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밤을 지키는 사람들의 기다림
이사야 21장에는 세 개의 신탁이 있습니다. 바벨론의 몰락을 알리는 신탁, 밤이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 두마의 신탁, 전쟁을 피해 달아나는 아라비아 사람들에 관한 신탁입니다.
서로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세 장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누군가가 위기 속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결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사야 21장은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과, 그 역사를 기다리는 인간이 모든 것을 미리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바다 광야에서 밀려오는 폭풍 — 바벨론을 향한 뜻밖의 이름
바다 광야에 관한 신탁. 네게브를 휩쓸고 지나가는 폭풍들처럼, 그것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왔다.이사야 21:1 · 본디새김
첫 번째 신탁은 독특한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바다와 광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말입니다. 바다는 물이 가득한 곳이고, 광야는 물이 부족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9절에 이르면 이 신탁이 바벨론의 멸망을 다룬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바벨론은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그 주변의 평야에는 강과 수로, 습지가 넓게 분포했습니다. 따라서 ‘바다 광야’라는 표현을 바벨론과 그 주변의 물 많은 평야에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광야’를 바벨론이 장차 황폐해질 운명과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이 명칭의 정확한 유래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다와 광야가 어떤 지리적 장소를 가리키는지, 또는 시적인 의미를 함께 담고 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사야는 그 이름의 뜻을 풀어 주기보다 곧바로 폭풍을 등장시킵니다.
네게브는 유다 남쪽의 건조한 지역입니다. 그곳을 휩쓰는 폭풍은 먼지와 모래를 일으키며 빠르게 지나가는 강한 바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엇이 오는지 아직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침략군일 수도 있고, 그 침략을 통해 나타날 재앙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독한 환상이 내게 전해졌다. 배신하는 자는 배신하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한다. 「엘람아, 올라가라. 메대야, 포위하라. 그녀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했다.」이사야 21:2 · 본디새김
앞 절의 폭풍은 바깥세상을 휩쓰는 힘이었습니다. 이제 그 폭풍이 예언자의 내면에까지 들어온 듯합니다.
‘배신하는 자는 배신하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한다’는 표현도 주목할 만합니다.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들을 반복하면서 배신과 약탈이라는 행위가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바벨론이 다른 민족을 배신하고 약탈해 온 모습을 묘사하는 말일 수도 있고, 이제 바벨론을 공격할 세력의 행동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뜻하는지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엘람과 메대는 메소포타미아의 동쪽과 북동쪽에 자리 잡았던 역사적 세력들입니다. 이들의 등장은 바벨론을 향해 전쟁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는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그녀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했다’는 일인칭 선언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발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문장 앞에는 별도의 발화자 표시가 없으므로, 원문의 표현만으로 모든 화자 전환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녀의 모든 탄식’이 바벨론이 겪게 될 슬픔을 뜻하는지, 바벨론이 다른 나라들에 일으켰던 탄식을 뜻하는지도 해석이 갈립니다. 뒤의 읽기를 따르면 바벨론이 일으킨 억압과 고통이 끝나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반면 앞의 읽기에서는 바벨론 자체의 탄식이 끝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말씀을 받은 이사야는 안도하거나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 장면은 정반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3:17에서도 메대 사람들이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51:11, 28에서는 메대의 왕들과 바벨론의 멸망이 연결됩니다. 역사적으로 바벨론은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 21장의 신탁을 그 몰락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선 시대의 바벨론과 앗시리아 사이의 충돌을 염두에 두는 해석도 있으며, 이 장 전체를 특정한 한 해의 사건에 모두 대응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몸이 뒤틀리는 예언자
그 때문에 내 허리에 고통이 가득했고, 아이 낳는 여자의 산고 같은 진통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듣고서 몸이 뒤틀렸고, 보고서 겁에 질렸다.이사야 21:3 · 본디새김
산고는 몸 전체를 사로잡는 강렬한 고통입니다. 당사자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멈출 수 없으며, 한 번 시작되면 그 과정을 지나야 하는 고통입니다.
