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잊힌 도시와 하나님께 돌아가는 부
어떤 도시가 세계 무역의 중심지라고 생각해 봅니다. 먼 나라에서 곡식이 들어오고, 그곳의 상인들은 여러 왕국을 오가며 막대한 부를 쌓습니다.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조차 그 도시의 상인들을 존중합니다. 바다는 그 도시를 세상과 연결하는 길이며, 배가 들어올 때마다 부가 쌓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시가 무너집니다.
이사야 23장은 그런 도시, 두로를 향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두로가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창녀가 몸을 파는 일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사의 수입이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에게 속한 거룩한 것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사야 23장의 관심은 부유한 도시가 어떻게 무너지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도시의 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에도 있습니다.
이 장은 이사야 13장부터 이어진 여러 민족에 관한 예언의 마지막에 놓입니다. 앞 장에서는 예루살렘이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두로가 등장합니다. 정치와 군사에 이어 경제적 번영까지, 사람들이 의지하는 힘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두로가 무너지자 바다 건너에서 통곡이 시작되다
무너진 도시의 모습이 아니라, 소식을 듣는 사람들부터 보여 주다
이사야는 두로의 멸망을 직접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두로에 관한 말씀입니다. 「타르시스의 배들아, 슬피 울어라! 두로가 파괴되어 집도 없고 들어갈 곳도 없다.」 키팀 땅으로부터 그 소식이 뱃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이사야 23:1 · 두루새김
그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과 상인들의 슬픔을 배 자체에 옮겨 놓은 시적 표현입니다. 보통 한 도시가 무너지면 성벽과 건물의 파괴가 먼저 묘사됩니다. 하지만 두로의 경우에는 그 도시와 연결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모습이 먼저 나옵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동쪽 해안에 자리했던 페니키아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능했고, 지중해 곳곳에 무역 관계를 맺고 정착할 곳을 만들었습니다.
「타르시스」는 멀리 떨어진 해상 무역 지역을 가리킵니다. 흔히 지중해 서쪽과 연결하여 이해하지만, 이 본문만으로 정확한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타르시스의 배들」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대형 상선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열왕기상 10:22 참조).
「키팀」은 기본적으로 키프로스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구절에 따라 그 주변의 지중해 지역까지 가리키는 범위가 넓어질 수도 있습니다.
「집도 없고 들어갈 곳도 없다」라는 표현은 파괴의 결과를 짧게 보여 줍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시설이 사라졌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적어도 그 배들이 의지하던 항구 도시의 기능이 무너졌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나일강의 곡식이 두로의 부가 되다
2–3절에서는 그 연결 관계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넓은 바다를 건너온 시호르의 곡식, 나일강에서 거둔 곡식이 두로의 수입이 되었습니다. 두로는 여러 민족이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되었습니다.이사야 23:3 · 두루새김
「시호르」가 정확히 나일강의 어느 물길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나일강에서 거둔 곡식」과 나란히 등장하므로, 여기서는 이집트의 풍부한 곡물 생산과 연결됩니다.
두로는 곡식을 생산하는 농업 중심지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두로를 거쳐 이동했고, 두로는 그 무역을 통해 부유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두로가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히 한 도시의 재산이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두로를 거쳐 움직이던 물품과 사람, 여러 지역의 경제적 관계가 흔들리는 사건입니다. 5절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두로의 소식을 듣고 몸부림치는 이유도 여기에서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여기서 뜻밖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처럼 말하는 바다
「시돈아, 부끄러워해라!」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이 낳는 고통을 겪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지도 않았다. 젊은 남자들을 기르지도, 젊은 여자들을 키우지도 않았다.」이사야 23:4 · 두루새김
한때 많은 사람으로 가득했던 세계가 이제 아무도 낳거나 기르지 않은 것처럼 황량해집니다. 젊은 남자들과 젊은 여자들은 한 도시의 현재 인구일 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넘어, 그 도시가 이어 갈 생명과 미래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무역의 번영으로 가득했던 공간이 상실의 공간으로 바뀐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바다」와 「바다의 요새」를 두로를 둘러싼 바다와 요새로 지켜지는 도시가 사람처럼 말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고, 바다 자체가 도시와 주민을 잃은 슬픔을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세계가 존중하던 상인들을 누가 낮추는가
오래된 도시도 자기 역사를 보장할 수 없다
6절은 타르시스로 건너가라는 명령을 전합니다.
