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5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의 손을 붙잡으시다

이사야 45장은 놀라운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한 사람의 오른손을 붙잡으십니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사람조차 아닙니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입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레스의 이름을 아십니다. 고레스는 여호와야훼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여호와야훼는 그의 손을 붙잡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을 아는 사람들의 행동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까지 사용하여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하필 고레스를 선택하셨을까요? 이방 왕을 사용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다스리신다면, 평안뿐 아니라 재앙도 그분에게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왜 마침내 온 세상을 향한 초청으로 확대됩니까?

이사야 45장은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 일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누구를 구원하시려는가라는 질문으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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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름부음 받은 이」 — 고레스에게 주어진 뜻밖의 이름

이사야 45:1–3 본문 →

앞 장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고레스를 「내 목자」라고 부르셨습니다(44:28). 이제 45장은 한층 더 놀라운 칭호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의 기름부음 받은 이 고레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앞에 민족들을 굴복시키려고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내가 왕들의 허리띠를 풀어 그 앞에 두 짝 문을 열겠다. 성문들은 닫히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45:1 · 본디새김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왕이나 제사장이 특별한 직무를 맡는 일과 관련됩니다. 사무엘상 16:13에서는 다윗이 왕으로 부름받으며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의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특별한 임무를 위해 세우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다윗의 후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에 속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자신의 기름부음 받은 이라고 부르십니다.

본문은 고레스가 실제로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에 따라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의 역사적 역할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고레스가 기름부음 받은 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보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무엇을 이루시려는가에 있습니다.

오른손을 붙잡는 분은 누구인가?

고대 세계에서 오른손은 힘과 행동을 떠올리게 하는 신체 부위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을 붙잡으셨다는 것은 고레스가 행할 일의 능력과 방향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고레스는 하나님을 붙잡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붙잡으십니다.

허리띠를 푼다는 표현은 왕들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거나 전투할 준비를 잃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옷을 허리에 묶어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고대의 복식 관습을 생각하면, 허리띠가 풀리는 모습은 힘과 준비 태세가 무너지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청동 문과 쇠 빗장도 등장합니다(2절). 이것들은 강대한 도시의 방어력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문들을 부수고 빗장들을 잘라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레스 앞에 길을 내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내가 네게 어둠 속의 보물들과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 재물들을 주겠다. 너를 네 이름으로 부르는 나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이사야 45:3 · 본디새김

정복한 도시에서 얻는 재물은 왕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됩니다. 고레스의 행동에는 정치적·경제적 동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도 그가 보물을 얻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가 단지 승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이 역사를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고레스가 실제로 여호와야훼만을 섬기는 신앙으로 완전히 돌아섰다고 보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레스가 이후 어떤 개인적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적 선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말은 훗날 ‘메시아’라는 명칭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곧바로 후대의 메시아 개념 전체를 고레스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네가 나를 알지 못했어도」 — 하나님의 목적은 고레스보다 크다

이사야 45:4–6 본문 →

4절에서 하나님은 고레스를 선택하신 이유를 직접 밝히십니다.

「내 종 야곱을 위해,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위해 내가 너를 네 이름으로 불렀다. 네가 나를 알지 못했어도 나는 네게 칭호를 준다.」이사야 45:4 · 본디새김

이 문장이 없었다면 고레스에게 주어진 앞의 약속은 단지 제국의 정복 전쟁에 대한 신적 승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고레스는 자신의 제국을 확장하는 왕으로 활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행동을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역사 속에 놓으십니다.

「나는 여호와야훼다. 다른 이는 없다. 나 말고는 신이 없다. 네가 나를 알지 못했어도 나는 네 허리띠를 매어 준다.」이사야 45:5 · 본디새김

고레스가 여호와야훼를 알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고레스를 선택하여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인간의 종교적 인식보다 앞서 있습니다.

1절에서는 다른 왕들의 허리띠를 푸셨습니다. 이제는 고레스의 허리띠를 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왕들의 힘을 무너뜨리시는 동시에 고레스에게 행동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레스가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가능성과 정면으로 맞섭니다. 고레스에게 주어진 힘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 시야는 고레스를 넘어섭니다.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여호와야훼다. 다른 이는 없다.」이사야 45:6 · 본디새김

해가 뜨는 동쪽에서 지는 서쪽까지, 곧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고레스를 사용하시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특정 민족을 선택하신다는 사실과 그분이 온 세계의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 서로 충돌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관심이 끝나는 경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역사적 중심입니다.

「평안을 이루고 재앙을 창조한다」 — 하나님은 어디까지 다스리시는가?

