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9장
이 장의 자리 · 28–35장 · 잘못된 의지에 내릴 화
입술은 가까이, 마음은 멀리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제사가 드려졌으며, 해마다 절기가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공경하는 말을 입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성읍을 향해 포위를 선언하십니다.
더욱 뜻밖인 것은 포위당한 예루살렘을 구하시는 분도 여호와야훼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성읍을 낮추시면서도 대적들을 흩으시고, 백성의 눈을 감기시면서도 다시 보게 하실 날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29장은 이처럼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하나님의 행동을 나란히 놓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의 성읍을 치시면서 동시에 지키십니까? 왜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할 예언자들조차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까? 그리고 무엇이 달라져야 이 백성은 다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무너져야 할 것은 성벽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고 믿으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백성의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성읍을 포위하시다
다윗의 성읍이 포위당하는 역설
첫 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을 평소와 다른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아, 아리엘아, 아리엘아,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아. 한 해에 또 한 해를 더해라. 절기들이 돌아오게 하라.」이사야 29:1 · 본디새김
아리엘이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는 것은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이라는 설명과 8절의 시온산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자신의 도성으로 삼았습니다(사무엘하 5:6–9). 그 뒤 예루살렘은 다윗 왕조의 중심지가 되었고,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뒤에는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한때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에 이제 여호와야훼가 직접 진을 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승리가 기억되는 장소가 하나님의 포위 앞에 놓인 것입니다.
1절의 절기 언급도 같은 맥락에서 읽힙니다.
이 말은 정기적인 예배와 절기가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포위 선언이 이어지므로, 절기가 반복된다는 사실만으로 성읍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경고로 들립니다.
아리엘이라는 이름의 반전
「내가 아리엘을 압박하겠다. 슬픔과 탄식이 일어나고, 그 성은 내게 아리엘, 곧 제단 화덕처럼 될 것이다.」이사야 29:2 · 본디새김
원래 제단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 성읍 자체가 불길 속에 놓이는 제단처럼 묘사됩니다.
4절에서 예루살렘의 몰락은 그 목소리로 표현됩니다.
「너는 낮아져 땅에서 말하고, 네 말소리는 먼지 속에서 낮게 깔릴 것이다. 네 목소리는 땅에서 들리는 죽은 자의 혼 같고, 네 말소리는 먼지 속에서 지저귈 것이다.」이사야 29:4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죽은 자의 혼이나 영매가 내는 소리는 속삭이거나 지저귀는 소리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이사야 8:19). 여기서 그 비유는 실제로 죽은 자가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권위와 힘이 얼마나 낮아질지를 드러냅니다.
이 성읍은 아직 말을 하지만, 더는 예전처럼 말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과 3절의 「내가 너를 둥글게 둘러 진을 치고」, 두 절의 ‘진을 치다’에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 하나가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아리엘(אֲרִיאֵל)은 형태상 ‘하나님의 사자(獅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단의 화덕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에스겔 43:15–16에서는 제단과 관련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처음부터 ‘제단 화덕’이라는 뜻만 의도되었는지, ‘하나님의 사자’라는 이름과의 언어유희가 함께 작용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2절이 예루살렘을 제단 화덕에 비유하면서 그 이름을 심판의 이미지로 전환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포위당한 성읍과 꿈에서 깨어나는 군대
4절까지 읽으면 예루살렘이 결국 멸망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장면이 돌연 바뀝니다.
너를 대적하는 낯선 자들의 무리는 고운 먼지처럼 되고, 포악한 자들의 무리는 날려 가는 겨처럼 될 것이다. 그 일이 갑자기,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다.이사야 29:5 · 본디새김
바로 앞 절에서 예루살렘은 먼지 속으로 낮아졌습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무리 자체가 먼지가 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지만, 그렇다고 그 성읍을 공격하는 나라들이 무제한의 권력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너를 찾아올 것이다. 천둥과 지진과 큰 소리로,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삼키는 불길로.이사야 29:6 · 본디새김
그분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분이면서, 그 백성을 파괴하려는 세력까지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꿈속에서는 이미 승리했다
7–8절에서는 적군의 패배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일상적인 경험을 끌어옵니다.
