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4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사람은 신을 만들고, 하나님은 사람을 빚으십니다
이사야 44장에는 한 나무를 둘러싼 기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를 베어 옵니다. 그 나무의 절반은 불에 넣어 태우고, 그 불로 빵을 굽고 고기를 익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남은 나무로 신을 만듭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잘라 쓰던 나무에게, 이제 자신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어떻게 자기 목숨을 맡기게 됩니까?
그런데 이 장은 우상을 비웃는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신을 빚지만, 여호와야훼는 사람을 빚으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만든 것에 구원을 부탁하지만,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빚으신 백성을 직접 구원하십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죄를 지은 백성을 되찾고 그들의 죄를 지우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44장은 그 약속을 이어받아, 왜 이스라엘이 다른 신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야훼를 신뢰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뜻밖에도 한 이방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택하신 페르시아 왕 고레스입니다.
「여수룬아」 — 하나님은 이 백성을 무엇이라 부르시는가?
44장은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이제 들어라, 내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이사야 44:1 · 본디새김
이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야곱, 이스라엘, 그리고 여수룬입니다.
여수룬(יְשֻׁרוּן)은 ‘곧다’, ‘올바르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어근과 연결되는 시적인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을 애정 어린 방식으로 부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신명기에도 등장합니다. 특히 신명기 32:15에서는 여수룬이 살이 찌자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버렸다고 고발합니다. 반면 신명기 33:5, 26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도우시는 백성의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여수룬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스라엘의 실제 행동이 언제나 올바르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와 반역을 고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백성을 여수룬이라 부르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택하시고 빚으신 백성이라는 관계를 다시 확인하십니다.
너를 만들고 모태에서부터 너를 빚었으며 너를 도울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여수룬아.」이사야 44:2 · 본디새김
여기서 이스라엘 전체가 마치 한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이것은 각 개인의 태아 형성 과정을 설명하려는 말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의 시작과 존재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미 만드시고 빚으신 분이면서, 앞으로 그들을 도우실 분입니다. 과거의 창조와 미래의 도움이 하나의 문장 안에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의 현재는 무너져 있지만, 하나님이 이 백성을 빚으셨다는 사실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물을 부으시는 하나님, 영을 부으시는 하나님
3절에는 같은 동작이 반복됩니다.
「내가 목마른 땅에 물을 붓고, 마른 땅에 시냇물을 부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네 씨 위에 내 영을 붓고, 네 후손들 위에 내 복을 붓겠다.」이사야 44:3 · 본디새김
네 번의 ‘붓다’가 두 쌍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물과 시냇물이 마른 땅을 적십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과 복이 이스라엘의 후손에게 부어집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에 물을 주시는 일 자체도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같은 동사를 반복함으로써 독자는 물과 영의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메마른 땅에 물이 필요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후손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합니다.
땅은 스스로 물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바깥에서 물이 공급되어야 생명이 자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생명력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영을 부으시고 복을 주셔야 합니다.
이사야 32:15에서도 위로부터 영이 부어질 때 광야가 열매 맺는 땅으로 변화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사야서에서 회복과 새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활동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풀 사이에서 돋아나고, 물길 곁의 포플러나무들처럼 자랄 것이다.」이사야 44:4 · 본디새김
본문은 이 회복을 군사력이나 영토 확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자라나는 후손들입니다. 공동체가 계속 살아남고, 다음 세대가 자라나며,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미래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을 택한다
5절에서는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이 사람들의 말과 행동으로 바뀝니다.
「이 사람은 『나는 여호와야훼의 것이다』 하고 말하고, 저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신을 부를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손에 『여호와야훼의 것』이라고 쓰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이다.」이사야 44:5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스스로 여호와야훼와 이스라엘의 이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그분께 속한다는 자발적인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장의 중간에 등장할 우상숭배자의 고백과 정반대입니다.
5절에서 사람은 「나는 여호와야훼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17절에서 우상숭배자는 자신이 만든 물건에게 「당신은 저의 신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인정합니다. 뒤에서는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물건을 자기 위에 신으로 세웁니다.
