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잊힌 도시와 하나님께 돌아가는 부

어떤 도시가 세계 무역의 중심지라고 생각해 봅니다. 먼 나라에서 곡식이 들어오고, 그곳의 상인들은 여러 왕국을 오가며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조차 그 도시의 상인들을 존중합니다. 바다는 그 도시를 세상과 연결하는 길이며, 배가 들어올 때마다 부가 쌓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시가 무너집니다.

이사야 23장은 그런 도시, 두로를 향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두로의 상업 활동을 창녀가 몸을 파는 일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사의 수입이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에게 속한 거룩한 것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사야 23장의 관심은 부유한 도시가 어떻게 무너지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도시의 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에도 있습니다.

이 장은 이사야 13장부터 이어진 여러 민족에 관한 신탁의 마지막에 놓입니다. 앞 장에서는 예루살렘이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두로가 등장합니다. 정치와 군사에 이어 경제적 번영까지, 사람들이 의지하는 힘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623장 본문 읽기 →

두로가 무너지자 바다 건너에서 통곡이 시작되다

이사야 23:1–5 본문 →

무너진 도시의 모습이 아니라, 소식을 듣는 사람들부터 보여 주다

이사야는 두로의 멸망을 직접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두로에 관한 신탁. 통곡하라, 타르시스의 배들아. 그곳이 파괴되어 집도 들어갈 곳도 없기 때문이다. 키팀 땅으로부터 그들에게 이 일이 알려졌다.이사야 23:1 · 본디새김

그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과 상인들의 슬픔을 배 자체에 옮겨 놓은 시적 표현입니다. 보통 한 도시가 무너지면 성벽과 건물의 파괴가 먼저 묘사됩니다. 하지만 두로의 경우에는 그 도시와 연결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모습이 먼저 나옵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동쪽 해안에 자리했던 페니키아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해상 항해와 무역에 능했고, 지중해 곳곳에 교역망과 정착지를 형성했습니다.

「집도 들어갈 곳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은 파괴의 결과를 압축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시설이 사라졌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적어도 그 배들이 의지하던 항구 도시의 기능이 무너졌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나일강의 곡식이 두로의 부가 되다

2–3절에서는 그 연결망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넓은 물길로 들어온 시호르의 곡식, 나일강의 수확물이 그 성읍의 수입이었다. 그 성읍은 여러 민족의 교역장이 되었다.이사야 23:3 · 본디새김

두로는 곡식을 생산하는 농업 중심지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두로를 거쳐 이동했고, 두로는 그 교역을 통해 부유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두로가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히 한 도시의 재산이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두로를 거쳐 움직이던 물품과 사람, 여러 지역의 경제적 관계가 흔들리는 사건입니다.

5절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두로의 소식을 듣고 몸부림치는 이유도 여기에서 이해됩니다. 이집트는 두로에 곡물을 공급하던 지역입니다. 두로의 몰락은 이집트와 무관한 외국의 재앙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여기서 뜻밖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처럼 말하는 바다

부끄러워해라, 시돈아.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산고를 겪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지도 않았으며, 젊은이들을 길러 내지도, 처녀들을 키우지도 않았다.」이사야 23:4 · 본디새김

한때 많은 사람으로 가득했던 세계가 이제 아무도 낳거나 기르지 않은 것처럼 황량해집니다. 젊은이들과 처녀들은 한 도시의 현재 인구일 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한 인구 감소를 넘어, 그 도시가 이어 갈 생명과 미래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무역의 번영으로 가득했던 공간이 상실의 공간으로 바뀐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타르시스」는 멀리 떨어진 해상 교역 지역을 가리킵니다. 흔히 지중해 서쪽과 연결하여 이해하지만, 이 본문만으로 정확한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타르시스의 배들」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대형 상선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열왕기상 10:22 참조). 「키팀」은 기본적으로 키프로스와 관련된 명칭입니다. 구절에 따라 그 주변의 지중해 지역까지 가리키는 범위가 넓어질 수도 있습니다. 「시호르」가 정확히 나일강의 어느 물길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나일강의 수확물」과 나란히 등장하므로, 여기서는 이집트의 풍부한 곡물 생산과 연결됩니다. 「바다」와 「바다의 요새」를 두로의 해상 환경 및 요새화된 도시를 의인화한 표현으로 볼 수 있고, 바다 자체가 도시와 주민을 잃은 상실감을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세계가 존중하던 상인들을 누가 낮추는가

이사야 23:6–9 본문 →

오래된 도시도 자기 역사를 보장할 수 없다

6절은 타르시스로 건너가라는 명령을 전합니다.