이사야 45:7–8 본문 →

7절은 이사야 45장에서 가장 어렵고 무거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는 빛을 빚고 어둠을 창조하며, 평안을 이루고 재앙을 창조한다. 나 여호와야훼가 이 모든 일을 한다.」이사야 45:7 · 본디새김

빛과 어둠은 서로 반대되는 영역을 나타냅니다. 평안과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대조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느 한쪽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평안이 있을 때는 여호와야훼가 다스리시지만 재앙이 일어나면 다른 신이나 독립적인 악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앙을 ‘허락하신다’가 아니라 ‘창조하신다’

히브리어에서 여기 사용된 낱말은 라(⁨רַע⁩)입니다. 문맥에 따라 악, 나쁜 것, 해로움, 재난 등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샬롬, 곧 평안과 온전한 안녕을 나타내는 말과 대조되기 때문에, 도덕적인 악행 자체보다 전쟁이나 패배, 파괴와 같은 재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적합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단지 지켜보시거나 허락만 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앙을 창조한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의 제국 질서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고레스가 여러 민족을 굴복시키고 왕들의 힘을 빼앗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이 변화는 해방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패배와 재앙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밝은 결과만 자신의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제국의 무너짐과 권력의 해체까지도 자신의 다스림과 무관한 일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악한 분이시거나 악행을 선한 일로 바꾸어 부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각각의 불행이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 일어났는지 인간이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어떤 재앙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피해자들이 특별히 더 큰 죄를 지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역사의 최종적인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인간이 그 역사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구별하도록 이끕니다.

세상의 역사는 서로 경쟁하는 신들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구원과 심판의 역사 모두 한 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재앙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구원을 명하신다

8절의 분위기는 갑자기 달라집니다.

「하늘아, 위에서 내려 쏟아라. 구름들은 의를 흘려 내릴지어다. 땅은 열릴지어다. 하늘과 땅은 구원을 열매 맺을지어다. 땅은 의도 함께 싹 틔울지어다. 나 여호와야훼가 그것을 창조했다.」이사야 45:8 · 본디새김

이 장면은 비가 내리고 땅에서 식물이 자라는 자연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장에서 의는 하나님이 자신의 올바른 뜻을 역사 속에서 실현하시는 행동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 결과로 억압받는 백성이 해방되고, 무너진 삶이 회복되며,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평안과 재앙 모두를 다스리시지만, 이 자리에서 자신이 이루시려는 일을 구원과 의가 자라나는 모습으로 보여 주십니다.

재앙 자체가 이 장의 마지막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너뜨리시는 일뿐 아니라 다시 세우시는 일을 행하십니다. 그분이 고레스를 일으키시는 목적도 단지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에서 구원이 열매 맺는 주체를 정확히 어떻게 이해할지는 문법적으로 여지가 있습니다.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앞에 등장한 하늘과 땅을 함께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구원과 의가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는 중심은 같습니다.

「무엇을 만들고 있느냐?」 —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따질 때

이사야 45:9–13 본문 →

9절은 강한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아, 자신을 빚은 이와 다투는 자여, 흙으로 된 질그릇 조각들 가운데 한 조각이여. 진흙이 자기를 빚는 이에게 「무엇을 만들고 있느냐?」 하고 말하겠는가? 네가 만든 것이 「그에게는 손이 없다」 하고 말하겠는가?이사야 45:9 · 본디새김

손으로 빚어진 물건이 자신을 빚은 사람에게 손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진흙은 자신이 어떤 그릇이 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들어진 물건이 자신을 만드는 사람의 자격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비유가 바뀝니다.

아, 아버지에게 「무엇을 낳으십니까?」 하고, 여자에게 「무엇을 낳으려고 산고를 겪으십니까?」 하고 말하는 자여.이사야 45:10 · 본디새김

태어나는 사람은 자신의 부모를 선택하거나 자신의 출생 조건을 명령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자신을 낳는 과정에 있는 부모를 향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따지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토기장이와 부모라는 두 비유가 가리키는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근원에 대하여, 그 근원에서 나온 존재가 마치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두고 다투고 있는가?