이것은 도시의 파괴 이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약속은 없습니다. 오히려 12절에서는 키팀으로 건너가도 쉬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너희의 흥겨운 도시냐? 아득한 옛날부터 있던 도시가 이렇게 되었느냐? 그 주민들은 먼 곳까지 걸어가 나그네로 살게 될 것이다.」이사야 23:7 · 두루새김
이 질문에는 놀라움과 조롱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두로는 어제 생겨난 도시가 아닙니다. 오랜 역사와 해상 무역의 전통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그 세월 동안 사람들은 항해 기술을 발전시켰고, 여러 지역과의 관계를 쌓았으며, 자신들의 명성을 세웠습니다.
해상 활동의 넓은 범위가 그 도시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먼 곳으로의 이동은 더 이상 영광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때 두로의 힘이었던 바깥 세계와의 연결이, 이제는 그 도시의 불안정함을 드러내는 배경이 됩니다.
왕관을 씌워 주던 도시
8절은 두로의 지위를 한 단계 더 높여 묘사합니다.
왕관을 씌워 주던 두로에게 이런 일이 닥치도록 누가 계획했습니까? 두로의 상인들은 통치자들이었고,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서 존중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이사야 23:8 · 두루새김
「왕관을 씌워 주던」이라는 표현은 두로가 지닌 특별한 영향력을 드러냅니다. 이 표현은 두로가 다른 통치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높은 지위를 가진 도시였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보통 통치자는 군대와 영토를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로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일로 영향력을 얻은 사람들이 통치자들과 나란히 놓입니다. 군사력만이 아니라 경제력도 사람들에게 존경과 권위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이사야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9절이 대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이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온갖 화려함을 뽐내는 교만에 수치를 안기고, 세상에서 존중받는 모든 이를 낮추려고 하신 일입니다.이사야 23:9 · 두루새김
두로의 몰락은 세상에서 더 강한 국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그 사건 너머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화려함이 아니라 화려함을 뽐내는 교만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아름다운 건물과 쌓아 온 부, 오래된 역사와 높은 명성이 그 자체로 모두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인간을 스스로 높아진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8절에서는 두로의 무역상들이 「세상에서 존중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세상에서 존중받는 모든 이」를 낮추려고 계획하셨다고 합니다.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의 경제력과 영향력이 존경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지위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존중하는 지위와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한 지위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9절은 「온갖 화려함을 뽐내는 교만」과 「세상에서 존중받는 모든 이」를 말합니다. 두로는 한 도시지만, 그 도시를 향한 심판은 세상 전체의 권력과 영광을 향한 말씀으로 넓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원문에서는 도시의 발이 그 도시를 먼 곳으로 데려간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는 앞으로 닥칠 추방과 떠돌이 생활입니다. 도시가 무너지면서 주민들이 먼 땅에서 나그네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래전부터 두로가 바다를 건너 먼 지역으로 나아가 온 역사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두로의 상인들과 정착민들이 여러 지역에 거주해 온 사실과 어울립니다. 원문의 동사 형태만으로 두 읽기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다를 다스리는 하나님 앞에서 피할 곳을 찾다
띠가 풀린 타르시스
10절에서는 시선이 다시 타르시스로 향합니다.
