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0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내 길도 아시는 하나님
이사야 40장에는 놀라운 질문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민족들을 먼지처럼 여기시며, 하늘의 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헤아리시는 하나님에 관한 장대한 선포가 이어진 뒤, 한 백성의 초라한 탄식이 들려옵니다.
「내 길은 여호와야훼에게서 숨겨졌고, 내 권리는 내 하나님에게 외면당한다.」
하나님이 무능하시다는 불평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알기에 생겨나는 질문입니다. 그토록 크신 분이 왜 우리의 고통에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시는가?
이 장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먼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선포하고, 그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다음에야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그 능력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지 밝힙니다.
위로하여라 — 심판의 이야기가 끝나는 자리에서
이사야 39장은 불길한 예고로 끝납니다. 히스기야가 바벨론에서 온 사절들에게 자신의 보물과 무기고를 보여 준 뒤, 이사야는 왕궁의 재물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왕의 후손들까지 끌려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39:5–7).
그런데 바로 다음 장의 첫마디는 뜻밖에도 위로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말한다.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이사야 40:1 · 본디새김
39장과 40장 사이에서 독자가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끌려가며,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살아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예루살렘 함락과 바벨론 유배의 경험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40장은 이러한 고난을 이미 겪었거나 그 끝을 바라보는 백성에게 말씀하는 장면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사야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유다의 불의와 반역을 끈질기게 고발하셨습니다. 특히 1:2–4에서는 하나님이 길러 내신 자녀들이 자신을 거역했다고 탄식하십니다. 그럼에도 40장은 그들의 정체성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인해 줍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기 때문에 비로소 백성이라는 이름을 얻는 순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시며 위로를 명령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마음을 달래며 말하고, 그녀에게 외쳐라. 그녀의 복무가 끝났다고, 그녀의 죗값이 치러졌다고, 그녀가 자기 모든 죄 때문에 여호와야훼의 손에서 두 배를 받았다고.」이사야 40:2 · 본디새김
여기서도 예루살렘은 아무 잘못 없는 피해자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죄가 있었고, 그에 따른 고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 죄와 고난이 더 이상 관계의 마지막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짐을 짊어졌지만, 이제 그 기간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때 독자는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예루살렘은 여전히 무너져 있고, 백성은 여전히 멀리 있는데, 하나님의 위로는 어떻게 현실이 되는가?
다음 장면은 그 질문에 길로 대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문제는 「두 배를 받았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문자적인 계산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죄에 비해 두 배나 무거운 형벌을 내리셨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 고난이 충분하게, 남김없이 주어졌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수량 표현만으로 어느 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더 이상의 형벌이 아니라 위로를 선포하는 문장입니다.
광야에 길을 닦아라 — 돌아오는 이는 누구인가
한 목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여호와야훼의 길을 닦아라. 사막 평원에 우리 하나님의 큰길을 곧게 내어라.」이사야 40:3 · 본디새김
백성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보다 먼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시는 길이 등장합니다.
고대 왕이 행차할 때 길을 정비하는 이미지는 이 선포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왕의 행차를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고 통로를 마련하듯, 여기서는 여호와야훼의 오심을 위해 온 지형이 바뀝니다.
골짜기는 높아지고 산과 언덕은 낮아집니다. 가파른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됩니다. 이것은 우선 실제 도로 공사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심을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이 없다는 사실을 장엄한 지형의 변화로 그린 시적 언어입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보다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21–22). 사람이 먼저 길을 찾아 하나님을 모셔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길을 여셨습니다.
첫 출애굽에서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사야 40장에서는 그 땅을 잃어버린 백성 앞에 다시 광야의 길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한 번 이루셨던 구원이 새로운 형태로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35:8–10에도 광야의 큰길과 시온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뒤이어 43:16–21에서는 바다에 길을 내셨던 하나님이 광야에 새로운 길을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들은 출애굽의 기억이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구원을 이해하는 언어가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육체가 함께 그것을 볼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입이 말했기 때문이다.」이사야 40:5 · 본디새김
이 영광은 이스라엘만이 비밀스럽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육체」가 함께 볼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구원이 온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이 됩니다.
아직 길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골짜기는 여전히 깊고 산은 여전히 높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목소리는 승리의 노래가 아니라 인간의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다 — 위로 한가운데 놓인 인간의 덧없음
이사야 40장에는 여러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위로하라는 명령이 들리고, 다음에는 광야에서 길을 준비하라는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이어서 또 다른 목소리가 외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한 목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그러자 그가 말했다. 「무엇을 외칠까?」 모든 육체는 풀이고,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이사야 40:6 · 본디새김
앞에서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육체가 풀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이 선포되는 순간에도 그들은 여전히 연약합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헤세드(חֶסֶד) 계열의 형태입니다. 헤세드는 흔히 사랑이나 신실함, 호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매력, 사람에게서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인간의 「영광」이라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핵심은 단순히 외모가 시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훌륭하고 믿음직해 보이는 것마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풀은 말랐고 꽃은 시들었다. 여호와야훼의 바람이 그 위에 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백성은 풀이다.이사야 40:7 · 본디새김
인간은 자신이 세운 왕국과 제도, 재물과 능력을 오래 지속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람 앞에서 그것들은 들의 꽃만큼 연약합니다.
