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7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자신의 끝을 보지 못한 제국

이사야 47장은 왕좌에서 내려오는 한 여인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한때 수많은 나라 위에 군림하던 여주인이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왕좌도 없이 먼지 위에 앉으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곡식을 갈고,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바벨론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의 몰락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나는 영원히 여주인으로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예측하기 위해 수많은 점술가와 별을 관찰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미래를 알려 주겠다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는데도, 정작 자신에게 다가오는 파멸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은 미래를 알아내는 기술을 자랑했지만 자신의 끝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제국이 왜 무너지는지를 군사력이나 경제력의 변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바벨론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무엇을 믿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를 들여다봅니다.

강대한 권력은 어떻게 자신에게 끝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까?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847장 본문 읽기 →

왕좌에서 먼지로 — 바벨론의 자리가 뒤바뀌다

이사야 47:1–3 본문 →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내려와 먼지 위에 앉아라, 처녀 딸 바벨론아. 왕좌 없이 땅바닥에 앉아라, 칼데아의 딸아. 사람들이 다시는 너를 여리고 곱다고 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47:1 · 본디새김

바벨론은 도시이자 제국이지만, 여기서는 한 여인으로 의인화됩니다. ‘딸’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에서 도성이나 공동체를 부르는 데 사용됩니다. 이사야 1:8의 ‘딸 시온’과 37:22의 ‘처녀 딸 시온’도 그러한 예입니다.

‘처녀’는 도성을 젊은 여성으로 의인화하는 시적 호칭입니다. 여기서는 아직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제국의 자부심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바벨론은 원래 왕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왕좌는 명령하고 통치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 앉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 자리를 빼앗으십니다.

바벨론은 여전히 앉아 있지만, 왕좌가 아니라 땅바닥에 앉습니다.

고대의 애도 장면에서 먼지나 재 가운데 앉는 것은 슬픔과 굴욕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욥기 2:8에서는 욥이 재 가운데 앉고, 예레미야애가 2:10에서는 예루살렘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씁니다. 높임받던 존재가 낮아지고, 영광스럽던 자리가 애도와 수치의 자리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맷돌을 가져다가 갈아서 가루를 내어라. 네 너울을 벗어라.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라. 다리를 드러내고 강들을 건너라.」이사야 47:2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맷돌로 곡식을 가는 일은 일상적인 노동이었지만, 종이나 포로에게 강요되는 고된 노동으로도 등장합니다. 사사기 16:21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힌 삼손은 감옥에서 맷돌을 돌립니다. 예레미야애가 5:13에서도 젊은이들이 강제로 맷돌을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리던 지배자가 이제 명령받는 노동자의 자리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이어 너울을 벗고, 옷자락을 걷고, 다리를 드러내며 강을 건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높은 지위를 상징하던 차림을 잃고, 편안하고 보호받는 생활에서 벗어나 강제로 이동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의 굴욕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네 음부가 드러나고, 네 수치도 보일 것이다. 내가 복수하겠다. 아무에게도 호의를 베풀지 않겠다.」이사야 47:3 · 본디새김

이사야는 도성을 여성으로 의인화한 뒤, 그 여인의 신체가 노출되는 모습을 통해 제국의 굴욕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이미지가 고대의 수치와 명예 관념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이것을 실제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정당하다는 가르침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대상은 한 개인이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정치적 권력이며, 신체의 노출은 그 권력이 보호받던 지위와 위엄을 상실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예언적 이미지입니다.

바벨론은 다른 사람들을 벌거벗기고 포로로 만들 수 있는 제국이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존엄과 위세를 지킬 수 없는 처지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심판을 시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끼어듭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복수는 개인적인 분풀이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마지막 문장의 히브리어는 해석이 갈립니다. 사용된 동사 파가는 ‘만나다’, ‘마주치다’를 기본 의미로 가지며, 문맥에 따라 간청하거나 개입하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아무의 간청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누구도 예외로 두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바벨론의 심판을 단호하게 선언하신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되찾아 주는 이」 — 바벨론을 향한 심판의 한가운데서 들리는 목소리

이사야 47:4–5 본문 →

4절은 이 장의 흐름에서 특별한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를 되찾아 주는 이,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다.이사야 47:4 · 본디새김

앞의 1–3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향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5절부터도 바벨론을 향한 책망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우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듣다가 그분이 누구신지를 고백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문장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고백으로 읽을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어 본문이 화자를 따로 밝히지는 않으므로, 반드시 별도의 공동체가 실제로 말을 끊고 들어왔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뒤 문장과 구분되는 고백적 목소리가 등장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되찾아 주는 이’는 가까운 친족이 책임을 지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거나 가족을 보호하는 역할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바벨론의 지배 아래 놓여 있지만, 자신들을 되찾아 주실 분이 따로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분이 바벨론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단순한 국제 정세의 변화가 아닙니다.