이것은 도시의 파괴 이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서 7절은 두로의 오랜 역사를 회상합니다.

이것이 흥겨워하던 너희 성읍이냐, 그 시작이 아득한 옛날에 닿아 있는 성읍이냐? 그 발이 그 성읍을 먼 곳으로 데려가 나그네로 살게 할 것이다.이사야 23:7 · 본디새김

이 질문에는 놀라움과 조롱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두로는 어제 생겨난 도시가 아닙니다. 오랜 역사와 해상 교역의 전통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그 세월 동안 사람들은 항해 기술을 발전시켰고, 여러 지역과의 관계를 축적했으며, 자신들의 명성을 세웠습니다.

해상 활동의 넓은 범위가 그 도시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먼 곳으로의 이동은 더 이상 영광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때 두로의 힘이었던 바깥 세계와의 연결이, 이제는 그 도시의 불안정함을 드러내는 배경이 됩니다.

왕관을 씌워 주던 도시

8절은 두로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여 묘사합니다.

왕관을 씌워 주던 두로를 두고 누가 이런 일을 계획했느냐? 그 성읍의 상인들은 통치자들이었고,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서 존중받는 이들이었다.이사야 23:8 · 본디새김

「왕관을 씌워 주던」이라는 표현은 두로가 지닌 특별한 영향력을 드러냅니다. 이 표현은 두로가 다른 통치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높은 위상을 가진 도시였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보통 통치자는 군대와 영토를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로에서는 상업 활동으로 영향력을 얻은 사람들이 통치자들과 비견됩니다.

그토록 강력한 도시의 몰락을 도대체 누가 계획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그것을 계획했다. 모든 화려함의 교만을 욕되게 하고, 세상에서 존중받는 모든 이를 하찮게 만들려고 했다.이사야 23:9 · 본디새김

두로의 몰락은 세상에서 더 강한 국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그 사건 너머에서 여호와야훼의 계획을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화려함이 아니라 화려함의 교만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아름다운 건물과 축적한 부, 오래된 역사와 높은 명성이 그 자체로 모두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인간을 스스로 높아진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8절에서는 두로의 무역상들이 「세상에서 존중받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세상에서 존중받는 모든 이」를 낮추려고 계획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의 경제력과 영향력이 존경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 앞에서는 그 지위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존중하는 지위와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한 지위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9절은 「모든 화려함의 교만」과 「세상에서 존중받는 모든 이」를 말합니다. 두로는 한 도시지만, 그 도시를 향한 심판은 세상 전체의 권력과 영광을 향한 말씀으로 확대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그 발」이 성읍을 먼 곳으로 데려간다는 표현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는 앞으로 닥칠 추방과 유랑입니다. 도시가 무너지면서 주민들이 먼 땅에서 나그네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래전부터 두로가 바다를 건너 먼 지역으로 진출해 온 역사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두로의 상인들과 정착민들이 여러 지역에 거주해 온 사실과 어울립니다. 본문의 동사 형태만으로 두 읽기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다를 다스리는 하나님 앞에서 피할 곳을 찾다

이사야 23:10–14 본문 →

띠가 풀린 타르시스

10절에서는 시선이 다시 타르시스로 향합니다.

타르시스의 딸아, 나일강처럼 네 땅을 가로질러 가라. 더는 옭아매는 띠가 없다.이사야 23:10 · 본디새김

「나일강처럼 네 땅을 가로질러 가라」는 표현은 물이 제약 없이 흐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띠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두로의 지배력이나 통제력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타르시스는 이제 이전처럼 두로와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는 질서와 결속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두로라는 중심이 사라지면서 그와 연결된 지역들이 흩어지거나 제약 없이 움직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은 두로의 몰락이 다른 지역들의 질서까지 바꾸어 놓는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어 왕국들을 떨게 했다. 여호와야훼가 가나안에 대하여 그 요새들을 없애라고 명령했다.이사야 23:11 · 본디새김

두로에게 바다는 번영의 기반이었습니다.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먼 나라까지 항해할 수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으며, 여러 민족을 연결하는 거대한 교역망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야훼가 바로 그 바다 위로 손을 뻗으십니다.