「딸 타르시스야, 나일강처럼 네 땅을 가로질러 가라. 너를 옭아매는 띠는 더 이상 없다.」이사야 23:10 · 두루새김
「나일강처럼 네 땅을 가로질러 가라」는 표현은 물이 막힘없이 흐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옭아매는 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자흐(מָזִיחַ)는 띠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띠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두로의 지배력이나 통제력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타르시스는 이제 이전처럼 두로와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는 질서와 결속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두로라는 중심이 사라지면서 그와 연결된 지역들이 흩어지거나 제약 없이 움직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은 두로의 몰락이 다른 지역들의 질서까지 바꾸어 놓는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바다 위로 손을 뻗어 왕국들을 떨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가나안의 요새들을 없애라고 명령하셨습니다.이사야 23:11 · 두루새김
두로에게 바다는 번영의 바탕이었습니다.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먼 나라까지 항해할 수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으며, 여러 민족을 연결하는 거대한 무역 관계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야훼께서 바로 그 바다 위로 손을 뻗으십니다.
바다와 연결된 여러 왕국의 운명까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가나안」은 이 문맥에서 페니키아의 해안 지역을 포함하는 이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무역 세계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두로의 요새는 사람들의 눈에 튼튼해 보였을 것입니다. 특히 바다를 이용한 지리적 이점은 도시를 보호하는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바다 자체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키팀에 가도 쉼이 없다
12절에서는 딸 시돈에게 말씀이 주어집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짓밟힌 젊은 여자, 딸 시돈아, 너는 더 이상 흥겨워하지 못할 것이다. 일어나 키팀으로 건너가라. 거기서도 너는 쉬지 못할 것이다.」이사야 23:12 · 두루새김
시돈과 두로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페니키아의 도시들입니다. 이사야는 두 도시를 번갈아 부르며 그 지역 전체의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짓밟힌 젊은 여자」라는 표현은 도시가 겪는 굴욕과 고통을 드러냅니다. 도시를 여성으로 표현하는 것은 예언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키팀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이제는 키팀으로 도망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쉬지 못합니다.
멀리 갈 수 있다는 것과 안전하게 머물 수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칼데아 사람들의 땅을 보십시오. 그 백성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아시리아가 그 땅을 들짐승들의 거처로 삼았습니다. 아시리아 군대는 성을 공격하려고 탑들을 세우고 궁전들을 헐어, 그 땅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이사야 23:13 · 두루새김
한때 존재하던 도시와 백성도 군사적 공격으로 황폐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은 첫 구절을 그대로 떠올리게 합니다.
「타르시스의 배들아, 슬피 울어라! 너희의 요새가 파괴되었다.」이사야 23:14 · 두루새김
배들이 항해하던 바다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던 요새와 무역의 중심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15절부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은 히브리어의 문장 연결과 대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이 불분명하여, 누가 성을 공격하려고 탑들을 세우고 어떤 도시의 궁전을 헐었는지 확실하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아시리아가 칼데아 사람들의 땅을 파괴했다는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탑들을 세우고 궁전들을 헌 주체도 아시리아 군대로 밝혀 옮겼습니다. 다만 이 구절을 근거로 두로를 무너뜨린 세력이나 정확한 연대를 특정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 자체가 그만큼 분명하지 않습니다.
잊힌 창녀가 다시 노래를 부르다
칠십 년 동안 잊히는 도시
그날에 두로는 한 왕의 시대에 해당하는 칠십 년 동안 잊힐 것입니다. 칠십 년이 끝나면 두로에게는 이런 창녀의 노래가 들어맞을 것입니다.이사야 23:15 · 두루새김
여기서 중요한 변화는 「파괴」에서 「잊힘」으로의 전환입니다.
두로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 상인들이 존중받고, 그 영향력이 널리 알려진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가 이제는 기억조차 되지 않습니다.
칠십 년이 끝나면 두로는 다시 세상의 관심을 얻으려 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이유
16절은 짧은 노래를 소개합니다.
「잊힌 창녀야, 수금을 들고 도시를 돌아다녀라. 사람들이 너를 기억하도록 솜씨 좋게 연주하고 노래를 많이 불러라.」이사야 23:16 · 두루새김
이 비유는 두로가 실제로 성매매로 경제를 유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17절을 보면, 세상의 여러 나라와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를 맺고 그 대가를 얻는 두로의 활동을 몸을 파는 일에 비유한 것입니다.