조금 더 깊이
「자기 손에 『여호와야훼의 것』이라고 쓰고」라는 표현은 손에 직접 글을 써서 소속을 표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손을 사용해 서명하거나 자신을 여호와야훼께 바치는 행위로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문장만으로 구체적인 의식이나 표식의 형태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혈통적 후손만을 가리키는지, 이스라엘 공동체에 새롭게 참여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지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3절의 후손들이 주된 문맥이지만, 5절의 「이 사람」, 「저 사람」, 「또 다른 사람」이라는 열린 표현은 더 넓은 참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56:3–8에서는 실제로 이스라엘 밖에서 온 이들이 여호와야훼께 속한 공동체에 참여하는 미래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나 말고는 다른 바위는 없다」 — 신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을 되찾는 이인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이고 내가 마지막이다. 나 말고는 신이 없다.」이사야 44:6 · 본디새김
‘처음’과 ‘마지막’은 단순히 시간의 시작과 끝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과 진행과 결말을 다른 신들에게 나누어 맡기지 않으십니다.
「누가 나와 같으냐? 그가 외쳐 볼지어다. 내가 옛적의 백성을 세운 때부터 있었던 일을 알리고 내 앞에 차례로 펼쳐 볼지어다. 다가오는 일들과 앞으로 닥칠 일을 그들이 그 백성에게 알려 볼지어다.」이사야 44:7 · 본디새김
이것은 이사야 41:21–23에서도 등장한 논쟁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참된 분이라는 사실은 그분의 말과 역사 속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44:7의 히브리어 구문에서 ‘옛적의 백성을 세움’을 알려야 할 일의 시작점으로 볼지, 알려야 할 사건 자체로 볼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과 앞으로 행하실 일을 함께 제시하신다는 중심 내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고레스라는 구체적인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미래의 희망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역사 속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일을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을 증인으로 부르십니다.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때부터 네게 들려주고 알리지 않았느냐? 너희는 내 증인들이다. 나 말고 신이 있느냐? 다른 바위는 없다. 나는 그런 바위를 알지 못한다.」이사야 44:8 · 본디새김
구약에서 바위는 견고함, 보호, 피난처를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신명기 32:4는 하나님을 바위라고 부르며, 그분의 일과 길이 의롭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8:2에서도 여호와야훼는 피할 바위이자 요새로 묘사됩니다.
바위는 사람이 만들어 세우는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그 위에 서고, 그 틈에 몸을 피하며, 그 견고함을 의지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선언 직후에 이사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세우는 신입니다.
신을 만드는 장인은 왜 배고프고 목마른가?
9절부터 20절까지는 이사야서에서 가장 길고 생생한 우상 비판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체도 달라집니다.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직접 소개하셨지만, 여기서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행동이 삼인칭으로 묘사됩니다.
우상을 빚는 자들은 모두 허무하고, 그들이 아끼는 것들은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한다. 그들 자신이 그것들의 증인들이지만,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니,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이사야 44:9 · 본디새김
「빚는 자들」(יָצַר)이라는 표현은 이 장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빚으셨다고 말할 때에도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빚으십니다.
장인들은 신의 형상을 빚습니다.
형성하는 자와 형성되는 것의 위치가 뒤바뀝니다.
성경의 창조 신앙에서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상 제작에서는 사람이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결과물 앞에 엎드립니다.
쇠를 다루는 장인의 팔
12절에서는 쇠를 다루는 장인이 등장합니다.
쇠를 다루는 장인은 도끼로 숯불 속에서 작업하고, 망치들로 우상을 빚으며, 힘센 팔로 그것을 만들었다. 그도 굶주려 힘이 없었고, 물을 마시지 않아 지쳤다.이사야 44:12 · 본디새김
장인은 신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유지하려면 음식과 물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가 만들고 있는 신도 결국 이렇게 연약한 인간의 능력과 조건에 의존합니다.
3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12절에서 우상을 만드는 장인은 물을 마시지 못해 지칩니다.
여호와야훼는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지만, 우상은 생명을 공급받아야 하는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집니다.
사람을 닮은 신
13절에서는 나무를 다루는 장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줄을 펼쳐 치수를 재고, 윤곽을 그리고, 여러 도구로 나무를 깎습니다. 마침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형상을 만듭니다. 그 형상은 집 안에 놓입니다.