앞에서는 배신과 약탈이 계속된다는 말씀이 있었고, 엘람과 메대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건은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변화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일을 보는 예언자에게도 고통이 됩니다.
바벨론은 이사야서에서 교만과 억압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13–14장에는 바벨론의 몰락에 관한 신탁이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소식은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해방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멸망은 수많은 사람의 고통과 죽음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예언자는 그 파괴의 무게를 느끼고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사야가 정확히 누구의 고통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의 비극을 슬퍼하는 것인지, 전쟁의 참혹함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환상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 자체가 그를 압도하는 것인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이 본 일을 기쁜 승리의 소식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이 갈피를 잃었고, 전율이 나를 덮쳤다. 내가 바라던 황혼을 그가 내게 두려움으로 바꾸었다.이사야 21:4 · 본디새김
황혼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쉬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낮의 긴장이 끝나고 밤의 휴식이 다가오는 때입니다.
저녁은 더 이상 안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불안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자신이 바라고 원하던 저녁 또는 황혼이 공포가 되었다는 대조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본문은 그가 특별히 어떤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평소 쉬기를 바라던 시간을 가리킬 수도 있고, 특정한 일을 기다리던 상황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그가’ 두려움으로 바꾸었다는 표현에서, 그 행동의 주체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환상 속에서 다가오는 사건이 그에게 공포를 가져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식탁에서 방패로 — 평온한 장면을 깨뜨리는 전쟁의 명령
상을 차리고, 깔개를 펼치고, 먹고 마셨다. 「지휘관들아, 일어나라. 방패에 기름을 발라라.」이사야 21:5 · 본디새김
식사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온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위험이 멀리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독자에게 이미 전쟁이 끝난 결과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를 높은 곳에 세웁니다.
파수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깔개를 펼치고’라는 표현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을 깔개나 자리를 마련하는 행동으로 읽을 수도 있고, 경계를 서도록 파수꾼을 배치하는 행동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식탁을 차리고 깔개를 펼치는 모습으로 옮겼습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평화로운 식사와 긴박한 군사적 명령 사이의 대조가 뚜렷해집니다. 반대로 파수꾼을 배치했다는 읽기를 따르면, 최소한의 경계를 갖춘 상태에서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다가 갑작스러운 위협을 맞는 장면이 됩니다. 고대의 방패에는 가죽이 사용되기도 했으며,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장비를 관리하거나 전투에 대비하는 일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21에도 기름과 방패가 함께 언급됩니다. 한 가지 읽기는 바벨론의 지도자들이 위기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채 식사하고 있다가 공격 소식을 듣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전쟁에 나서는 군대가 식사를 마친 뒤 공격 준비를 하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므로 두 가능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다니엘 5장에는 바벨론 왕 벨사살이 잔치를 벌이던 밤에 왕국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21:5가 다니엘 5장의 바로 그 잔치를 직접 묘사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곳에서 벨사살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밤낮으로 망루에 선 파수꾼 — 보는 것과 전하는 것 사이
주가 내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가서 파수꾼을 세워라. 그가 보는 것을 알리게 하라.」이사야 21:6 · 본디새김
파수꾼은 자신이 바라는 일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보지 못한 일을 이미 보았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망루에 서서 관찰하고, 실제로 본 것을 보고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마음대로 정한 미래를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10절에서 그는 자신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들은 것을 알렸다고 말합니다.
「그가 탄 자들의 행렬, 둘씩 짝지은 기병들, 나귀 탄 자들의 행렬과 낙타 탄 자들의 행렬을 보면, 주의를 기울이게 하라. 큰 주의를 기울이게 하라.」이사야 21:7 · 본디새김
전쟁터에서 다가오는 군대의 규모와 방향을 관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먼 곳에서 움직이는 사람과 동물을 발견하면,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러 오는지 판단해야 했습니다.