앞에서는 하나님이 고레스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뒤에서는 하나님이 다시 고레스를 일으키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따라서 9–13절의 다툼은 하나님이 고레스를 선택하신 방식에 대한 반발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이방 왕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면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 우리가 기대한 구원과 너무 다른 것은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본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은 하나님의 예상 밖 선택을 문제 삼는 태도가 책망의 대상일 가능성을 뒷받침합니다.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이스라엘을 빚은 이가 이렇게 말했다. 「다가오는 일들을 내게 물어라. 내 아들들과 내 손이 한 일에 관해 너희가 내게 명령하려느냐?」이사야 45:11 · 본디새김

하나님께 앞으로의 일을 묻는 것과,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기대에 맞추어 일하셔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질문하고 탄식하는 모든 행동을 불신앙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왜 침묵하시는지 묻는 기도가 거듭 등장하고, 하박국 1:2–4에서는 악과 불의에 대한 질문이 하나님께 직접 제기됩니다.

따라서 이사야 45장의 책망을 모든 신앙적 질문에 대한 금지로 확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는 방식을 인간의 기대에 종속시키려는 태도입니다.

「내가 땅을 만들었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했다. 바로 내 손이 하늘을 펼쳤고, 내가 그 모든 군대에게 명령했다.」이사야 45:12 · 본디새김

9절에서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손을 문제 삼았습니다. 11절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명령하려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12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하늘을 펼치셨으며,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궁극적인 권한을 가지는지를 다시 분명하게 합니다.

고레스가 일으켜진 것은 ‘의’ 안에서다

「내가 의로 그를 일으켰고,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겠다. 그가 내 성읍을 세우고 값도 뇌물도 없이 내 유배민들을 풀어 줄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이사야 45:13 · 본디새김

여기서 「그」는 앞에서 등장한 고레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을 고레스의 모든 행동이 도덕적으로 의롭다는 보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고레스의 제국 통치나 정복 전쟁 전체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승인 아래 놓인다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고레스를 일으키신 목적과 그 목적이 갖는 올바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모두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되었다고 판단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 45장에서는 하나님이 고레스라는 특정한 인물을 직접 지명하시고 그에게 맡기신 일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러한 계시 없이 현대의 정치적 권력자에게 고레스와 동일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본문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3절에서 고레스는 감추어진 보물과 재물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유배민들을 해방하는 일이 값이나 뇌물을 받고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고 선언됩니다. 고레스가 정복을 통해 재물을 얻는 것과, 포로들의 해방을 대가를 요구하는 거래로 삼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유배민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사기 위해 고레스에게 값을 치러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해방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뜻에 속합니다.

하나님이 자유롭게 선택하신 방법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무너진 성읍을 세우고, 붙잡힌 사람들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구원 목적을 위해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는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후반부는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명령하다’에 해당하는 동사 형태가 사용되지만, 의문을 나타내는 표지는 별도로 없습니다. 따라서 이를 정말로 하나님께 명령하라는 말, 곧 비꼬는 도전으로 읽을 수도 있고, 본디새김처럼 「너희가 내게 명령하려느냐?」라는 반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다가오는 일들을 내게 물어라」라는 명령도 그 어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역대하 36:22–23과 에스라 1:1–4는 고레스가 유다 백성의 귀환과 성전 건축을 허락하는 내용을 기록합니다.

「참으로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사야 45:14–17 본문 →

14절에서는 또다시 장면이 바뀝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이집트의 수고로 얻은 것과 쿠시의 교역으로 얻은 것, 키 큰 사람들인 스바인들이 네게 건너와 네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네 뒤를 따라가며 사슬에 묶인 채 건너올 것이다. 네게 엎드려 절하고 네게 간청할 것이다. 『참으로 당신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른 이는 없으며, 다른 신은 없습니다.』」이사야 45:14 · 본디새김

이들은 이스라엘 밖의 민족들입니다. 특히 이집트와 그 남쪽 지역에 해당하는 이름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고레스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밖의 민족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장면으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사슬에 묶인 채」라는 표현은 평화롭게 찾아와 자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순례자들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다. 패배와 굴복, 종속을 떠올리게 하는 강한 이미지입니다. 여기에는 정치적 복속과 신앙적 인정이 함께 나타납니다. 고대의 왕권과 제국 질서 속에서 다른 민족이 승리한 쪽에 복종하는 장면을 반영하는 언어입니다.

또한 이 구절을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명령으로 확대할 수도 없습니다. 뒤의 20–22절에서는 민족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직접 하나님께 나아와 구원받으라는 초청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4절의 복속 이미지와 뒤의 보편적 초청 사이에는 긴장이 남습니다. 이사야는 이방 민족들의 패배와 굴복이라는 정치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들이 여호와야훼를 인정하게 되는 더 넓은 미래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을 숨기시는가?