고대의 우상숭배자들이 모두 나무 자체를 곧바로 신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신상을 신적 존재가 현존하는 형상이나 매개로 이해하는 종교적 관념도 있었습니다.
본문은 의도적으로 신상이 만들어지는 물질적 과정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형상이라 하더라도 그 형상은 여전히 인간이 측정하고 깎고 옮기고 놓아야 하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술을 통해 일정한 형태를 얻고, 사람이 마련한 장소에 놓여야 하는 형상이 어떻게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까?
14절에서는 시선이 더 뒤로 이동합니다.
그는 자기가 쓸 백향목들을 베어 내고, 티르사나무와 참나무를 골라 숲의 나무들 가운데서 자기 몫으로 확보했다. 그는 오렌나무를 심었고, 비가 그것을 자라게 했다.이사야 44:14 · 본디새김
우상이 되는 재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 있는 것은 사람의 기술과 자연의 공급에 의존하는 나무입니다. 이사야는 신상의 겉모습에서 출발해 그 재료의 기원까지 추적합니다. 그리고 독자가 마지막에 보게 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자란 나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오렌나무가 정확히 어떤 수종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그 이름이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절반은 불에 태우고, 절반에는 절한다
15–17절은 앞의 설명을 더욱 날카로운 장면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는 나무를 태워 몸을 덥힙니다. 빵을 굽고 고기를 익혀 먹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유익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바로 같은 나무의 남은 부분으로 우상을 만듭니다.
한쪽 나무는 불에 넣습니다.
다른 쪽 나무에는 엎드려 절합니다.
둘은 같은 나무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쪽을 자신의 필요를 위한 물건으로 사용하면서, 다른 한쪽은 자신의 운명을 맡길 신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나머지로는 신을, 자기 우상을 만들었다. 그것에 엎드려 절하고 몸을 굽히며, 그것에 기도하며 말했다. 「저를 건져 주십시오. 당신은 저의 신이기 때문입니다.」이사야 44:1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자신을 빚으신 여호와야훼에게 구원을 기대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자는 자신이 빚은 형상에게 구원을 부탁합니다.
여기서 우상의 문제는 단순히 재료가 나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큰 능력을 지닌 존재에게 구원을 구해야 할 인간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든 뒤 거기에서 궁극적인 구원을 기대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더 심각한 문제는 우상숭배자가 자신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인간은 미래를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미래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관리할 수 있는 대상에 의지할 때,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과 보호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동시에 얻으려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심리학적으로 직접 설명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이사야가 보여 주는 우상숭배의 행동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내 오른손에 있는 것이 거짓이 아닌가?」 — 우상이 빼앗는 분별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다. 그들의 눈은 덧칠되어 보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도 덧칠되어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이사야 44:18 · 본디새김
‘덧칠되다(טוּחַ)’라는 표현은 눈과 마음이 가려져 제대로 보거나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들의 문제는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무가 어떻게 자랐는지 압니다. 자신이 어떻게 베었는지도 압니다. 그 나무의 일부를 태워 음식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런데 그 사실들을 함께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는 마음에 되새기지 않았고, 이렇게 말할 지식도 분별도 없었다. 「그 절반을 불에 태웠고, 그 숯불 위에서 빵도 구웠으며,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런데 그 나머지로 혐오스러운 것을 만들겠는가? 나무토막에 엎드려 절하겠는가?」이사야 44:19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어려운 철학적 추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조금 전에 한 일을 차례대로 떠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상숭배는 무엇이 참인지 모르는 상태에 그치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올바르게 연결하지 못하는 상태로 묘사됩니다.
그는 재를 먹고 살았다. 속은 마음이 그를 빗나가게 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건져 내지도 못하고, 「내 오른손에 있는 것이 거짓이 아닌가?」 하고 말하지도 못했다.이사야 44:20 · 본디새김
「재를 먹고 살았다」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재를 음식처럼 먹는 모습을 묘사하기보다는, 결국 아무런 생명도 주지 못하는 것에 자신을 의탁한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우상숭배자는 그 나무로 빵을 굽고 고기를 익혀 실제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으로 섬기는 형상은 그에게 생명을 공급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만든 것을 자신이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거짓임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본문은 우상숭배의 가장 깊은 문제를 여기서 드러냅니다. 우상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 우상을 붙잡은 사람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설 능력까지 잃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증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반면 우상 제작자들은 자기가 만든 것들의 증인이지만, 정작 그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44:9).
