소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확실한 지리적 대응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 자음의 의미를 달리 읽어 특정 지명보다 버려진 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야위는 몸과 남겨진 올리브 열매 — 심판은 무엇을 남기는가

이사야 17:4–6 본문 →

「그날에는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야윌 것이다.」이사야 17:4 · 본디새김

나라의 멸망을 설명하면서 이사야가 선택한 첫 번째 이미지는 인간의 몸입니다.

‘야곱의 영광’이라는 추상적인 말 바로 뒤에 ‘살진 몸’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풍요로움과 힘이 사라지는 변화입니다.

군사적 패배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야위는 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명력과 힘을 점차 잃어 가는 모습입니다. 국가의 멸망이 단순히 왕과 군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를 지탱하던 삶의 힘 전체가 쇠약해지는 사건임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비유가 다시 바뀝니다.

「추수하는 이가 서 있는 곡식을 모으고 그의 팔이 이삭들을 베는 것처럼 될 것이다.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줍는 것처럼 될 것이다.」이사야 17:5 · 본디새김

보통 추수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한 해 동안 기른 곡식이 결실을 맺고, 사람들이 먹을 양식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추수 자체가 심판의 이미지가 됩니다.

풍성하게 서 있던 곡식이 베어져 들판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야곱의 영광도 사라질 것입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 일대와 관련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여호수아 15:8; 18:16).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골짜기의 모습을 이용해 독자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추수 장면을 그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 예상하지 못한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거두다 남은 것이 있을 것이다. 올리브나무를 두드려 털고 난 뒤처럼, 나무 꼭대기에는 열매 두세 알이, 열매 맺는 나무의 가지들에는 네댓 알이 남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이사야 17:6 · 본디새김

고대에는 올리브 열매를 거두기 위해 나뭇가지를 흔들거나 두드리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열매가 떨어지지만, 높은 가지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는 몇 알이 남을 수 있습니다.

이 숫자들은 남아 있을 사람의 정확한 인구를 계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열매가 많이 맺혔던 나무에 이제 극히 적은 열매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주 적다’는 사실과 함께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5절만 읽으면 모든 것이 베어져 사라진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6절은 그 인상을 수정합니다.

심판은 매우 철저하지만, 완전한 소멸로만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남은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장래가 모두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은 극심한 감소와 소수의 생존을 함께 강조합니다.

바로 그다음 절에서 본문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를 만든 이와 내가 만든 것 — 사람의 시선이 바뀌다

이사야 17:7–8 본문 →

그날에는 사람이 자기를 만든 이를 바라보고,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향할 것이다.이사야 17:7 · 본디새김

앞의 장면들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잃는지가 중심이었습니다. 왕국을 잃고, 요새를 잃고, 영광을 잃고, 풍성하던 열매를 잃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무엇을 바라보게 되는지가 중심이 됩니다.

‘자기를 만든 이’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전쟁을 도와주시는 신으로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필요할 때 찾아가는 여러 보호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십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들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들, 곧 아세라들과 태양 기둥들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17:8 · 본디새김

7절에서는 ‘자기를 만든 이’가 등장하고, 8절에서는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이 등장합니다. 두 표현에는 ‘만들다(⁨עָשָׂה⁩)’라는 같은 히브리어 어근이 사용됩니다.

이사야는 같은 동작을 정반대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손으로 제단과 우상숭배의 상징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자신이 만든 것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사람을 만드신 분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상이 나무나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가치하다는 논증에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이 존재의 근원이고 무엇이 인간의 활동으로 생겨난 것인지를 구별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제단을 세울 수 있습니다. 종교적 상징물을 만들고, 의식을 정하며, 특별한 장소를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가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근원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 문제를 ‘바라보다’라는 동작으로 설명합니다.

7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할 때 사용한 히브리어 동사는 8절에서 제단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할 때에도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다는 것은 이전에 의지하던 대상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반복되는 이 호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분이면서도, 인간이 마음대로 다루거나 통제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 세울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고치거나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사람이 만들어 낸 존재가 아니십니다. 인간의 필요나 판단에 종속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변화가 멸망의 위기와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모든 고통이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도록 의도되었다는 보편적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야곱의 영광이 쇠하는 상황과 그날에 일어나는 시선의 변화를 연결합니다. 또한 ‘사람’이라는 단수 표현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빠짐없이 회개할 것임을 명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을 바라보던 사람이, 마침내 자신을 만든 이를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아세라는 가나안 종교의 여신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경에서는 그 여신과 관련된 목상이나 제의적 기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태양 기둥도 특정한 종교적 상징물과 관련된 표현이지만, 실제 모양이나 사용 방식은 확실하게 복원하기 어렵습니다. 이사야 10:20–21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를 친 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야훼를 진실하게 의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17:6의 남은 열매가 곧바로 7절의 모든 사람과 정확히 동일한 집단이라고 명시된 것은 아닙니다.

