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정작 보아야 할 분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위기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무기고를 살피고, 무너진 성벽을 조사하고, 물을 확보하고, 집을 헐어 방어 시설을 보강했습니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모든 준비를 묘사한 뒤 뜻밖의 말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이를 바라보지 않았고, 오래전에 그것을 빚은 이를 보지 않았다.」

이사야 22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읍 전체를 향한 심판의 말씀에 이어, 왕궁을 관리하는 셉나와 그를 대신할 엘리아김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국가의 위기와 개인 관리의 교체가 서로 무관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장면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질문이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은 무엇을 의지하여 자신을 지키려 했습니까?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자신의 영광과 안전의 근거로 삼으려 했습니까?

성벽과 무덤, 왕궁의 열쇠와 벽에 박힌 말뚝까지, 이 장에 등장하는 물건들은 모두 그 질문을 향합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722장 본문 읽기 →

환상의 골짜기에서 벌어진 이상한 축제

이사야 22:1–4 본문 →

환상을 보는 곳에서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하다

이 장은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신탁」이라는 낯선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본문을 조금만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9절에 다윗 성이, 10절에 예루살렘이 직접 등장합니다. 외국 민족을 향한 심판 선언들이 이어지는 이사야 13–23장 한가운데, 이번에는 예루살렘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바벨론과 모압과 이집트를 향해 말씀하셨던 여호와야훼가 이제 자기 백성의 도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을 판단하는 안전한 관찰석에 앉아 있지 않습니다. 그 도시 역시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서 있습니다.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신탁.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기에 네가 온통 지붕들로 올라갔느냐?이사야 22:1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선포되어 온 도시입니다. 이사야 자신도 이 도시와 유다에 관한 환상을 받은 사람입니다(이사야 1:1). 그런데 지금 이 도시의 사람들은 자기들 앞에 닥친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란으로 가득한 너, 떠들썩한 성읍, 들뜬 도시야. 네 죽임당한 이들은 칼에 죽임당한 이들이 아니며, 전쟁에서 죽은 이들도 아니다.이사야 22:2 · 본디새김

뒤에 나오는 13절의 잔치와 연결해 읽으면, 도시가 위기 속에서도 들떠 있었다는 인상이 강해집니다. 핵심은 죽음이 발생한 방식의 세부 사항보다, 도시가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맞서다 쓰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지휘관들은 함께 달아났다가 사로잡힙니다. 활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붙잡히고, 멀리 도망친 사람들까지 포로가 됩니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사람들이 싸움의 중심에 서 있지 않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도시를 지켜야 할 지도력 자체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러한 장면을 보고 단순히 백성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했다. 「내게서 눈을 돌려라. 나는 쓰라리게 울겠다. 딸인 내 백성의 파멸을 두고 나를 위로하려 서두르지 마라.」이사야 22:4 · 본디새김

「딸인 내 백성」이라는 표현에는 친밀함이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에게 예루살렘의 재앙은 멀리 떨어진 외국 도시의 몰락을 구경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백성이 무너지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과, 심판받는 사람을 향한 슬픔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예루살렘은 산지에 자리한 도시지만, 주변 산들과 도시 내부의 골짜기를 생각하면 골짜기라는 표현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시편 125:2 참조). 다만 이 명칭이 특정 골짜기의 정확한 지리적 이름인지, 예언적 의미를 담은 시적 명칭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집에는 평평한 지붕이 흔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쉬거나 모이기도 했고,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을 내려다볼 수도 있었습니다. 적군을 살피고 있었을 수도 있고, 어떤 사건에 반응해 모였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1절의 지붕 위 소란이 13절의 잔치와 정확히 동일한 사건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포위된 도시에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그런 상황의 묘사로 읽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직접적인 사망 원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아시리아의 위협은 이사야 36–37장과 연결되며, 도망한 지도자들의 체포는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 당시의 상황과도 닮아 있습니다(열왕기하 25:4–7). 그렇지만 이사야 22장에는 연대나 왕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환상의 모든 세부 사항을 어느 한 차례의 포위전에 확정적으로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성벽을 바라보는 사람들