참된 증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올바르게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러나 여기서 누가 그들의 눈과 마음을 가렸는지는 명시적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읽기도 있지만, 본문은 행위자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은 채 그들이 보지 못하는 상태를 강조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기억하여라」 —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돌아와야 할 백성
21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야곱과 이스라엘을 직접 부르십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것들을 기억하여라. 너는 내 종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빚었다. 너는 내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44:21 · 본디새김
여기서 「이것들을 기억하여라」라는 명령은 앞에서 보여 준 우상의 헛됨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함께 돌아보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왜 그것이 구원자가 될 수 없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우상처럼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신적 지위를 부여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빚으신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절에는 서로 마주 보는 두 종류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기억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고대의 포로와 유배 상황에서 백성이 하나님께 잊혔다고 느낄 만한 이유는 많았습니다. 성전은 무너졌고, 도성은 황폐해졌으며,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도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바벨론의 정치적 판단이나 자신들의 현재 처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자기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네 반역들을 먹구름처럼, 네 죄들을 구름처럼 지워 버렸다. 내게 돌아와라. 내가 너를 되찾았기 때문이다.」이사야 44:22 · 본디새김
죄는 하늘을 가리는 구름처럼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그 구름을 지워 버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구름이 걷힌 하늘에는 그것이 있던 자리가 남지 않습니다.
보통은 먼저 돌아와야 하나님이 되찾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순서가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백성을 되찾으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백성에게 회개가 필요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내게 돌아와라」는 분명한 요청이며, 그들에게는 돌이켜야 할 불충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되찾으셨기 때문에 백성에게 돌아갈 길이 열립니다.
이사야 43:25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백성의 죄를 지우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44:22에서는 그 선언이 실제적인 부름으로 이어집니다.
용서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열어 주신 길입니다.
나무들이 기뻐 외친다
23절에서는 시야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하늘아, 기뻐 외쳐라. 여호와야훼가 이 일을 했기 때문이다. 땅 깊은 곳들아, 함성을 질러라. 산들아, 숲과 그 안의 모든 나무야, 기쁨의 노래를 터뜨려라. 여호와야훼가 야곱을 되찾았고, 이스라엘을 통해 자기 영광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44:2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사람이 나무를 잘라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나무들이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도록 부름받습니다.
나무는 사람이 신으로 만들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속한 존재이며, 시적인 표현 속에서 창조주를 찬양하는 무리의 일원이 됩니다.
우상 제작자들의 손에서 재로 끝나는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숲이 등장합니다.
재와 노래.
이사야는 같은 피조물을 두고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 줍니다.
홀로 하늘을 펼치신 하나님이 폐허가 된 성읍들을 세우신다
24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다시 소개하십니다.
너를 되찾는 이, 모태에서부터 너를 빚은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호와야훼, 모든 것을 만드는 이다. 나 홀로 하늘을 펼치고, 나 스스로 땅을 펴 놓았다.」이사야 44:24 · 본디새김
장인들은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도구가 필요했고, 힘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만들려는 형상은 자연에서 얻은 재료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하늘과 땅 자체를 만드신 분입니다.
