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8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이름을 부르면서도 듣지 않는 백성

이사야 48장은 낯선 모순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자신들이 거룩한 성읍에 속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실제 삶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 바벨론은 자신의 힘을 절대화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벨론과 달리 이스라엘은 참된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바벨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습니까?

이스라엘 역시 완고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며, 자신의 우상과 판단을 의지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백성을 구원하시려 하십니까?

이사야 48장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인간의 불순종을 어떻게 넘어서는지, 그러면서도 그 불순종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함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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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이스라엘이지만, 삶은 그렇지 않았다

이사야 48:1–2 본문 →

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부르십니다.

야곱 집안아, 이것을 들어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유다의 물에서 나온 자들아.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입에 올리지만, 진실함도 의로움도 없이 그렇게 하는 자들아.이사야 48:1 · 본디새김

야곱, 이스라엘, 유다. 이 세 이름은 백성의 뿌리와 정체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유다의 물에서 나온 자들」이라는 표현은 독특합니다. 이를 유다의 혈통에서 나온 사람들이라는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관습이나 특정한 물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진실함과 의로움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구를 정확히 사용하는 것과 구별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과 조상, 신앙의 전통도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충실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 1:10–17에서 하나님은 제사와 기도가 풍성하지만 정의를 행하지 않는 백성을 책망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문제는 예배의 형식 자체가 아니라, 예배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버리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이사야 48장은 같은 문제를 유배와 회복의 문맥에서 다시 드러냅니다.

「거룩한 성읍 사람」이라는 이름의 역설

그들은 거룩한 성읍 사람이라 불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야훼다.이사야 48:2 · 본디새김

거룩한 성읍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2:1에서도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읍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이사야 48장의 청중은 예루살렘이 황폐해지고 바벨론의 지배를 겪는 역사적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성읍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성읍이 무너진 이유와 자신들의 불순종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름은 거룩함을 가리키지만, 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이름을 가진 것과 하나님께 속한 백성답게 사는 것은 구별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왜 미리 말씀하셨고, 왜 새로운 일을 감추셨는가?

이사야 48:3–8 본문 →

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과거 행동을 설명하십니다.

「지난 일들은 내가 오래전부터 알려 주었다. 그것들은 내 입에서 나왔고, 내가 그것들을 들려주었다. 내가 갑자기 행동하자 그 일들이 이루어졌다.」이사야 48:3 · 본디새김

하나님은 역사가 일어난 뒤에야 자신이 그 일을 했다고 주장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미리 말씀하시고, 실제로 그 말씀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나는 네가 완고하며, 네 목덜미는 쇠로 된 힘줄이고 네 이마는 청동임을 알았기에,」이사야 48:4 · 본디새김

‘목덜미가 뻣뻣하다’는 이미지는 구약에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32:9에서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만든 백성을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쇠와 청동은 단단한 금속입니다. 쉽게 구부러지거나 굽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단순히 성격이 고집스럽다는 말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쉽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바꾸려 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오래전부터 네게 알려 주었고, 그 일이 닥치기 전에 네게 들려주었다. 네가 『내 우상이 그 일들을 했고, 내 조각상과 내 주조상이 그 일들을 명령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이사야 48:5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행동을 보고도 그 공로를 다른 신에게 돌릴 수 있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일이 일어난 뒤에 누가 그 일을 이루었는지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그것을 알리셨다는 사실이 증거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도록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새로운 일을 감추셨는가?

6절에서 예상 밖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너는 들었다. 그것을 모두 보아라. 너희는 알리지 않겠느냐? 이제부터 나는 네게 새로운 일들을 들려준다. 감추어져 있어 네가 알지 못하던 일들이다.」이사야 48:6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알려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추어 두었던 새로운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그 일들은 지금 창조되었고, 오래전에 된 것이 아니다. 오늘 전에는 네가 그 일들을 듣지 못했다. 네가 『보아라, 나는 그 일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이사야 48:7 · 본디새김

두 설명이 대칭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시면, 백성은 그 일을 우상이 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새 일을 밝히시면, 백성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을 다른 신의 공로로 돌릴 수도 있고, 자기 지식의 성취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 길을 모두 막으십니다.