배고픈 사람이 꿈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깨어나면 배는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에서 물을 마셨지만, 깨어나 보니 갈증이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차지하려는 여러 민족의 계획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여호와야훼는 말씀하십니다. 강한 군대를 더 강한 군대가 무찌른다는 설명이 아니라, 적군이 꿈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었다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지만, 최종적인 결과를 결정하는 권한은 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9절부터는 또 다른 형태의 착각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나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36–37장과 열왕기하 18–19장은 아시리아가 유다의 성읍들을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위협한 사건을 전합니다. 이사야 29장의 포위와 구원도 그러한 역사적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29:1–8 자체는 공격하는 나라의 이름이나 사건의 연도를 밝히지 않으므로, 특정한 한 차례의 침공을 그대로 묘사한 기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찾아올 것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파케드(פָּקַד)는 파카드 동사의 수동형입니다.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살피다, 돌보다, 책임을 묻다, 징벌하다 등의 뜻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앞의 1–4절을 고려하면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방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5절과 7–8절은 공격하는 무리의 패배를 말하므로, 대적들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해할 근거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긴장을 완전히 해소하지 않습니다.
눈을 감은 예언자들과 읽을 수 없는 두루마리
포도주 없이 취한 사람들
9절은 당혹스러운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머뭇거려라, 그리고 어리둥절해져라.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눈먼 자가 되어라. 그들은 취했지만 포도주 때문이 아니고, 휘청거렸지만 독한 술 때문이 아니다.이사야 29:9 · 본디새김
이 명령은 실제로 눈을 멀게 하라는 권고가 아닙니다. 이미 분별력을 잃어버린 백성의 상태를 드러내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앞 장인 이사야 28:7–8에서는 포도주와 독한 술에 취한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판단을 그르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이사야는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도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문제는 육체의 취기가 아니라 영적 분별력의 상실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너희 위에 깊은 잠의 영을 쏟아붓고, 예언자들인 너희 눈을 꼭 감아 버렸으며, 너희 머리인 선견자들을 덮었기 때문이다.이사야 29:10 · 본디새김
9절은 백성에게 스스로 눈을 멀게 하라고 말합니다. 10절은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눈을 감기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완고함과 하나님의 심판이 나란히 놓인 것입니다. 이는 이사야 6:9–10에서 이미 등장한 주제입니다.
백성의 눈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보지 못합니다. 지도자들의 머리도 덮여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보가 부족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전달해야 할 통로 자체가 기능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책은 있는데 아무도 읽지 못한다
11–12절은 이러한 상태를 두루마리에 비유합니다.
글을 아는 사람에게 봉인된 두루마리를 건네자 그는 봉인되어 있어서 읽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건네자 그는 글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같습니다.
말씀이 주어져 있어도 그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서 두루마리는 단순한 문맹 문제를 지적하는 비유가 아닙니다. 11절이 그것을 ‘이 모든 환상’이라고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환상이 주어졌지만, 백성에게 그것은 봉인된 글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
주가 말했다. 「이 백성이 입으로 다가오고 입술로 나를 공경하면서도, 마음은 내게서 멀어졌고, 그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에게서 배워 익힌 명령이 되었다.」이사야 29:13 · 본디새김
히브리어 성경에서 ‘마음’은 감정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며 의지하고 결정을 내리는 인간의 내면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예배할 때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판단과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종교적인 언어와 행위를 유지합니다.
