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무너지는 땅 위에 남는 왕좌
이사야 24장을 읽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땅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이 흩어지고, 도시가 무너집니다. 음악이 멎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한가운데서 노래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해와 달마저 부끄러워하는 가운데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리십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장은 단순히 세상이 멸망하는 모습을 그린 예언이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질서가 무너질 때,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끝까지 남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13–23장은 바벨론, 모압, 이집트, 두로 등 여러 나라를 차례로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24장에서는 특정한 나라의 이름이 사라집니다. 심판의 무대가 한 나라에서 땅 전체로 넓어진 것입니다.
모두가 같아지는 날
땅을 비우시는 하나님
이사야 24장은 숨 돌릴 틈 없이 시작합니다.
보라, 여호와야훼가 땅을 비우고 황폐하게 한다. 그 표면을 뒤틀고 그 주민들을 흩어 버린다.이사야 24:1 · 본디새김
여기서는 어떤 적군이 쳐들어오는지, 어느 왕이 전쟁을 일으키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행동의 주체가 곧바로 드러납니다.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레츠(אֶרֶץ)는 문맥에 따라 특정 지역의 땅을 뜻할 수도 있고,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1절의 낱말 하나만으로 이 장이 지구 전체의 물리적 파괴를 예고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4절의 「세상」, 13절의 「민족들」, 16절의 「땅 끝」, 21절의 「땅의 왕들」을 함께 읽으면, 이 예언의 시야가 한 지역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종이나 그 주인이나, 여종이나 그 여주인이나,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빌려주는 사람이나 빌리는 사람이나, 채권자나 그에게 빚진 사람이나 다 같을 것이다.이사야 24:2 · 본디새김
인간 사회를 조직하는 관계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종교적 지위, 사회적 신분, 경제적 거래와 채무 관계가 모두 등장합니다.
평소에는 이런 관계들이 사람의 처지를 결정합니다. 제사장은 백성과 다른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주인은 종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립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빚진 사람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의 심판 앞에서는 이런 차이가 아무런 특별한 보호막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서 「다 같을 것이다」라는 말은 모두가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심판의 재앙을 함께 겪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 권력 아래 고통받는 사람의 책임을 언제나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지위도 하나님의 판단에서 벗어날 면책 특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땅은 온통 비워지고 모조리 약탈당할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이 말을 했기 때문이다.이사야 24:3 · 본디새김
이사야는 세계의 운명이 강대국이나 부유한 사람들의 손에 최종적으로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의지해 온 질서가 무너질 수 있는 까닭은 그 모든 질서 위에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처럼 철저하게 땅을 비우시는가요? 4–6절은 그 이유를 사람들의 행동에서 찾습니다.
사람의 죄가 땅을 병들게 하다
땅이 인간의 행동 때문에 슬퍼한다
땅이 슬퍼하며 시들었다. 세상이 쇠약해지고 시들었다. 땅의 백성 가운데 높은 자들이 쇠약해졌다.이사야 24:4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땅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사람만 고통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 자체가 쇠약해집니다.
호세아 4:1–3에서는 이스라엘에 진실과 인애가 없고, 사람들이 살인과 거짓을 일삼기 때문에 땅이 슬퍼하며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이 쇠약해진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 모두 인간의 행동과 땅의 상태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땅은 그 주민들 아래에서 더럽혀졌다. 그들이 가르침들을 어기고, 규정을 넘어서고,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이사야 24:5 · 본디새김
본문은 땅이 악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고통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주민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땅이 더럽혀졌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잘못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는 문제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삶을 뒤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언약이 깨졌는가?
5절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 문제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언약이 무엇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입니다.
창세기 9:8–17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후손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물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특히 창세기 9:16에서는 그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의 세계적인 범위와 창세기 9장의 「영원한 언약」이라는 정확한 표현을 고려하면 노아 언약과의 연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창세기 9장에는 생명의 존엄성과 피 흘림에 관한 명령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창세기 9:4–6). 따라서 인간이 생명을 파괴하며 하나님의 질서를 어겼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과 가르침입니다.
5절에는 「가르침들」과 「규정」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들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레위기 18:24–28에서는 사람들의 잘못으로 땅이 더럽혀지고, 결국 땅이 주민들을 토해 낸다는 경고가 나옵니다. 이것은 이사야 24장의 땅이 더럽혀지고 주민들이 흩어지는 장면과 매우 가깝습니다.