하나님이 과거를 알리시는 방식과 미래를 밝히시는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두 행동에는 공통된 목적이 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새로운 역사적 사건에 창조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적절히 배치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현실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7절의 「지금 창조되었고」는 그 일이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행동과 계시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언제 처음 형성되었는지를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설명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듣고도 듣지 않은 백성

8절에서는 문제가 더욱 깊어집니다.

「너는 듣지도 않았고, 알지도 않았으며, 오래전부터 네 귀가 열려 있지도 않았다. 네가 틀림없이 배신하리라는 것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너는 태중에서부터 반역자라 불렸다.」이사야 48:8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알리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듣지도 알지도 못했다고 하십니다.

문제는 그 말씀이 백성의 인식과 삶 속에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이 요구하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한 6–7절의 새로운 일은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그 일에 관해서는 실제로 듣지 못했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알려 주신 일에 대해서는 백성의 완고함을 책망하시고, 새롭게 밝히시는 일에 대해서는 그들의 무지를 인정하게 하십니다.

태중에서부터 반역자였다는 말은 특정한 태아가 실제로 어떤 죄를 저질렀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오래되고 뿌리 깊은 불신실함을 출생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이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까?

「나를 위해, 나를 위해」 — 하나님은 왜 분노를 억누르시는가?

이사야 48:9–11 본문 →

9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왜 이스라엘을 완전히 끝장내지 않았는지를 설명합니다.

「내 이름을 위해 나는 분노를 늦추고, 나에 대한 찬양을 위해 너를 향한 분노를 억누르겠다. 너를 끊어 없애지 않으려는 것이다.」이사야 48:9 · 본디새김

오히려 이스라엘이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나님이 그 심판에 한계를 두시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을 위해」입니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누구라고 밝히셨는지, 어떤 약속을 하셨으며 그 약속에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나타냅니다.

출애굽기 32:11–14에서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멸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신 일과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근거로 호소합니다. 이사야 48장에서도 비슷한 논리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신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보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말씀하신 분으로 남으시기 때문에 그 백성을 완전히 끊어 없애지 않으십니다.

고난의 용광로는 무엇을 했는가?

「보아라, 내가 너를 제련했으나 은을 제련하듯 하지는 않았다. 고난의 용광로에서 너를 선택했다.」이사야 48:10 · 본디새김

제련은 금속을 불 속에서 가열하여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고난의 용광로는 시련과 심판을 통해 백성이 다루어지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고난을 겪는 동안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도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붙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택은 고난이 선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고난이 인간을 자동으로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보편적인 법칙도 아닙니다. 이사야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고난을 겪는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나를 위해, 나를 위해 내가 행동하겠다. 어찌 내 이름이 더럽혀질 수 있겠느냐? 내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겠다.」이사야 48:11 · 본디새김

「나를 위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이것은 구원의 근거를 인간에게서 찾으려는 시도를 끊어 냅니다.

이 장에서 그 영광이 다른 이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앞의 우상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데 그들이 그 일을 다른 신의 공로로 돌린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야 할 자리에서 우상이 높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신실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은을 제련하듯 하지는 않았다」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베카세프, 문자적으로 ‘은으로’ 또는 ‘은처럼’으로 연결될 수 있는 형태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은을 정련하는 방식과 다르게 다루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은을 얻는 제련과는 다르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한 은처럼 깨끗하게 만들어 놓으셨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앞의 8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반역이 여전히 지적되었습니다.

땅과 하늘을 부르시는 하나님, 바벨론을 칠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

이사야 48:12–15 본문 →

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가 바로 그다. 내가 처음이고, 또한 내가 마지막이다.」이사야 48:12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분입니다. 그분은 역사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시는 분입니다.

「또한 내 손이 땅의 기초를 놓았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펼쳤다.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들은 함께 나선다.」이사야 48:13 · 본디새김

‘그들’은 앞에 등장한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표현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이 부르시면 함께 나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스라엘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단순히 다른 민족들보다 더 나쁜 행동을 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들을 부르신 창조주에게 올바르게 응답하지 못했다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은 누구인가?

