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56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열린 집과 잠든 파수꾼들

하나님이 자신의 집에 새로운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그 초대받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신이 그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영원히 구별될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내시는 자녀를 남길 수 없는 자신을 마른 나무에 비유합니다. 한 사람은 출신 때문에, 다른 사람은 자신의 몸과 후손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이들에게 자신의 집과 성벽 안에 영원한 이름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들을 거룩한 산으로 데려가시고, 그들이 드리는 제물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몰려오고, 파수꾼들은 눈이 멀어 있습니다. 경고해야 할 개들은 짖지 못하며, 양 떼를 돌보아야 할 목자들은 자기 이익만 챙깁니다.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환대의 약속 뒤에 이토록 날카로운 비판이 이어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백성에게 속할 수 있는 길을 넓게 여시지만, 그 백성을 돌보아야 할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책임까지 없애지는 않으십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656장 본문 읽기 →

구원이 가까이 왔으므로 정의를 행하라

이사야 56:1–2 본문 →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여라. 내 구원이 올 때가 가까우며, 내 의가 드러날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이사야 56:1 · 본디새김

본문의 논리는 인간의 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져오실 구원이 인간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행해야 할 의이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드러내실 의입니다. 두 표현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사야서에서 그분이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며, 백성을 구원하시고 올바른 질서를 세우시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반면 사람에게 요구되는 의는 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행동입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이 모두 이루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구원이 가까이 왔으므로 이미 그 구원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56장의 첫 문장은 앞으로 펼쳐질 환대와 지도자 비판의 기준이 됩니다.

왜 안식일이 특별히 강조되는가

「이것을 행하는 사람, 이것을 굳게 붙드는 인간, 곧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고 지키며, 어떤 악도 행하지 않도록 제 손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이사야 56:2 · 본디새김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은 단순히 일주일 가운데 하루 쉬는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31:13-17에서 안식일은 여호와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설명됩니다. 또한 출애굽기 20:8-11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뒤 쉬셨다는 사실과 연결되고, 신명기 5:12-15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으로 살다가 해방되었다는 기억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자신들을 해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삶의 시간 안에서 인정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특히 신명기 5:14에서는 남종과 여종, 집 안에 머무는 이방인까지 쉬도록 명령합니다. 안식일은 자신만 쉬고 다른 사람에게 끝없이 노동을 시키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쉼을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등장할 이방인들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라는 설명 대신, 이스라엘의 언약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징이, 이제 여호와야훼에게 결합한 이방인의 삶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2절은 ‘어떤 악도 행하지 않도록 제 손을 지키는 사람’을 함께 언급합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실천이 나란히 놓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안식일 준수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삶입니다. 둘 중 하나를 다른 하나의 대체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손을 지킨다’는 표현은 구체적인 행동을 강조합니다. 마음속에서만 의로운 생각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손이 어떤 일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2절의 ‘사람’과 ‘인간’도 특별합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특정 지파를 먼저 언급하지 않고,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태어날 때부터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가보다, 누가 자신의 언약을 붙들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가를 전면에 놓으십니다.

마른 나무라 말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이름을 주시다

이사야 56:3–5 본문 →

서로 다른 이유로 배제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여호와야훼와 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야훼가 반드시 나를 자기 백성에게서 갈라놓을 것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내시도 「보아라, 나는 마른 나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이사야 56:3 · 본디새김

한 사람은 공동체 안의 자리를 걱정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미래가 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그를 ‘여호와야훼와 결합한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와의 관계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갈라질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민족적 정체성과 언약의 경계가 서로 깊이 연결된 역사였습니다. 특히 신명기 23:1-8에는 특정한 신체적 상태나 출신과 관련하여 여호와야훼의 회중에 들어오는 일을 제한하는 규정들이 있습니다. 이 규정들은 모든 외국인을 일률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지만, 소속에 대한 실제적인 경계가 존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와 나란히 등장하는 내시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후손을 통해 가문의 이름과 기억을 이어 가는 일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자녀를 남기지 못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개인적인 아쉬움만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끊어지고 미래에 기억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도 자신의 처지를 마지막 결론으로 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보다 나은 이름이라는 약속

4-5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내시에게 주실 것을 직접 밝히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 안식일들을 지키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선택하며, 내 언약을 굳게 붙드는 내시들에게는,」 「내가 내 집과 내 성벽 안에서 그들에게 아들들과 딸들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겠다. 내가 그에게 영원한 이름, 끊어지지 않을 이름을 주겠다.」이사야 56:4–5 · 본디새김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반드시 자녀를 낳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아들들과 딸들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공동체 바깥에 따로 세워 놓고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집과 성벽 안에 이름을 주십니다. 그가 배제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바로 그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 존중받는 자리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구약에서 복과 미래의 지속을 나타내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보다 나은 이름을 주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람의 가치와 미래가 반드시 생물학적 후손의 유무에 달려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후손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계보가 끊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끊어지지 않을 이름을 약속하십니다. 자신의 백성 가운데 그 사람을 기억하고 받아들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누가 존중받을 만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기준 자체를 새롭게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사람에게 없었던 것을 먼저 보지 않으십니다. 그가 자신의 언약을 붙들고,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원한 이름을 약속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왕궁에서는 내시가 왕실과 행정 조직에서 일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표현이 모든 문맥에서 반드시 신체적으로 거세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사야 56장에서는 자신을 ‘마른 나무’라고 부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비유는 자녀를 낳아 후손을 이어 갈 수 없는 상태와 관련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기념물과 이름’은 히브리어로 야드 바셈입니다. 야드는 본래 손을 뜻하지만, 문맥에 따라 기념물이나 기념하는 장소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셈은 이름을 뜻합니다. 두 낱말이 함께 사용되어 한 사람의 존재가 기억되고 존중받는 자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는 이방인들

