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3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하나님은 부르셨고, 백성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43장에는 서로 마주 보는 두 문장이 있습니다.

「내가 네 이름을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이름을 부르셨지만,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의 약속은 무엇에 근거합니까? 백성이 하나님을 충실히 섬겼기 때문도 아니고, 이제부터 충실히 섬기겠다고 다짐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잘못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사야 43장은 죄 없는 백성을 구원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죄를 아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다시 부르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743장 본문 읽기 →

「너는 내 것이다」 — 구원은 관계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이사야 43:1–4 본문 →

43장은 「이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짧은 말은 앞 장을 읽은 사람에게 특별한 무게로 들립니다.

이사야 42장 끝에서 이스라엘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으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았으며, 그 결과 전쟁과 파괴를 겪었습니다. 특히 42:25는 하나님의 심판이 불처럼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태웠는데도 백성이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물을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있고, 강들을 건널 때 그 물이 너를 휩쓸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을 때에도 데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이사야 43:2 · 본디새김

이미 불을 겪은 백성에게 이제는 불이 그들을 삼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겪은 그 백성을 향해, 그 경험이 마지막 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백성은 여전히 물을 지나야 합니다. 불 속을 걸어야 하는 상황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약속의 중심은 고난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물론 이 표현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재난에서도 신체적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보편적인 보장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심판과 포로 생활의 위기를 겪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원 약속입니다. 본문은 그 위기를 통과할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근거는 1절에 있습니다.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한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아, 너를 빚은 이가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이름을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이사야 43:1 · 본디새김

‘되찾다’는 말은 토지나 가족의 권리를 잃었을 때 가까운 친족이 나서서 되찾는 행위를 나타내는 데 쓰입니다. 레위기 25:25에서는 가난해진 친족이 판 땅을 가까운 친족이 되찾는 상황에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단어에는 단순히 위험에서 구조한다는 뜻을 넘어서는 관계의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에게 속한 이를 되찾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그 관계는 구원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너를 창조한 여호와야훼」, 「너를 빚은 이」라는 표현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고 빚으신 분이며, 이제 그들을 되찾으시는 분입니다. 처음 만드신 분이 다시 나서서 구원하십니다.

「내가 네 이름을 불렀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상대를 알아보고 관계 안으로 불러들이는 행위입니다. 이어지는 「너는 내 것이다」가 그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3–4절에서는 그 관계의 깊이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네가 내 눈에 귀하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나는 너 대신 사람들을, 네 목숨 대신 민족들을 주겠다.」이사야 43:4 · 본디새김

백성이 귀하고 존귀한 이유를 그들의 업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가 먼저 나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2장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책망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들은 책망받을 이유가 없는 백성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집트와 쿠스와 세바는 왜 등장하는가?

「나는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너를 구원하는 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집트를 네 몸값으로 주었고, 쿠스와 세바를 너 대신 주었다.」이사야 43:3 · 본디새김

이집트와 쿠스, 세바는 실제 민족과 지역을 가리킵니다. 쿠스는 대체로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 일대와 관련되며, 세바의 정확한 역사적 범위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표현은 국제적인 권력 변동까지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일이 단순히 한 백성의 내적 변화가 아니라, 강대한 제국들의 운명과 관련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특정 민족들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몸값으로 지급되었다는 기록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거래의 과정이나 역사적 성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민족들의 생명을 이스라엘보다 가치 없게 평가하는 보편적인 원칙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이사야서 자체가 이집트와 앗수르까지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사야 19:23–25).

그렇다고 43:3–4의 날카로운 표현을 부드럽게 지워 버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자신의 개입이 국제 질서까지 뒤흔들 만큼 중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흩어진 아들딸을 사방에서 부르시는 하나님

이사야 43:5–7 본문 →

5절에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명령이 다시 등장합니다.

1절에서는 그 이유가 「내가 너를 되찾았기 때문이다」였고, 5절에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을 차례로 부르십니다.

「내가 북쪽에 『내놓아라』 하고, 남쪽에 이렇게 말하겠다. 『붙들어 두지 마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내 딸들을 땅끝에서,』」이사야 43:6 · 본디새김

마치 세상의 네 방향이 하나님의 백성을 붙잡아 둔 세력인 것처럼 묘사됩니다. 포로와 유배의 경험 속에서 이 표현은 실제적인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스스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흩어 놓은 거리와 권력도 하나님 앞에서는 마지막 장벽이 되지 못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집단적 정체성을 말할 때 남성 조상의 이름이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지만, 이 자리에서는 딸들이 명시적으로 호명됩니다. 하나님이 되찾으시는 백성은 추상적인 민족 개념이 아니라, 먼 곳에 흩어진 아들딸들로 그려집니다.