두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와 주어야 번영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무역 상대가 떠나가면 두로의 부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잊힌 창녀가 다시 손님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노래하듯, 두로도 세상의 관심을 되찾으려고 합니다.
앞에서 두로의 상인들은 통치자들처럼 존경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도시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노래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1절과 14절에서 배들은 슬피 울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16절에서는 창녀가 노래를 부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통곡이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두로를 다시 찾아오시는 분
17절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주어가 등장합니다.
칠십 년이 끝나면 여호와야훼께서 두로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두로는 다시 몸을 팔아 돈을 벌 것입니다. 온 땅의 모든 나라를 상대로 몸을 팔 것입니다.이사야 23:17 · 두루새김
앞 절에서 두로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하도록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두로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방문을 곧바로 두로의 회개나 신앙이 새로워지는 일과 같은 것으로 보면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 앞서 나가게 됩니다. 이사야는 두로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음 절에서 두로가 벌어들인 수입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 년을 실제 기간으로 이해할 수 있고, 「한 왕의 시대」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한 시대의 길이를 나타내는 수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이 누구인지, 칠십 년이 정확히 어느 해부터 어느 해까지인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찾아오실 것입니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파카드(פָּקַד)로, 문맥에 따라 돌보다, 찾아오다, 살피다, 책임을 묻다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이 단어 자체가 언제나 은혜로운 방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대상을 주의 깊게 살피시고 그 운명에 개입하시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두로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녀의 삯이 거룩한 것이 되다
두로가 물건을 사고팔아 얻은 이익과 몸을 팔아 번 돈은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것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그 돈은 쌓이거나 저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수입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는 데 쓰일 것입니다.이사야 23:1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이사야 23장 전체의 방향을 바꿉니다.
① 교역 이익이 쌓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이 구절에서 가장 먼저 눈여겨볼 표현은 「쌓이거나 저장되지 않을 것입니다」입니다.
두로의 무역 활동이 계속되는 것만으로는 이 장의 결말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두로가 다시 부자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관심이었다면, 그 도시의 경제가 회복된다는 17절에서 이야기를 끝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한 절을 더 덧붙여 그 부가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지 말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 변화는 두로가 다시 돈을 벌게 된다는 사실보다, 그 돈이 더 이상 두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쌓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② 거룩함은 물건의 종류만이 아니라 그 물건이 속한 분과도 관련된다
18절의 「거룩한 것으로 구별될 것입니다」라는 표현에서 거룩함은 여호와야훼께 속하도록 구별된다는 뜻을 갖습니다.
구약에서 어떤 것이 거룩하다고 불리는 것은 그 자체가 남다른 성질의 물건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별되었다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한때 세상에서 자기 영광을 높이는 데 사용되던 이방 도시의 재물이 이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선언됩니다.
③ 그렇다면 두로는 회복된 것인가?
그러므로 이 결말에는 회복과 심판의 의미가 함께 남아 있습니다. 두로의 무역 활동은 다시 시작되지만, 두로는 더 이상 자기 영광이 모든 것의 중심인 것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재물을 좋은 일에 사용하기만 하면 그 재물을 얻는 모든 방식이 정당화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은 경제 윤리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법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도시의 부가 어떤 운명을 맞는지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④ 그 부를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18절에서는 물건을 사고팔아 얻은 이익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또는 더 넓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만을 가리키는지,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 전체를 포함하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두로의 부에 관해 앞에서는 왕관과 통치자들, 세상에서 존중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나옵니다.
앞에서는 세계의 존경을 받는 상인들의 지위가 강조되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충분한 음식과 좋은 옷을 누리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통곡하던 배들과 다시 울려 퍼지는 노래
그러나 두로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통곡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로의 부를 심판하시면서도, 그 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한때 세상의 존경을 받던 상인들은 낮아지지만, 그들이 쌓던 재물은 새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무너진 항구를 향해 배들이 슬피 울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는 장면이 남습니다.
두로가 쌓은 것은 부였지만, 하나님이 마지막에 보여 주시는 것은 그 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이사야 23장은 바다에서 모여든 재물이 누구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오래된 무역 도시의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