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37장

이 장의 자리 · 36–39장 · 히스기야와 아시리아

제국의 손과 하나님의 손

이사야 37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히스기야가 편지를 펼쳐 놓는 모습입니다.

그 편지에는 앗시리아 왕 산헤립의 위협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 나라가 앗시리아 앞에 무너졌고, 그 나라들의 신들조차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으니 예루살렘도 같은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산헤립은 여러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국들을 정복한 사람과 모든 왕국의 하나님은 같지 않습니다.

그 차이가 이 장 전체를 움직입니다.

앞 장에서 앗시리아의 사절 랍사게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누구를 신뢰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여러 나라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여호와야훼도 예루살렘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7장은 그 주장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산헤립은 자신이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헤립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조차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사야 37장의 핵심적인 반전입니다.

히스기야가 위협을 듣습니다. 하나님도 그 말을 들으십니다. 산헤립 역시 새로운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소식을 듣고도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다릅니다.

이 장은 그 차이를 따라가며, 역사를 움직이는 말과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신뢰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837장 본문 읽기 →

아이가 태어나려 하지만 낳을 힘이 없다

이사야 37:1–7 본문 →

왕이 옷을 찢고 성전으로 들어가다

1절은 히스기야의 행동으로 시작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감싼 뒤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들어갔다.이사야 37:1 · 본디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 세 관리가 옷을 찢은 채 히스기야에게 돌아왔습니다. 이제 히스기야도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비탄과 재난,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드러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앞 장에서 앗시리아는 자신들의 군사력을 보여 주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위협에 즉시 군사적인 반격으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엘리아김과 셉나, 제사장 원로들을 예언자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이들은 모두 굵은 베를 입고 있습니다. 왕의 탄식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머무르지 않고,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공동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는 유다의 정치적 판단을 거듭 비판해 온 예언자였습니다. 이집트와의 동맹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제 왕은 그 예언자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출산 직전인데 낳을 힘이 없다

그들이 이사야에게 말했다. 「히스기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고난과 책망과 모욕의 날입니다. 아이들이 자궁 어귀까지 왔지만 산모들에게 낳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이사야 37:3 · 본디새김

결정적인 순간이 왔는데, 그 순간을 통과할 힘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이를 낳을 힘이 없다는 것은 산모와 아이 모두에게 위험한 상황입니다. 이제까지 견뎌 온 모든 진통과 수고가 결실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앗시리아의 위협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이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랍사게가 계속 공격했던 것도 바로 유다의 무력함이었습니다. 유다에는 충분한 병거와 기병이 없고, 앗시리아에 맞설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사실을 무조건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무력함에서 랍사게와 전혀 다른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랍사게는 너희에게 힘이 없으므로 항복하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우리에게 힘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도움을 구하겠다고 합니다.

같은 무력함을 인정하더라도, 누구를 신뢰하느냐에 따라 그다음 행동은 달라집니다.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랍사게의 말을 들으시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들으신 그 말 때문에 꾸짖으실지도 모릅니다. 랍사게의 주인인 앗시리아 왕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라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러니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를 올려 주십시오.』」이사야 37:4 · 본디새김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히스기야가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자와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인정하며 중보를 요청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뒤의 20절에서는 히스기야 자신이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라고 기도합니다.

랍사게는 여러 나라의 신들과 여호와야훼를 같은 범주에 놓았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여호와야훼를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나라의 신상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나무와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

이미 많은 성읍이 함락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전쟁의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사야 1:9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살아남은 이들을 조금이라도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유다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10:20–22에서도 남은 이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전망이 나타납니다. 37장에서는 이 주제가 국가적 재난 속에서 구체적인 현실이 됩니다.

남은 이들은 단순히 경건한 소수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전쟁을 겪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히스기야는 바로 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를 요청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첫 번째 응답

이사야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주인에게 이렇게 전해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들은 말, 곧 앗시리아 왕의 종들이 나를 헐뜯은 그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라.』」이사야 37:6 · 본디새김

그런데 이 명령은 앗시리아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주장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말을 들으셨다는 사실과, 앞으로 행하실 일에 근거합니다.