7절은 그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곧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이를 데려오너라. 내 영광을 위해 내가 그를 창조했다. 내가 그를 빚었고, 또한 그를 만들었다.』」이사야 43:7 · 본디새김

1절에서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고 빚으신 하나님은 7절에서 다시 그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1절의 「네 이름」은 이제 7절의 「내 이름」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는 단순히 어디에서 살았는지, 어떤 왕의 지배를 받았는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아직 백성의 찬양으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찬양할 백성을 되찾기 위해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 목적이 21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러 모으시는 이 백성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지만, 정작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먼 백성을 증인으로 세우시다

이사야 43:8–13 본문 →

8절은 앞의 구원 약속과 분위기가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눈이 있어도 눈먼 백성을, 귀가 있어도 귀먹은 이들을 이끌어 내라.」이사야 43:8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이사야 42:18–20에서 등장한 이스라엘의 모습과 이어집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고, 귀를 열어 놓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내 증인들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또한 내가 택한 내 종이다.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바로 그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나보다 앞서 빚어진 신이 없었고, 내 뒤에도 없을 것이다.」이사야 43:10 · 본디새김

어떻게 눈먼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증인은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백성을 자기 증인으로 선택하십니다.

「모든 나라가 함께 모였으니, 민족들도 모여들게 하여라. 그들 가운데 누가 이것을 알리며,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느냐? 그들이 자기 증인들을 내세워 옳음을 입증하게 하여라. 그들이 듣고 『참되다』 하고 말하게 하여라.」이사야 43:9 · 본디새김

이것은 법정의 장면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가 참된 신인지, 누가 역사를 알고 그 방향을 밝힐 수 있는지를 놓고 증언과 입증이 요구됩니다.

이 법정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증인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들의 증언은 자신들이 얼마나 훌륭한 백성인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무엇을 알리셨으며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렸고 구원했으며 들려주었다. 너희 가운데 다른 신은 없었다. 너희는 내 증인들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나는 하나님이다.」이사야 43:12 · 본디새김

백성은 그 역사를 경험한 증인입니다. 증인은 보통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세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증인 자신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믿고 깨닫는 것이 목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증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증언하면서 그 하나님을 알아 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통해 보게 하시려 합니다.

10–13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유일성이 반복해서 선언됩니다.

「나, 내가 여호와야훼다. 나 말고는 구원하는 이가 없다.」이사야 43:11 · 본디새김

10절의 「빚어진 신」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빚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들은 누군가에 의해 빚어지는 대상으로 표현됩니다.

참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빚으시는 분이지만, 거짓 신들은 인간이 빚어 내는 존재라는 대조가 형성됩니다. 이 주제는 이사야 44:9–20에서 우상 제작의 풍자로 더욱 구체화됩니다.

13절의 「내가 일을 하면 누가 그것을 되돌리겠느냐?」는 이 장면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이 참된 분이라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종교적 명칭을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역사를 실제로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시작하시는 일은 다른 권력이나 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하실 새로운 역사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43:9 마지막의 「그들이 듣고 『참되다』 하고 말하게 하여라」에서 ‘그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문법적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소집된 민족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들이 내세운 증인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주장의 참됨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바다를 가르셨던 하나님이 이제 광야에 길을 내신다

이사야 43:14–21 본문 →

14절은 바벨론을 향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너희를 되찾은 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인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를 위해 내가 바벨론으로 보냈다. 그들 모두를 도망자로 내려보내고, 갈대아 사람들도 그들이 환호하던 배들로 내려보내겠다.」이사야 43:14 · 본디새김

앞에서 이스라엘은 사방에 흩어진 백성이었고, 이제 그들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 바벨론이 등장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바벨론의 힘이 무너지는 일이 이스라엘을 되찾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16절부터는 바벨론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의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다에 길을 내고, 거센 물에 통로를 내며,이사야 43:16 · 본디새김
병거와 말, 군대와 용사들을 이끌어 내는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함께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꺼져 버렸고, 아마 심지처럼 꺼졌다.이사야 43:17 · 본디새김

이것은 출애굽의 바다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4:21–28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은 건너가지만, 뒤쫓던 이집트의 병거와 군대는 물에 휩쓸립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옛날 출애굽 때처럼 다시 바다를 가르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다음 말씀은 예상 밖입니다.

