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53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우리가 틀리게 보았던 사람
이사야 53장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한 사람이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다고 고백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그를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아름다움도 위엄도 없었고, 병과 고통에 익숙했으며, 사람들에게 멸시받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가 하나님에게 맞아 고난을 겪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말이 달라집니다.
이사야 53장은 이 깨달음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따라가는 노래입니다. 한 사람의 고난을 묘사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몰랐던 사람들의 눈이 열리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이 노래는 앞 장의 마지막 세 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 52:13-15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종이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종의 모습은 사람 같지 않을 만큼 망가져 있었고, 왕들은 그를 통해 전에 듣지 못했던 일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53장은 바로 그 깨달음의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실패와 수치로 판단했던 그 삶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셨습니까?
우리는 왜 그를 알아보지 못했는가
믿을 수 없는 소식
우리가 전한 소식을 누가 믿었는가? 여호와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드러났는가?이사야 53:1 · 본디새김
앞 장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모든 민족 앞에서 자신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셨고, 땅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52:10). 그런데 이제 그 팔을 누가 알아보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사람들이 반드시 그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던 구원의 모습과 실제로 나타난 종의 모습이 너무 달랐던 것입니다.
52:15에서는 많은 민족과 왕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으므로, 53:1부터는 그 민족과 왕들이 자신들의 깨달음을 고백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종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각각 문맥상 근거가 있습니다. 52:15와 직접 연결하면 민족들의 고백이 자연스럽고, 53:8의 ‘내 백성’과 종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사명을 고려하면 이스라엘의 고백이라는 이해도 가능합니다. 본문은 53:1에서 화자의 신분을 새롭게 밝혀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을 읽을 때에는 화자가 누구인지를 미리 확정하기보다, 그들이 공통으로 고백하는 내용에 먼저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은 종의 고난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이제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 판단했는지 깨닫고 있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자라난 어린 싹
그는 그의 앞에서 어린 싹처럼, 메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형체도 위엄도 없었다. 우리가 그를 보았지만 마음이 끌릴 만한 모습도 없었다.이사야 53:2 · 본디새김
어린 싹은 아직 연약합니다. 메마른 땅은 식물이 자라기에 불리한 곳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싹이 자라납니다.
‘그의 앞에서’라는 표현은 문맥상 여호와야훼 앞에서 자라났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표현은 뒤의 ‘우리가 그를 보았지만’이라는 고백과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종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자라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 11:1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가지가 자란다고 말합니다. 두 구절은 연약한 식물의 이미지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나 53:2의 어린 싹이 11:1의 다윗 왕조에서 나온 가지와 정확히 동일한 인물이라고 이 비유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53장의 강조점은 종이 어떤 혈통에서 나왔는가보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있습니다. ‘위엄’이라는 표현까지 함께 사용된 것을 보면,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를 만한 영광이나 권위를 그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위엄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를 자신의 종으로 부르고 계셨습니다.
귀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
3절에서 사람들의 판단은 더욱 냉혹해집니다.
그는 멸시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고통의 사람이었고 병에 익숙했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하는 이처럼 그는 멸시받았고, 우리는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이사야 53:3 · 본디새김
여기서 ‘고통의 사람’이라는 말은 그가 지속적인 고난을 경험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병에 익숙했다’는 표현 역시 실제적인 질병과 고통의 어휘를 사용합니다. 이를 처음부터 모든 육체적 의미가 사라진 추상적인 영적 고통으로 바꾸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관심을 두는 것은 고통의 의학적 원인이 아니라, 그 고통 때문에 종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취급받았는가입니다. 특히 얼굴을 가리고 피한다는 장면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얼마나 철저히 외면받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단지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존중할 만한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4절부터 그 판단이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얼굴을 가리는 주체가 종 자신인지, 그를 피하는 사람들인지는 원문의 표현상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 전체에서 그가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외면당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가 당한 고난을 우리는 잘못 이해했다
결정적인 한마디, ‘실로’
4절의 첫 단어는 이 노래의 방향을 바꿉니다.
실로 그가 우리의 병을 짊어졌고, 우리의 고통을 그가 떠맡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타격을 받고, 하나님에게 맞아 괴로움을 겪는다고 여겼다.이사야 53:4 · 본디새김
‘그가’와 ‘우리가’라는 두 주어가 맞부딪칩니다.