자신들을 사로잡은 권력의 지배가 끝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잠자코 앉아라. 어둠 속으로 들어가라, 칼데아의 딸아. 사람들이 다시는 너를 왕국들의 여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47:5 · 본디새김

말로 명령하고 자기 위엄을 드러내던 제국에게 침묵이 요구됩니다. 바벨론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른 나라들을 지배한다는 사실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배의 자리가 사라집니다.

제국의 정체성 자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바벨론이 왜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지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이 넘겨주셨지만, 바벨론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 47:6–7 본문 →

6절은 이사야 47장의 심판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나는 내 백성에게 분노했다. 내 유산을 더럽혔고, 그들을 네 손에 넘겼다. 너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몹시 무겁게 지웠다.」이사야 47:6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일이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되어 있다고 해서,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셨지만, 바벨론의 잔혹함까지 무죄라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권력도 심판받는가?

이사야 10:5–15에서 앗수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도구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앗수르 왕은 자신이 행한 정복을 자기 능력과 지혜의 성취로 자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앗수르를 사용하셨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 왕의 교만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권력을 사용하실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권력이 저지른 불의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묻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목적이 바벨론에게 무제한의 폭력을 허락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늙은이에게 지운 무거운 멍에

멍에는 짐승의 목에 얹어 일을 시키는 도구입니다.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강제 노동과 억압, 지배를 나타내는 이미지가 됩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이미 쇠약한 사람들에게도 무거운 멍에를 지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억압받는 사람의 연약함이 고려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원하는 대로 행사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사야는 제국의 악을 설명하면서 그 제국이 얼마나 많은 땅을 정복했는지 세지 않습니다.

대신 늙은 사람 하나가 감당해야 했던 멍에의 무게를 보여 줍니다.

바벨론의 죄는 단지 강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강한 자리에 있으면서 약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 『나는 영원히 여주인으로 있으리라』 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너는 이런 일들을 마음에 두지 않았고, 그 끝을 생각하지 않았다.」이사야 47: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의 잔혹함과 뒤의 파멸을 연결합니다. 여기서 ‘끝’은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일 수도 있고, 바벨론 자신의 지배가 끝나는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두 의미는 문맥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끝을 생각하지 않으면 책임을 생각할 이유도 사라지기 쉽습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보다, 앞으로도 계속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더 중요해집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힘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를 잊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저지른 일의 끝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있고,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 제국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때

이사야 47:8–10 본문 →

8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내면을 직접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이제 이것을 들어라, 향락을 즐기며 안심하고 앉아 있는 여자야. 너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내가 있고,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 않을 것이며, 자식 잃는 일도 겪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47:8 · 본디새김

이 문장은 45장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선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45:5에서 여호와야훼는 「나는 여호와야훼다. 다른 이는 없다. 나 말고는 신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벨론이 자신을 두고 비슷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유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바벨론은 자신의 권력과 안전을 절대화하면서 자신 외에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의 가장 깊은 착각은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한계가 없다고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

과부가 되거나 자식을 잃는 일은 고대 사회에서 단순히 가족 구성원이 줄어드는 문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생계와 보호, 가문의 지속성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상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자신을 지탱하는 권력과 후계, 공동체의 미래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하루에, 한순간에 네게 닥칠 것이다. 자식을 잃는 일과 과부가 되는 일이다. 네 마술이 아무리 많고, 네 주문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 두 가지가 온전히 네게 닥칠 것이다.」이사야 47:9 · 본디새김

바벨론이 절대로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일이 그대로 심판의 내용이 됩니다. 여기서 하루와 한순간이라는 표현은 몰락의 갑작스러움과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바벨론의 제국적 지위와 안전이 급격히 무너지는 일을 가족의 상실이라는 이미지로 묘사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지혜가 바벨론을 속였다

「너는 네 악을 믿고 『나를 보는 이는 없다』 하고 말했다. 네 지혜와 네 지식, 바로 그것이 너를 그릇된 길로 이끌었다. 너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내가 있고,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이사야 47:10 · 본디새김

본문은 그 지식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수준이 부족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바벨론에게 어떤 확신을 주었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바벨론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아무도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위험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은 이 잘못된 확신을 교정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확신을 더욱 굳게 만들었습니다.