랍사게는 자기 왕을 「위대한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앗시리아 왕의 종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대표하는 제국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들은 여전히 다른 왕에게 속한 종들입니다.

「『보아라, 내가 그 안에 영을 넣겠다. 그는 소문을 듣고 자기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그를 자기 땅에서 칼에 쓰러지게 하겠다.』」이사야 37:7 · 본디새김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헤립 자신이 방향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말씀을 전한 직후, 앗시리아의 위협은 오히려 한 번 더 반복됩니다. 그 반복이 히스기야를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이끕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영」은 히브리어 루아흐(⁨רוּחַ⁩)입니다. 이 낱말은 바람이나 숨결, 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산헤립의 내면이나 행동에 영향을 주신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만, 그 방식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악한 영이 그에게 들어간다거나, 하나님이 단순히 생각 하나를 떠올리게 하신다는 식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산헤립도 소문을 듣는다

이사야 37:8–13 본문 →

듣는 행위가 전쟁의 방향을 바꾼다

8절에서 랍사게는 앗시리아 왕에게 돌아갑니다.

산헤립은 이미 라기스를 떠나 립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어 9절에서는 새로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앗시리아 왕은 쿠시 왕 티르하카에 관하여 「그가 임금님과 싸우려고 나왔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사자들을 보내며 말했다.이사야 37:9 · 본디새김

여기서 본문은 산헤립이 소식을 듣는다는 사실을 반복합니다. 이 반복은 앞의 예언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산헤립이 소문을 듣고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9절의 소식을 7절의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산헤립이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철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히스기야에게 다시 위협적인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는 지금까지 다른 나라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해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 역시 다른 나라의 군사적 움직임에 반응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의 행동도 자신이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소식들에 영향을 받습니다.

두 번째 위협은 히스기야의 하나님을 직접 겨냥한다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렇게 전해라. 『네가 신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은 앗시리아 왕의 손에 넘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너를 속이게 두지 마라.』」이사야 37:10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랍사게는 이집트와 히스기야의 군사적 능력부터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공격합니다. 그가 무너뜨리려는 것은 단지 유다의 성벽이 아닙니다. 히스기야가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산헤립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거짓된 약속으로 규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히스기야가 군사적으로 잘못 판단했다는 비판보다 훨씬 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1–13절에서는 여러 나라와 도시의 이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고산, 하란, 레셉, 텔라사르의 에덴 자손들, 하맛, 아르팟, 스파르와임, 헤나와 이와입니다. 산헤립은 자신과 조상들이 여러 나라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하맛 왕과 아르팟 왕과 스파르와임 성읍의 왕과 헤나와 이와의 왕은 어디 있느냐?』」이사야 37:13 · 본디새김

그런데 이 질문은 나중에 산헤립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산헤립은 다른 나라의 왕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자신의 왕권도 언젠가 끝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마지막에 그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이제 히스기야는 그 위협을 글로 받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를 통해서만 응답을 기다리던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이 말하는 티르하카는 이집트와 쿠시를 다스린 왕으로 알려진 타하르카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산헤립의 유다 원정은 통상 기원전 701년으로 이해되는 반면, 타하르카가 왕위에 오른 시점은 기원전 690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중에 왕이 된 인물의 칭호를 과거 사건에 사용한 것일 수도 있고, 본문이 전하는 사건들의 시간적 관계를 달리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이 구절만으로 한 해석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편지를 펼치고, 사실은 인정하되 결론은 거부한다

이사야 37:14–20 본문 →

히스기야는 편지의 내용을 지우지 않는다

14절에서 히스기야는 다시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올라갑니다.

히스기야는 사자들의 손에서 서신들을 받아 읽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올라갔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여호와야훼 앞에 펼쳤다.이사야 37:14 · 본디새김

히스기야의 행동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을 하나님의 판단 아래 가져가는 행위로 읽을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현실을 지우지 않습니다. 산헤립의 위협을 실제보다 작게 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바꾸는 것은 현실 자체가 아니라, 그 현실을 가져가는 자리입니다.