본문은 이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명확한 단서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땅에 사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렸고, 그 결과 자신들이 거주하는 세계를 더럽혔다고 선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 할 관계와 질서를 깨뜨린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안에 사는 이들은 죄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땅에 사는 이들이 불탔고, 사람은 아주 조금만 남았다.이사야 24:6 · 본디새김
여기에는 「그러므로」가 두 번 등장합니다. 본문은 심판을 아무 이유 없이 닥친 재난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언약이 깨졌기 때문에 저주가 땅을 삼켰습니다. 주민들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그 수가 줄어듭니다.
심판은 철저하지만 사람이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이 작은 여지가 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음악이 멎은 도시
즐거움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7절부터 이사야는 다시 사람들의 일상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새 포도주가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약해졌다. 마음이 즐겁던 이들이 모두 탄식했다.이사야 24:7 · 본디새김
농작물의 결실과 인간의 기쁨이 함께 무너지는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는 손북과 수금이 등장합니다.
손북의 흥겨움이 그쳤고, 들뜬 이들의 소란이 멎었으며, 수금의 흥겨움이 그쳤다.이사야 24:8 · 본디새김
이사야는 심판을 단순히 사람의 생명이 줄어드는 사건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던 활동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음악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활동입니다. 사람들은 축제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함께 모여 노래하며, 기쁜 일을 축하합니다.
사람들은 노래하며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고, 독주는 그것을 마시는 이들에게 쓸 것이다.이사야 24:9 · 본디새김
같은 음료라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상황이 달라지면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심판이 단순히 외부의 물질적 조건만 바꾸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름 없는 혼돈의 성읍
10절에서는 하나의 도시가 등장합니다.
혼돈의 성읍이 부서졌고, 집집마다 닫혀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이사야 24:10 · 본디새김
앞 장까지는 바벨론, 다마스쿠스, 두로처럼 구체적인 도시와 나라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저 「혼돈의 성읍」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 없는 성읍을 특정한 역사적 도시와 연결하려는 해석들이 있지만, 본문만으로 어느 도시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도시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장의 넓은 시야와 잘 어울립니다. 이 도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거주와 질서의 공간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질서가 깨지고, 사람이 살아가던 도시가 혼돈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이것을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읍에는 황폐함이 남았고, 성문은 두들겨 맞아 폐허가 될 것이다.이사야 24:12 · 본디새김
고대 도시에서 성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로이면서 거래와 공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문이 파괴된다는 것은 단순히 출입 시설 하나가 부서진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도시를 하나의 공동체로 기능하게 하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선이 도시의 폐허를 벗어나 밭과 과수원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2에서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있었다고 말할 때 이 낱말이 사용됩니다. 이사야 24장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그대로 거꾸로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창조와 관련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점은 중요합니다.
남겨진 작은 무리와 땅 끝에서 들려오는 노래
수확이 끝난 나무에 남은 열매
땅 한가운데서, 민족들 가운데서 사람들이 올리브나무의 열매를 털고 난 뒤처럼, 포도 수확이 끝나면 남는 송이들처럼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24:1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에서 「사람은 아주 조금만 남았다」고 했던 6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올리브나무의 열매를 털면 대부분의 열매가 떨어집니다. 포도를 수확한 뒤에는 포도나무에 소량의 송이가 남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일차적인 의미는 생존자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확의 이미지에는 또 다른 가능성도 담겨 있습니다.
다 거두어들인 뒤에도 무언가가 남습니다. 심판이 지나간 세계가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6:13에서는 나무가 베인 뒤에도 그루터기가 남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사야 10:20–22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들에 나오는 남은 자들과 24:13의 사람들이 정확히 동일한 집단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 속에서도 일부가 남는다는 공통된 주제는 분명합니다.
멎었던 음악과 새롭게 들려오는 찬양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환호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위엄 때문에 바다 쪽에서 기뻐 외칠 것이다.이사야 24:14 · 본디새김
7–12절에서는 음악이 멎었습니다. 손북과 수금의 소리가 사라졌고, 거리에는 즐거운 노래 대신 울부짖음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노래가 시작됩니다.
앞에서는 포도주와 축제의 즐거움이 노래의 배경이었습니다. 지금은 「여호와야훼의 위엄」 때문에 환호합니다.
기쁨의 근거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줍니다.
13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언급한 뒤 14절이 「그들은」이라고 시작하므로, 남은 사람들이 찬양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그들의 정확한 정체와 거주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동쪽에서 여호와야훼를 영화롭게 하라. 바다의 해안들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이사야 24:15 · 본디새김
「바다 쪽」은 이스라엘 땅을 기준으로 서쪽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다 쪽에서 시작된 환호가 동쪽과 해안들로 확대됩니다. 16절에서는 그 노래가 「땅 끝」에서 들립니다.