요새를 세우고 반석을 잊다 — 안전의 역설

이사야 17:9 본문 →

그날 그의 요새 성읍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버려 두었던 숲과 나무 꼭대기의 터처럼 되어 황폐해질 것이다.이사야 17:9 · 본디새김

3절에서는 에프라임에서 요새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9절에서는 그 요새 성읍들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를 묘사합니다.

요새는 위험을 막기 위해 세운 장소입니다. 높은 성벽과 튼튼한 방어시설을 갖추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버려진 터가 됩니다.

이제 10절에서 이 비극의 이유가 밝혀집니다.

이스라엘은 요새를 세웠지만, 자신의 참된 피난처인 반석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이 옮긴 ‘숲과 나무 꼭대기’에 해당하는 표현은 뜻을 분명하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칠십인역에서는 이 구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땅을 버리고 떠난 아모리인과 히위인에 관한 표현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마소라 본문의 표현을 따라 숲과 높은 곳의 버려진 터로 읽을 수도 있고, 고대 가나안 주민들이 버리고 떠난 성읍들을 연상시키는 역사적 비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본래 표현에 더 가까운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아침에 싹틔운 식물과 고칠 수 없는 고통 — 인간이 가꾼 것은 무엇을 보장하는가

이사야 17:10–11 본문 →

네가 너를 구원하는 하나님을 잊었고, 너의 피난처인 반석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즐거움을 주는 식물들을 심고, 그곳에 낯선 이의 가지를 심을 것이다.이사야 17:10 · 본디새김

이제 예언은 여성 단수의 ‘너’에게 직접 말합니다.

이사야는 그 대상을 여기서 명시하지 않지만, 앞의 에프라임과 야곱에 관한 신탁의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인격화하여 부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잊다’와 ‘기억하지 않다’는 같은 의미를 반복하면서 중요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이나 과거 사건에 관한 지식을 머릿속에 간직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어떤 분이시며,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삶에서 인정하고 따르는 것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8:11–18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풍요로워진 뒤 여호와야훼를 잊지 말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과 힘이 오직 자기 능력으로 생겨났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의 이미지입니다. 사람이 위험을 피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기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바로 앞에 등장한 요새와 대비됩니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잘못은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든 것을 의지하면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잊었다는 데 있습니다.

‘즐거움을 주는 식물들’은 아름답거나 보기 좋은 식물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낯선 이의 가지’는 외부에서 들여온 식물의 가지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람들이 정성껏 좋은 식물과 가지를 심어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모습이 됩니다.

반면 이 표현을 특정한 종교적 행위와 연결하여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는 식물과 정원을 종교의례에 사용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일부 해석은 이 구절의 ‘낯선 이’라는 표현도 다른 신들과 연결하여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17:10–11은 어떤 신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의식의 내용을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반드시 특정한 이방 제의라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종교적 의례에 관한 비유라면, 본문은 하나님 대신 다른 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일반적인 재배 활동에 관한 비유라면, 하나님을 잊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과 기술로 좋은 결과를 확보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모습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앞의 ‘하나님을 잊었다’는 선언이 이 행동의 신학적 의미를 결정합니다.

심는 날 너는 식물들 둘레에 울타리를 단단히 두르고, 아침에 네 씨앗을 싹 틔울 것이다. 병과 고칠 수 없는 고통의 날에 수확은 한 무더기가 될 것이다.이사야 17:11 · 본디새김

여기에는 인간의 세심한 관리와 노력, 빠른 성장을 바라는 마음이 나타납니다. 보통 농사를 짓는 사람은 씨앗을 뿌린 뒤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심는 날과 그다음 아침이 가까이 놓이며, 식물이 빠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예상과 다르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수확의 기쁨 대신 ‘병과 고칠 수 없는 고통의 날’을 말합니다.

