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7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자기 포도밭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사야 27장은 바다의 괴물이 죽는 장면으로 시작해,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돌아오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는 뜻밖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포도밭을 위한 노래입니다. 포도밭에 진노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분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지키며 순간마다 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백성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기로 하신 것입니까?

이사야 27장은 둘 다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장에는 여전히 죄에 대한 심판이 있고, 추방과 황폐함이 있으며,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지나도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시면서도 그 백성을 다시 열매 맺게 하려 하십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927장 본문 읽기 →

바다의 괴물에게 겨누어진 칼

이사야 27:1 본문 →

하나님은 왜 뱀과 싸우시는가?

이사야 27장은 독특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날에 여호와야훼가 자기의 매섭고 크고 강한 칼로 달아나는 뱀 리워야단을, 몸을 뒤트는 뱀 리워야단을 벌하고, 바다에 있는 괴물을 죽일 것이다.이사야 27:1 · 본디새김

앞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그 생명의 약속이 펼쳐지는 첫 장면에서 하나님은 칼을 드십니다.

이처럼 거듭 강조되는 칼의 위력은 앞으로 등장할 상대가 평범한 적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뱀은 인간의 손에 쉽게 붙잡히지 않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달아나고, 몸을 뒤틀며, 바다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칼은 그를 놓치지 않습니다.

리워야단은 어떤 나라를 가리키는가?

이 괴물을 특정 제국과 연결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리워야단을 아시리아나 바벨론이라고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 제국 하나를 정답으로 확정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위협까지 제압하시는 모습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여기서 전쟁의 장면을 더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칼을 든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난 직후, 갑자기 포도밭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 41장에서는 인간이 제압할 수 없을 만큼 두려운 존재로 묘사됩니다. 시편 104:26에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다 생물로 등장합니다. 반면 시편 74:13–14에서는 하나님이 바다의 괴물들을 깨뜨리시고 리워야단의 머리들을 부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리워야단을 어떤 특정 동물의 정확한 명칭으로만 이해하거나, 반대로 성경 전체에서 언제나 동일한 초자연적 존재를 가리킨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달아나는 뱀 리워야단」, 「몸을 뒤트는 뱀 리워야단」, 그리고 「바다에 있는 괴물」이 이어집니다. 이들이 각각 서로 다른 세 괴물인지, 하나의 거대한 위협을 여러 이미지로 묘사하는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이름이 반복되고 시적 평행을 이루므로, 하나의 위협적인 대상을 여러 표현으로 강조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나 바벨론처럼 이스라엘을 압박했던 강대국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0:7에서는 이집트가 라합이라는 이름과 연결되고, 이사야 51:9–10에서는 라합을 깨뜨리고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의 행동이 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27장의 리워야단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협하는 세력을 상징한다고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고대의 바다 괴물 이미지는 바다가 지닌 위험과 통제하기 어려운 혼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구약은 그런 존재를 하나님과 대등하게 싸우는 또 하나의 신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21에서는 하나님이 큰 바다 생물들까지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칼을 드신 분이 포도밭에 물을 주신다

이사야 27:2–3 본문 →

다시 등장한 포도밭의 노래

그날에, 탐스러운 포도밭, 그것을 두고 노래하여라.이사야 27:2 · 본디새김

1절과 2절은 모두 「그날에」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리워야단을 벌하시는 날과 포도밭을 노래하는 날은 서로 무관한 시간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행동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바다의 괴물에게는 칼을 드시지만, 포도밭에는 물을 주십니다.

그러나 포도밭의 노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사야 5장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좋은 땅에 포도밭을 만드시고, 돌을 골라내시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망대를 세우시고 포도즙 틀까지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대한 열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5:7은 포도밭이 누구인지 직접 밝힙니다. 여호와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식물은 유다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대하신 열매가 무엇이었는지도 밝힙니다. 정의와 의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타난 것은 피 흘림과 고통받는 사람들의 외침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포도밭의 울타리를 제거하고, 그곳을 황폐하게 하며, 비가 내리지 않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이사야 5:5–6).

그런데 27장에서는 정반대의 말씀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야훼는 그것을 지키는 이다. 순간마다 그것에 물을 준다. 누군가 그것을 덮치지 못하도록 밤에도 낮에도 그것을 지킨다.」이사야 27:3 · 본디새김

처음의 실패한 포도밭이 어떻게 다시 회복되는지를 보여 주는 대응 관계입니다. 그분은 누군가에게 포도밭을 잘 돌보라고 명령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직접 그 포도밭을 지키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순간마다」와 「밤에도 낮에도」라는 표현입니다. 한순간도 포도밭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포도밭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그것을 덮치지 못하도록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포도밭을 돌보시는 분의 신실함이 새로운 열매의 근거가 됩니다.