이사야 22:5–11 본문 →

도시를 둘러싼 전쟁과 벗겨진 덮개

5절에서 시선은 도시 내부에서 도시 바깥으로 옮겨 갑니다.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 속한 날, 소란과 짓밟힘과 혼란의 날이 있기 때문이다. 담이 허물어지고, 산을 향해 외침이 울리는 날이다.이사야 22:5 · 본디새김

이사야는 외국 군대의 침입을 하나님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독립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군사적 위기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예루살렘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엘람은 화살통을 메고, 키르는 방패를 드러냅니다. 병거와 기병들이 예루살렘 주변의 좋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성문을 향해 진을 칩니다.

도시 밖의 열린 공간이 모두 적군의 활동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가 유다의 덮개를 벗겼다. 그날 너는 숲의 집에 있는 무기를 바라보았다.이사야 22:8 · 본디새김

여기서는 유다를 보호하던 덮개가 제거되어 위험 앞에 노출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숲의 집」은 솔로몬이 지은 「레바논 숲 집」과 연결됩니다. 열왕기상 7:2–5는 이 건물이 많은 백향목 기둥으로 지어졌다고 설명하며, 열왕기상 10:16–17은 그곳에 금 방패들을 두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무기를 확인하고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군사적 수단을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지 않았는가

9–11절은 방어 준비 과정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다윗 성의 성벽에 틈이 얼마나 벌어졌는지 살핍니다. 아래 못의 물을 모읍니다. 예루살렘의 집들을 세어 보고, 성벽을 보강할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집들을 헙니다. 두 성벽 사이에는 물을 저장할 시설을 만듭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적이 들어올 수 있고, 도시의 물 공급이 끊기면 성벽이 버텨도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집들을 허물어 성벽을 보수한다는 것은 주민의 일상적 생활공간까지 군사적 방어에 동원할 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방어 활동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옛 못의 물을 모으려고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이를 바라보지 않았고, 오래전에 그것을 빚은 이를 보지 않았다.이사야 22:11 · 본디새김

특히 8절의 「바라보다」(⁨נָבַט⁩)와 11절의 「바라보지 않았다」, 9절의 「보았다」(⁨רָאָה⁩)와 11절의 「보지 않았다」는 히브리어에서도 각각 같은 동사를 반복하는 대조입니다.

이사야가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이 바라본 것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들의 시선이 멈춘 자리입니다.

그들은 성벽의 균열을 알아냈지만, 그 도시가 왜 이런 위기를 맞고 있는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물을 확보하는 방법을 찾았지만, 자신들의 생존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11절의 「그것을 만든 이」와 「그것을 빚은 이」가 무엇을 만들고 빚었다는 뜻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고 돌보신 일, 물을 포함한 생존의 조건을 마련하신 일, 또는 지금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을 오래전부터 계획하신 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11절이 가리키는 분은 궁극적으로 여호와야훼이며, 사람들이 자기들의 방어 활동을 하나님의 역사와 분리하여 바라보았다는 것이 책망의 핵심입니다.

이사야 5:12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즐기고 잔치를 벌이지만, 여호와야훼가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위기의 날에 백성이 어떻게 응답하기를 바라셨습니까?