‘주의를 기울이게 하라. 큰 주의를 기울이게 하라.’ 이 표현을 통해 예언의 수신자는 기다림의 긴장을 느끼게 됩니다. 결과를 알고 있는 독자가 아니라, 아직 결과를 알지 못하는 파수꾼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사자처럼 외쳤다. 「주여, 저는 낮이면 늘 망루에 서 있고, 밤마다 제 경계 자리에 서 있습니다.」이사야 21:8 · 본디새김
기다림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마침내 기다리던 행렬이 나타납니다.
「보십시오, 저기 사람을 태운 행렬, 둘씩 짝지은 기병들이 옵니다.」 그가 응답하여 말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바벨론이. 그녀의 신들을 새긴 우상들을 모두 그가 땅에 내리쳐 부수었다.」이사야 21:9 · 본디새김
명령받은 것을 기다리던 파수꾼이 마침내 그 징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등장하는 것은 바벨론의 왕도, 궁전도, 성벽도 아닙니다.
바벨론의 몰락은 정치적·군사적 사건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 나라가 신성하게 여기던 것들의 몰락과도 연결됩니다.
고대 근동에서 도시의 신상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었습니다. 도시와 왕국의 보호, 신적 권위, 종교적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대상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도시를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지킨다고 믿었던 신상들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파수꾼은 바벨론의 함락을 선언하지만, 바로 다음 절에서 이사야는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을 ‘타작당한 곡식’이라고 부릅니다. 그 승리의 소식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 있었을까요?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레케브(רֶכֶב)는 문맥에 따라 병거 또는 탈것을 탄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병거 편대가 이동하는 모습인지까지 복원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사자(אֲרִי)처럼 외쳤다’는 표현에는 원어상 독특한 문제가 있습니다. 마소라 본문에는 실제로 ‘사자’라는 명사가 등장하지만, 비교를 나타내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자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표현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파수꾼을 가리키는 말로 읽으려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뒤에서 계속 말하는 파수꾼의 외침으로 이해했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여기서 두 번 반복되는 말은 두 차례의 함락을 반드시 뜻하지 않습니다. 함락의 사실을 강렬하게 선언하는 시적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부순 주체는 ‘그가’라고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고, 실제로 도시를 공격한 정복자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원문은 그 주체를 특정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6:1–2에서는 바벨론의 신 벨과 느보가 엎드러지고, 신상들이 짐승의 짐이 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원래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여겨졌던 신들이 오히려 운반되어야 할 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21:9의 우상 파괴도 그와 가까운 신학적 의미를 가집니다.
「나의 타작당한 곡식아」 — 심판의 소식을 듣는 사람들
나의 타작당한 곡식아, 내 타작마당의 곡식아, 내가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렸다.이사야 21:10 · 본디새김
이사야는 여기서 말의 방향을 바꿉니다.
지금까지는 바벨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언자는 자신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직접 부릅니다.
타작은 수확한 곡식에서 낟알과 겨를 분리하기 위해 곡식을 두드리거나 압력을 가하는 작업입니다. 농사에서는 필요한 과정이지만, 이사야의 비유에서 그 모습은 고통과 압박을 나타냅니다.
곡식은 타작마당에서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다른 힘에 의해 두드려지고 짓눌립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청중을 바로 그런 상태에 놓인 존재로 부릅니다.
바벨론의 압박을 받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바벨론의 몰락을 듣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강대국의 지배와 위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심판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더 넓게 가리키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이 절은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한 집단으로만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역사를 완전히 통제하거나 모든 일을 스스로 이해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들은 것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3–4절에서 그 환상을 감당하지 못해 고통받았던 예언자가, 이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정확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 자체가 때로는 고통스럽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자신이 들은 것을 전합니다.
그런데 다음 신탁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파수꾼에게 질문이 주어지지만, 그가 전하는 대답은 바벨론의 몰락 선언처럼 분명하지 않습니다.