그는 짊어졌고, 우리는 잘못 판단했습니다. 그는 고통받았고, 우리는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실로’라는 말은 앞에서 사람들이 내렸던 판단을 바로잡습니다. 그들은 종이 병과 고통에 익숙한 모습을 보고, 그 고난이 그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짊어진 고통이 자신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
종의 고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기 이해가 바뀌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에게 맞았다는 판단은 왜 틀렸는가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사람을 심판하신다면, 극심한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욥기의 친구들도 욥의 고난을 설명하면서 비슷한 논리를 사용했습니다. 욥기 4:7-8에서 엘리바스는 죄 없는 사람이 멸망한 적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악을 경작하는 사람이 그것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기의 이야기는 고난의 크기만으로 그 사람의 죄를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53장에서도 비슷한 오류가 드러납니다.
10절은 여호와야훼가 종을 짓부수기로 뜻하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종의 고난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잘못은 하나님이 그 사건과 관계가 있으시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고난의 의미를 잘못 판단했습니다.
종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본문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있었다고 밝힙니다. 그들은 종의 고난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자신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위한 평안, 우리의 죄악
5절에서는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반역 때문에 찔렸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짓부서졌다. 우리의 평안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아 생긴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야 53:5 · 본디새김
그는 찔렸지만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우리의 반역입니다. 그는 짓부서졌지만 그 고난은 우리의 죄악과 연결됩니다. 징계는 그에게 내려졌지만, 평안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상처는 그가 입었지만, 나은 것은 우리입니다.
여기서 ‘반역’은 단순한 실수보다 강한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반역하고 잘못했으며, 그 죄악에 따른 책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여기서 징계는 고통을 통해 바로잡거나 질서를 회복하는 행동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죄의 책임이 이전되는 과정을 하나의 완성된 법적 공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종이 죄악을 짊어졌고, 그의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평안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나았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4절에서는 병과 고통이 실제적인 의미를 지닌 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 치유는 죄악과 평안의 회복이라는 문맥 속에 놓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모든 개인의 육체적 질병이 즉시 낫는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본문은 병과 상처와 치유라는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사용하여, 죄악으로 망가진 사람들의 삶이 종의 고난을 통해 회복되는 일을 보여 줍니다.
모두가 길을 잃었고, 한 사람이 짊어졌다
6절에서는 고백의 범위가 더욱 넓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었고, 저마다 자기 길로 돌아섰다. 여호와야훼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닥치게 했다.이사야 53:6 · 본디새김
‘우리는 모두’와 ‘우리 모두의 죄악’이라는 표현이 절의 앞뒤를 감싸고, 그 사이에는 ‘저마다 자기 길로 돌아섰다’는 말이 놓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걸어간 방향은 모두 본래 있어야 할 길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죄를 단순히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의 합계로 보지 않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방향을 잃고 자신의 길을 따르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1:3에서도 이스라엘은 자신의 주인을 알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소와 나귀도 자기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은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53장에서는 그 관계의 붕괴가 길 잃은 양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예상과 다르게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자기 길로 돌아섰으므로 각자 자기 죄악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그 모든 죄악이 종에게 닥치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53장의 구원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반성했기 때문에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의 고난이 먼저 있고,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고백합니다.
사람들이 종을 귀하게 여기게 되어서 그가 그들을 위해 고난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고난을 짊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보게 됩니다.
그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가
도살당하러 가는 양
7절에서는 다시 종의 모습이 중심에 놓입니다.
그는 억눌리고 괴로움을 겪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양처럼 도살당하러 끌려갔고, 털 깎는 이들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야 53:7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양은 길을 잃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유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양은 종을 가리킵니다. 앞의 양들은 스스로 길을 벗어났지만, 뒤의 양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양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도살당하러 끌려가는 양이고, 다른 하나는 털 깎는 사람들 앞에서 잠잠한 암양입니다. 두 이미지 모두 저항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존재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첫 번째는 죽음으로 향하는 모습을, 두 번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말없이 견디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앞 장에서 왕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일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종이 고난받는 동안 입을 열지 않습니다. 왕들의 침묵은 놀라움의 결과입니다. 종의 침묵은 억압과 고난 가운데서 나타납니다.