앗시리아 왕의 말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들렸던 상황에서, 이제 그 말이 여호와야훼 앞에 놓입니다.

「당신만이 땅의 모든 왕국의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고백합니다.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 당신만이 땅의 모든 왕국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이사야 37:16 · 본디새김

산헤립은 여러 나라의 신들을 열거한 뒤, 여호와야훼도 그중 하나인 것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여호와야훼를 여러 나라에 각각 속한 신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모든 왕국의 하나님이십니다.

산헤립이 다스리는 앗시리아도 그 왕국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앗시리아가 다른 나라들을 정복했더라도 그 나라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야훼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산헤립은 나라들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여호와야훼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히스기야는 두 존재를 같은 수준에서 비교하지 않습니다. 산헤립은 자신이 차지한 땅을 자랑하지만, 히스기야는 그 땅 자체를 만드신 분께 기도합니다.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떠 주십시오

「여호와야훼, 당신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 당신의 눈을 떠서 보아 주십시오.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려고 전해 온 모든 말을 들어 주십시오.」이사야 37:17 · 본디새김

히브리어 기도문에서 귀를 기울이고 눈을 뜨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시고 행동해 주시기를 구하는 간청입니다. 시편 17:6, 31:2 등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나타납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위협이 단순히 유다 왕국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능력과 권위에 대한 모욕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자기 나라의 정치적 이익을 곧 하나님의 명예와 동일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는 산헤립이 실제로 여호와야훼의 구원 능력을 공개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두 문제가 함께 놓입니다.

산헤립의 주장 가운데 사실인 것은 인정한다

「여호와야훼, 참으로 앗시리아 왕들이 모든 나라와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했습니다.」이사야 37:18 · 본디새김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거짓말만 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사실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그는 산헤립이 내놓은 결론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것들은 신들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나무와 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것들을 없애 버렸습니다.」이사야 37:19 · 본디새김

산헤립의 경험은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잘못되었습니다. 그가 불태운 신상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물체였습니다. 그 사실이 창조주 여호와야훼까지 같은 방식으로 평가할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논증은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더욱 중요해집니다. 이사야 44:9–20에서는 사람이 나무를 가지고 자신의 필요를 위한 물건과 신상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신상에게 구원을 구하는 모순이 자세히 드러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그와 같은 구별을 이미 보여 줍니다.

참된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보호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창조주이십니다.

구원의 목적은 모든 왕국이 알게 되는 것이다

20절에서 히스기야는 마침내 구원을 구합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저희를 그의 손에서 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땅의 모든 왕국이 당신만이 여호와야훼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이사야 37:20 · 본디새김

여기서 「그의 손」은 산헤립의 권세를 가리킵니다. 기도는 자신들의 위기에서 시작했지만, 끝에서는 모든 왕국을 향합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왕국의 하나님이셨습니다. 20절에서는 모든 왕국이 그 사실을 알게 되기를 구합니다.

기도의 처음과 끝이 서로 연결됩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 백성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단순히 유다의 정치적 성공으로만 이해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통치가 드러나는 사건이 되기를 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적을 근거로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고백하고,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 행동하시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전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그룹」은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 관련된 날개 달린 천상 존재들입니다. 출애굽기 25:18–22에서는 증언의 궤를 덮는 속죄 덮개 위에 그룹들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따라서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왕좌에 앉아 다스리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전과 언약궤에 연결된 하나님의 왕권과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제국의 승리를 허락하신 분이 그 한계도 정하신다

이사야 37:21–29 본문 →

「네가 내게 기도했으므로」

21절에서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말을 전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앗시리아 왕 산헤립에 관하여 네가 내게 기도했으므로,」이사야 37:21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고백하며 구원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시온이 산헤립을 비웃다

22절은 예상과 전혀 다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야훼가 그를 두고 한 말이다. 처녀인 딸 시온이 너를 업신여기고 너를 비웃었다. 딸 예루살렘이 네 뒤에서 머리를 흔들었다.」이사야 37:22 · 본디새김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결과를 의인화된 시온의 행동으로 미리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딸 시온」은 예루살렘을 인격화한 표현입니다. 「처녀」라는 말은 그 도시가 침략자의 손에 함락되지 않는다는 전망과 어울립니다.