「참으로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구원자이십니다.」이사야 45:15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알게 하려고 고레스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자신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시겠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라고 불리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완전히 감추어져 계셔서 아무도 그분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사람들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레스는 제국을 확장하는 왕으로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적 능력을 가진 정복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행동을 드러냅니다.

고레스가 여호와야훼를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그의 손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과, 인간이 그분의 행동을 즉시 알아보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16–17절은 그 차이를 두 집단의 운명으로 보여 줍니다.

형상들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부끄러워하고 수치를 당했으며, 함께 치욕 속에 떠나갔다.이사야 45:16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 너희는 영원토록 부끄러워하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45:17 · 본디새김

여기서 수치란 단지 남들 앞에서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의지한 대상이 실제로는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겪게 되는 실패와 굴욕이 포함됩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미 역사 속에서 수치를 겪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는 그들에게 깊은 굴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수치가 영원한 결말이 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근거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다른 민족들보다 강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14절의 ‘너’는 여성 단수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남성인 고레스를 직접 가리키는 것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시온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부르는 구약의 표현들을 고려하면, 여기서 이스라엘 공동체 또는 시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절 자체가 그 대상을 이름으로 명시하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5절의 고백이 정확히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는 본문에서 완전히 명시되지 않습니다. 앞 절의 이방인들이 이어서 말한다고 볼 수도 있고, 새로운 화자가 하나님을 향해 감탄하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은밀하게 말하지 않았다」 — 숨어 계시지만 침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사야 45:18–19 본문 →

18절은 창조의 목적을 선언합니다.

하늘을 창조한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이며, 땅을 빚고 만든 이다. 그가 땅을 굳게 세웠다. 그것을 텅 빈 곳으로 창조하지 않고, 살 곳으로 빚었다. 「나는 여호와야훼다. 다른 이는 없다.」이사야 45:18 · 본디새김

하나님은 땅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곳에 생명이 거주하도록 뜻하셨습니다. 바로 앞에서 예루살렘과 유배민들의 회복이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성읍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땅을 살 곳으로 빚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황폐해진 성읍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회복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창조와 구원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하나님의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헛되이’ 찾게 하지 않으신다

「나는 어둠의 땅 어느 곳에서 은밀하게 말하지 않았다. 야곱의 후손에게 『헛되이 나를 찾아라』 하고 말하지 않았다. 나 여호와야훼는 의를 말하고 올바른 것을 알린다.」이사야 45:19 · 본디새김

18절에서는 하나님이 땅을 ‘텅 빈 곳’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절에서는 야곱의 후손에게 하나님을 ‘헛되이’ 찾으라고 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표현에 같은 히브리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목적 없는 공허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결과 없는 헛된 부름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라는 앞의 고백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적 활동을 인간의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이루시려는지 영원히 감추고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역사의 표면에서는 알아보기 어려웠던 하나님의 목적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 해석됩니다. 사람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즉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어떤 왕을 세우시고 다른 왕을 무너뜨리시는지, 왜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는지 완전히 설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까지 헛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이제 그 말씀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땅을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텅 빈 곳’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창세기 1:2에서 땅의 상태를 설명할 때에도 등장합니다. 다만 이사야 45:18에서는 땅을 거주할 수 없는 황무지로 남겨 두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창세기는 창조 서술 속의 상태를, 이사야는 하나님이 땅을 만드신 목적을 강조합니다.

「땅의 모든 끝들아, 내게 돌이켜 구원받아라」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계를 부르신다

이사야 45:20–22 본문 →

20절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청중을 부르십니다.

「모여서 와라. 함께 가까이 다가와라, 민족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들아. 자기들의 나무 우상을 들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알지 못한다.」이사야 45:20 · 본디새김

그들은 전쟁과 제국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 사람이 옮겨 주어야 하는 신에게,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험에서 건져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사람에게 들려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십니다.

「알리고 가져와라. 그들이 함께 의논하게 하여라. 누가 옛적부터 이것을 들려주었으며, 그때부터 이것을 알렸느냐? 나 여호와야훼가 아니냐?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 의로운 하나님, 구원자는 나 말고는 없다.」이사야 45:21 · 본디새김

이번에는 ‘의로운 하나님’과 ‘구원자’가 나란히 놓입니다. 그분의 구원은 자신의 올바른 뜻을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45장에서 그 행동은 고레스의 등장과 유배민의 해방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보다 훨씬 넓은 대상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땅의 모든 끝들아, 내게 돌이켜 구원받아라. 내가 하나님이며 다른 이는 없기 때문이다.」이사야 45:22 · 본디새김

「땅의 모든 끝들」이라는 표현은 지리적으로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민족들과 우상을 의지했던 사람들도 이 부름의 범위 안에 들어옵니다.