본문이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살아 있는 응답이 아니라, 사람에게 배운 규칙을 수행하는 일로 대체된 상태입니다. 예배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배우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일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첫 절에서 절기가 계속 돌아오는데도 예루살렘이 심판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말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서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1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이런 백성에게 다시 놀라운 일을 행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운 일’은 무조건 기쁜 기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곧이어 지혜로운 사람의 지혜가 사라지고 분별력 있는 사람의 분별이 감추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의지하던 지혜의 체계가 무너지는 일도 하나님의 놀라운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지혜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었겠습니까?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이사야 29:13을 직접 인용하시며 입술의 공경과 마음의 거리를 지적하십니다(마가복음 7:6–7). 바울도 29:14의 지혜에 관한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고린도전서 1:19). 두 인용 모두 인간의 종교적 확신과 지혜가 하나님의 뜻을 대신할 수 없다는 이사야의 문제의식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29장 자체의 중심에는 먼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와 약속이 있습니다.
토기장이를 진흙처럼 여기는 사람들
15절은 또다시 ‘아’라는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1절의 탄식은 아리엘이라는 성읍을 향했습니다. 15절의 탄식은 하나님께 계획을 숨기려는 사람들을 향합니다.
아, 자기 계획을 여호와야훼에게 숨기려고 깊이 파고드는 자들이여. 그들의 행위는 어둠 속에 있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우리를 보겠는가? 누가 우리를 알겠는가?」이사야 29:15 · 본디새김
그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16절은 이런 태도를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너희의 뒤집힌 생각이여. 토기장이가 진흙처럼 여겨질 수 있겠느냐? 만들어진 것이 자기를 만든 이를 두고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 하고 말하며, 빚어진 것이 자기를 빚은 이를 두고 「그는 분별이 없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이사야 29:16 · 본디새김
첫 번째 말은 자신이 만든 이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두 번째 말은 자신을 빚은 이의 판단 능력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정체성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오히려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보다 낫다고 여깁니다.
이 비유는 인간이 생각하거나 계획을 세우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이해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사야 10:15에서도 비슷한 비유가 사용됩니다. 도끼가 자기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없듯, 하나님의 손에 있는 존재가 스스로를 절대적인 권력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는 15절 자체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30:1–2에서는 여호와야훼에게 묻지 않고 이집트의 보호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책망받습니다. 이사야 31:1 역시 이집트의 군사력을 의지하면서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따라서 15절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당시 유다 지도층의 정치·외교적 판단과 연결하여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이 절의 비판은 그보다 넓습니다. 어떤 계획이든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 자체가 문제입니다.
봉인된 글이 들리기 시작하는 날
레바논과 경작지의 변화
17절에서 풍경이 갑자기 바뀝니다.
아주 조금만 더 지나면 레바논이 경작지로 바뀌고, 경작지가 숲으로 여겨지지 않겠느냐?이사야 29:17 · 본디새김
이것을 특정 지역에서 실제로 벌어질 농업·산림 변화의 예고로 읽을지, 하나님이 이루실 대대적인 반전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을 보면 이 변화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는 분명해집니다.
듣지 못하던 사람이 말씀을 듣는다
그날에 귀먹은 이들이 두루마리의 글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이 어둠과 암흑에서 벗어나 보게 될 것이다.이사야 29:18 · 본디새김
앞에서는 글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두루마리를 읽을 수 없었습니다. 듣게 되는 대상이 바로 앞에서 아무도 읽을 수 없었던 두루마리의 글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상태가 뒤집힙니다.
또한 10절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의 눈을 감기셨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눈먼 사람들이 어둠과 암흑에서 벗어나 보게 됩니다.
문맥상 영적 이해력의 회복이 중심에 있지만, 이것이 실제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회복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의 다른 본문에서도 구원은 듣고 보는 능력의 회복으로 묘사됩니다(이사야 35:5–6).
기뻐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19절에서 그 변화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억눌린 이들은 여호와야훼 안에서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이사야 29:19 · 본디새김
그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20–21절에서 설명됩니다. 포악한 자들과 조롱하는 자들,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성문에서 시비를 가리는 이에게 덫을 놓으며, 헛된 구실로 의로운 이를 밀어낸 자들이다.이사야 29:21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단순히 사람들이 드나드는 출입구가 아니었습니다. 장로들과 지도자들이 모여 분쟁을 해결하고 재판하는 공적인 장소이기도 했습니다(신명기 21:19, 룻기 4:1–11).