성벽 앞에서 랍사게는 유다의 군사력을 조롱했습니다.

이제는 시온이 산헤립을 조롱합니다.

예루살렘이 갑자기 더 강한 군대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 도시의 운명을 다르게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정말 모욕한 이는 누구인가

「네가 누구를 모욕하고 헐뜯었느냐? 누구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네 눈을 높이 치켜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향해서였다.」이사야 37:23 · 본디새김

이것은 산헤립의 교만을 신체적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그는 상대를 내려다보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행동의 최종적인 대상이 누구였는지 밝히십니다.

산헤립은 여러 나라의 신들을 하나의 범주에 놓고 그 신들이 자기 군대 앞에서 무력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다른 신상들과 단순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만든 권력의 기준으로 판단되거나 조종될 수 없는 분입니다.

산헤립의 말에는 「내가」가 가득하다

「너는 네 종들을 시켜 주를 모욕하고 말했다. 『내 수많은 병거를 이끌고 나는 산들의 높은 곳, 레바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올라갔다. 나는 그곳의 키 큰 백향목들과 가장 좋은 사이프러스들을 베고, 그 끝의 높은 곳, 그 무성한 숲으로 들어가겠다.』」이사야 37:24 · 본디새김
「『나는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다. 내 발바닥으로 이집트의 모든 강줄기를 말리겠다.』」이사야 37:25 · 본디새김

그의 말에서는 모든 성취의 주체가 자신입니다. 높은 산을 넘고, 거대한 나무를 베며, 먼 지역의 물을 통제하는 일은 왕의 능력과 정복의 규모를 과시하는 데 적합한 이미지입니다.

이사야 2:12–17에서는 높고 교만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는데, 그 가운데 레바논의 백향목도 등장합니다. 산헤립은 높은 나무들을 베어 버리는 자신의 힘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시적 세계에서 높고 견고한 것들을 낮추시는 궁극적인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 것은 군대가 먼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발바닥으로 이집트의 모든 강줄기를 말리겠다는 표현은 과장된 정복의 언어입니다. 산헤립은 자신의 군사력을 자연의 거대한 힘까지 제압할 수 있는 능력처럼 묘사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그 자랑의 전제를 뒤집으십니다.

「내가 오래전에 그 일을 마련했다」

「네가 듣지 못했느냐? 내가 오래전에 그 일을 마련했고, 아득한 옛날부터 그것을 빚었다. 이제 내가 그것을 실현했으니, 너는 요새화된 성읍들을 무너뜨려 돌무더기로 만들게 되었다.」이사야 37:26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도 「내가」가 반복됩니다. 산헤립은 자신이 모든 일을 이루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이룬 일까지 자신의 오래된 계획과 통치 안에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사야 10:5–15에서 이미 전개된 주제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앗시리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막대기와 도끼에 비유됩니다. 도끼가 나무를 벨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도끼가 자신의 힘으로 나무를 벤 것처럼 자랑한다면, 그 도끼는 자기를 사용하는 사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의 승리는 실제였지만, 그는 그 승리의 의미를 잘못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앗시리아의 군사적 성공을 자신의 통치 아래 두셨다는 사실이 앗시리아가 행한 모든 폭력과 교만을 도덕적으로 승인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이어지는 28–29절에서 하나님은 산헤립의 격분과 오만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어떤 세력을 사용하신다는 사실과, 그 세력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일을 해도 된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산헤립은 실제로 나라들을 공격했습니다. 사람들을 두렵게 했고,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며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산헤립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강한 군대 앞에서 지붕 위의 풀처럼 된 사람들

「그곳 주민들은 손에 힘이 없어 겁에 질리고 수치를 당했다. 그들은 들의 풀과 푸른 풀, 지붕 위의 풀과 곡식이 서기 전의 밭이 되었다.」이사야 37:27 · 본디새김