14절에서는 다시 역사 속의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너희는 모두 모여 들어라. 그들 가운데 누가 이 일들을 알려 주었느냐? 여호와야훼는 그를 사랑했다. 그는 바벨론에서 여호와야훼의 뜻을 이루고, 그의 팔은 칼데아 사람들을 칠 것이다.」이사야 48:14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미 고레스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르신 왕으로 소개하셨습니다(44:28; 45:1–13). 그러므로 여기서 바벨론을 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을 고레스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적으로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48:14 자체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가 누구인지보다 그가 누구의 뜻을 이루는지를 강조합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를 사랑했다」는 표현에서 이 사랑을 하나님이 그 인물의 모든 성품과 행동을 도덕적으로 승인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하시고 호의를 베푸셨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바벨론을 치는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해방과 연결됩니다.

「나, 내가 말했다. 내가 그를 부르기도 했다. 내가 그를 데려왔고, 그는 자기 길에서 성공할 것이다.」이사야 48:15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한 인물을 통해 역사 속에서 실제로 행동하십니다.

문맥에서 성공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바벨론에 대한 역할과 관련됩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언제나 옳거나, 그가 앞으로 추구할 모든 목표가 성취된다는 보편적인 보장은 아닙니다.

이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소리에 뜻밖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제 주 여호와야훼와 그의 영이 나를 보냈다」 — 누가 말하고 있는가?

이사야 48:16 본문 →

16절은 이 장에서 해석상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게 가까이 와서 이것을 들어라. 나는 처음부터 은밀히 말하지 않았다. 그 일이 생길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주 여호와야훼와 그의 영이 나를 보냈다.이사야 48:16 · 본디새김

여기까지는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시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으며,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관하게 멀리 계셨던 분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말하는 이가 갑자기 달라진 듯합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적 사자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이사야서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종’의 역할과 연결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앞의 고레스 이야기와 연결하여 읽으려는 시도도 가능하지만, 고레스가 이 구절에서 갑자기 여호와야훼의 영과 관련된 사명을 직접 고백한다고 보기에는 문맥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만으로 화자의 정체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를 직접 진술한 구절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구약 본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영, 보냄받은 사람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일은 이제 보냄받은 이를 통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하늘에서 선언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의 사람을 통해 전달되며,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계속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앞의 일인칭 선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새로운 화자가 등장한다고 보는 해석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선언을 전달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하나님에게 보냄받았다고 밝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종’의 역할과 연결하는 것은 바로 다음 장인 이사야 49장에서는 하나님의 종이 자신의 부르심과 사명을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이 문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이 화자와 자신의 영을 함께 보내셨다는 뜻인지, 하나님의 영이 보내시는 일에 함께하셨다는 뜻인지 구문상 여지가 있습니다.

「네가 내 명령들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 이루어지지 않은 평안

이사야 48:17–19 본문 →

17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다시 소개하십니다.

너를 되찾아 주는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이다. 네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며, 네가 걸어갈 길로 너를 이끈다.」이사야 48:17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히 그분의 권위를 확인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백성이 살아갈 길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백성이 잘 살아가도록 이끄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 하나님은 깊은 아쉬움을 드러내십니다.

「네가 내 명령들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네 평안이 강처럼, 네 의로움이 바다의 파도처럼 되었을 것이다.」이사야 48:18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돌아보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면 누릴 수 있었던 삶을 말씀하십니다.

평안은 왜 강에 비유되는가?

강은 한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물웅덩이가 아닙니다. 물이 계속 흐르고, 그 주변에 생명이 자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들의 삶에 이러한 지속적이고 풍성한 평안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 의로움은 바다의 파도에 비유됩니다. 하나의 파도가 지나가면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옵니다. 이 표현은 의로움이 순간적인 행동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나타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평안과 의로움은 서로 다른 낱말이지만, 이곳에서는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에서는 올바른 관계와 행동이 지속되고, 그 결과 삶에 평안이 흐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놓쳐 버린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넘어 구원을 이루시지만, 그 불순종 때문에 잃어버린 평안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모래처럼 많아졌을 후손들

19절에서는 또 하나의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이 등장합니다.