이사야 56:6–8 본문 →

출신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했는가

내시에게 이름을 약속하신 여호와야훼는 이제 이방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여호와야훼를 섬기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려고 여호와야훼와 결합한 이방인들, 곧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고 지키며 내 언약을 굳게 붙드는 모든 이들은,」이사야 56:6 · 본디새김

하나님은 출신의 경계를 넘어서 사람들을 받아들이시지만, 자신과의 관계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를 사랑하고 그분의 언약을 붙드는 일이 공동체에 속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됩니다.

구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으로 그 존재의 정체성과 명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존중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출신을 먼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누구를 섬기고 사랑하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이방인의 제물도 받아들여진다

「내가 그들을 내 거룩한 산으로 데려가고, 내 기도의 집에서 기뻐하게 하겠다.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제물은 내 제단 위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내 집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56:7 · 본디새김

이방인이 스스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자격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데려가시고 기뻐하게 하시며, 그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에 실제로 참여하게 된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에게 간구하며, 그분과 관계를 맺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는 말은, 여호와야훼를 찾고 섬기는 민족들이 그분에게 나아올 수 있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어떤 사람은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여진 채 여전히 낯선 사람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6장이 그리는 하나님의 집에서는 이방인들이 실제로 예배하고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여시는 집은 문턱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겨우 출입을 허용하는 곳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있는 곳입니다.

더 모아들이겠다는 약속의 여백

8절은 이 약속을 한 번 더 넓힙니다.

쫓겨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으는 주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이스라엘에게 이미 모인 이들에 더하여, 내가 그에게 더 모아들이겠다.」이사야 56:8 · 본디새김

여기서 포로와 흩어진 백성의 귀환이라는 이사야서의 큰 주제가 다시 나타납니다. 문법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이미 모인 사람들 외에 또 다른 사람들을 더 모은다는 뜻입니다. 그 대상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인지, 앞에서 약속받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사람들인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6-7절과 직접 연결하면 이방인들이 더해지는 모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이스라엘이 계속 돌아오는 의미 역시 배제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정확한 명단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회복된 공동체는 이미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숫자와 범위로 최종적으로 닫혀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갈라질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모으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전혀 다른 초대가 들립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은 열왕기상 8:41-43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드렸던 기도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솔로몬은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듣고 먼 나라에서 와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 목적은 땅의 모든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6장은 그 방향을 더욱 분명한 회복의 약속으로 펼쳐 보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이사야 56:7을 인용하십니다. 특히 마가복음 11:17에는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는 표현이 직접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예수는 이사야의 말씀과 예레미야 7:11의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하여 성전의 실제 모습을 문제 삼으십니다.

짐승들에게 먹으러 오라고 하는 이유

이사야 56:9 본문 →

들의 모든 짐승들아, 먹으러 오너라. 숲의 모든 짐승들아.이사야 56:9 · 본디새김

9절 자체에는 먹이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0-11절에서는 파수꾼과 목자가 등장합니다. 파수꾼은 위험을 살펴야 하고, 목자는 양 떼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9절의 짐승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공동체를 해칠 수 있는 외부의 위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56장에서는 양 떼가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목자라는 표현이 그 이미지를 불러옵니다.

마치 위험을 막아야 할 사람들이 이미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제 짐승들이 마음껏 먹으러 와도 된다는 조롱처럼 들립니다. 위협 앞에 무방비로 놓인 공동체를 묘사하는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9절의 들짐승들이 곧 6-8절에서 받아들여진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와 결합하여 그분을 섬기는 이방인은 하나님의 집에 초대받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해칠 수 있는 위협은 지도자들의 무책임 때문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환대와 무책임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장은 위험한 짐승들을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짐승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방치한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9절의 화자를 새롭게 밝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외침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히 누구의 발언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34:5-8의 장면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 떼를 돌보지 않자 양들이 흩어지고, 들짐승들의 먹이가 됩니다. 목자들은 양을 먹이는 대신 자신들만 먹이고 있었습니다.