고대의 지붕은 흙이 덮인 평평한 구조인 경우가 있었으므로, 그 위에 풀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붕 위의 풀은 땅에 깊이 뿌리내리기 어렵고 쉽게 시들 수 있습니다. 시편 129:6에서도 지붕 위의 풀은 자라기도 전에 마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의 약함을 조롱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무너뜨린 산헤립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일을 너 자신의 절대적 능력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약했다는 사실은 산헤립이 스스로 신적 권위를 주장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앉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까지 아신다

28절은 산헤립의 자랑을 아주 일상적인 동작으로 바꿔 놓습니다.

「네가 앉는 것과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을 내가 안다. 네가 나를 향해 격분하는 것도 안다.」이사야 37:28 · 본디새김

이것은 시편 139:2–3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앉고 일어남과 모든 길을 아신다고 고백하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 37장에서는 그 말이 특별히 심판의 의미를 지닙니다.

산헤립은 자신이 여러 나라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권력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평범한 움직임까지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는 다른 나라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자신도 하나님의 통치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산헤립의 오만은 하나님께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던 갈고리가 자기 코에 꿰어진다

「네가 나를 향해 격분하고 네 오만함이 내 귀에까지 올라왔으므로, 내가 네 코에 내 갈고리를 꿰고 네 입술에 내 재갈을 물려, 네가 왔던 길로 너를 돌려보내겠다.」이사야 37:29 · 본디새김

재갈은 동물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도구입니다. 코에 갈고리를 꿰는 것은 상대를 강제로 이끌어 가거나 굴복시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산헤립은 다른 나라의 왕들과 주민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를 움직이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진군하는 정복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방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던 왕이, 자신의 돌아갈 길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존재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산헤립이 물러난 뒤 유다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하나님은 단지 적을 쫓아내는 말씀으로 응답을 끝내지 않으십니다. 전쟁 이후 백성의 삶이 어떻게 다시 시작될지도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히브리어는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내게 기도했으므로」라고 읽으면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말씀하신다는 인과관계가 강조됩니다. 반면 「네가 내게 기도한 그 일에 관하여」라는 뜻으로 읽으면, 이제 하나님이 다루실 문제의 주제를 밝히는 표현이 됩니다. 본디새김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연결을 살렸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은 히스기야의 기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 앗시리아의 왕실 미술과 전쟁 기록에는 포로를 결박하고 굴욕적으로 끌고 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29절의 비유는 단순히 동물을 다루는 일반적인 장면을 넘어, 정복자의 권력이 거꾸로 자신에게 적용되는 상황을 연상시킵니다.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

이사야 37:30–32 본문 →

왜 구원의 표징이 농사 이야기인가

30절에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표징을 주십니다.

「이것이 네게 표징이 될 것이다. 올해에는 떨어진 낟알에서 저절로 자란 곡식을 먹고, 이 년째에는 거기서 다시 저절로 자란 곡식을 먹어라. 삼 년째에는 너희가 씨를 뿌리고 거두며, 포도밭들을 심고 그 열매를 먹어라.」이사야 37:30 · 본디새김

왜 이것이 구원의 표징일까요?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백성의 삶이 즉시 회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유다의 많은 성읍이 파괴되었습니다. 농경지가 황폐해졌을 수도 있고, 전쟁을 피해 사람들이 자기 땅을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백성에게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문제만큼이나 이후에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했습니다. 그들이 당장 정상적인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먹을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씨를 뿌리고 수확할 날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그 순간 즉시 확인할 수 있는 표징만은 아닙니다. 앞으로 여러 해에 걸쳐 나타날 일을 약속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실성을 백성의 삶 속에서 점차 확인하게 하는 표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순간에 적을 물리치시는 일뿐 아니라, 여러 계절에 걸친 백성의 생존과 회복도 자신의 약속 안에 두십니다.

「너」에서 「너희」로 넓어지는 약속

처음에는 표징을 받을 대상이 단수인 ‘너’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셋째 해에 씨를 뿌리고 거두라는 부분에서는 복수 명령으로 바뀝니다.