바벨론은 지식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이 자신의 한계까지 설명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셨다고 선언합니다. 바벨론이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 행동은 이미 하나님의 고발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심판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심판을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역사적으로 바벨론은 기원전 539년에 고레스의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47장의 모든 이미지를 그해의 개별 사건과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도시와 제국의 몰락을 한 여인의 운명으로 집약한 예언적 시입니다. 이사야 14:4에서는 바벨론 왕을 조롱하는 노래가 시작됩니다. 그 왕은 여러 민족을 억압하던 자로 묘사되지만, 결국 죽음과 몰락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특히 이사야 14:13–14에서는 스스로 하늘 위로 올라가 지극히 높은 분과 같아지려는 교만한 생각이 등장합니다. 두 본문 모두 인간의 권력이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는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계적 권력과 부와 교만의 상징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 18:7–8은 이사야 47:7–9의 여주인, 과부, 애통, 갑작스러운 재앙이라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이어받습니다. 이는 이사야 47장의 역사적 바벨론 심판을 후대의 제국적 악에 적용하여 확장한 정경적 읽기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47장의 본래 장면을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심판받는 것은 실제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자신을 영원한 여주인으로 여기며, 수많은 점술과 지식에 의지하던 바벨론입니다.

재앙이 오는 줄도 모르고, 그것을 막는 방법도 모른다

이사야 47:11 본문 →

11절에서는 재앙에 관한 표현이 연속해서 등장합니다.

「재앙이 네게 닥칠 것이나, 너는 그것을 물리칠 방도를 알지 못할 것이다. 재난이 네 위에 떨어질 것이나, 너는 그것을 달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알지 못하는 파멸이 갑자기 네게 닥칠 것이다.」이사야 47:11 · 본디새김

바벨론이 자랑하던 미래에 대한 통제 능력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녀의 재앙은 단순한 불운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자비를 버렸던 제국이 그 힘을 잃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 말씀을 마치지 않으십니다. 바벨론에게 마지막 기회처럼 보이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모든 방법을 사용해 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첫 번째 표현은 원어에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샤흐라는 ‘새벽’과 연결해서 읽으면 재앙이 어디에서 밝아 오는지, 언제 시작되는지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찾거나 구하는 행동과 관련된 형태로 분석하면, 재앙을 물리칠 방법을 찾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뒤에 나오는 「달랠 수 없을 것이다」와 연결하여 물리칠 방도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옮겼습니다. 10절의 「네 악」과 11절의 「재앙」은 모두 라아 계열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 도덕적 악과 해로운 재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절에서는 바벨론이 저지른 악과 바벨론에게 닥칠 재앙이 언어적으로 맞물립니다. 이것을 모든 악행이 현세에서 반드시 동일한 형태의 재앙으로 되돌아온다는 보편적 공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바벨론이라는 특정한 제국의 폭력과 교만을 심판하는 말씀입니다.

「어서 나서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라」 — 미래를 예측하던 사람들이 미래 앞에 무너지다

이사야 47:12–13 본문 →

12절은 겉으로는 바벨론에게 도움을 주는 말처럼 들립니다.

「자, 네 주문과 네 수많은 마술로 버텨 보아라. 네가 젊은 시절부터 애써 온 것들이다. 어쩌면 네가 그것들로 덕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네가 두려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이사야 47:12 · 본디새김

그러나 앞에서 이미 그것들이 재앙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어쩌면」은 실제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격려라기보다, 바벨론이 의지하던 방법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반어적인 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너는 수많은 조언에 지쳤다. 하늘을 나누는 자들, 별들을 살피는 자들, 네게 닥칠 일 가운데 얼마를 달마다 알려 주는 자들이 어서 나서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라.」이사야 47:13 · 본디새김

이들은 하늘의 움직임과 별의 위치, 달의 주기 등을 관찰하여 미래를 판단하려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제 실제로 바벨론을 구원해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 미래를 구원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닥쳐올 재앙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반드시 그 재앙을 막을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자신의 지혜와 점술 체계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살피는 사람들이 바벨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내려고 애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중단시키거나 그 결과를 되돌릴 권한은 없습니다.

