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9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
이사야 49장에는 놀라운 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산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위로하셨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정작 위로받았다는 시온이 입을 엽니다.
시온은 「여호와야훼가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시는데, 시온의 눈앞에는 여전히 무너진 성벽과 텅 빈 집들이 있습니다.
이 모순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실까요?
이 장에서는 두 목소리의 낙심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나는 헛되이 수고했다」고 말합니다. 시온은 「여호와야훼가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의 낙심이고, 두 번째는 구원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낙심입니다.
입은 날카로운 칼인데, 자신은 실패했다고 느끼는 종
49장은 새로운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해안 땅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의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여호와야훼가 태중에서부터 나를 불렀고, 내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언급했다.이사야 49: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바벨론을 떠나 하나님의 구원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한 사람이 등장하여 먼 민족들을 직접 부릅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하기보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의 사명은 스스로 선택한 직업이나 계획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여호와야훼가 그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의 개인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언급하셨다고 말하면서도, 독자에게는 그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어떤 개인인지를 식별하는 일보다 그가 누구에게 부름받았고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칼과 화살이 모두 감추어져 있다
그가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들고, 자기 손의 그늘에 나를 숨겼다. 그가 나를 잘 다듬은 화살로 만들고, 자기 화살통에 나를 감추었다.이사야 49:2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칼은 손에 쥐고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 종에게 날카로운 것은 손이 아니라 입입니다. 그의 능력은 군사력보다 말과 선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11:4에서도 장차 나타날 다윗 계열의 통치자가 자기 입의 막대기와 입술의 숨으로 악인을 심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행위가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라, 현실을 드러내고 판단하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날카로운 무기는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직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은 하나님이 종을 준비시키시는 일과 그를 드러내어 사용하시는 일이 구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화살은 스스로 목표를 정하거나 발사될 때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다듬어 화살통에 넣은 사람이 언제 어디로 쏠지를 결정합니다. 이 비유에서 종의 사명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별히 준비된 종이 다음 절에서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나는 헛되이 수고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너는 내 종이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통해 내 영광을 드러내겠다.」이사야 49:3 · 본디새김
하나님의 선언만 들으면 종의 사명은 영광스러운 성공으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4절에서 종은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나는 헛되이 수고했고, 텅 빈 것과 입김 같은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래도 나의 권리는 여호와야훼에게 있고, 나의 보상은 나의 하나님에게 있다.」이사야 49:4 · 본디새김
그가 왜 이렇게 느끼는지,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겪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자신의 수고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종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었다고 느끼면서도 마지막 판단을 자신이 내리지 않습니다. 종은 자신의 수고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여호와야훼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만으로 자신의 사명을 최종 평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실패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감에 마지막 판단권을 넘겨주지도 않습니다.
이 고백 뒤에 하나님은 종의 사명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종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큽니다.
「이스라엘아」 —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종은 누구인가?
3절에서 하나님은 종을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5–6절에서 그 종은 야곱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맡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종을 이스라엘 전체로 읽는 길
먼저 3절의 표현을 그대로 존중하면, 종은 이스라엘과 깊이 동일시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야 41:8–9에서는 야곱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며, 44:1–2에서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경우 5–6절의 이스라엘 회복 사명은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이들이 나머지 백성을 회복시키는 역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이스라엘이 자기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여 다시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는 과정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종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로 읽는 길
다른 가능성은 이 종이 이스라엘의 사명을 대표하여 수행하는 특별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는 태중에서부터 부름받은 ‘나’가 말하고, 2절에서는 그의 입이 칼처럼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4절에는 자신의 수고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도 나옵니다. 이런 일인칭 표현들은 종을 개별적인 인물로 이해할 여지를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단순히 그의 개인 이름을 알려 주는 행위라기보다,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사명을 그가 대표하고 구현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읽기는 5–6절에서 종이 야곱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존재로 구별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 유리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이 종의 개인 이름이나 구체적인 신분을 밝히지 않으므로, 그를 특정한 역사적 인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두 읽기 사이에는 실제적인 해석상의 차이가 남습니다.