본문은 그 침묵의 구체적인 심리적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50:5-6에서 종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거역하지 않았고, 때리는 사람들에게 등을 내주었습니다. 그와 연결하면 53장의 침묵 역시 사명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모든 억압받는 사람이 폭력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윤리적 명령이 아닙니다. 본문은 특정한 종의 고난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그의 침묵을 근거로 피해자에게 저항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벗어납니다.
종의 침묵은 불의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재판은 있었지만 정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억압과 재판으로 그는 끌려갔다. 그의 세대를 누가 헤아리겠는가? 그가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내 백성의 반역 때문에 그들에게 타격이 닥쳤다.이사야 53:8 · 본디새김
재판은 본래 억울한 사람을 보호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절차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억압과 재판이 함께 등장합니다. 본문을 따라 읽으면 종은 공정한 판결로 보호받는 대신, 억압적인 사법 절차와 연결된 상황에서 끌려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 이들의 땅’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그곳에서 잘려 나갔다는 것은 종의 생명이 끊어졌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그의 삶은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죽어서도 악인처럼 취급받은 사람
9절은 종의 죽음 뒤에까지 시선을 옮깁니다.
그의 무덤이 악인들 곁에 정해졌고, 그는 죽어서 부자 곁에 있게 되었다. 그는 폭력을 행하지 않았고 그의 입에 속임수도 없었는데도 그랬다.이사야 53:9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매장은 단순히 시신을 처리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대우를 받게 할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악인들과 함께 매장된다는 것은 종이 죽어서도 죄인이나 불명예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종의 입은 자신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억압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버리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인처럼 취급받았지만, 본문은 그에게 폭력이나 속임수가 없었다고 밝힙니다.
이 사실은 다음 단락에서 종의 고난이 왜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사건으로 이해되는지를 뒷받침합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은 원문의 전치사와 문장 구조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어, 구체적인 법정 절차를 자세히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세대를 누가 헤아리겠는가?’ 여기서 ‘세대’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따라 여러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의 처지를 깊이 생각했느냐는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종의 억울한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는 그의 생애와 후손, 그가 이어 갈 미래를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죽음으로 인해 그의 삶이 끊어진 비극을 강조합니다. ‘내 백성의 반역 때문에 그들에게 타격이 닥쳤다.’ 히브리어에서 ‘그들에게’에 해당하는 라모(נֶגַע)는 일반적으로 복수의 대상을 가리키지만, 일부 문맥에서는 단수와 관련하여 이해되는 경우도 논의됩니다. 따라서 이 말이 백성에게 닥친 타격을 가리키는지, 종에게 가해진 타격을 나타내는지에 대해 읽기가 갈립니다. 또한 ‘내 백성’의 ‘내’가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말하던 화자가 자신이 속한 백성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여호와야훼의 발언이 끼어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5-6절과 11-12절을 함께 읽으면, 적어도 본문 전체가 종의 고난과 다른 사람들의 죄악 사이에 깊은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9절에서 악인들과 부자가 같은 의미로 병렬된 것인지, 아니면 악인들 곁에 묻힐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부자와 관련된 매장을 하게 되었다는 대조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악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죽어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모타브(מָוֶת)는 문자적으로 복수형을 포함한 독특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형태가 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신약은 이 종의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요한복음 12:38은 이사야 53:1을 직접 인용하고, 사도행전 8:32-35는 이사야 53:7-8의 말씀을 인용한 뒤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 설명합니다. 베드로전서 2:22-25 역시 종의 무죄함과 고난, 죄를 짊어지는 사명을 예수의 삶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신약의 읽기는 이사야 53장과 예수의 고난 사이에 직접적인 신학적 관계를 설정합니다. 다만 구약 본문의 역사적·문학적 의미와 신약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은 구별해서 살펴야 합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고난을 통해 무엇을 이루시는가
하나님이 그를 짓부수기로 뜻하셨다는 말
10절에서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를 짓부수기로 뜻했고, 그를 병들게 했다. 그가 자기 목숨을 배상 제물로 바친다면, 그는 후손을 보고 오래 살 것이며, 여호와야훼가 기뻐하는 일이 그의 손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이사야 53:10 · 본디새김
어떻게 하나님이 의로운 종을 짓부수기로 뜻하실 수 있습니까?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고난을 일으키는 인간의 행동과 그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7-9절에서 종은 억압당하고, 부당한 재판과 연결된 상황에서 끌려가며, 악인처럼 취급받았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0절의 끝은 여호와야훼가 기뻐하시는 일이 종의 손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종이 고통받는 상태 자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이루어질 어떤 결과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이 종을 짓부수기로 뜻하셨다는 말씀을, 하나님이 무고한 사람의 고통 자체를 즐기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종의 고난을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그 고난이 하나님의 구원 목적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전히 긴장이 남습니다.