「네 씨는 모래처럼, 네 뱃속에서 나온 후손들은 그 모래알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 이름이 내 앞에서 끊기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이사야 48:19 · 본디새김

창세기 22:17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약속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이 순종했더라면 후손들의 번성과 그 이름의 지속성이 얼마나 풍성하게 나타났을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문의 의미를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약속이 완전히 취소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장에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끊어 없애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48:9).

20절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게만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실제로 움직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벨론에서 나와라」 — 구원은 떠나는 행동을 요구한다

이사야 48:20–21 본문 →

20절에서 말씀의 분위기가 크게 바뀝니다.

바벨론에서 나와라. 칼데아에서 달아나라. 기쁨의 외침으로 알리고, 이것을 들려주어라. 땅끝까지 이것을 전하여라. 말하여라. 「여호와야훼가 자기 종 야곱을 되찾았다.」이사야 48:20 · 본디새김

그동안 듣지 않았던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은 그 구원의 길로 나서야 합니다.

물론 이 명령을 현대의 모든 신앙인이 자신이 살던 도시나 사회를 떠나야 한다는 보편적인 규칙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과 이스라엘의 귀환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주어진 명령입니다.

떠나는 백성이 전해야 할 소식

20절은 떠나는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알립니다.

들려줍니다.

전합니다.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도 진실함이 없었던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실제 구원 행위를 전하도록 명령받습니다. 처음의 말은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말이었습니다. 마지막의 말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증언하는 말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종 야곱을 되찾았다.」 이 선언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분명합니다. 행동하신 분은 여호와야훼십니다. 되찾아진 백성은 야곱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 자신의 능력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위에서 물을 흐르게 하신 하나님

그가 그들을 메마른 땅을 지나도록 이끌 때에도 그들은 목마르지 않았다. 그가 그들을 위해 바위에서 물을 흐르게 했다. 그가 바위를 가르자 물이 흘러나왔다.이사야 48:21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하나님이 물을 공급하신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는 일은 단지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낯선 길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미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과 양식의 양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은 이 아름다운 물의 장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갑자기 경고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또한 이 말씀은 「되찾았다」라는 완료된 행동의 형식으로 선포됩니다. 이것을 반드시 모든 귀환 과정이 이미 역사적으로 끝났다는 기록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적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확실하게 이루실 구원을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선언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1–7에서 이스라엘은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툽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를 치게 하시고, 그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민수기 20:2–13에도 물이 없는 광야에서 바위와 물이 등장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8:21은 이러한 광야의 구원 역사를 회상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 — 왜 구원의 노래 뒤에 경고가 오는가?

이사야 48:22 본문 →

22절은 짧습니다.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이사야 48:22 · 본디새김

18절에서는 누릴 수 있었지만 잃어버린 평안이 등장했습니다. 22절에서는 악인들에게 평안이 없다고 선언됩니다. 같은 ‘평안’이라는 낱말이 두 장면을 연결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모든 영적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을 누리는 일에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누구인가?

22절은 악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인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바벨론 사람들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반역을 거듭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가 이스라엘 내부의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사야 47장에서 바벨론의 죄와 심판이 길게 묘사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권력과 사람들을 넓게 가리키는 말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을 특정한 집단만을 향한 제한적인 선언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고난받는 모든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평안이 없다는 식으로 뒤집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48장의 이스라엘은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평안이 없다는 선언은 개인의 고통을 죄의 직접적인 증거로 판정할 수 있게 해 주는 문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향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던 백성이 이제 그분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이사야 48:1–22 본문 →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행동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름을 가진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출발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이사야 48장은 메마른 땅을 지나는 백성의 모습으로 끝을 향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제국의 질서를 떠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길에는 물이 없는 광야가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래된 한 장면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가 바위를 가르자 물이 흘러나왔다.」 백성이 스스로 물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끄셨고, 하나님이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그 물의 기억 뒤에 한마디 경고를 남깁니다.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하나님은 메마른 땅에서도 백성을 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에는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 앞에는 바벨론을 떠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던 백성이 이제 그분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할 소식은 자신들이 얼마나 충실했는지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종 야곱을 되찾았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