심판은 땅 전체를 향했지만, 찬양 역시 땅 끝까지 울려 퍼집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왜 함께 기뻐하지 않는가?
16절은 이 장에서 가장 예상 밖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땅 끝에서 우리는 노래들을 들었다. 「의로운 이에게 영예를.」 그러나 나는 말했다. 「나는 야위어 간다, 나는 야위어 간다. 아, 나는 참담하다. 배신자들이 배신했다. 배신자들이 배신에 배신을 거듭했다.」이사야 24:16 · 본디새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들려온다고 해서 인간의 배신이 이미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찬양이 시작되는 것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노래가 들리는 동안에도 배신이 계속되고, 그 때문에 예언자가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과, 세상에 여전히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찬양은 그 악을 부정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또한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언제나 즐거운 표정으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찬양이 들린다고 해서 모든 탄식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에서 예언자는 두 현실을 함께 듣고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위엄을 찬양하는 목소리와, 인간의 배신으로 무너지는 세계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무너짐은 더욱 거대한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동쪽」(אוּ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빛과 관련된 말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해가 떠오르는 방향인 동쪽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한 지역 범위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6절의 「의로운 이」가 누구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를 가리킨다고 읽으면, 땅 끝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찬양하는 노래가 됩니다. 앞뒤 문맥이 여호와야훼의 위엄과 통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의로운 사람이나 의로운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심판 가운데 남은 의로운 이들에게 영예가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은 그 대상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한쪽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히브리어는 배신을 뜻하는 같은 어근을 여러 번 반복하여 그 행동의 심각성과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도망칠 곳이 사라지고 땅의 기초가 흔들리다
공포에서 달아나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
땅에 사는 자야, 공포와 구덩이와 덫이 네게 닥친다.이사야 24:17 · 본디새김
공포의 소리를 피해 달아나는 자는 구덩이에 떨어지고,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자는 덫에 걸릴 것이다. 높은 곳의 창문들이 열렸고, 땅의 기초들이 흔들렸기 때문이다.이사야 24:18 · 본디새김
이 장면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상황에서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빠져나갈 길을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위와 아래의 안정성이 모두 사라지는 장면입니다.
반역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땅
19–20절은 흔들리는 땅을 세 번에 걸쳐 묘사합니다.
땅이 산산이 부서졌다. 땅이 쩍쩍 갈라졌다. 땅이 몹시 흔들렸다.이사야 24:19 · 본디새김
짧은 문장들이 반복됩니다. 마치 땅의 붕괴를 연속해서 목격하는 것 같습니다.
땅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흔들리고, 초막처럼 이리저리 흔들릴 것이다. 그 땅의 반역이 그 위를 무겁게 짓누르니, 땅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4:20 · 본디새김
평소 사람들은 땅을 흔들리지 않는 기반으로 생각합니다. 건물이 무너지더라도 땅은 남아 있고, 사람이 쓰러지더라도 땅은 그를 받쳐 줍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바로 그 땅 자체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반역한 일이 그들이 살아가는 땅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땅이 더는 버티지 못합니다.
인간의 반역은 그들 자신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던 세계까지 무너뜨리는 무게가 됩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지진이나 자연재해가 그 지역 주민들의 특정한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24장은 예언적 환상 안에서 세계적 심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개별 재해의 원인을 판정하는 일반 법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본문은 땅 위에서 벌어지는 심판을 넘어, 높은 곳의 세력들에게까지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공포와 구덩이와 덫」의 세 낱말은 매우 비슷한 소리를 냅니다. 소리가 점점 짧아지는 듯한 이 세 단어가 연달아 등장하면서, 독자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 바짝 다가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레미야 48:43–44에서도 모압을 향해 공포와 구덩이와 덫이 선언됩니다. 비슷한 표현이 한 나라의 심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만, 이사야 24장에서는 그 대상이 「땅에 사는 자」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7:11에서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리면서 홍수가 시작됩니다. 다만 이사야가 노아 때와 똑같은 홍수가 다시 일어난다고 예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홍수 이야기의 언어를 사용하여 심판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은 모든 살아 있는 생물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24장에서는 사람들이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다고 선언하며, 다시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초막은 견고한 건물이 아닙니다. 밭이나 포도원에 임시로 세운 가벼운 구조물로, 외부의 힘에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또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지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땅의 붕괴를 매우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사야 25–27장에서는 민족들이 등장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새로운 구원의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을 땅이 영원히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설명으로만 좁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존 질서가 스스로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높은 곳의 군대와 땅의 왕들이 함께 심판받다
그날에 여호와야훼가 높은 곳의 군대를 높은 곳에서, 땅의 왕들을 땅 위에서 벌할 것이다.이사야 24:21 · 본디새김
하늘의 높은 곳도, 땅 위의 왕좌도 여호와야훼의 권세 밖에 있지 않습니다.