「밤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 아침이 와도 끝나지 않는 불안
두마에 관한 신탁. 세일에서 누군가 내게 외친다. 「파수꾼이여, 밤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파수꾼이여, 밤이 얼마나 지났습니까?」이사야 21:11 · 본디새김
두 번째 신탁은 매우 짧습니다.
질문자는 밤이 있다는 사실을 묻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그 밤이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해가 뜨는 시간보다, 자신들이 겪는 두려움과 고통이 언제 끝나는가 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전쟁이나 재앙을 가리키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파수꾼의 대답은 기대와 다릅니다.
파수꾼이 말했다. 「아침이 옵니다. 밤도 옵니다. 물으려거든 물으십시오. 돌아오십시오. 오십시오.」이사야 21:12 · 본디새김
한 가지 읽기는 고통이 잠시 끝나고 평안이 찾아오지만, 그 뒤에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친다는 뜻입니다. 다른 읽기는 아침과 밤이 모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서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게 다른 운명이 주어질 가능성을 남겨 둡니다. 또는 인간이 미래에 관해 원하는 만큼 분명한 답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강조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파수꾼은 아침의 도래를 말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밤의 끝이라고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질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다시 찾아와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대답은 독자에게 쉬운 위로를 주지 않습니다. 아침이 온다는 소식과 함께 밤이 온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래에 관해 마치 모든 답을 가진 것처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약속하지 않은 결과를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정직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마라는 이름은 창세기 25:14에서 이스마엘의 후손 가운데 등장합니다. 따라서 아라비아 북부와 관련된 지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세일은 구약에서 에돔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지역입니다(창세기 32:3; 신명기 2:4–5). 이 때문에 두마에 관한 신탁을 에돔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마와 세일이 정확히 어떤 관계로 등장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마라는 별도의 지역에 관한 질문이 세일에서 들려오는 것일 수도 있고, 두마라는 이름이 에돔을 시적으로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두마(דּוּמָה)는 ‘침묵’을 뜻하는 말과도 소리가 같습니다. 따라서 고요함이나 침묵의 이미지를 의도한 이름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것이 명백한 언어유희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돌아오십시오’를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오라는 신학적 초대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돌아오다’는 동사는 회개를 나타낼 때에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목적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다시 찾아와 묻도록 하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말을 반드시 회개의 명령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밤을 지내는 대상들에게 필요한 것 — 물과 빵
아라비아에 관한 신탁. 드단 사람들의 대상들아, 너희는 아라비아의 수풀에서 밤을 지낼 것이다.이사야 21:13 · 본디새김
세 번째 신탁에서 장소가 바뀝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드단은 고대 아라비아의 교역과 관련된 집단입니다. 에스겔 27:20에는 드단이 무역활동을 하는 지역으로 언급됩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드단 사람들의 대상들’이라고 부를 때, 독자는 물건을 싣고 먼 길을 이동하는 상인들의 행렬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상적인 이동을 계속하지 못합니다.
대상에게 길은 생계의 기반입니다. 어느 곳에 물이 있고, 어디에서 쉬어 갈 수 있으며, 어떤 경로가 안전한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길 위의 정상적인 이동 대신 수풀에서 밤을 보냅니다. 그들이 평소의 이동 경로를 벗어나 몸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마른 이를 맞으러 물을 가져가라. 테마 땅의 주민들은 피신하는 이에게 빵을 가져다주어 맞이했다.이사야 21:14 · 본디새김
단순히 목마른 사람이 나타나면 물을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가지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가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물을 구하러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테마는 아라비아 북부와 관련된 지명으로, 창세기 25:15에서는 이스마엘의 후손 가운데 등장합니다. 욥기 6:19에도 테마의 대상들이 언급됩니다. 이처럼 테마는 광야와 교역로의 세계에 속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칼들을 피해 달아났기 때문이다. 뽑힌 칼을 피해, 당겨진 활을 피해, 전쟁의 무게를 피해 달아났다.이사야 21:15 · 본디새김
특히 뽑힌 칼과 당겨진 활은 공격이 임박했거나 이미 시작된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칼이 칼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활이 느슨하게 놓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쟁의 무게’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전쟁은 단지 무기가 충돌하는 순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가하는 압박과 고통 전체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물과 빵은 단순한 친절의 표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도움입니다.
