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6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사람을 짊어지시는 하나님

이사야 46장은 바벨론의 신들이 무릎을 꿇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릎을 꿇는 이유가 이상합니다. 누군가를 경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신을 짊어집니다. 다른 쪽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짊어지십니다.

참된 하나님과 거짓 신의 차이는 누가 더 화려하고 강력해 보이는가가 아니라, 마지막에 누가 누구를 짊어지고 구해 내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앞 장에서 여호와야훼는 고레스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46장은 바벨론의 신들이 그 역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단순히 다른 신들을 조롱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태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짊어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읽는 시간 15분소단락 746장 본문 읽기 →

무릎 꿇은 벨과 느보 — 신들이 짐이 되다

이사야 46:1–2 본문 →

이사야 46장 첫 문장에서 등장하는 벨과 느보는 바벨론의 신들입니다.

‘벨’은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칭호로, 이 문맥에서는 바벨론의 대표적인 신 마르두크를 가리킵니다. 예레미야 50:2에서도 벨과 므로닥이 함께 언급되며 바벨론의 멸망과 연결됩니다. ‘느보’는 바벨론 종교에서 지혜와 기록에 관련된 신 나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신들의 위엄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벨은 무릎을 꿇었고, 느보는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다. 너희가 들고 다니던 것들이 실려 지친 짐승에게 짐이 되었다.이사야 46:1 · 본디새김

고대 세계에서 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굽히는 사람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신들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의도적으로 신과 경배자의 위치를 뒤집습니다.

신상은 본래 사람들이 운반하던 물건이었습니다. 종교적인 행렬에서 사람들이 신상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은 신을 높이는 행위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운반 행위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한때 신을 높이기 위해 운반하던 형상이 이제는 짐승까지 지치게 하는 짐으로 묘사됩니다. 누군가가 들고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존재에게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신들은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했다

그들은 함께 몸을 굽히고 무릎을 꿇었다. 짐을 구해 내지 못했고, 그들 자신도 포로로 끌려갔다.이사야 46:2 · 본디새김

‘구해 내다’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신들이 패배한 포로처럼 취급되는 풍자적 장면입니다. 신상을 운반하는 모습과 신들 자체가 사로잡히는 모습을 겹쳐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기대했던 신들이 정작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이를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할 때 벨과 느보의 신상 모두를 실제로 포로처럼 끌고 갔다는 구체적인 역사 기록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신들의 무능함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예언적 묘사를 사용합니다.

「머리가 희어져도 내가 짊어지겠다」 — 하나님은 언제까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가?

이사야 46:3–4 본문 →

3절은 「내 말을 들어라」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내 말을 들어라, 야곱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남은 모든 자들아. 배 속에서부터 내가 짊어지고, 태에서부터 내가 들고 온 자들아.」이사야 46:3 · 본디새김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두 장면은 같은 운반 동사들을 반복하여 연결합니다. 1절에서 우상들이 ‘실린 것들’과 ‘짐이 된 것들’로 표현되고, 3절에서 이스라엘은 ‘짊어져진 자들’과 ‘들려 온 자들’로 표현됩니다.

표현은 비슷하지만 관계의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돌보심은 이스라엘이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배 속에서부터」, 「태에서부터」라는 표현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강대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기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스스로 설 능력조차 없던 때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짊어지셨습니다.

여기서 ‘배 속’과 ‘태’는 우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시작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을 한 사람처럼 부르시며, 그 백성의 생애를 태어남에서부터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시간은 갑자기 생애의 끝자락으로 이동합니다.