왕에게 주어진 말씀이 공동체의 삶으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왕이 살아남더라도 백성이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면 나라의 회복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왕궁의 생존에 그치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고 포도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삶에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농사의 이미지가 백성 전체를 설명하는 비유로 바뀝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뿌리를 내린다

「유다 집안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이사야 37:31 · 본디새김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열매는 그 뒤에 나타납니다. 그들은 다시 자기 땅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생존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에야 삶의 결실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백성이 다시 군사적 강국이 되거나 주변 나라들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뿌리와 열매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심판으로 무너진 나라의 회복을 가장 기본적인 삶의 이미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27절에서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은 주민들은 들의 풀과 지붕 위의 풀에 비유되었습니다. 지붕 위의 풀은 깊이 뿌리내리기 어려우며 쉽게 시듭니다. 그런데 31절에서는 유다의 남은 사람들이 아래로 뿌리를 내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히 약한 사람들을 한 차례 위험에서 건져 내시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주시는 일입니다.

남은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남은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살아남은 이들이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열정이 이 일을 이룰 것이다.」이사야 37:32 · 본디새김

4절에서 히스기야는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남은 이들은 전쟁의 재난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32절에서는 그들이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나옵니다.

이 표현은 그들이 도시 안에 갇힌 채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다시 나아가는 미래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사야서의 「남은 이들」은 단순히 심판을 피한 생존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이어지는 공동체로 나타납니다.

「열정」은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약속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시는 강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9:7에도 등장합니다. 다윗의 왕좌가 정의와 의로 굳게 세워질 것이라는 약속 뒤에,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열정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유다의 미래는 히스기야의 탁월한 전략이나 군사력에 최종적으로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열정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이 표징이 주어진 정확한 농사력의 시점이나 처음 두 해에 경작할 수 없었던 구체적인 이유까지 본문이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년과 희년의 규정에 연결하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 구절에는 해당 연도를 명시하는 표현이 없으므로 그렇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화살 하나 쏘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37:33–35 본문 →

심판의 경계가 구체적으로 정해진다

33절에서 하나님은 산헤립이 예루살렘에 대해 할 수 없는 일들을 차례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가 앗시리아 왕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 성읍에 들어오지 못하고, 거기서 화살을 쏘지도 못할 것이다. 방패를 들고 그 성읍에 다가서지도 못하고, 그 성읍을 치려고 흙 언덕을 쌓지도 못할 것이다.」이사야 37:33 · 본디새김

마지막의 흙 언덕은 성벽을 공격하기 위해 쌓는 공성용 경사로나 토루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앗시리아의 공성전에서 이런 토루와 공성장비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라기스 공성을 묘사한 앗시리아의 부조에도 그러한 공격 장면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앗시리아 군대가 유다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36:1에서 이미 많은 요새화된 성읍이 함락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약속되는 것은 유다의 모든 피해가 없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예루살렘 자체에 대한 산헤립의 공격이 제한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왔던 길로 돌아간다

「그는 자기가 왔던 길로 돌아갈 것이며, 이 성읍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이사야 37:34 · 본디새김

34절은 앞의 7절과 29절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이 반복은 산헤립의 군사적 계획이 역전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온 목적은 그 도시를 굴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갑니다.

강대한 제국의 권세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또 내 종 다윗을 위해서」

「내가 이 성읍을 지켜 구하겠다. 나 자신을 위해서, 또 내 종 다윗을 위해서 그렇게 하겠다.」이사야 37:35 · 본디새김

그러나 하나님은 이 도시를 지키시는 이유를 히스기야 개인의 경건함이나 공로에서 찾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연결하는 표현입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집안과 왕권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계와 신실하심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37장에서는 바로 그 약속이 예루살렘의 보호와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다윗의 왕조나 예루살렘이 어떤 상황에서도 심판받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서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불의를 거듭 심판하셨습니다. 따라서 37:35를 예루살렘이 영원히 군사적으로 함락되지 않는다는 무조건적인 보장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히스기야는 모든 왕국이 여호와야훼만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20절). 하나님은 나 자신을 위해 이 성읍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근거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아침에 드러난 죽음과 뒤늦게 찾아온 왕의 마지막

이사야 37:36–38 본문 →

전투 장면 없이 끝나는 전쟁

36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됩니다.