이사야 21장은 거대한 나라가 무너지는 순간을 보여 주다가, 전쟁을 피해 달아난 한 사람에게 물을 건네는 자리까지 독자를 데려옵니다.
전쟁의 최종적인 결과를 알지 못해도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누가 어느 나라의 군대를 이길지 알지 못해도 피난민에게 빵을 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은 이곳이 울창한 숲인지, 관목이 우거진 곳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건조한 지역의 수풀이나 거친 지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본문은 한 문장 안에 명령과 이미 이루어진 행동을 함께 놓습니다. 물을 가져가라는 명령이 있고, 빵을 가져다주어 맞이했다는 진술이 있습니다. 이 두 표현은 서로 다른 문법적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물을 가져가는 행위까지 모두 이미 일어났다고 단정하거나, 빵을 건넨 일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명령이라고 평탄하게 읽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품꾼의 햇수로 쳐서 앞으로 한 해」 — 케다르의 영광이 끝나는 때
주가 내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품꾼의 햇수로 쳐서 앞으로 한 해가 지나면, 케다르의 모든 영광이 끝날 것이다.」이사야 21:16 · 본디새김
앞선 두마에 관한 신탁에서는 밤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었지만, 분명한 기한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품꾼은 정해진 기간 동안 일하고 품삯을 받는 사람입니다. 계약된 기간은 막연하게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따라서 ‘품꾼의 햇수’라는 표현은 정해진 기간을 정확하게 계산한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케다르는 창세기 25:13에서 이스마엘의 아들 가운데 등장합니다. 구약에서는 아라비아의 유목 집단과 관련된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60:7에서는 케다르의 양 떼가 언급되고, 에스겔 27:21에서도 케다르는 양과 염소 등의 교역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케다르의 영광을 단순히 하나의 군사적 권력만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집단이 자랑하던 삶의 기반과 풍요, 사회적 위세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7절은 특별히 군사적 힘에 주목합니다.
「남아 있는 활잡이들, 곧 케다르 자손의 용사들은 그 수가 줄어들 것이다.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했기 때문이다.」이사야 21:17 · 본디새김
활잡이는 멀리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병사입니다. 광야와 넓은 지역에서 이동하며 싸우는 집단에게 활을 사용하는 전투력은 중요한 군사적 자산이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용사들의 숫자조차 적어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 신탁은 아라비아 사람들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을 선언하시는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야훼의 통치는 이스라엘의 국경 안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큰 나라의 영광에 관한 예언과 작은 사람들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같은 신탁 안에 나란히 놓인 것입니다.
오늘의 의미 — 밤이 끝나는 시간을 모를 때
미래를 아는 일과 오늘 해야 할 일을 아는 일은 반드시 같지 않습니다. 두마에서 질문하는 사람은 밤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라비아의 피난민에게 물을 가져가는 사람은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몰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이 바벨론과 아라비아의 역사에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의 세부 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전쟁의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아라비아의 수풀에 드단의 대상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소처럼 교역로를 따라 이동하지 못합니다. 칼과 활을 피해 길을 벗어났고, 밤을 지낼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그 시간의 끝을 알려 주기 전에 보여 준 장면이 있습니다.
테마의 주민들이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가져가고, 도망치는 사람에게 빵을 가져다주어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언제 끝나는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케다르의 용사들이 얼마나 살아남을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물과 빵이 있습니다.
케다르의 영광은 한 해 안에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에도 아라비아의 수풀에는 물과 빵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위해 물을 가져가라고 말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