「너희가 늙어도 나는 바로 그다. 머리가 희어져도 내가 짊어지겠다. 내가 너희를 만들었고 내가 들고 가겠다. 내가 짊어지고 구해 내겠다.」이사야 46:4 · 본디새김

어린아이를 안고 다니는 모습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어진 사람을 계속 짊어지는 모습은 쉽게 상상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낯선 이미지가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보호자는 시간이 지나면 지칠 수 있습니다. 부모도 늙고, 보호자도 약해집니다. 어린아이를 안아 주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질 것입니다. 처음에는 약한 백성이었지만 나라를 이루었고, 이후 왕국의 분열과 전쟁, 멸망과 포로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늙어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쇠약해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네 번 반복되는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은 만드셨고, 들고 가시며, 짊어지시고, 구해 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드신 뒤에 그들을 독립된 존재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만드신 일이 지속적인 돌보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짊어지는 행동의 마지막에는 ‘구해 내다’가 등장합니다. 앞의 2절에서 바벨론의 신들은 자기 짐을 구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짊어지신 백성을 구해 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같은 구원 문제가 두 장면에서 정반대의 결론을 얻습니다.

물론 이 약속을 모든 개인이 노년에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거나 어떤 위험에서도 반드시 구조된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포로 생활을 겪으며 공동체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긴 역사와 쇠약함 속에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신과 움직이시는 하나님

이사야 46:5–7 본문 →

5절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에 빗대고 누구와 같다고 하며, 누구와 견주어 우리가 서로 닮았다고 하겠느냐?」이사야 46:5 · 본디새김

앞에서 이미 하나님과 우상의 행동 방식이 비교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누가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인간이 만든 신의 모습을 다시 보여 주십니다.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고 저울로 은을 다는 자들이 금속 세공인을 고용하고, 그는 그것으로 신을 만든다. 그들은 엎드리고 또 절한다.」이사야 46:6 · 본디새김

이전 장에서 묘사된 나무 우상과 달리 이번에는 값비싼 금속으로 만든 신상이 등장합니다. 재료가 얼마나 비싼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작의 순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돈을 지불합니다.

장인이 형상을 만듭니다.

사람이 그 앞에 절합니다.

여기서 1절의 바벨론 신들이 몸을 굽혔던 장면이 다시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신들이 무너져 몸을 굽혔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 신상 앞에서 경배하며 몸을 굽힙니다.

「그들은 그것을 어깨에 들어 올려 짊어지고,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그것은 서 있고,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누가 그것에게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를 곤경에서 구원하지 못한다.」이사야 46:7 · 본디새김

장인이 뛰어난 기술로 신상을 만들고,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상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이 장면은 우상의 물리적 움직임과 영적인 능력을 연결합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신상은 자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하거나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형상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상식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형상에 구원의 능력을 부여하고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종교적 행위 자체가 질문의 대상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여라」 — 하나님을 알아보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이사야 46:8–9 본문 →

8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백성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굳세어져라. 반역하는 자들아, 마음에 되새겨라.」이사야 46:8 · 본디새김

앞의 장면에서는 우상들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부르는 호칭은 부드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믿음과 충성으로 가득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시 생각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굳세어져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명령형 베히트오샤슈(⁨אִישׁ⁩)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드문 형태입니다. 스스로 굳게 서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정신을 차리고 사람답게 행동하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앞뒤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너진 분별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판단이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자신의 기억과 판단을 사용하여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먼 옛적의 일들을 기억하여라. 내가 하나님이며 다른 이는 없고, 내가 하나님이며 나 같은 이는 없기 때문이다.」이사야 46:9 · 본디새김

여기서 옛일은 막연한 추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과거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위기 속에서 보존되었고,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기억하게 하심으로써 미래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은 그분이 앞으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을 이해하는 토대가 됩니다. 여기서 기억은 단순히 오래된 정보를 보존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현재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지 분별하기 위해 과거를 다시 살피는 행위입니다.

「내 계획은 이루어질 것이다」 —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과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

이사야 46:10–11 본문 →

10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처음부터 끝을 알리고, 옛적부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알리며, 『내 계획은 이루어질 것이고,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내가 하겠다』 하고 말한다.」이사야 46:10 · 본디새김

본문은 하나님이 단지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신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알리시고, 그 계획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동쪽에서 부르시는 맹금

11절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구체적인 인물과 연결됩니다.