여호와야훼의 사자가 나가서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그들이 모두 죽은 시체였다.이사야 37:36 · 본디새김

지금까지 랍사게와 산헤립은 자신들의 군사적 능력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병거와 기병을 자랑했고, 정복한 나라와 성읍의 이름을 열거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앗시리아의 패배를 묘사하는 부분은 한 절뿐입니다.

전투의 세부 과정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은 유다 군대가 더 강한 무기를 사용해 얻은 승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산헤립은 니느웨로 돌아간다

앗시리아 왕 산헤립은 진영을 떠나 물러가 돌아왔고, 니느웨에 머물렀다.이사야 37:37 · 본디새김

산헤립의 귀환이 세 동작으로 표현됩니다. 떠납니다. 물러갑니다. 돌아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왕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떠나는 왕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7절에서 산헤립이 자기 땅에서 칼에 쓰러질 것이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의 집에서 칼에 쓰러진 왕

그가 자기 신 니스록의 집에서 엎드려 절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들인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쳤다. 그들은 아라랏 땅으로 도망쳤고, 그의 아들 에사르하돈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이사야 37:38 · 본디새김

다른 민족의 신들이 구원하지 못했다고 비웃던 왕이 자신의 신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죽습니다. 그는 수많은 성읍을 무너뜨렸지만 자신의 왕궁 안에서 일어나는 반역은 막지 못했습니다.

이사야는 긴 세월의 간격을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7절에 주어진 말씀의 결과를 마지막에 배치합니다.

산헤립은 자기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칼에 쓰러졌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은 산헤립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이 결말은 앗시리아라는 제국의 즉각적인 소멸을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왕의 오만한 선언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십팔만 오천 명은 본문이 제시하는 수치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규모나 사건의 발생 원인을 독립적인 고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본문은 여호와야훼의 사자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죽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전염병이었을 것이라거나, 특정한 자연재해 또는 군사적 기습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산헤립의 왕실 비문에는 유다의 여러 성읍을 점령하고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고립시켰다는 주장이 등장합니다. 히스기야가 바친 공물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자체를 함락시켰다는 승전 기록은 없습니다. 이 점은 예루살렘이 산헤립에게 정복되지 않았다는 성경의 서술과 양립합니다. 다만 그 비문은 성경에 기록된 십팔만 오천 명의 죽음이나 여호와야훼의 사자의 행동을 확인해 주지는 않습니다. 「니스록」이라는 명칭의 정확한 역사적 식별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산헤립의 유다 원정은 통상 기원전 701년으로 이해되고, 산헤립의 암살은 기원전 681년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두 사건 사이에는 약 2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본문이 37–38절을 연속해서 기록했다고 해서 산헤립이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직후 살해되었다고 읽으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뒤 무엇이 남는가

이사야 37:1–38 본문 →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의 정복이 사실임을 인정하면서도, 여호와야훼가 모든 왕국의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둘의 차이는 어떤 정보를 알고 있느냐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 정보를 해석하는 기준이 달랐습니다.

이사야 37장은 어떤 위기든 기도하면 반드시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공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에 주어진 구체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모든 개인적·국가적 위기에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언제나 전쟁이나 질병이나 재난에서 구출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 히스기야는 절망에 빠져 아이가 태어나려 하지만 낳을 힘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라의 미래가 시작되려는 순간에 모든 힘이 소진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 사람들을 약속하십니다.

죽음에 가까운 절망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다시 살아갈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한 채 자기 땅으로 돌아갑니다. 이 장의 끝에서 그의 왕권은 다른 아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씨를 뿌릴 것입니다.

지금은 무너진 성읍과 황폐한 밭이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땅에서 다시 자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산헤립은 여러 성읍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려는 미래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