조금 더 깊이

엘람은 메소포타미아 동쪽에 자리했던 지역으로, 이사야 21:2에도 등장합니다. 키르는 아람 사람들의 이동과 관련하여 열왕기하 16:9과 아모스 9:7에 언급됩니다. 다만 22장의 키르를 고대 지도의 어느 지점에 정확히 놓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 덮개가 구체적으로 군사적 방어를 가리키는지, 여호와야훼의 보호를 비유하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이제 유다가 더 이상 안전하게 가려져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8절의 「그가」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 날이 여호와야훼에게 속한다고 했으므로 여호와야훼의 행동으로 읽을 수 있지만, 군사적 공격의 결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열왕기하 20:20과 역대하 32:2–5, 30에는 히스기야가 물 공급과 성벽 보강에 힘쓴 사실이 나옵니다. 이사야 22장의 묘사는 그런 역사적 방어 활동과 잘 어울립니다. 다만 11절의 저수지를 이 기록들에 나오는 특정 시설과 동일시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에」라는 표현은 특히 하나님의 오래된 계획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사야 37:26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오래전에 계획하신 일을 역사 속에서 이루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위협했을 때, 히스기야는 적군의 편지를 여호와야훼 앞에 펼쳐 놓고 기도합니다(이사야 37:14–20). 그는 군사적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적군의 위협과 여러 민족이 겪은 파멸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여호와야훼 앞에 가져갑니다. 이 두 장면을 연결하면, 이사야가 말하는 신뢰가 현실에 눈을 감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울어야 할 날에 잔치를 벌이다

이사야 22:12–14 본문 →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과 사람들이 선택한 것

12절과 13절은 매우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날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는 울고 통곡하고, 머리를 밀고 굵은 베를 두르라고 촉구했다.이사야 22:12 · 본디새김

머리를 밀거나 굵은 베옷을 입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슬픔과 애도, 낮아짐을 나타내는 행위였습니다. 자신들이 마주한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지금까지의 태도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은 정반대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보라, 환희와 기쁨이 있었다. 소를 죽이고 양과 염소를 잡으며,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우리가 죽을 테니.」이사야 22:13 · 본디새김

「내일이면 우리가 죽을 테니」라는 말에는 죽음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앞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의미를 깨달으라고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려고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내 귀에 밝혔다. 「너희의 이 죄악은 너희가 죽을 때까지 결코 속죄되지 않을 것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이사야 22:14 · 본디새김

바로 앞 문맥을 보면 살인이나 우상숭배 같은 특정 범죄가 새롭게 고발된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동을 외면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신 애도에 잔치로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부르고 계시는데도, 그 부름 자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전체를 향한 신탁이 끝납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도시의 한 관리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주제가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앞에서 드러난 도시 전체의 태도가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들의 잔치는 여러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위 상황에서 두려움을 잊으려는 행동일 수도 있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마지막 순간을 즐기려는 체념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내면을 더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습니다. 14절의 표현은 히브리어 맹세 문형에서 사용되는 강한 부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막연하게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죽음 이후의 상태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는지도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선언의 초점은 지금 백성 앞에 놓인 죄악의 심각성에 있습니다.

셉나 — 자기 자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

이사야 22:15–19 본문 →

왕궁 관리가 자기 무덤을 만들다

15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사야에게 왕궁을 맡은 관리 셉나를 찾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왕궁을 맡은 이」라는 직책은 왕의 집안과 궁정 운영을 감독하는 높은 지위입니다. 뒤에서 그 직책을 이어받는 엘리아김에게 다윗 집안의 열쇠가 주어진다는 사실도 그 권한의 무게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셉나에게 전달해야 할 첫 번째 말은 그의 행정이나 외교 정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무덤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네 것이 무엇이며, 여기에 네 사람이 누구이기에, 너는 여기에 네 무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 무덤을 파는 자, 바위에 자기를 위한 거처를 새기는 자야.」이사야 22:16 · 본디새김

높은 곳에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드는 일은 상당한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무덤은 단순히 시신을 묻는 공간이 아니라 가문의 지위와 기억을 드러내는 장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셉나가 지금의 자리를 마치 영구적으로 소유한 것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겨냥합니다. 특히 「여기에」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바로 이곳이라고 주장하듯, 높은 곳의 바위에 자신을 위한 영구적인 거처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정반대입니다.