「나는 동쪽에서 맹금을, 먼 땅에서 내 계획을 이룰 사람을 부른다. 참으로 내가 말했고, 참으로 내가 그것을 이루겠다. 내가 구상했고, 참으로 내가 그것을 실행하겠다.」이사야 46:11 · 본디새김

여기서는 강한 힘과 빠른 움직임을 가진 새의 이미지가 사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맹금은 문자 그대로 하늘을 나는 새라기보다, 하나님이 먼 곳에서 부르시는 강력한 인물을 묘사하는 이미지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장은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의 이사야 44:28과 45:1–13에서 고레스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름받은 인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46:11의 동쪽에서 오는 인물을 고레스와 연결하는 것은 문맥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고레스는 바벨론 동쪽의 페르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한 왕입니다. 이사야가 먼 곳에서 오는 맹금에 비유한 인물을 고레스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실제 제국의 권력 변동을 통해 실현된다는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계획과 실행 사이의 거리

11절 후반부에는 네 개의 선언이 이어집니다. 말함과 이룸, 구상함과 실행함이 각각 대응합니다.

그들은 이미 오랜 유배의 현실을 겪고 있습니다. 강대한 바벨론은 쉽게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회복도 당장 실현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과 역사의 현실 사이에 놓인 거리를 설명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분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모든 사건이 인간의 선택이나 책임과 무관하게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본문이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대한 추상적인 철학적 설명이 아니라, 유배민을 위한 구원 약속의 확실성입니다.

「의에서 멀리 떨어진 자들아」 — 멀어진 것은 누구인가?

이사야 46:12–13 본문 →

12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명령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마음이 완고한 자들아, 의에서 멀리 떨어진 자들아.」이사야 46:12 · 본디새김

하나님은 청중을 바꾸어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백성의 다른 문제를 점점 더 깊이 드러내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지만, 그분의 말씀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문맥에서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기대에 붙잡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일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의에서 멀리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의에서 멀리 떨어진 자들아」라는 표현은 쉽게 도덕적인 판단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백성의 잘못과 불충실에 대한 책망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3절을 함께 읽으면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내가 내 의를 가까이 가져왔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내 구원은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시온에 구원을, 이스라엘에게 내 영광을 주겠다.」이사야 46:13 · 본디새김

이 대조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에게 더 의롭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가 실제로 백성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사야 45장에서 이미 하나님의 의는 구원과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뜻에 따라 고레스를 일으키시고, 유배민을 해방하시며, 무너진 성읍을 회복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의는 하나님이 옳게 행하시고 자신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성품과 행동을 나타냅니다. 구원은 그러한 하나님의 행동이 백성에게 가져오는 구체적인 결과입니다. 따라서 13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운 뜻을 역사 속에서 실현하실 때가 가까워졌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가까이 오는데, 백성은 아직 멀리 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부족함을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백성의 완고함을 괜찮다고 인정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고, 기억하라고 명령하시며, 자신의 말씀을 들으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책망의 목적은 백성을 절망 속에 내버려 두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지해야 할 하나님이 이미 가까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내 구원은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늦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어떤 특정한 날짜나 시간표의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구원이 이루어질 정확한 시점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시는 일을 지체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져 있었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길은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이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시온」이라는 구체적인 장소가 등장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과 연결되는 이름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으신 역사의 중심적인 장소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회복을 향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백성의 능력이나 성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마지막 표현인 「이스라엘에게 내 영광을 주겠다」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이스라엘’과 ‘내 영광’을 나란히 놓습니다. 본디새김처럼 시온에 구원을 주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준다는 병행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이스라엘, 곧 나의 영광’이라는 동격 관계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주시는 행동이 강조됩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백성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두 읽기 모두 문맥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짐을 지우시는가, 짐을 지시는가?

이사야 46:1–13 본문 →

이 장에서 하나님은 두 차례나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기억하라고 명령하시고, 다른 신을 의지하는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백성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지탱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6장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짊어지시는 분이면서, 그 백성을 위한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46장은 바벨론의 신들이 짐승의 등에 실려 끌려가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끝에 남는 장면은 전혀 다릅니다.

자신이 만든 형상을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랜 세월 약해지고 늙어 가는 백성을 여전히 짊어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그들을 내려놓지 않으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