「이전 일들을 기억하지 마라. 옛일들을 곰곰이 생각하지 마라.」이사야 43:18 · 본디새김

이 명령을 출애굽의 역사를 잊어버리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역사를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근거로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아라, 내가 새 일을 한다. 이제 그것이 싹튼다. 너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참으로 내가 광야에 길을, 황무지에 강들을 내겠다.」이사야 43:19 · 본디새김

하나님이 과거를 무의미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의 한계가 되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옛 구원에서는 바다에 길이 나서 물이 물러나고 백성이 지나갑니다(43:16–17). 새 구원에서는 광야에 강이 나서 물이 흐르고 백성이 살아갑니다(43:19–20).

앞에서는 물이 너무 많아 건널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물이 너무 없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앞에서는 물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물을 흘러나오게 하십니다.

여기서 새 일은 출애굽과 아무 관계 없는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출애굽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보다 넓은 가능성을 보여 주는 구원입니다. 같은 하나님이 다른 상황 속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이 약속은 바벨론에 붙잡혀 고향에서 멀어진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직접적인 의미는 그들이 다시 돌아갈 길이 열리고, 돌아가는 여정에서 생명을 공급받으리라는 희망입니다. 광야와 물이라는 이미지는 구원의 실제성과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함께 나타냅니다.

새로운 일은 이미 완성된 건축물처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싹이 돋아나는 일에 비유됩니다. 싹은 아직 완성된 열매가 아닙니다. 하지만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일을 백성이 알아보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라는 질문은 42장부터 이어진 백성의 영적 눈멂과도 연결됩니다.

볼 수 없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싹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들짐승들은 하나님을 알아보는데

「들짐승들, 자칼들과 타조들이 나를 존귀하게 여길 것이다. 내 백성, 내가 택한 이에게 마시게 하려고 내가 광야에 물을, 황무지에 강들을 주었기 때문이다.」이사야 43:20 · 본디새김

하나님이 광야에 물을 주시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자신의 백성을 마시게 하려는 일이지만, 그 은혜의 장면에는 들짐승들도 참여합니다. 이는 이사야 35:6–7의 광야가 물로 살아나는 회복의 이미지와도 이어집니다.

그런데 들짐승들의 찬양은 다음 절에서 이스라엘의 사명과 연결됩니다.

「내가 나를 위해 빚은 백성이 나를 찬양하는 말을 전할 것이다.」이사야 43:21 · 본디새김

여기서 10절의 증인이라는 역할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들의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감정 표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전하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이 장의 가장 뜻밖의 반전이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세부 장면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바리힘은 ‘도망자들’로 읽을 수도 있고 ‘문빗장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뒤따르는 배에 관한 표현도 환호하던 배들이라는 의미인지, 도망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배들이라는 의미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첫 문장에서 무엇을 바벨론으로 보냈는지도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특정한 군사 작전이나 바벨론 사람들의 도주 경로를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빚어진 백성이 하나님에게 지쳐 버렸다

이사야 43:22–24 본문 →

21절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으로 마무리됩니다. 독자는 이제 회복된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장면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은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너는 나에게 지쳐 버렸다, 이스라엘아.」이사야 43:22 · 본디새김

1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네 이름을 불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셨지만, 백성에게서는 그 부름에 걸맞은 응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23–24절에서는 제물과 향료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너는 번제에 쓸 양이나 염소를 내게 가져오지 않았고, 네 희생제물로 나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예물로 네게 종살이를 시키지 않았고, 유향으로 너를 지치게 하지 않았다.」이사야 43:23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예배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문제는 단순히 제사의 수량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너는 나를 위해 은을 주고 향기 나는 갈대를 사지 않았고, 네 희생제물의 기름으로 나를 배부르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네 죄들로 내게 종살이를 시켰고, 네 죄악들로 나를 지치게 했다.」이사야 43:24 · 본디새김

이 문장들은 치밀하게 서로를 뒤집습니다.

22절에서 백성은 하나님에게 지쳐 버렸다고 묘사됩니다. 2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에게 종살이를 시키시거나 지치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4절에서는 오히려 백성이 하나님에게 종살이를 시키고 그분을 지치게 했다고 선언하십니다.