‘나 홀로’라는 강조는 창조의 행위가 다른 신들과 분담한 작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선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들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25절에서 하나님은 허튼소리하는 자들의 징조를 무너뜨리시고 점치는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의 판단을 어리석게 만드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천체의 움직임과 여러 징조를 관찰하여 미래를 판단하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왕과 국가의 운명에 관한 결정에도 이러한 활동이 관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의 지식이 자신을 미래의 최종적인 해석자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관찰한 징조를 통해 미래를 통제하거나 확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역사 속에서 이루실 일이 그러한 판단을 넘어설 수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내 종의 말을 이루고, 내 사자들의 계획을 완수한다. 예루살렘을 두고 『그곳에 사람이 살 것이다』 하고, 유다의 성읍들을 두고 『그 성읍들이 세워질 것이다』 하고 말한다. 내가 그 폐허들을 일으키겠다.」이사야 44:26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후손들이 나무처럼 자라나는 미래가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들이 살아갈 성읍들이 다시 건설되는 미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종교적 변화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백성이 실제로 거주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삶의 공간까지 회복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폐허가 다시 세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을 가로막는 거대한 권력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나는 깊은 바다에 이렇게 말한다. 『말라라. 내가 네 강들을 말리겠다.』」이사야 44:27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 때 물을 제어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11:15–16과 51:10에서도 물길을 말리고 백성이 지나갈 길을 여는 장면이 구원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황폐해진 인간의 도시를 다시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내 종’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명시되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으로 불린 것을 고려하여 집합적인 이스라엘과 연결할 수 있고, 바로 뒤에 언급되는 ‘내 사자들’과 함께 예언적 말씀을 전하는 종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과 사자들의 말이 성취되는 것은 그들이 독립적인 예언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말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27절을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할 때 강의 물길을 돌렸다는 특정한 군사 작전의 직접적인 예고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27절 자체는 특정 강의 이름이나 작전 과정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회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를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는 내 목자다」 — 하나님은 왜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부르시는가?
「나는 고레스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내 목자다. 그가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리라.』 또 예루살렘을 두고 『그곳이 세워질 것이다』 하고, 성전에는 『네 기초가 놓일 것이다』 하고 말한다.」이사야 44:28 · 본디새김
구약에서는 왕이 백성을 돌보는 목자로 묘사되곤 합니다. 사무엘하 5:2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을 돌보며 다스릴 사람으로 부름받습니다. 시편 78:70–72 역시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을 목자의 마음으로 돌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다윗 왕조의 후손이 아니라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내 목자’라고 부르십니다.
고레스는 역사 속에서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 왕입니다. 에스라 1:1–4는 그가 유다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고 전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되찾기 위해 이방 제국의 통치자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고레스가 ‘내 목자’라고 불린다고 해서 그가 이스라엘의 신앙을 온전히 고백하는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그의 종교적 경건이나 인격 전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무너진 이유를 바벨론의 강대한 힘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회복이 또 다른 이방 제국의 왕을 통해 이루어지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강대한 제국의 왕은 자신이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왕조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6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신 것의 구체적인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경계 안에서만 활동하시는 지역 신이 아닙니다. 페르시아와 바벨론의 역사를 포함한 온 세계가 그분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목자’라는 호칭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방식
고레스에게 ‘목자’라는 호칭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이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실제 역사 속의 통치자를 사용하시고, 정치적 상황을 바꾸시며, 무너진 도성과 성전의 재건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홀로 하늘을 펼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역사 속의 구원은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성전의 기초
28절은 고레스라는 이름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단어들이 가리키는 곳은 예루살렘과 성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완성된 성전의 장엄한 모습을 묘사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기초를 놓아야 하는 상태입니다.
기초는 건물의 완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초가 놓인다는 것은 무너진 곳에 다시 건물이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한 뒤 여러 지역의 신상과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종교 시설을 복구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고대의 고레스 원통문서에도 나타납니다. 다만 그 문서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루살렘 회복 기록과 원통문서를 완전히 동일한 문서적 증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44장이 보여 주는 참된 신앙
우상 제작자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행동이 가진 모순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서 이사야 44장의 가장 깊은 위로는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굳게 붙잡고 있는가보다, 하나님이 자신이 빚으신 백성을 어떻게 붙들고 계시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분은 한 왕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 왕을 통해 무엇이 시작될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폐허 속에 남아 있는 예루살렘, 무너져 버린 성전의 자리.
그곳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네 기초가 놓일 것이다」.
아직 건물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 무너진 도시가 모두 회복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 폐허를 향해 새로운 시작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자신이 놓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지만, 하늘과 땅을 만드신 여호와야훼는 한 이방 왕을 부르시고, 역사를 움직여 무너진 성전의 기초를 다시 놓게 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