유배를 경험한 이스라엘에게 이 말은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영원히 지켜 줄 것 같았던 왕조와 성전,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는 일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덧없음이 왜 위로의 선포 가운데 들어왔을까?
만약 위로의 근거가 인간의 힘이라면 이 선포는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왕들은 죽고 군대는 무너지며 제국의 질서도 바뀝니다. 심지어 위로를 듣는 이스라엘 자신도 풀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인간의 지속성보다 더 오래가는 무엇에 근거해야 합니다.
풀은 말랐고 꽃은 시들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이사야 40:8 · 본디새김
앞의 5절이 「여호와야훼의 입이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한 까닭도 이제 이해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확실한 이유는 그들이 회복할 만큼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벨론이 언젠가 약해질 것이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들의 회복을 말씀하신 분의 말씀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의 위로는 인간의 연약함을 모른 척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연약함을 가장 분명하게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성립하는 위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베드로전서 1:24–25 역시 이사야 40:6–8을 인용하여 인간의 덧없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지속성을 복음 선포에 연결합니다.
보아라, 너희 하나님이다 — 정복자의 팔과 목자의 품
이제 시선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역할이 달라졌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힘껏 네 목소리를 높여라. 높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너희 하나님이다.」이사야 40:9 · 본디새김
위로받아야 했던 예루살렘이 이제 유다의 다른 성읍들을 위로할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예루살렘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은 도시가 다른 도시를 향해 목소리를 높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 어느 왕이 물러날 것인지, 귀환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이사야 40장이 말하는 기쁜 소식의 중심입니다. 단순히 바벨론의 지배가 끝난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보아라, 주 여호와야훼가 힘 있게 오고, 그의 팔이 그를 위해 다스린다. 보아라, 그의 보상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보수가 그 앞에 있다.」이사야 40:10 · 본디새김
팔은 능력을 행사하는 수단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팔은 특히 구원과 심판을 이루는 강력한 능력을 나타냅니다. 출애굽기 6:6에서는 하나님이 편 팔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목자처럼 자기 양 떼를 먹이고, 자기 팔로 어린양들을 모아 자기 품에 안고 갈 것이다.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이끌 것이다.」이사야 40:11 · 본디새김
10절에서는 통치하던 팔이 11절에서는 어린양을 모으는 팔이 됩니다.
이것은 강함과 부드러움을 나란히 나열한 장면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지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목자는 모든 양을 똑같은 속도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품에 안고, 새끼를 돌보는 어미 양은 그 형편에 맞추어 이끕니다. 자신이 인도하시는 이들의 연약함과 형편을 고려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단순히 강력한 군주가 소유물을 되찾는 장면이 아닙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 떼를 다시 모아 돌보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히브리어 메바세레트(בָּשַׂר)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성을 나타내는 형태입니다. 이 표현을 시온과 예루살렘 자체가 전령이 된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시온과 예루살렘을 향해 소식을 전하는 여성 전령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후자에 가깝게 읽습니다. 「그의 보상」과 「그의 보수」라는 표현은 그분이 이루신 일과 함께 가져오시는 결과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를 승리의 성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뒤에 나오는 구원받은 백성과 연결하여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10절 자체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에스겔 34:11–16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흩어진 양들을 찾으시고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목자들에 대한 심판 뒤에, 하나님 자신이 목자가 되신다는 약속이 이어집니다. 이사야 40:11의 목자 이미지는 그러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같은 신학적 흐름에 놓여 있습니다.
누가 물을 손으로 재었느냐 — 하나님을 평가할 저울이 있는가
11절까지의 선포가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오시는지 보여 주었다면, 12절부터는 그분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지 묻기 시작합니다.
누가 자기 오므린 손으로 물을 재고, 뼘으로 하늘을 헤아렸으며, 계량 그릇에 땅의 티끌을 담았느냐? 누가 저울로 산들을 달고, 천칭으로 언덕들을 달았느냐?이사야 40:12 · 본디새김
바다와 하늘, 산과 땅을 묘사하면서도 인간이 사용하는 계량 도구의 언어를 씁니다. 인간은 작은 대상을 재기 위해 손과 저울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시적 장면에서는 하나님이 바다와 하늘을 그처럼 손쉽게 헤아리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13–14절에서 질문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누가 여호와야훼의 영을 헤아렸으며, 누가 그의 조언자가 되어 그에게 알려 주었느냐?이사야 40: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물과 하늘을 헤아리는 능력이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헤아릴 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능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판단력이 부족하다면 그 능력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통치자들은 강력할수록 조언자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에게 그분보다 더 지혜로운 조언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서 판단의 길을 배우시지 않았고, 누구에게서 통찰을 전달받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어서 민족들이 등장합니다.