「그가 너를 돌돌 말아 공처럼 만들어 널찍한 땅으로 던질 것이다. 거기서 네가 죽고, 거기에 네 영광스러운 병거들도 있을 것이다. 네 주인의 집안에 수치를 안기는 자야.」이사야 22:18 · 본디새김

단단히 고정되기를 바라는 인간과, 그 인간을 자기 자리에서 옮기시는 하나님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특히 「네 영광스러운 병거들」이라는 표현은 셉나의 지위를 드러내는 소유물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가 영광으로 여겼던 것들도 그를 지켜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몰락과 함께 언급됩니다.

그는 왕궁의 권력을 맡았지만 그 권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지만 그 자리를 영원히 차지할 권리는 없었습니다.

「내가 너를 네 자리에서 밀어내고, 그가 너를 네 직책에서 끌어내릴 것이다.」이사야 22:19 · 본디새김

예루살렘이 성벽과 무기에서 안전을 찾았다면, 셉나는 자기 직책과 높은 곳의 무덤에서 그것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리를 없애 버리시는 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을 부르십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일인칭 「내가」와 삼인칭 「그가」는 원문에서도 바뀝니다. 삼인칭의 주체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매끄럽게 하나로 통일해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 36:3에는 엘리아김이 왕궁을 맡은 사람으로, 셉나는 서기관으로 등장합니다. 이 기록은 두 사람의 지위가 실제로 달라졌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셉나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직책을 잃었는지, 18절에 예고된 먼 땅에서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엘리아김 — 열쇠를 맡고 말뚝으로 세워지는 사람

이사야 22:20–24 본문 →

주인이 아니라 맡은 사람으로서의 권력

20절은 셉나를 향한 심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날에 내가 내 종, 힐키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부르겠다.」이사야 22:20 · 본디새김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내 종」으로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아김의 권위는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를 부르시고, 의복을 입히시고, 허리띠를 매어 주시며, 통치권을 그의 손에 맡기십니다.

「내가 그에게 네 긴 옷을 입히고, 네 허리띠로 그를 단단히 동여매며, 네 통치권을 그의 손에 주겠다. 그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안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이사야 22:21 · 본디새김

21절의 의복과 허리띠는 그가 공식적인 직책을 이어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셉나가 가지고 있던 권한이 그에게 옮겨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며 그들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버지는 가정의 권위를 지닌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가족을 부양하고 보호할 책임을 맡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사야는 그 이미지를 통치자의 역할에 적용합니다.

셉나의 이야기에서는 그가 자신을 위해 무덤을 만드는 모습이 중심이었습니다. 엘리아김의 이야기에서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말이 중심에 놓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관리와 다른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관리가 대조됩니다.

다윗 집안의 열쇠

22절은 엘리아김에게 주어진 권위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내가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놓겠다. 그가 열면 닫을 이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이가 없을 것이다.」이사야 22:22 · 본디새김

왕궁의 열쇠를 맡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을 여닫는 일을 담당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왕궁과 왕의 권위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누가 들어올 수 있고, 누구에게 접근이 허락되는지를 결정할 권한입니다.

열쇠는 영광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그가 맡아야 할 책임을 나타냅니다.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은 매우 큽니다. 그 결정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권한은 어디까지나 위임받은 권한입니다.

엘리아김이 다윗 집안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맡습니다.

하나님은 셉나의 잘못 때문에 관리라는 직책 자체를 폐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한 사람을 물러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권력이 본래 수행해야 할 책임을 계속 이어 가게 하십니다.

단단한 곳에 박힌 말뚝

23절에서는 새로운 비유가 등장합니다.