바다와 연결된 여러 왕국의 운명까지 여호와야훼의 권세 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가나안」은 이 문맥에서 페니키아의 해안 지역을 포함하는 명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상업 세계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두로의 요새는 사람들의 눈에 견고해 보였을 것입니다. 특히 바다를 이용한 지리적 이점은 도시를 보호하는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바다 자체가 여호와야훼의 통치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키팀에 가도 쉼이 없다

12절에서는 시돈의 딸에게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가 말했다. 「학대받은 처녀인 시돈의 딸아, 너는 더 이상 흥겨워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 키팀으로 건너가라. 거기서도 네게 쉼이 없을 것이다.」이사야 23:12 · 본디새김

시돈과 두로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페니키아의 도시들입니다. 이사야는 두 도시를 번갈아 부르며 그 지역 전체의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학대받은 처녀」라는 표현은 도시가 겪는 굴욕과 고통을 드러냅니다. 도시를 여성으로 의인화하는 것은 예언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처음에는 키팀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이제는 키팀으로 도망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쉼이 없습니다.

멀리 갈 수 있다는 것과 안전하게 머물 수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13절은 이런 경고를 다른 나라의 운명과 연결합니다.

보라, 칼데아인들의 땅을. 그 땅의 백성은 없어졌다. 앗시리아가 그 땅을 들짐승들의 터로 삼았다. 앗시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공성탑들을 세우고 칼데아 땅의 궁전들을 헐어 버렸다. 앗시리아가 그 땅을 폐허로 만들었다.이사야 23:13 · 본디새김

한때 존재하던 도시와 백성도 군사적 공격으로 황폐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은 첫 구절을 그대로 떠올리게 합니다.

통곡하라, 타르시스의 배들아. 너희의 요새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이사야 23:14 · 본디새김

배들이 항해하던 바다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던 요새와 교역의 중심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15절부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은 이 장에서 원문의 해석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히브리어의 문장 연결과 대명사의 지시 대상이 불분명하여, 누가 공성탑을 세우고 어떤 도시의 궁전을 헐었는지 확실하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은 앗시리아가 칼데아인들의 땅을 파괴했다는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이 구절은 두로가 다른 지역의 운명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을 근거로 두로를 무너뜨린 세력이나 정확한 연대를 특정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 자체가 그만큼 분명하지 않습니다.

잊힌 창녀가 다시 노래를 부르다

이사야 23:15–17 본문 →

일흔 해 동안 잊히는 도시

그날에 두로는 한 왕의 시대에 해당하는 일흔 해 동안 잊힐 것이다. 일흔 해가 끝나면 두로에는 이런 창녀의 노래가 들어맞을 것이다.이사야 23:15 · 본디새김

여기서 중요한 변화는 「파괴」에서 「잊힘」으로의 전환입니다.

두로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 상인들이 존중받고, 그 영향력이 널리 알려진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가 이제는 기억조차 되지 않습니다.

일흔 해가 끝나면 두로는 다시 세상의 관심을 얻으려 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이유

16절은 짧은 노래를 소개합니다.

「잊힌 창녀야, 수금을 들고 성읍을 돌아다녀라. 솜씨 좋게 연주하고 노래를 많이 불러라. 네가 기억되도록.」이사야 23:16 · 본디새김

여기서 두로는 창녀에 비유됩니다. 이어지는 17절을 보면, 세상의 여러 왕국과 상업적 관계를 맺고 그 대가를 얻는 두로의 활동을 음행에 비유한 것입니다.

두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와 주어야 번영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교역 상대가 떠나가면 두로의 부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잊힌 창녀가 다시 손님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노래하듯, 두로도 세상의 관심을 되찾으려고 합니다.

앞에서 두로의 상인들은 통치자들처럼 존경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도시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노래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1절과 14절에서 배들은 통곡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16절에서는 창녀가 노래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통곡이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두로를 다시 찾아오시는 분

17절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주어가 등장합니다.