이 종은 이스라엘과 무관한 외부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지니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이스라엘의 회복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너무 작은 일이다」
이제 야곱을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고 이스라엘이 자기에게 모이게 하려고 나를 태중에서부터 자기 종으로 빚은 이,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나는 여호와야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고,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었다.이사야 49:5 · 본디새김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부름받습니다. 유배에서의 귀환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네가 내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보존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너무 작은 일이다. 내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내가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삼겠다.」이사야 49:6 · 본디새김
그들은 나라를 잃고 흩어진 백성입니다. 그들을 다시 모으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은 거대한 구원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만으로는 너무 작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이스라엘 한 민족의 회복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빛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밖으로 퍼져 나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사명이 취소되고 다른 민족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부르심이 본래 얼마나 넓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49장의 종은 그 보편적인 복의 약속과 연결되는 사명을 맡습니다.
종은 자신이 감당한 일의 결과를 보며 낙심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이 장차 어디까지 이어질지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종의 낙심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이사야 42:1–9에서는 하나님의 종이 민족들에게 정의를 펼치고, 백성의 언약과 민족들의 빛으로 세워질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이후 이사야 50:4–9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며 고난을 견디는 종의 모습이 나타나고, 52:13–53:12에서는 멸시와 고난을 겪는 종의 사명이 더욱 깊이 전개됩니다.
신약에서는 이사야 49:6의 ‘민족들의 빛’이라는 표현이 누가복음 2:32에서 예수와 연결되고, 사도행전 13:47에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선교를 설명하는 데 직접 인용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6:2는 이사야 49:8의 구원의 때에 관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는 이사야의 종과 구원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확장 안에서 읽은 후대의 정경적 전개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49장의 본래 흐름에서는 먼저 종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그 회복이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는 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신약에서 이 말씀이 어떻게 확장되어 사용되는지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전해집니다. 글자로 기록된 본문에는 로, ‘아니다’가 있어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읽기에는 로, ‘그에게’가 있어 하나님께 모이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본디새김은 후자의 읽기를 따릅니다. 전자의 읽기는 앞에서 종이 자신의 수고가 헛되었다고 고백한 내용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읽기는 하나님이 종에게 맡기신 회복의 목적을 강조합니다.
멸시받는 종 앞에서 왕들이 일어선다
7절은 종의 현재와 미래를 강하게 대조합니다.
이스라엘을 되찾아 주는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멸시받는 사람, 민족에게 혐오받는 이, 통치자들의 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들이 보고 일어나며, 고관들이 엎드릴 것이다. 신실한 여호와야훼, 곧 너를 선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때문이다.」이사야 49:7 · 본디새김
고대 궁정에서 누군가를 보고 일어서는 행동은 존중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엎드리는 행동은 더 강한 경의나 복종을 표현합니다. 그를 멸시하던 권력의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종이 스스로 왕들을 굴복시킬 힘을 확보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를 선택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명과 미래는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여기서 고난받는 사람이 반드시 현세에서 사회적 성공을 거둔다는 보편적인 법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사명을 받은 종의 낮아짐과 장차 높임받을 일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종의 높아짐 자체가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그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이 다음 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펼쳐집니다.
「백성의 언약」 — 종은 무엇을 위해 보존되는가?
8절에서 하나님은 종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호의를 베푸는 때에 내가 네게 응답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다. 나는 너를 지켜 백성의 언약으로 삼아, 땅을 다시 세우고 황폐해진 유산의 땅들을 물려주며,」이사야 49:8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앞부분은 4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종은 자신의 권리와 보상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종의 사명은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보존하시는 가운데 계속됩니다.
사람이 어떻게 언약이 되는가?
언약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약속과 책임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언약으로 세워집니다. 이 표현은 종이 단지 새로운 규칙이나 약속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2:6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백성의 언약’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명을 맡으면서 동시에 그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도록 하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그러나 ‘백성의 언약’이 정확히 종의 어떤 지위나 행동을 가리키는지 본문이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특정한 언약 체계의 모든 세부 내용을 이 표현 하나에 넣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종이 백성의 언약으로 세워지는 일은 땅을 다시 세우고, 황폐한 유산을 돌려주고,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현실 세계와 분리된 내면의 종교적 경험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이 실제로 살아갈 공간과 자유를 회복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나와라」와 「모습을 드러내라」
「갇힌 자들에게 『나와라』,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라』고 말하게 하겠다. 그들은 길가에서 풀을 뜯고, 벌거벗은 모든 언덕이 그들의 풀밭이 될 것이다.」이사야 49:9 · 본디새김
여기서 감금과 어둠은 유배와 억압의 상황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종의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입은 포로들에게 나오라고 말하는 데 사용됩니다.