보아라, 민족들은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같고, 저울 위의 먼지처럼 여겨진다. 보아라, 그는 해안 땅들을 가는 먼지처럼 들어 올린다.이사야 40:15 · 본디새김
포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국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제국은 법을 만들고 군대를 움직이며 사람들을 고향에서 끌어갈 수 있습니다. 한 인간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그 제국들이 물 한 방울, 저울 위의 먼지로 바뀝니다.
여기서 민족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그 민족에 속한 개개인의 생명에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초점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권세의 상대적 크기입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힘을 가진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힘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레바논도 불을 때기에 넉넉하지 않고, 그곳의 짐승들도 번제로 바치기에 넉넉하지 않다.이사야 40:16 · 본디새김
레바논은 울창한 숲과 큰 나무로 알려진 지역이었습니다. 이사야 2:13에도 레바논의 높고 교만한 백향목들이 등장합니다. 그 숲 전체를 연료로 쓰고 그곳의 짐승들을 모두 번제로 바친다고 해도 하나님께 걸맞은 제물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제사를 드리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단순한 부정이 아닙니다. 어떤 규모의 재물과 제물도 하나님을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얻을 수 있는 분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측량 도구와 정치적 권세, 종교적 예물까지 모두 하나님의 크기 앞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흔들리지 않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을 누구에 견주겠느냐? 어떤 형상을 그와 나란히 놓겠느냐?이사야 40:18 · 본디새김
하나님과 민족들 사이에도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면, 사람이 만든 형상과 하나님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19–20절은 우상을 만드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장인이 금속을 부어 만들고, 금속 세공인이 금을 입히고, 은으로 사슬을 만듭니다. 금속을 사용할 여력이 부족한 사람은 썩지 않을 나무를 찾아 솜씨 좋은 장인에게 맡깁니다.
20절의 「제물을 바치기에는 너무 가난한 사람」은 히브리어 표현 자체에 해석상 어려움이 있어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금속이나 나무를 선택하고 장인을 찾는 행동이 우상 제작의 일부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은 우상이 오래 버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재료를 고릅니다. 우상이 쓰러지지 않도록 솜씨 좋은 장인을 찾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조차 없는 형상에게 인간은 자기 삶의 안전을 맡기려 합니다.
「흔들리지 않을 우상」이라는 표현은 앞의 8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지만, 우상은 인간이 기술과 재료를 동원하여 서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 대조는 이사야 후반부에서 더욱 날카롭게 전개됩니다. 44:9–20에서는 사람이 나무의 일부로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남은 나무로 신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는 모습까지 묘사됩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느냐? 처음부터 너희에게 전해지지 않았느냐? 땅의 기초를 깨닫지 못했느냐?이사야 40:21 · 본디새김
여기서 반복되는 질문은 새로운 지식을 처음 전달하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미 들었으면서도 현실의 고난 속에서 잊어버린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땅의 기초를 깨닫지 못했느냐?」는 표현은 땅의 기초 자체를 이해했느냐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앞의 「처음부터」와 짝을 이루어 땅의 기초가 놓인 때부터 알려진 사실을 깨닫지 못했느냐는 시간적 표현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질문들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의 근본적인 질서를 세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땅의 둥근 천장 위에 앉아 있고, 땅의 주민들은 메뚜기와 같다. 그는 하늘을 얇은 휘장처럼 펼치고, 거처로 삼을 천막처럼 그것을 펼쳐 놓았다.이사야 40:22 · 본디새김
인간은 땅 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하나님은 하늘을 천막처럼 펼쳐 놓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인간이 거대한 것으로 생각하는 세계가 하나님께는 펼칠 수 있는 휘장과 같습니다.
그분은 통치자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십니다. 땅의 재판관들은 뿌리를 제대로 내리기도 전에 바람에 마르는 식물과 같습니다.
여기서 6–8절의 풀이 다시 생각납니다. 처음에는 모든 육체의 덧없음을 설명하던 식물의 이미지가 이제 정치적 권력자들에게 적용됩니다. 아무리 강력한 통치자라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뿌리내린 존재는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누구에 견주어, 내가 그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이가 말한다.이사야 40:25 · 본디새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6장에서 이사야는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고 그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부정함을 깨닫습니다. 40장에서는 그 거룩함이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피조물의 수준으로도 축소할 수 없는 분입니다.