「내가 그를 단단한 곳에 말뚝으로 박겠다. 그는 자기 아버지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될 것이다.」이사야 22:23 · 본디새김

이어지는 24절에서 여러 그릇이 그에게 걸린다고 말하므로, 이 장면에서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물건들을 지탱하는 못이나 말뚝의 모습이 특히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24절을 읽으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그의 아버지 집안의 모든 영광, 자손과 후손들, 대접에서 온갖 항아리에 이르는 모든 작은 그릇을 사람들이 그에게 걸 것이다.」이사야 22:24 · 본디새김

한 사람이 신뢰할 만한 자리에 세워지고, 그에게 속한 가족들도 그를 통해 안정과 영광을 누립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 이사야는 한 사람의 권력에 얼마나 많은 것이 매달릴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마지막 반전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자손과 후손들」 가운데 두 번째 낱말은 히브리어에서도 뜻이 확실하지 않아,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관련된 다양한 존재들이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이미지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읽기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읽기입니다. 엘리아김은 견고하게 세워진 관리이므로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보호와 명예를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경고가 담긴 읽기입니다. 본래 예루살렘과 유다를 위해 세워진 관리에게 그의 가족과 친족들의 영광이 지나치게 집중되면서, 그의 지위가 가문의 이익을 떠받치는 수단이 될 위험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바로 다음 절 때문에 힘을 얻습니다. 본문은 아직 엘리아김이 친족을 부당하게 등용했다거나 권력을 남용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엘리아김에게 주어진 「다윗 집안의 열쇠」는 신약의 요한계시록 3:7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표현하는 데 직접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22장에서 이 열쇠는 먼저 유다 왕궁의 관리에게 위임된 권한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이미지를 가져와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권위를 드러냅니다. 엘리아김이라는 역사적 인물 자체를 곧바로 그리스도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단한 곳에 박힌 말뚝이 빠지다

이사야 22:25 본문 →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그날에 단단한 곳에 박힌 말뚝이 빠질 것이다. 그것이 찍혀 넘어지고, 거기에 걸린 짐도 끊어질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기 때문이다.이사야 22:25 · 본디새김

이 장의 마지막 절은 앞의 약속과 충돌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특히 23절과 25절은 「말뚝」과 「단단한 곳」이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말뚝이 앞에서 말한 말뚝과 무관하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는 인간이 영구히 소유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또한 인간에게 의존하여 세워진 영광은 그 인간의 자리와 함께 흔들릴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첫 번째는 이 말뚝을 엘리아김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엘리아김은 단단한 곳에 박힌 말뚝으로 묘사되었습니다. 24절에서는 그의 집안의 모든 영광이 그에게 매달립니다. 25절에서는 그 말뚝과 거기에 걸린 짐이 함께 떨어집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사야는 엘리아김의 임명과 그가 감당하게 될 무게를 보여 준 뒤, 결국 그 또한 무너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에게 주어진 권한이 가족의 영광을 떠받치는 수단으로 변질될 위험까지 암시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해석을 받아들이더라도 엘리아김이 실제로 어떤 잘못을 저질러 몰락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이 말뚝을 셉나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셉나는 자기 지위가 단단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밀어내십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절은 엘리아김의 안정적인 임명을 다시 강조하면서, 셉나와 그를 의지하던 사람들이 함께 몰락하는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15절부터 시작된 셉나 심판의 흐름을 한 장면으로 묶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23절에서 엘리아김에게 적용된 「단단한 곳에 박힌 말뚝」이라는 표현을 25절에서 갑자기 셉나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문장의 직접적인 연결만 놓고 보면 엘리아김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셉나에 관한 심판의 마무리로 읽는 해석 역시 문맥상의 근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쪽이 확정적인지 단정하기보다는, 두 읽기가 공유하는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아야 할 것

이사야 22:1–25 본문 →

문제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을 하나님 없이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능력은 실제적이지만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필요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맡은 자리와 권한은 중요하지만 영원히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22장이 끝날 때, 독자의 눈앞에는 말뚝 하나가 남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자기 집안의 영광과 수많은 짐을 걸었습니다. 말뚝은 견고해 보였고, 모두가 그것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말씀은 그것이 빠지고 넘어지며, 거기에 걸린 짐도 끊어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앞에 서서 우리는 처음의 예루살렘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 도시는 무기를 보았고, 성벽을 보았고, 물을 보았습니다. 눈앞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보아야 할 분을 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독자에게 남기는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확보했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동안 누구를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