여기서 ‘돌이켜’는 단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의지하던 방향에서 여호와야훼를 향해 돌아서는 응답입니다.

고레스에게는 하나님이 먼저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는 모습이 강조되었습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말씀에서는 그 하나님의 행동에 사람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다른 신은 없다’는 선언이 어떻게 초청이 되는가?

하나님은 이 장에서 자신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하십니다. 처음에는 그 선언이 고레스의 정복을 설명하는 근거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22절에서는 구원의 초청을 뒷받침하는 이유가 됩니다.

오직 한 분만이 참된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온 땅의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오도록 초청받습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스라엘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인 경계가 아니라, 온 세상이 그분께 돌아와야 하는 이유로 제시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모든 민족이 이미 구원받았거나, 아무런 응답 없이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지만, 그 부름 앞에서 돌이키는 응답이 요구됩니다.

이제 그 초청은 더욱 장엄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보편적인 초청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도 연결됩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5장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모든 민족의 미래를 하나님의 한 가지 목적 안에 놓습니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고」 — 온 세계가 인정하게 될 한 분 하나님

이사야 45:23–25 본문 →

2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했다. 내 입에서 의롭게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고, 모든 혀가 맹세할 것이다.」이사야 45:23 · 본디새김

고대의 맹세는 흔히 자신보다 높은 권위를 증인으로 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이는 그분보다 높은 권위가 없다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상대의 권위를 인정하며 복종하는 행동입니다. 혀로 맹세하는 것은 그 권위를 말로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몸과 말이 함께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땅끝의 모든 사람에게 돌아와 구원받으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23절의 보편적인 복종을 오직 강제적인 굴복으로만 읽으면 바로 앞의 구원 초청을 놓치게 됩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기쁨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으로만 읽어도 다음 절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24절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반응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야훼 안에서 내게 의로운 일들과 힘이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하나님께 격분하던 자들이 그분에게 와서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23절의 모든 무릎과 모든 혀를 모든 사람의 동일한 운명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보편적인 미래를 선언하지만, 그 인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쁨으로 나타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본문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그 누구도 최종적으로 여호와야훼의 권위 밖에 서서 다른 신을 참된 구원자로 내세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의와 힘이 함께 있다

힘만 있고 의가 없다면 그 힘은 단지 더 강한 제국의 힘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의로운 뜻만 있고 그것을 이룰 힘이 없다면, 그 뜻은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목적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45장에서 의와 힘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그분의 의로운 목적을 실현하며, 그분의 의는 역사 속에서 실제적인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은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 25절은 다시 이스라엘을 향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이 여호와야훼 안에서 옳다고 인정받고 자랑할 것이다.이사야 45:25 · 본디새김

이것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지워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취소하고 이제 다른 민족들만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가운데 자신의 구원을 모든 민족에게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의 정당함은 그들이 언제나 옳게 행동했다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앞 장들에서 이스라엘의 잘못은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여호와야훼 안에서」 옳다고 인정받고 자랑하게 됩니다.

그들의 자랑은 자기 능력이나 도덕적 우월함이 아닙니다.

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9:23–24에서 지혜와 힘과 부를 자랑하지 말고 여호와야훼를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신 내용과도 통합니다. 이스라엘이 자랑할 수 있는 근거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히브리어 문장에는 몇 가지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내게’를 고백하는 사람의 말 안에 포함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누가 이 고백을 하고 누가 하나님께 나아오는지에 대해서도 문법적으로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후대 신약에서는 이사야 45:23의 모든 무릎과 모든 혀에 관한 선언이 로마서 14:11에 직접 인용되며, 빌립보서 2:10–1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장면에 적용됩니다. 이는 원래 여호와야훼의 유일한 주권을 선포한 말씀을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읽은 신약의 신학적 전개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45장을 그 후대의 적용에서 거꾸로 출발하여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일하실 때

이사야 45:1–25 본문 →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시는 방법은 인간의 예상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고레스라는 예상 밖의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시는 것도, 모든 민족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도 그 목적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장의 의는 하나님의 행동이 옳다는 선언인 동시에, 그 올바름이 구원이라는 결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한 사람의 오른손을 붙잡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한 사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사이에 제국이 무너지고, 유배민이 해방되며, 하나님이 이루시는 의와 구원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향해 하나의 부름이 울려 퍼집니다. 「땅의 모든 끝들아, 내게 돌이켜 구원받아라. 내가 하나님이며 다른 이는 없기 때문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