‘지치다’와 ‘종살이를 시키다’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행위의 주체와 대상이 뒤바뀌는 것입니다.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자신들에게 부담스럽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의 관점을 제시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섬기느라 지친 것이 아니라, 너희의 죄가 나를 지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처럼 피로에 시달리시거나 실제로 백성의 노예가 되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백성의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거스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강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20절에서 들짐승들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23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그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물이 주어지자 들짐승들은 하나님을 높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은 그분을 찾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은 포로 생활과 성전의 파괴를 경험한 백성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제사 관련 표현을 특정 시기의 예배 태만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으로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제사 언어를 사용하여 백성의 관계적 불충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나, 바로 내가」 — 백성이 자신을 변호하기 전에 하나님이 죄를 지우신다

이사야 43:25–28 본문 →

22–24절의 고발을 듣고 나면 다음에는 어떤 말씀이 나올 것 같습니까?

백성이 회개하고, 제사를 회복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보상해야 한다는 요구가 뒤따를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25절에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나, 바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네 반역들을 지워 버리는 이다. 네 죄들을 기억하지 않겠다.」이사야 43:25 · 본디새김

백성이 잘못을 바로잡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먼저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자신이 죄를 지우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지워 버리다’에 해당하는 표현은 기록된 것을 지우거나 없애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었지만 그것을 더 이상 백성을 규정하는 기록으로 남겨 두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나 자신을 위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하셨고(43:4), 그들을 자기 이름으로 부르셨으며(43:1, 7), 자신의 영광을 위해 빚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43:7, 21). 이제 그 백성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목적에 맞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목적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장에서 두 번 등장하는 ‘기억하지 않음’

18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에게 「이전 일들을 기억하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5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가리켜 「네 죄들을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억하지 않는 대상은 서로 다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과거 구원이고, 두 번째는 백성의 과거 죄입니다. 이 둘을 같은 의미의 망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는 옛 구원 방식에 생각이 갇히지 말라는 뜻이고, 뒤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의 죄를 더 이상 그들을 거스르는 근거로 붙들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구원을 시작하시려는 하나님 앞에서 과거는 더 이상 미래의 절대적인 한계가 되지 못합니다.

이사야 43장의 ‘새 일’은 그래서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길을 걷게 될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까지 새롭게 하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왜 다시 백성의 죄를 고발하시는가?

25절에서 죄를 지우시겠다고 하신 뒤, 26절은 다시 재판의 언어로 돌아갑니다.

「내 기억을 일깨워라. 우리가 함께 시비를 가려 보자. 네가 옳다는 판결을 받도록, 네가 이야기해 보아라.」이사야 43:26 · 본디새김

이것은 8–13절의 법정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앞에서는 민족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인을 내세우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에는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무죄의 증거가 없습니다.

「네 첫 조상이 죄를 지었고, 너를 대변하는 이들이 나를 거슬러 반역했다.」이사야 43:27 · 본디새김

그들의 역사와 그들을 대표하는 이들까지 고발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성소의 지도자들을 더럽혔고, 야곱을 진멸에, 이스라엘을 모욕에 넘겨주었다.」이사야 43:28 · 본디새김

이 절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단순히 바벨론의 군사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을 심판에 넘겨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진멸」은 매우 강한 심판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실제로 남김없이 멸망했다는 역사적 진술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이스라엘을 여전히 부르시고 되찾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5절의 용서와 28절의 심판은 서로 충돌합니까?

이 장을 시간순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사건 기록처럼 읽으면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말씀하십니다.

25절은 27–28절에 기록된 죄와 심판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사실임에도 하나님이 죄를 지우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 백성에게 무조건 괜찮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잘못을 정확히 고발하십니다. 그러나 구원의 가능성을 그들이 스스로 무죄를 입증하는 데 걸어 두지도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지우시겠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아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나’라는 표현이 강조되어 반복됩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유일한 구원자로 선언하셨을 때와 비슷한 방식입니다. 27절의 ‘첫 조상’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담, 야곱과 같은 특정 인물로 해석하는 길도 있고,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집합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너를 대변하는 이들’ 역시 예언자나 제사장 등 특정한 직분으로 좁힐 가능성이 있으나, 본문 자체는 그들을 명시적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이사야 43:1–28 본문 →

이사야 43장은 결국 사람이 하나님께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먼저 어떻게 사람을 찾아오시는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용서는 백성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충실하신 결과로 선포됩니다.

그러나 이 장의 마지막 장면을 성급하게 화해의 축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28절에서 백성은 여전히 자신들의 죄와 심판 앞에 서 있습니다. 아직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는지는 서술되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앞서 하나의 장면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이 없어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황무지입니다. 길도 없고 마실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땅입니다.

백성이 먼저 길을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손으로 강을 판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길을 내시고, 하나님이 물을 흐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직 그 길을 보지 못하는 백성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