「내게는 분노가 없다」 — 심판하셨던 하나님이 평화를 권하시다

이사야 27:4–5 본문 →

하나님은 더 이상 화내지 않으시는가?

「내게는 분노가 없다. 싸움에서 내 앞에 가시와 가시덤불이 놓인다면 좋으련만. 내가 그것들을 향해 나아가 모두 함께 불태우겠다.」이사야 27:4 · 본디새김

앞에서 하나님은 리워야단을 죽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뒤에서는 야곱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심판하셨다는 사실도 나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분노가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신이 돌보시는 포도밭을 이야기하시면서 분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하나님이 이제 어떤 죄악에도 분노하지 않으신다는 보편적 선언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포도밭을 향한 하나님의 관계가 심판의 선언에서 보호의 선언으로 변화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가시덤불을 포도밭에 대한 외부의 위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포도밭 안에 남아 있는 죄악과 반역의 요소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해석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포도밭과 가시덤불을 동일하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포도밭은 지키시지만, 가시덤불은 불태우십니다.

불태우는 대신 평화를 이루라는 초청

「아니면 그가 내 보호를 붙잡게 하라. 그가 나와 평화를 이루게 하라. 평화를 나와 이루게 하라.」이사야 27:5 · 본디새김

불태워지는 길과 하나님의 보호를 붙잡는 길이 나란히 제시됩니다. 여기서 「보호」는 단순히 위험한 상황에서 잠시 숨는 장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을 의지할 수 있는 견고한 힘으로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강함은 적을 없애는 능력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맞서던 존재에게도 평화의 길을 제시하실 수 있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화의 길을 먼저 제시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라는 초청입니다.

이제 포도밭에는 새로운 미래가 약속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장에서 가시와 가시덤불은 버려진 포도밭에 자라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사야 27장에서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불태우겠다고 하십니다. 이 가시덤불을 포도밭에 대한 외부의 위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해치려는 적대적인 세력을 제거하신다는 뜻입니다. 반면 포도밭 안에 남아 있는 죄악과 반역의 요소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면서 그들 가운데 자라나는 해로운 것들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앞에 등장한 가시덤불로 상징되는 적대자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하나님께 대항하던 사람들을 보다 넓게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정확히 어느 집단에게 평화를 제안하시는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응답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뿌리를 내리고 온 세상에 열매를 맺다

이사야 27:6 본문 →

다가오는 날들에 야곱이 뿌리를 내리고, 이스라엘이 꽃을 피우고 싹을 낼 것이다. 그들이 온 세상을 열매로 채울 것이다.이사야 27:6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전쟁과 추방, 황폐함을 겪었습니다. 나라가 흔들리고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 백성에게 뿌리를 내린다는 약속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더 이상 뽑혀 나가거나 떠돌지 않고, 다시 살아갈 터전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장에서 포도밭의 문제는 열매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의로움을 기대하셨지만 피 흘림과 고통의 외침을 보셨습니다. 따라서 27장의 열매를 단순히 인구 증가나 경제적 번영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여기서 열매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시 열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5장의 포도밭 노래와 연결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그분이 기대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회복의 전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의 포도밭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땅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열매가 「온 세상」을 채웁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전 세계의 영토를 정복한다는 구체적인 정치적 예언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사야서가 여러 곳에서 보여 주는,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복이 민족들에게 미치는 전망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2:2–4에서는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배우러 시온으로 나아옵니다. 이사야 19:23–25에서는 이집트와 아시리아까지 여호와야훼의 복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포도밭을 회복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포도밭이 살아남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온 열매가 세상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약속 바로 뒤에는 이스라엘이 실제로 겪었던 심판에 관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기 포도밭을 사랑하시면서도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하셨을까요?

야곱을 치신 하나님은 무엇을 이루려 하셨는가?

이사야 27:7–9 본문 →

야곱과 그를 친 자들이 받은 심판은 같았는가?

7절은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야곱을 친 자를 때린 것처럼 야곱을 때렸는가? 여호와야훼에게 죽임당한 이들처럼 야곱이 살육당했는가?이사야 27:7 · 본디새김

야곱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을 압박했던 세력들이 당한 심판과 동일한 방식으로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라는 대조가 제시됩니다.