특히 4절에서 쇠약해졌던 「높은 자들」(מָרוֹם)과 21절의 「높은 곳의 군대」에는 히브리어로 높음을 나타내는 같은 낱말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땅의 높은 자들이 쇠약해졌습니다. 이제는 높은 곳의 군대까지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은 죄수들을 구덩이에 모아 놓듯 한데 모여, 감옥에 갇힐 것이다. 많은 날이 지난 뒤에 벌을 받을 것이다.이사야 24:22 · 본디새김
18절에서는 심판을 피하려던 사람이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22절에서는 심판받는 세력들이 구덩이에 갇힌 죄수처럼 모입니다. 구덩이는 이제 도망치다 빠지는 함정에서 심판받는 이들이 갇히는 장소로 확장됩니다.
세상을 다스린다고 여겨졌던 존재들이 오히려 죄수처럼 갇힙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권력이 무너진 뒤 누가 다스리는가요?
조금 더 깊이
「높은 곳의 군대」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하늘의 별들과 같은 천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하늘에 속한 영적 존재들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 4:19에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의 군대로 언급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천체들이 신적인 존재와 연결되어 숭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 24:21을 하늘의 세력과 땅의 통치자들이 함께 심판받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높은 곳의 군대를 구체적인 천사 집단이나 특정한 악한 존재들의 이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많은 날이 지난 뒤에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그들의 처벌이 즉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마지막 동사는 문맥에 따라 살피거나 찾아오는 의미도 가질 수 있으므로, 그 후의 구체적인 처리 방식과 최종 운명을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달과 해가 부끄러워하는 왕의 영광
달은 수치를 당하고, 해는 부끄러워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의 장로들 앞에 영광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24:23 · 본디새김
해와 달도 여호와야훼의 영광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해와 달은 고대 사람들이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천체입니다. 사람들은 해와 달을 통해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이해했습니다. 또한 고대 근동의 여러 문화에서는 해와 달이 신적인 권위와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그 모든 빛보다 크다는 시적 선언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눈에 가장 밝고 위대한 것처럼 보이는 대상마저 여호와야훼의 영광 앞에서는 그 위엄을 주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의 중심은 해와 달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다스릴 것이며」라는 선언입니다.
무너지는 땅과 흔들리지 않는 통치
앞에서 여러 나라에 대한 신탁이 이어졌고, 이제 땅 전체가 심판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세계적 심판의 마지막에 시온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장면에 사람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군대나 상인이나 세계의 통치자들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의 장로들」입니다.
이사야가 마지막에 보여 주는 장면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모두 없애 버리시고 홀로 계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분이 왕으로 다스리시고, 그분의 장로들 앞에 영광이 있는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서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통치와 가르침이 드러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사야 2:2–4에서는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시온으로 모여듭니다. 여호와야훼는 민족들 사이를 판단하시고,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듭니다. 이사야 24장의 마지막은 그와 같은 통치의 전망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평화로운 순례의 장면보다, 모든 권력이 심판받은 뒤 드러나는 여호와야훼의 왕권이 강조됩니다. 이 장로들이 누구인지는 본문이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4:9–11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모세와 아론,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 일흔 명이 올라가 하나님을 뵙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십니다. 이사야 24:23의 장로들을 출애굽기의 그 장로들과 직접 동일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대표자들 앞에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주제적 연결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시온을 중심으로 펼쳐질 잔치의 장면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이사야 25:6).
땅이 흔들리는 동안에도
처음에 땅을 비우시던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왕으로 다스리십니다. 처음에 사람들이 흩어졌지만, 마지막에는 그분의 영광 앞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땅 끝에서 들려오던 찬양에 이어,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고통과 불의를 못 본 척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고통이 최종적인 현실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달은 수치를 당하고 해는 부끄러워합니다. 하늘에서 가장 밝은 빛조차 그분의 영광 앞에서는 자신의 위엄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에는 그 영광을 바라보는 장로들이 있습니다.
무너지는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왕이 세운 제국의 백성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영광 앞에 있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이 장은 땅이 얼마나 크게 흔들리는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온에서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왕으로 다스리시고, 그분의 장로들 앞에 영광이 있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