이사야가 지적하는 악행은 법과 재판을 악용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이 있습니다. 절차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과 정의가 없습니다.
13절에서 백성은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했지만 마음은 멀리 있었습니다. 21절에서 그들은 말과 절차를 사용해 이웃을 해쳤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입술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와 분리되면, 그 입술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다시 듣는 공동체는 사람의 목소리도 다시 공정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기쁨과 불의한 재판의 종식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레바논은 성경에서 울창한 삼림, 특히 백향목으로 잘 알려진 지역입니다. 이사야 2:13에서도 레바논의 백향목이 등장합니다. 반면 여기서 ‘경작지’로 번역된 히브리어 갈멜(כַּרְמֶל)은 비옥하고 경작할 수 있는 땅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반드시 갈멜산이라는 지명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레바논이 경작지로 바뀌고 경작지가 숲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익숙한 자연의 질서와 모습이 크게 달라지는 장면입니다. 이사야 32:15에서도 광야가 경작지로 바뀌고 경작지가 숲처럼 여겨지는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고 정의와 의가 자리 잡는 일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29장의 자연적 변화 역시 단순히 풍경을 바꾸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새롭게 질서가 잡히는 세계를 그리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29:4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큰일을 보았으면서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갖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30:6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그분을 사랑하게 하실 것을 약속합니다. 이사야 29장은 그와 같은 관계의 회복을 눈과 귀, 마음과 분별력,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녀들이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야곱과 아브라함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속량한 여호와야훼가 야곱의 집에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야곱이 수치를 당하지 않고, 이제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9:22 · 본디새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 행동하셨듯, 야곱의 집을 위해서도 행동하실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자녀들은 누구의 작품인가
「그가 자기 가운데 있는 자기 자녀들, 곧 내 손이 만든 이들을 볼 때, 그 자녀들이 내 이름을 거룩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곱의 거룩하신 이를 거룩하게 여기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이다.」이사야 29:23 · 본디새김
여기서 ‘그’는 야곱을 가리킵니다. 16절에서는 피조물이 자신을 만든 이를 부정합니다. 23절에서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자녀들이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깁니다.
처음에는 만든 이와 만들어진 이의 관계가 뒤집혀 있었습니다. 이제 그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경건한 어조로 발음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자신의 삶에서 마땅히 존중해야 할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리 있었습니다. 23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이름을 실제로 거룩하게 여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원하셨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24절에서는 그 변화가 마지막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마음이 헤매던 이들은 분별력을 얻고, 불평하던 이들은 가르침을 배울 것이다.」이사야 29:2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혜가 사라지고 분별 있는 사람들의 분별력이 감추어졌습니다(14절). 그런데 이제 마음이 헤매던 사람들이 분별력을 얻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에게서 배워 익힌 명령에 불과했습니다(13절). 그런데 이제 불평하던 사람들이 참된 가르침을 배웁니다.
백성은 이전에도 무언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움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분별력을 얻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을 주시며 그를 보호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사야 29:22가 정확히 아브라함 생애의 어느 사건을 ‘속량’이라고 부르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특정 사건 하나와 동일시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언약 역사 속으로 부르시고 그를 위해 행동하신 사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절과 24절, 두 곳의 ‘배우다’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온 말이며, 두 장면은 배움의 성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구원
그분은 다윗의 성읍이라고 해서 그 불의를 눈감아 주지 않으시고, 그 성읍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회복의 가능성을 거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성읍을 낮추시고, 인간의 지혜를 무너뜨리시며, 자신이 만드신 존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듣고, 보고, 배우고, 기뻐할 수 있는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는 회복된 공동체를 묘사하면서 강대한 군대나 화려한 성전의 모습을 마지막에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장면은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만을 고집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다시 하나님을 공경하게 되는 것은 입술에 새로운 말을 익혔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마침내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