칠십 년이 끝나면 여호와야훼가 두로를 찾아올 것이다. 두로는 다시 몸 판 삯을 받는 일로 돌아가, 온 땅 위에 있는 세상의 모든 왕국과 음행할 것이다.이사야 23:17 · 본디새김

하나님의 방문을 곧바로 두로의 회개나 영적 갱신과 동일시하면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 앞서 나가게 됩니다. 이사야는 두로의 내면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음 절에서 두로가 벌어들인 수입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일흔 해를 실제 기간으로 이해할 수 있고, 「한 왕의 시대」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한 시대의 길이를 나타내는 수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이 누구인지, 일흔 해가 정확히 어느 해부터 어느 해까지인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만으로 두로의 역사에서 특정한 칠십 년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찾아올 것이다」는 하나님이 어떤 대상을 주의 깊게 살피시고 그 운명에 개입하시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두로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녀의 삯이 거룩한 것이 되다

이사야 23:18 본문 →

그 성읍의 교역 이익과 몸 판 삯은 여호와야훼에게 속한 거룩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쌓이거나 비축되지 않을 것이다. 그 교역 이익은 여호와야훼 앞에 사는 이들이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는 데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23:1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이사야 23장 전체의 방향을 바꿉니다.

① 교역 이익이 쌓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두로의 상업적 활동이 계속되는 것만으로는 이 장의 결말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두로가 다시 부자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관심이었다면, 그 도시의 경제가 회복된다는 17절에서 이야기를 끝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한 절을 더 덧붙여 그 부가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지 말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 변화는 두로가 다시 돈을 벌게 된다는 사실보다, 그 돈이 더 이상 두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축적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② 거룩함은 물건의 종류만이 아니라 그 물건이 속한 분과도 관련된다

18절의 「거룩한 것이 될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거룩함은 여호와야훼께 속하도록 구별된다는 뜻을 갖습니다.

구약에서 어떤 것이 거룩하다고 불리는 것은 그 자체가 남다른 성질의 물건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별되었다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방 도시의 상업 수입이 거룩한 것으로 선언됩니다.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에만 관심을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먼바다를 항해하는 상인들의 활동과 이방 도시가 벌어들이는 수입까지도 자신의 목적 아래 두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③ 그렇다면 두로는 회복된 것인가?

본문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두로의 내면적 변화보다 그 재물이 새로운 목적에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결말에는 회복과 심판의 의미가 함께 남아 있습니다. 두로의 상업 활동은 다시 시작되지만, 두로는 더 이상 자기 영광이 모든 것의 중심인 것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재물을 좋은 일에 사용하기만 하면 그 재물을 얻는 모든 방식이 정당화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은 경제 윤리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법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도시의 부가 어떤 운명을 맞는지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④ 그 부를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18절에서는 교역 이익이 「여호와야훼 앞에 사는 이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두로의 부에 관해 앞에서는 왕관과 통치자들, 세상에서 존중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나옵니다.

부를 통해 누리는 영광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이사야서 전체에서 두로의 마지막 장면이 갖는 의미

이사야 19장에서는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이스라엘과 함께 여호와야훼의 복에 참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이사야 19:23–25). 그 본문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를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아시리아를 「내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사야 23장에서도 이방 도시의 운명은 파멸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두로의 부가 여호와야훼께 속하게 됩니다.

19장에서는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23장에서는 이방 도시의 교역 수입이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 됩니다. 이처럼 이사야서는 여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면서도, 그 민족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목적 밖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60:5에서는 바다의 풍부함과 여러 민족의 재물이 시온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60:9에서는 먼 섬들과 타르시스의 배들이 등장합니다. 60:11에서는 여러 민족의 재물이 들어오도록 성문이 열려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두 본문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과 성취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제적 연결은 분명합니다. 민족들의 부와 바다의 교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3:18에서는 실제 성매매의 대가를 여호와야훼의 집에 서원 예물로 가져오는 일을 금지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23:18에서는 창녀의 삯으로 비유된 두로의 교역 수입이 여호와야훼께 거룩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본문 사이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독자가 주목할 만한 강한 긴장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실제 성매매의 수입도 하나님께 바치면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몸 판 삯」은 두로의 교역 활동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본문은 실제 성매매 수입에 관한 율법을 폐지하는 규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 앞에 사는 이들」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또는 더 넓게 여호와야훼의 임재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만을 가리키는지,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 전체를 포함하는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통곡하던 배들과 다시 울려 퍼지는 노래

이사야 23:1–18 본문 →

하나님은 두로의 부를 심판하시면서도, 그 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한때 세상의 존경을 받던 상인들은 낮아지지만, 그들이 축적하던 재물은 새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그러나 두로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통곡이 아닙니다.

한 여인이 수금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는 아직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손님들을 되찾기 위한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도시를 여호와야훼가 다시 찾아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무너진 항구를 향해 배들이 통곡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는 장면이 남습니다. 두로가 축적한 것은 부였지만, 여호와야훼가 마지막에 보여 주시는 것은 그 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