종에게 주어진 말의 능력은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갇힌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이 장면은 사람들을 양 떼처럼 묘사합니다. 풀을 뜯는다는 표현은 목자의 돌봄 아래 있는 가축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래 풀이 충분히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곳까지 그들을 먹일 장소가 됩니다.
구원받아 돌아가는 길은 단지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 길을 걷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생명을 공급하시는 일이 포함됩니다.
「그들은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뜨거운 열기와 해가 그들을 내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고, 샘물 곁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49:10 · 본디새김
광야의 여정에서 굶주림과 목마름, 뜨거운 태양은 실제적인 위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위험을 아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그분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이끄십니다.
15절에서는 어머니가 자기 젖먹이를 불쌍히 여기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설명하십니다. 두 장면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서로 다른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드신다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만들고, 나의 큰길들이 높이 솟을 것이다.」이사야 49:11 · 본디새김
산은 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백성을 귀환시키기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길이 이미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백성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을 부르셨기 때문에 그들이 걸어갈 길을 마련하십니다.
「보아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올 것이다. 보아라, 이들은 북쪽과 서쪽에서, 또 이들은 시님 땅에서 올 것이다.」이사야 49:12 · 본디새김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도입니다. 이것은 단지 포로 생활이 끝난다는 선언을 넘어섭니다. 백성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보여 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장면 앞에서 온 창조 세계가 노래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에서 시님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시님(סִינִים)을 어떤 지역이나 민족과 연결해야 하는지 여러 가능성이 제시될 수 있지만, 본문은 그 위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님을 오늘날의 특정 국가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하늘은 기뻐하는데 시온은 버림받았다고 말한다
13절은 장엄한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하늘아, 기뻐 외쳐라. 땅아, 즐거워하여라. 산들아, 기쁨의 외침을 터뜨려라.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위로했고, 고통받는 자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49:13 · 본디새김
여기서는 구원이 이미 확실한 현실인 것처럼 선포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이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온이 말했다. 「여호와야훼가 나를 버렸고, 주가 나를 잊었다.」이사야 49:14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실제로 파괴되었고, 많은 주민이 죽거나 흩어졌으며, 도시의 삶은 무너졌습니다. 시온의 눈앞에는 하나님의 위로보다 폐허가 더 분명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목소리를 지우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기뻐하는 노래 바로 뒤에 시온의 항의를 놓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참되다는 사실과,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직 버림받았다고 느낀다는 사실은 같은 장면 안에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시는가?
15절에서 하나님은 질문으로 대답하십니다.
「여자가 자기 젖먹이를 잊어, 제 배에서 낳은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 여자들이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이사야 49:15 · 본디새김
어머니와 젖먹이는 특별히 깊은 의존 관계를 가집니다. 아이는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거나 자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 생존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가장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으로 여겨질 수 있는 어머니의 돌봄조차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억과 사랑은 그 한계를 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억’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잊지 않는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표현은 종종 약속에 따라 행동하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시고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따라서 시온을 잊지 않겠다는 선언은 그녀의 존재를 계속 떠올리겠다는 약속 이상입니다.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관계와 책임을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손바닥에 새겨진 도성
「보아라, 내가 손바닥에 너를 새겼다. 네 성벽들은 언제나 내 앞에 있다.」이사야 49:16 · 본디새김
당시 시온의 성벽은 무너졌거나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시온이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은 파괴된 성벽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도시의 현실을 알고 계시며, 그 도성을 회복하려는 자신의 뜻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시온의 상실이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진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온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그녀를 회복시키는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부터 그 회복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자식을 잃었던 여인에게 자녀들이 돌아온다
17절에서 하나님은 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들이 서둘러 오고, 너를 허물고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네게서 나갈 것이다.」이사야 49:17 · 본디새김
시온의 회복은 단순히 떠났던 사람이 돌아오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녀를 황폐하게 만들었던 권력의 지배가 끝나는 일도 포함합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 시온에게 직접 명령하십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 왔다.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너는 반드시 그들 모두를 장신구처럼 걸치고, 신부처럼 그들을 몸에 매어 달 것이다.」이사야 49:18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은 시온에게 자기 감정을 억지로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녀가 보지 못하던 새로운 현실을 보여 주십니다.