눈먼 파수꾼과 배부른 줄 모르는 목자들

이사야 56:10–12 본문 →

위험을 살펴야 할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

그의 파수꾼들은 눈이 멀어 있고, 모두 알지 못한다. 모두 말 못 하는 개들이어서 짖을 수 없다. 꿈꾸며 누워서 졸기를 좋아한다.이사야 56:10 · 본디새김

파수꾼은 본래 위험을 남보다 먼저 발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높은 곳에서 먼 곳을 살피고, 적이 다가오거나 위험이 나타나면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습니다. 바로 뒤에 ‘모두 알지 못한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들의 눈멂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무엇이 위험한지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개는 위협을 발견했을 때 짖어서 알릴 수 있습니다. 특히 무리를 지키는 개에게 짖는 일은 중요한 기능입니다. 앞에서는 눈이 멀어 위험을 발견하지 못했고, 이제는 입을 열어 경고하지도 못합니다.

위험을 볼 수 없고, 위험을 알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꿈꾸며 누워서 졸기를 좋아합니다. 바로 앞에서 짐승들이 먹으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라는 설명 없이, 파수꾼의 무지는 그 자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들은 먹기만 하고, 목자들은 분별하지 못한다

11절에서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더욱 신랄하게 묘사합니다.

이 개들은 게걸스러워 배부른 줄 모른다. 그들은 목자들이지만 분별할 줄 모른다. 모두 제 길로 돌아섰고, 하나같이 각자 제 부당한 이익을 향했다.이사야 56:11 · 본디새김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일에는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개들은 경고하는 데는 무능하고 먹는 데는 탐욕스럽습니다.

파수꾼과 개에 이어 목자가 등장합니다. 세 이미지는 서로 다른 역할을 가리키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돌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파수꾼은 도시를 지킵니다.

개는 위험을 알립니다.

목자는 양 떼를 돌봅니다.

그런데 이사야 56장의 지도자들은 이 세 역할을 모두 실패합니다. 그들은 보지 못하고, 경고하지 못하며,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이익을 얻는 일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돌보는 책임보다 자기 몫을 챙기는 일을 앞세웁니다.

모두 자기 길로 돌아섰다는 말

이사야 53:6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자기 길로 돌아섰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길을 잃은 사람들이 종의 고난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56장에서는 목자들이 자기 길로 돌아섰습니다.

공동체 안에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인도하고 돌보아야 할 지도자마저 자기 욕망을 따라가면, 공동체 전체가 더욱 깊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특히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한을 사용한다면,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 권한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내일도 더 대단할 것이라는 위험한 확신

마지막 절에서는 지도자들의 목소리가 직접 들립니다.

「오너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겠다. 독한 술을 실컷 마시자. 내일도 이날 같을 것이다. 훨씬 더 대단한 날이 될 것이다.」이사야 56:12 · 본디새김

문제는 술을 즐기는 행동이 지도자의 무책임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경계해야 할 때 잠들어 있고, 돌보아야 할 때 자기 배를 채우며, 위험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내일은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소망과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은 다릅니다.

1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구원이 가까이 왔으므로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2절의 지도자들은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바로잡습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늘의 잘못을 그대로 두고 내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깊이

‘꿈꾸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짐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표현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누워서 졸기를 좋아한다는 뒤의 표현과 어울려 꿈꾸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지만, 낱말의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은 예언자적 경고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고, 목자는 정치적·사회적 지도자를 가리키는 익숙한 비유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당시의 예언자, 제사장, 통치자 등 백성을 이끌 책임을 가진 지도층에 대한 비판으로 폭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도자가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거나, 특정 직분 하나만을 지목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 장에서 하나님은 목마른 사람들에게 돈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초대하셨습니다(이사야 55:1). 따라서 이사야서는 포도주를 마시는 일 자체를 언제나 악한 행동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55장과 56장을 이어 읽으면 반복되는 ‘오너라’라는 초대가 인상적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부르십니다. 위협적인 짐승들은 먹이를 찾아옵니다. 부패한 지도자들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부릅니다. 이 반복은 각 구절이 반드시 하나의 정교한 문학적 장치로 설계되었다는 뜻까지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접한 장들의 독자가 이 초대들을 서로 대조해 읽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누구에게 열리고, 누가 그 집을 무너뜨리는가

이사야 56:1–12 본문 →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 주는 일과 그 집이 안전하고 정의로운 곳이 되도록 지키는 일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모으시는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를 인도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람들을 대하시는 방식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대조를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모두 악하고 이방인들은 모두 선하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모든 이방인을 무조건 받아들인다고 말하지 않으며, 모든 지도자가 부패했다고 선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여호와야훼와 결합하여 그분의 언약을 붙드는 이방인들과,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고 이익을 좇는 지도자들을 대비합니다.

이사야 56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파수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높은 곳에 서서 멀리서 다가오는 위험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멀어 있습니다. 경고해야 할 개들은 짖지 못합니다. 그 사이 지도자들은 서로 포도주를 가져오라며,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잠든 동안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장의 앞부분에서는 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을 향해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배제될 것이라 두려워하던 이방인, 자신을 마른 나무라고 생각하던 내시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누구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무엇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지 아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그러나 파수꾼들은 그 두 가지를 분별해야 할 자리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집에 들어올 사람들을 모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집을 지켜야 할 사람들은 아직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