다만 원문에서 누구를 때리고 누구를 죽였는지를 나타내는 대명사들의 지시 대상이 모두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두 번째 질문의 「죽임당한 이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들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본디새김은 여호와야훼에게 죽임당한 다른 이들과 야곱을 비교하는 방향으로 옮겼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두 질문 모두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을 치던 세력의 운명을 대조합니다.

추방과 거센 동풍

「당신은 그녀를 내몰고 떠나보내며 그녀와 다투셨습니다.」 그는 동풍이 부는 날, 자기의 거센 바람으로 그녀를 몰아냈다.이사야 27:8 · 본디새김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해 「당신은」이라고 고백하다가, 이어서 하나님을 가리켜 「그는」이라고 서술합니다. 이러한 시점 변화는 시적인 말씀에서 낯설지 않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징계를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야곱에게 내려진 심판은 추상적인 처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내몰리고 떠나보내졌습니다. 고향을 잃고 다른 땅으로 가야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리적 환경에서 동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건조하고 거센 바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하나님이 백성을 몰아내시는 심판의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추방을 겪었으나, 앞에서는 다시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약속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이스라엘의 징계는 회복의 전망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고통스러운 심판을 통해 무엇이 제거되어야 했습니까?

용서는 우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야곱의 죄악이 속죄될 것이다. 그의 죄를 없애는 일이 맺는 모든 열매는 이것이다.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산산이 부서진 석회 돌처럼 만들 때, 아세라들과 태양 기둥들이 서 있지 못할 것이다.이사야 27:9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른 신들과 관련된 숭배 행위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단순히 다시 예배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잘못된 숭배의 파괴를 말씀하십니다.

특히 「산산이 부서진 석회 돌처럼」이라는 표현은 그 철저함을 보여 줍니다. 제단이 잠시 사용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다시 쉽게 세워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부서진 모습입니다.

본문은 죄악의 제거와 잘못된 숭배의 파괴를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모든 고난이 자동으로 사람을 정결하게 만들고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는 이 장에서 야곱의 죄와 징계, 정결하게 됨과 회복을 구체적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모든 개인의 고통이 어떤 죄의 결과인지, 또 모든 고통에 어떤 특별한 정화의 목적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말하는 제단은 문맥상 여호와야훼께서 명하신 제사 제도 자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연결된 제단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세라는 가나안의 여신과 관련된 숭배 대상이며, 성경에서는 그 숭배에 사용된 기둥이나 목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태양 기둥들 역시 이 문맥에서 부적절한 숭배와 관련된 물건입니다. 9절의 「이것으로」가 앞에 나온 징계를 가리키는지, 뒤에 나오는 제단의 파괴를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한 제단을 부수는 일이 죄악이 속죄되는 조건인지, 속죄와 정결하게 됨이 가져온 결과인지도 원문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우상을 부수는 행동으로 스스로 속죄를 획득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상과 관련된 행위를 그대로 남겨 두어도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이 떠난 요새와 말라 버린 가지들

이사야 27:10–11 본문 →

어느 성읍이 버려졌는가?

요새화된 성읍은 홀로 남았고, 거처는 내버려지고 버림받아 광야와 같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송아지가 풀을 뜯고, 그곳에 드러누워 그 성읍의 가지들을 다 먹어 치울 것이다.이사야 27:10 · 본디새김

여기서 다시 이름 없는 도시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성읍으로 읽는 것입니다. 앞에서 야곱의 죄와 정결하게 되는 일을 다루었으므로, 그 죄로 인해 황폐해진 이스라엘의 도시를 묘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강력한 세력의 성읍으로 읽는 것입니다. 앞서 이사야 25:2와 26:5–6에서도 높은 요새를 가진 성읍이 무너졌습니다. 그런 흐름에서 압제자의 도시가 황폐해지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성읍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므로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도시가 제 기능을 잃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세워 놓은 질서가 사라지고, 그 공간이 버려진 들판처럼 변한 것입니다.

같은 식물인데 왜 하나는 꽃피고 하나는 불타는가?

그 성읍의 가지들이 마르면 꺾일 것이며, 여자들이 와서 거기에 불을 붙일 것이다. 그 성읍의 주민들은 깨달음이 없는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만든 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빚은 이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7:11 · 본디새김

앞에서 야곱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온 세상을 열매로 채울 것이라고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지들이 말라 버려 땔감이 됩니다.

하나는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다른 하나는 메말라 꺾이고 불에 탑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나 보호받고 다른 민족은 언제나 심판받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이미 이스라엘 자신의 죄와 징계가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던 존재에게도 평화를 이루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27:5).