너희 눈을 높이 들어 보아라. 누가 이것들을 창조했느냐? 그는 그것들의 군대를 수대로 이끌어 내고, 그 모두를 이름으로 부른다. 그의 기력이 넘치고 힘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이사야 40:26 · 본디새김
고대 근동에서는 하늘의 천체들이 신적 존재들과 연결되거나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하늘의 군대를 하나님과 경쟁하는 존재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시고 이끌어 내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별들의 전체 수량을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하나를 자신의 통치 아래에 두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때로 상대를 알고, 권한을 행사하고, 관계를 맺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이 장의 가장 깊은 긴장이 드러납니다.
내 길은 여호와야훼에게서 숨겨졌다 — 지친 백성이 묻는 질문
26절까지 들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위대함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장대한 선포 끝에서 이스라엘의 불평을 꺼냅니다.
야곱아, 너는 왜 이렇게 말하며, 이스라엘아, 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내 길은 여호와야훼에게서 숨겨졌고, 내 권리는 내 하나님에게 외면당한다.」이사야 40:27 · 본디새김
첫째, 자신의 길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시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둘째, 자신의 권리가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겪는 현실 속에서 공의로운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자신들의 사정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탄식합니다.
포로 생활의 경험을 생각하면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심판이 임했다는 설명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이 모든 질문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고난은 길어지고 제국은 여전히 강하며, 회복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사야 40장은 이 탄식을 불신앙이라는 한마디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함에 관한 긴 선포가 끝난 뒤 그 질문을 직접 인용합니다. 독자는 별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 자기 길은 하나님에게서 숨겨졌다고 말하는 한 백성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길은 모르실 수 있는가?
너는 알지 못했느냐? 듣지 못했느냐? 여호와야훼는 영원한 하나님, 땅끝들을 창조한 이다. 그는 지치지도 피곤해지지도 않으며, 그의 통찰은 헤아릴 수 없다.이사야 40:28 · 본디새김
하나님은 피곤해서 그들을 돌보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통찰에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지연이나 침묵만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사정을 모르신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고난의 구체적인 이유나 끝나는 날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해를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람을 더 막막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친 사람에게 힘을 주고, 기력이 없는 사람에게 힘을 크게 더해 준다.이사야 40:29 · 본디새김
29절에는 특별한 자격 조건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강한 사람에게 더 큰 힘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을 뽑아 능력을 주시겠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힘을 받을 사람을 설명하는 표현은 오히려 「지친 사람」과 「기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국은 강한 군대와 통치 권한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상은 자신을 지탱할 힘조차 없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누구에게서도 힘을 빌리지 않으시며, 오히려 힘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베푸십니다.
젊은이들도 지치고 피곤해지며, 청년들도 여지없이 비틀거린다.이사야 40:30 · 본디새김
젊은이와 청년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체력과 활력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가장 활기찬 사람도 피곤해지고, 가장 건강한 사람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를 기다리는 이들은 힘을 새롭게 하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펼쳐 올라갈 것이다. 달려도 피곤해지지 않고,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40:31 · 본디새김
이사야 40장의 기다림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 있을 것이라는 선포에 근거합니다. 현실에서 아직 구원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수동성이 아니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을 자신의 현재보다 더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들어 높이 오르는 모습처럼, 힘을 잃었던 사람들도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먼저 독수리처럼 날아오릅니다. 그다음에는 달려도 피곤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걸어도 지치지 않습니다.
비유의 움직임만 보면 점점 평범해지는 순서입니다. 하늘을 날던 사람이 달리기를 하고, 달리던 사람이 걷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힘을 받은 사람이 특별한 순간에만 높이 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달리고 걸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실제로 돌아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광야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큰길은 단순한 상징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고향을 잃었던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야 하고,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 길은 한 번의 놀라운 도약으로 끝나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날개를 펼쳐 오를 힘을 약속하시면서, 마침내 오래 걸어도 지치지 않을 힘을 약속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날개가 새롭게 돋아나는 모습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히브리어 표현 자체가 반드시 새로운 깃털의 성장을 뜻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은 이를 날개를 펼쳐 높이 오르는 동작으로 읽었습니다. 이 순서를 반드시 의도적인 강약의 역전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장의 마지막에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이다」가 놓였다는 사실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침내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위대함은 연약한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토록 위대하신 분이 지친 사람에게 힘을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그분은 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시는 분이고, 동시에 기력이 없는 사람에게 힘을 더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40장은 아직 길이 끝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들려준 말씀입니다. 아직 광야가 남아 있고, 돌아갈 거리가 남아 있으며, 현실은 여전히 버겁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는 모든 어려움이 이미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는 더 이상 산도 없고, 제국도 없고, 별들의 군대도 없습니다.
그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때 지쳐서 비틀거리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길이 하나님에게서 숨겨졌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 걷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얻어, 길이 끝날 때까지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걷는 길 앞에는 이미 자신의 양 떼를 찾아오신 목자가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