의로운 종의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은 그 긴장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에 나오는 제물의 언어를 통해 그 고난의 의미를 더욱 깊게 설명합니다.
왜 배상 제물인가
레위기 5:14-6:7에서는 거룩한 것에 대한 잘못이나 이웃의 재산과 관련된 죄를 다루면서 배상과 제사를 요구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이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죄가 단순히 마음속의 후회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잘못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을 다루는 일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인 제사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책임을 지고 제물을 바칩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에서는 종 자신에게 폭력과 속임수가 없다고 말한 직후, 그 종의 목숨이 배상 제물과 연결됩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죄악과 관계된 제물의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 규정을 단순히 반복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제사의 언어를 사용하여 종의 고난이 다른 사람들의 죄책을 다루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죽음에 이른 종이 후손을 본다는 역설
앞에서는 종이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갔고, 죽어서 무덤에 놓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후손을 보고 오래 살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이 선포된 사람에게 미래가 약속되는 것입니다.
종의 생명은 끊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그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미래가 주어지고, 그를 통해 여호와야훼가 기뻐하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종은 고난과 죽음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선언됩니다.
고통 끝에 무엇을 보는가
11절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의 목소리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 끝에 보고 만족할 것이다. 의로운 내 종은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이들을 의롭다고 판정할 것이며, 그들의 죄악을 그가 떠맡을 것이다.」이사야 53:11 · 본디새김
사람들의 판단은 그를 악인처럼 취급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의로움을 선언하십니다. 종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멸시받았는지가 그의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를 보내신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판단하시는지가 결정적입니다.
많은 이들을 의롭다고 판정하는 종
11절의 다음 말씀은 종이 이루는 결과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앞에서 종은 폭력과 속임수를 행하지 않았는데도 부당하게 취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의로운 종이 다른 사람들을 의롭다고 판정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여기에는 법정의 이미지가 뒤집히는 반전이 있습니다.
본문은 사람들을 의롭다고 판정하는 일과 죄악을 짊어지는 일을 나란히 놓습니다. 종이 많은 이들의 죄악을 떠맡는 행동이 그들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결과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가 자기 목숨을 배상 제물로 바친다면’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동사 타심(שׂוּם)은 형태상 여성 단수 3인칭 또는 남성 단수 2인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종의 목숨이 제물로 바쳐지는 일을 종 자신의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고, 누군가가 그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종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방향으로 옮겼습니다. 이 읽기는 12절에서 종이 자기 목숨을 죽음에 쏟아부었다는 표현과 어울립니다. 그러나 10절 자체의 문법적 어려움은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종이 정확히 어떤 의식 절차를 수행했는지, 누가 제물을 바치는 주체였는지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이사야 53:10의 후손을 반드시 종의 육체적 자녀라고 읽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종의 사명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공동체나 그가 남기게 될 지속적인 결실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종이 죽음에 이른 뒤 어떻게 후손을 보고 오래 살게 되는지도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죽음 이후의 생명과 회복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공동체를 대표하는 종의 지속적인 생명과 사명의 성취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 자체가 부활의 과정이나 시점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11절에서 본디새김은 ‘보고 만족할 것이다’라고 옮겼습니다. 전해지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그가 무엇을 보는지 나타내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쿰란에서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 가운데에는 ‘빛’이라는 낱말이 포함된 읽기가 전해집니다. 칠십인역에도 종에게 빛을 보여 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고대 문헌들의 읽기를 따르면 종이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라는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반면 본디새김처럼 목적어를 따로 두지 않으면, 그가 자신의 고난 끝에 이루어진 결과를 보고 만족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고난과 죽음을 넘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바라보게 하지만, 그 과정의 세부 사항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자기의 지식으로’라는 말은 종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반면 사람들이 종을 알고 인정하게 되는 것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본문의 앞뒤를 고려하면 종의 지식과 순종이 그의 의로운 사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해가 자연스럽습니다. 이사야 50:4-5에서 종은 하나님에게 배운 말씀을 듣고 거역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삶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53:11은 그 지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표현에 너무 많은 내용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정복자의 전리품과 전혀 다른 승리
죽음에 자신을 내어준 사람에게 전리품이 주어진다
이 장의 마지막은 의외의 이미지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많은 이들 가운데서 몫을 나누어 주겠고, 그는 강한 이들과 전리품을 나눌 것이다. 그가 자기 목숨을 죽음에 쏟아붓고 반역자들과 함께 헤아려졌으며, 많은 이들의 죄를 짊어졌고, 반역자들을 위해 간청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53:12 · 본디새김
고대 세계에서 전쟁의 승자는 패배한 나라의 재물과 물품을 전리품으로 가져가거나 분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서는 앞에서 여러 제국의 힘을 묘사했습니다. 강대국들은 군사력으로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사로잡아 가며,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높임받는 종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승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전쟁의 결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결과와 연결됩니다.