자녀들이 장신구가 된다
시온은 한 여인으로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기쁜 날 아름다운 장신구를 걸치듯, 시온은 돌아온 자녀들로 인해 영광스럽게 꾸며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온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54:11–12에서 보석으로 꾸며지는 예루살렘의 이미지와도 연결되지만, 여기서는 건축 재료보다 회복된 주민들이 강조됩니다. 19절에서 시온의 폐허가 사람들로 비좁아집니다.
20절에서는 자녀들이 직접 말합니다.
「자식을 잃었던 네게 아들들이 다시 네 귀에 대고 말할 것이다. 『이곳은 내게 비좁다. 내가 살 수 있게 자리를 내주어라.』」이사야 49:20 · 본디새김
시온이 겪었던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미래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를 더 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온에게 단지 마음의 위안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회복시키십니다.
「이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러면 너는 마음속으로 말할 것이다. 『누가 나를 위해 이들을 낳았는가? 나는 자식을 잃고 홀로 되었으며, 유배되어 쫓겨났는데. 이들을 누가 길렀는가? 보아라, 나는 혼자 남았었는데, 이들은 어디에 있었는가?』」이사야 49:21 · 본디새김
이제 질문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아무도 없는가를 묻는 절망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돌아왔는가를 묻는 놀라움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시온에게 자신이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로만 확인시키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자녀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통해 그 사실을 보게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이렇게 먼 곳에 흩어진 자녀들을 누가 데려옵니까?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뜻밖의 사람들을 등장시키십니다.
이방 왕들이 자녀들을 품에 안고 데려온다
22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민족들을 향해 내 손을 들고, 백성들을 향해 내 깃발을 높이 들겠다.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데려오며, 네 딸들은 어깨에 실려 올 것이다.」이사야 49:22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손과 깃발은 사람들을 모으는 신호로 등장합니다. 깃발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 주거나 함께 모이게 하는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거나 흩어지게 했던 제국들의 세계가 이제는 이스라엘 자녀들을 돌려보내는 일에 참여합니다. 어린아이를 소중히 돌보며 데려오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될 것이라는 약속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민족들에게 알려집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민족들도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민족들의 미래를 서로 연결하십니다.
왕들이 양육자가 된다
「왕들은 너를 기르는 이들이 되고, 그들의 왕비들은 네게 젖을 먹이는 이들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엎드리며, 네 발의 먼지를 핥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내가 여호와야훼임을, 나를 기다리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음을 알 것이다.」이사야 49:23 · 본디새김
왕은 본래 명령하고 통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이를 돌보는 양육자의 역할을 맡습니다. 왕들이 가진 힘이 시온을 돌보는 일에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이사야 45장에서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부름받았던 사건과 연결되는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경계 밖에 있는 권력도 자신의 구원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23절에는 양육의 이미지뿐 아니라 강한 복종의 이미지도 등장합니다. 본문은 지배와 굴욕의 관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미래를 고대의 정치적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권력들은 더 이상 그들을 짓누르는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현대 독자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긴장도 남아 있습니다.
이사야 49:6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23절에서는 이방 통치자들이 시온 앞에 엎드리는 강한 복종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 둘을 지나치게 매끄럽게 하나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미래와,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권력의 위상이 뒤집히는 미래를 함께 보여 줍니다. 그 두 이미지의 관계를 모든 민족의 정치적 서열에 관한 영구적인 제도로 확정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14절에서 시온은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인지 그녀가 알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앎은 추상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녀들이 돌아오고, 강대한 나라들의 통치자들이 그녀를 돌보는 역사 속에서 얻는 앎입니다.
