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57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높은 곳에서 낮은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57장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의인이 죽었는데 아무도 그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신의를 지키며 살던 사람들이 사라지는데도 누구 하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정반대의 선언이 들립니다.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의인의 죽음과 평안을 함께 말하고, 마지막에는 악인의 삶과 평안의 부재를 함께 말합니다.

이 장이 묻는 것은 누가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누가 참된 평안을 누리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 신을 찾습니다. 더 멀리 사절을 보내고, 더 많은 제물을 바치며, 자신의 힘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면서도 짓눌리고 낮아진 사람과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올라간 곳과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곳이 다릅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757장 본문 읽기 →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 죽음

이사야 57:1–2 본문 →

57장 첫 문장은 죽음 자체보다 그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합니다.

의인이 죽었으나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신의를 지키는 이들이 거두어져 가는데도 의인이 재앙을 피해 거두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이가 없었다.이사야 57:1 · 본디새김

두 표현은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성실하게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죽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구체적인 사건을 밝히지 않습니다. 강조점은 죽음의 원인보다 그들의 부재를 대하는 공동체의 무관심에 있습니다.

이사야 56:10–12에서는 공동체를 지켜야 할 파수꾼들이 앞을 보지 못하고, 목자들이 저마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위험을 알아차려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실한 사람들이 사라지는데도 아무도 그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말은 단순히 슬퍼하지 않았다는 뜻보다 깊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공동체의 상태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독자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제 길을 바르게 걷는 사람은 평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잠자리에서 쉴 것이다.이사야 57:2 · 본디새김

‘재앙을 피해 거두어졌다’는 표현은 그들의 죽음이 앞으로 닥칠 악이나 재앙에서 벗어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의인의 죽음이 재앙을 피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조치라는 일반 법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이 특정한 상황에서 의인의 죽음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앞에서 ‘사라지는 일’처럼 보였지만, 여기서는 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죽음을 잠이나 쉼으로 표현하는 것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지만, 이 구절만으로 죽음 이후의 상태를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7–8절에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높은 산에 자신의 잠자리를 마련하고 그것을 넓힙니다. 하나는 바른 길을 걸어온 사람의 쉼을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대상을 향한 열망을 나타냅니다.

이사야는 사람이 어디에 자리를 마련했는가보다, 어떤 길을 걸어 그 자리에 이르렀는가를 묻습니다.

높은 산에 마련한 잠자리

이사야 57:3–10 본문 →

3절에서 말투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너희는 이리 가까이 오너라, 점을 치는 여자의 아들들아, 간음하는 남자와 음행한 여자의 씨들아.」이사야 57: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의인이 사라진 사회를 묘사했다면, 이제는 그 사회에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직접 불러 세웁니다. ‘점을 치는 여자의 아들들’, ‘음행한 여자의 씨들’이라는 표현을 반드시 실제 부모의 행위나 혈통에 관한 진술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서에서 간음과 음행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르는 행위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여기서도 이어지는 내용은 우상숭배와 제의 행위를 다룹니다. 따라서 이 거친 호칭은 그들의 신앙적 배신을 드러내는 고발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너희는 누구를 조롱하느냐? 누구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길게 내미느냐? 너희는 반역의 자식들, 거짓의 씨들이 아니냐?」이사야 57:4 · 본디새김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내미는 모습은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몸짓입니다. 본문은 조롱의 구체적인 대상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다른 대상을 조롱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너희는 잎이 무성한 모든 나무 아래에서 신들에게 욕정을 불태우며, 골짜기에서, 바위틈 아래에서 아이들을 잡아 죽이는 자들이다.」이사야 57:5 · 본디새김

이사야 57:5는 이러한 행위가 단순한 종교적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죄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제의 속에서 아이들을 죽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추구하는 신앙은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무엇을 자신의 몫으로 삼았는가