바벨론은 많은 조언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조언은 안식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지치게 했습니다. 이는 정보와 조언의 양이 곧 참된 분별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녀는 많은 것을 계산했지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를 실제로 구원할 수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는 실제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것을 지상의 사건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달과 별의 움직임에서 징조를 읽은 내용을 기록한 설형문자 점토판들도 전해집니다. 다만 「하늘을 나누는 자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늘이나 별의 영역을 구획하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기술적 직분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몸을 덥힐 불조차 남지 않았다

이사야 47:14–15 본문 →

14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조언자들과 점술가들의 결말을 보여 주십니다.

「보아라, 그들은 검불처럼 되었다. 불이 그들을 태워 버렸다. 그들은 불길의 손에서 제 목숨을 구해 내지 못할 것이다. 몸을 덥힐 숯불도 없고, 그 앞에 앉을 불도 없다.」이사야 47:14 · 본디새김

검불은 곡식을 거두고 남은 마른 줄기나 부스러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불이 붙으면 쉽게 타 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을 제공하겠다고 기대받던 사람들이 먼저 무너집니다.

불은 왜 따뜻하지 않은가?

불은 사람을 따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등장하는 불은 사람을 보호하거나 쉬게 하는 불이 아닙니다.

그들을 삼켜 버리는 불입니다.

바벨론이 의지하던 사람들과 방법들은 재앙을 막아 줄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몸을 덥히며 앉을 수 있는 평온한 불이 아니라, 자신들을 태워 버리는 불길입니다.

마지막에는 거래하던 사람들까지 떠난다

15절은 이 장 전체에서 가장 쓸쓸한 장면입니다.

「네가 애써 온 자들, 네 젊은 시절부터 너와 거래하던 자들이 네게 이렇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제 갈 길로 헤매 떠났다. 너를 구원할 자는 없다.」이사야 47:15 · 본디새김

「너와 거래하던 자들」이라는 표현은 바벨론이 의지해 온 교역 상대나 점술가들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은 군사력만으로 존재한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과 물품이 오가고, 상업과 교역이 이루어지는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한때 바벨론과 관계를 맺는 것이 유익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힘과 부를 통해 이익을 얻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몰락이 다가오자 그들은 저마다 자기 길로 떠납니다.

강한 권력은 많은 사람을 자기 주변에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오직 이익과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힘이 사라질 때 관계도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한때 수많은 나라를 지배하던 제국은 이제 자기 자신을 지켜 줄 사람 하나 찾을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마지막 두 행은 따뜻하게 할 숯불도 없고 그 앞에 앉을 불도 없다는 부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불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타오르는지를 지나치게 구체적인 그림으로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심판의 불을 인간이 통제하고 활용할 수 있는 불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벨론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사야 47:1–15 본문 →

바벨론이 몰락한 근본적인 문제는 미래에 관한 정보가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도 끝이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판단할 존재가 없다고 여기는 권력은 약한 사람의 고통을 쉽게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이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47장은 구원을 받는 바벨론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마지막을 성급하게 바벨론의 회복이나 화해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의 목적을 단순히 바벨론이 비참해지는 모습을 즐기게 하는 데 있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한때 바벨론은 왕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녀의 명령을 들었고, 여러 나라의 자원과 재물이 그녀에게 모였습니다. 점술가들은 미래를 말해 주었고, 거래하던 사람들은 그녀의 힘과 부를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조언하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점술가들은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합니다.

거래하던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길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더 이상 왕좌에 앉지 못합니다.

그녀는 먼지 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 마지막 장면에 별다른 장식을 더하지 않습니다. 「너를 구원할 자는 없다.」 이 말로 제국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자신은 영원히 왕좌에 앉아 있으리라고 믿었던 바벨론. 그러나 그 끝에 남은 것은 왕좌가 아니라 먼지였고, 수많은 조언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침묵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