강한 자의 손에서 포로를 빼앗을 수 있는가?
24절에서는 갑자기 질문이 등장합니다.
용사에게서 전리품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의로운 이의 포로가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이사야 49:24 · 본디새김
포로 생활을 겪은 이스라엘에게 이것은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강대한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스스로 그 권력을 무너뜨릴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서 돌아오라는 약속을 들었을 때,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25절에서 그 질문에 답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용사의 포로도 빼앗길 것이며, 포악한 자의 전리품도 빠져나올 것이다. 너와 다투는 자와 내가 다투고, 네 아들들을 내가 구하겠다.」이사야 49:25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은 시온의 편에 직접 서십니다.
시온은 홀로 자기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처지가 아닙니다. 그녀를 되찾으시는 하나님이 직접 나서십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기억하신다는 약속이 실제적인 구원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무서운 심판
26절은 이 장에서 가장 폭력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억누르는 자들에게 자기들의 살을 먹이고, 그들이 단 포도주에 취하듯 자기들의 피에 취하게 하겠다. 그러면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야훼가 너의 구원자이며, 너를 되찾아 주는 이, 야곱의 강한 이임을 알 것이다.」이사야 49:26 · 본디새김
이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식인 행위를 명령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억압자들에게 닥칠 파멸을 극단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자기들이 행한 폭력과 파괴가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심판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9:20에서도 백성들이 서로를 삼키는 모습으로 파괴적인 내적 갈등이 묘사됩니다. 따라서 49:26의 심판은 단순히 외부의 강자가 다른 강자를 무찌르는 장면을 넘어, 폭력적인 권력이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폭력성을 약화하여 단순한 도덕적 교훈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억압한 자들을 실제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심판은 두렵고 파괴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자녀들을 품에 안고 데려오시는 자비로운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자녀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권력에 대하여 단호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시온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그녀와 그녀의 자녀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맞서시는 모습입니다.
‘모든 육체’가 알게 될 것
여기서 시야는 다시 온 세상으로 넓어집니다.
1절에서 종은 해안 땅들과 먼 민족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에는 「모든 육체」가 여호와야훼가 누구신지 알게 된다고 선언됩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온 세상에 알려지는 과정에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억압자들에 대한 심판이 함께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시온에게만 알려지는 은밀한 사건이 아닙니다. 온 세상이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사건으로 선포됩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의로운 이의 포로」라는 표현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차디크(צַדִּיק), 곧 ‘의로운 사람’ 또는 ‘정당한 사람’으로 읽을 수 있는 말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문맥에서는 강한 자와 포악한 자가 포로를 붙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부 읽기에서는 이 부분을 ‘포악한 자의 포로’로 이해하려 합니다. 바로 다음 절에 ‘포악한 자’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그 근거가 됩니다. 반면 본문의 ‘의로운 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유지하면, 포로를 붙잡은 자가 자신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포로와 관련된 수식의 관계를 다르게 읽으려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표현만으로 어느 쪽이 확실한지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사야 49장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나님은 두 낙심을 모두 들으십니다. 그리고 종에게는 그의 사명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시온에게는 자신이 결코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현재의 현실을 부정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 현실이 마지막 결말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어떤 개인이 겪는 모든 상실이 반드시 이 땅에서 원래 모습 그대로 회복된다고 약속하는 구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시온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약속입니다.
시온은 무너진 성벽을 바라봅니다. 집들은 비어 있고, 자녀들은 멀리 흩어져 있습니다. 그녀가 보는 것은 상실의 흔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에게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 주시는 듯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손바닥에 너를 새겼다. 네 성벽들은 언제나 내 앞에 있다.」
시온은 무너진 성벽을 보고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성벽을 언제나 자신의 앞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잊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그녀를 자신의 기억 밖으로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이사야 49장이 보여 주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먼저 모든 상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녀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폐허가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차기도 전에, 하나님은 자신이 여전히 시온을 기억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말로만 남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녀들을 데려오시고, 땅을 회복시키시며, 그들을 붙잡은 강한 자들과 다투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시온조차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온 세상이 그분이 시온을 되찾으시는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약속의 한가운데, 하나님은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여자들이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