종이 높임받는 네 가지 이유
이 구절은 종이 왜 몫을 받는지를 네 가지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종은 자기 목숨을 죽음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는 반역자들과 함께 헤아려졌습니다.
많은 이들의 죄를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반역자들을 위해 간청합니다.
앞의 세 가지는 종이 겪은 고난과 죽음을 되돌아봅니다. 마지막 하나는 그의 간청을 말합니다.
그는 죄를 저지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었지만, 본문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짊어졌다고 밝힙니다.
사람들은 종을 반역자의 자리에 놓았지만, 그는 반역자들의 죄를 짊어지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2:11-14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뒤에도 여호와야훼께 백성을 위해 간청합니다. 민수기 14:13-20에서도 모세는 반역한 백성을 위해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의 종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의 죄를 짊어졌고, 자신도 반역자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으며, 생명을 죽음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위해 간청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종은 누구인가
이사야 53장의 종을 이해할 때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는 한 개인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입니까?
이사야 53장을 이사야서 전체 안에서 읽으면, 종은 이스라엘의 사명과 연결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그들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를 이스라엘 공동체 자체로 읽든, 그 공동체를 대표하는 의로운 인물로 읽든, 이러한 특징은 설명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종의 역사적 신원을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본문만으로 어느 한 해석을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에서는 ‘우리 모두’가 길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11-12절에서는 종이 ‘많은 이들’을 의롭다고 판정하고, ‘많은 이들’의 죄를 짊어졌다고 합니다. 히브리어의 ‘많은’은 언제나 ‘모두’와 정반대되는 제한적인 수량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무리나 다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6절의 ‘모두’와 11-12절의 ‘많은’ 사이에서 정확히 몇 명이 구원받는지를 계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종의 신원에 관해서는 이사야 41:8-9와 44:1-2에서는 이스라엘과 야곱이 명시적으로 여호와야훼의 종이라고 불립니다. 이사야 49:3에서는 종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따라서 종을 이스라엘 공동체와 연결하여 읽을 근거는 분명합니다. 이 읽기에 따르면 종의 고난은 민족들 가운데서 멸시받고 고난당한 이스라엘의 경험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52:15의 민족들과 왕들이 53장의 ‘우리’라고 고백하는 목소리라는 해석도 이 읽기와 잘 어울립니다. 반면 이사야 49:5-6에서 종은 야곱을 돌아오게 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 경우 종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면서도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또한 이사야 53장은 종의 폭력과 속임수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짊어졌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스라엘과 구별되는 의로운 개인이나,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대표적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근거가 됩니다. 그렇다고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공동체적 해석을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시에서는 도시나 민족이 한 사람처럼 묘사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2장에서도 시온은 옷을 입고 사슬을 벗는 한 여인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장이 우리의 판단에 던지는 질문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사람들은 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자신의 의로운 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받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사명을 감당한다고 밝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자신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라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의 고난이 다른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여호와야훼의 종이 겪는 고난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장을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는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마지막에서 종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멸시받기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몫이 주어지고, 강한 이들과 전리품을 나누는 자리가 약속됩니다. 그런데 그 높은 자리에서도 종의 마지막 행동으로 언급되는 것은 반역자들을 위한 간청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반역자들과 함께 헤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지 않은 죄악 때문에 고난받았고, 생명을 죽음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역자들을 향해 복수를 선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간청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의 자리에 놓았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다른 죄인들을 위해 간청하는 종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