인간의 노력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농사를 짓는 행위나 도시를 세우는 행위를 본질적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행위가 삶의 근본적인 안전까지 보장한다고 믿는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히브리어 본문은 압축되어 있어 문장 관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수확은 한 무더기’라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수확물이 쌓이는 모습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풍성하게 쌓인 수확물과 고칠 수 없는 고통이 나란히 놓이는 역설적인 장면이 됩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수확이 실패하거나 사라지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정성껏 심고 가꿨지만 정작 거두어야 할 때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말만으로 어느 쪽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다처럼 밀려오는 민족들 — 거대한 힘의 실체

이사야 17:12–13 본문 →

아, 많은 백성들의 으르렁거림이여. 그들은 바다들이 으르렁거리듯 으르렁거린다. 민족들의 요란한 소리여. 그들은 거센 물의 요란한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린다.이사야 17:12 · 본디새김

이사야는 여러 민족의 군대를 거센 물결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바다는 단지 넓고 거대한 자연환경이라는 뜻만 갖지 않습니다. 사람이 쉽게 막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으르렁거림’과 ‘요란한 소리’를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본문을 소리 내어 읽으면 비슷한 소리가 거듭 나타나면서 물결이 밀려오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군대가 다가오는 소리를 독자가 직접 듣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소리는 13절에서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바뀝니다.

민족들이 많은 물의 요란한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린다. 그가 그 무리를 꾸짖으면, 그 무리는 멀리 달아나 바람 앞에 산의 겨처럼, 폭풍 앞에 굴러가는 것처럼 쫓겨날 것이다.이사야 17:13 · 본디새김

방금 전까지 물결처럼 밀려오던 군대가 이제는 바람에 쉽게 흩날리는 가벼운 물체가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군대의 수가 줄어드는 과정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긴 전투나 지휘관들의 전략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의 꾸짖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군사적 요새를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요새는 무너질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거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군대도 한 번의 꾸짖음 앞에서 흩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힘도,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힘도 궁극적인 안전과 지배권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잘못이 심판받는다고 해서 그들을 약탈하는 자들의 행동이 자동으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불신앙을 심판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그 백성을 공격하는 강대국의 오만과 폭력도 제어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는 이사야 10:5–19에서도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앗시리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자기 힘을 자랑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태도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강대국은 자기 군사력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정의로워지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8:7–8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앗시리아 왕과 그의 군대는 강물이 넘쳐흘러 유다에까지 밀려오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17장의 거대한 민족들의 물결도 앗시리아의 군사적 위협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17:12–14에서는 침략하는 민족들의 이름이 직접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반드시 특정한 앗시리아 전쟁 하나에만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본문은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서 바다와 거센 물결을 꾸짖어 제압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표현들을 고려하면, 하나님의 꾸짖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편 106:9에서는 하나님이 갈대바다를 꾸짖어 마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나훔 1:4에서도 하나님이 바다를 꾸짖고 말리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저녁의 공포와 아침의 부재 — 강대국의 위세가 사라지는 순간

이사야 17:14 본문 →

저녁때, 보라, 공포가 닥친다. 아침이 오기 전에 그 무리는 없다. 이것이 우리를 약탈하는 자들의 몫이며, 우리를 노략질하는 자들에게 돌아갈 운명이다.이사야 17:14 · 본디새김

저녁과 아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사야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전투 장면도 없고, 패배한 군대가 어떻게 후퇴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약탈하는 자들’, ‘우리를 노략질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예언은 다마스쿠스와 에프라임과 야곱, 그리고 여러 민족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위협받던 백성의 입장에서 재앙이 사라진 결과를 선언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군대는 바다처럼 밀려옵니다.

그러나 꾸짖음 앞에서 겨처럼 흩어집니다.

저녁에는 공포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아침이 오기 전에 사라집니다.

거대함과 지속성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압도적으로 보이는 힘이 영원히 지속되는 힘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물론 ‘그 무리는 없다’는 표현이 반드시 군대의 모든 병사가 죽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 절에서 이미 멀리 달아나고 쫓겨나는 모습이 나왔으므로, 그 위협이 사라졌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열왕기하 19:35과 이사야 37:36에 기록된 앗시리아 군대의 밤사이 재앙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의 개입으로 앗시리아 군대가 큰 타격을 입는 사건을 전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17:14가 그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그 사건의 확정적인 예언으로만 읽기보다는, 하나님이 위협적인 민족들의 힘을 순식간에 무력화하신다는 주제로 연결하여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오늘의 의미 — 자신이 만든 것을 하나님처럼 의지하지 않기

이사야 17:1–14 본문 →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다시 얼마나 강한 나라가 될 것인가보다, 그들이 누구를 바라보게 될 것인가입니다.

저녁이 되자 수많은 민족의 군대가 밀려옵니다. 그들의 소리는 거센 바다처럼 요란합니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 밤은 길고 두려운 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오기 전에 그 군대는 사라집니다.

그토록 거대했던 힘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 온 땅을 뒤덮을 것 같았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그 대상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만든 이입니다.

저녁의 공포가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옵니다. 거대한 군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의지하던 힘들은 사라질 수 있지만, 그 모든 힘을 심판하시고 제어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그리고 그날, 사람은 다시 자신을 만든 이를 바라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