따라서 이 장의 핵심적인 구별은 민족적 혈통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의 뜻에 대한 응답에 있습니다.

그들을 만든 이가 왜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가?

여기서 문제의 원인은 「깨달음이 없는 백성」이라는 말로 제시됩니다. 문맥상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하나님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이사야 1:3에서는 소도 자기 주인을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고 책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뜻에 응답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그들을 만든 이」, 「그들을 빚은 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들을 만드신 분이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무지와 불응답이 심판의 배경입니다.

또한 이 선언을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보편적인 규정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황폐해진 성읍과 주민들의 운명을 심판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분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상태를 영원히 용인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황폐한 성읍과 말라 버린 가지들이 나타난 뒤, 하나님은 다시 사람들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거두신다

이사야 27:12 본문 →

그날에 여호와야훼가 그 강의 물줄기에서 이집트 시내까지 두드려 털어 낼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야훼가 너희를 하나하나 거두어들일 것이다.이사야 27:12 · 본디새김

이제 시선은 포도밭과 성읍을 벗어나 넓은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이사야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수확에 비유합니다. 여기에는 앞에서 등장한 포도밭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흩어진 백성을 거두시는 장면은 엄청난 규모의 사건입니다. 유프라테스강과 이집트 시내 사이의 넓은 지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수확은 「하나하나」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거대한 집단으로만 보지 않으십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거두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거두는 손과 마지막 뿔나팔

이사야 27장의 마지막에서는 수확의 이미지가 소리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거두시는 행동은 큰 뿔나팔 소리와 연결됩니다. 이제 그 소리를 따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 강」은 고대 이스라엘의 지리적 문맥에서 일반적으로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이집트 시내」는 이집트와 가나안 지역의 경계 부근을 가리키는 물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강의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두 지역은 북동쪽과 남서쪽의 넓은 범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올리브나무를 두드려 열매를 거두거나, 수확한 곡식을 두드려 알곡을 분리하는 작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24:13에서는 심판 후에 남은 사람들이 올리브나무를 털고 난 뒤의 열매나 포도 수확 후에 남은 송이들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아주 조금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수확의 이미지로 그 남은 사람들을 거두십니다.

큰 뿔나팔이 울리고 흩어진 사람들이 돌아오다

이사야 27:13 본문 →

그날에 큰 뿔나팔이 울릴 것이다. 앗시리아 땅에서 멸망해 가는 이들과 이집트 땅에 쫓겨나 있는 이들이 와서,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에서 여호와야훼에게 엎드려 절할 것이다.이사야 27:13 · 본디새김

나팔은 누구를 부르는가?

그들은 강력한 왕이나 부유한 상인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큰 뿔나팔이 울리자 다시 돌아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러 돌아오는가?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목적은 단순히 이전의 정치적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27장에서 회복의 마지막 모습은 이스라엘이 다시 강대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와 여호와야훼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뿔나팔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소집하거나, 중요한 종교적 행사를 알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민수기 10장에서는 나팔 소리를 통해 공동체의 이동과 집합을 조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레위기 25:9에서는 희년과 관련하여 뿔나팔을 불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사야 27장의 큰 뿔나팔은 사람들을 모으는 신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북왕국의 많은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열왕기하 17:6). 또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도피하거나 흩어져 살아갈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예레미야 43:5–7에서는 유다의 일부 사람들이 이집트로 내려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27:13이 이 가운데 어느 특정한 추방 사건이나 귀환 사건만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아시리아와 이집트를 통해 널리 흩어진 백성의 처지를 보여 줍니다. 이사야 11:11–12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여러 나라에 흩어진 자기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라는 약속이 나옵니다. 이사야 19:23–25에서는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이스라엘과 함께 여호와야훼의 복에 참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27장의 마지막은 이러한 약속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큰 뿔나팔이 울리는 날

이사야 27:1–13 본문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제거하시고, 그들 가운데 남아 있는 죄악도 제거하시며, 마침내 그들을 자신의 앞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제거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분이 포도밭을 계속 돌보시는 이유는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가 없는 빈 포도밭이 아니라, 죄에서 정결하게 되어 열매 맺는 포도밭입니다.

마지막에는 큰 뿔나팔이 울립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앗시리아 땅에서 멸망해 가던 사람들, 이집트 땅에 쫓겨나 있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부르시는 분은 포도밭을 밤낮으로 지키겠다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여호와야훼입니다.

한때 그들은 바람에 밀려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제 큰 뿔나팔 소리를 듣고 돌아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을 향하고, 그곳에서 모두가 여호와야훼 앞에 엎드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