「골짜기의 매끈한 돌들이 네 몫이다. 그것들, 바로 그것들이 네게 돌아간 몫이다. 너는 그것들에게도 술 제물을 쏟아붓고 예물을 바쳤다. 이런 일들을 두고 내가 마음을 누그러뜨리겠느냐?」이사야 57:6 · 본디새김

이스라엘에게 ‘몫’과 ‘기업’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시편 16:5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몫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57장의 사람들은 골짜기의 돌들을 자기 몫으로 삼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돌들이 제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술 제물과 예물을 바쳤다는 진술은 그것들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받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그 선택을 그대로 돌려주시는 듯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택한 것이 네 몫입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대상이 결국 그들이 얻게 될 전부라는 것입니다.

「너는 높이 솟은 산 위에 네 잠자리를 놓았고, 희생제물을 잡아 바치려고 그곳에도 올라갔다.」이사야 57:7 · 본디새김

높은 산은 고대 사회에서 신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장소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높은 곳에 올라갔다는 사실 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누구를 향해 제사를 바쳤는지가 문제입니다.

8절에서 ‘문과 문설주 뒤에 네 기념물을 놓았다’는 말도 나옵니다. 이는 신명기 6:9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문설주와 문에 기록하라고 한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의도적인 대조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집의 공간에 다른 기념물이 놓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대비가 생깁니다.

그 뒤로 잠자리의 이미지가 반복됩니다. 몸을 드러내고, 잠자리를 넓히고, 다른 이들의 잠자리를 사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린 모습을 성적 배신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 성적 의식이 포함되었는지는 본문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는 번역에도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동사에는 목적어가 명시되지 않아 언약을 맺는 행위로 읽을 수도 있고, 앞의 잠자리를 넓히는 행동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다른 관계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멀리 갈수록 깊이 내려가는 사람

9절에서는 장면이 다시 바뀝니다.

「너는 기름을 가지고 그 왕에게 찾아갔고, 네 향료를 늘렸다. 네 사절들을 먼 곳까지 보냈고, 스올에 이르기까지 너 자신을 낮추었다.」이사야 57:9 · 본디새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안전과 미래를 보장받으려고 다른 권력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도움을 청하러 나섰던 사람이 가장 낮은 곳까지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너는 많은 길을 다니느라 지쳤으나 『희망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네 손의 활력을 얻었기에 너는 쇠약해지지 않았다.」이사야 57:10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끈기와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좋은 덕목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끈기는 잘못된 길을 계속 걷게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열정이 아닙니다. 자신이 걷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돌아보는 능력입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에서 ‘신들에게’로 옮긴 히브리어 바엘림(bāʾēlîm)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신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도 있지만, 큰 나무나 상수리나무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어지는 ‘잎이 무성한 모든 나무 아래’라는 장소 표현과 제의 문맥이 중요합니다. 9절의 ‘그 왕’은 정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실제 외국의 군주를 가리킨다면 이 구절은 정치적 동맹과 외교적 의존을 비판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기름과 향료는 왕에게 보내는 예물과 연결될 수 있고, 먼 곳으로 보낸 사절들도 이러한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반면 앞뒤의 우상숭배 문맥에서 특정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자음과 제의 문맥을 고려한 읽기입니다. 본문은 어느 왕인지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한 인물이나 신격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실제로 그곳에 내려갔다는 이야기라기보다, 끝없이 자신을 낮추는 움직임을 극단적으로 묘사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두려워했기에 나를 잊었느냐

이사야 57:11–13 본문 →

하나님은 이제 그들의 행동에서 마음으로 질문을 옮기십니다.

「네가 누구를 걱정하고 두려워했기에 거짓말을 하고, 나를 기억하지도, 마음에 두지도 않았느냐? 내가 오래전부터 잠잠히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이사야 57:11 · 본디새김

그들을 움직인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두려움의 대상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지만, 그 두려움이 하나님을 잊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히 지적합니다. 1절에서 사람들은 의인의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11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두 곳 모두 히브리어에서 마음에 둔다는 동일한 관용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사람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의 의미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자신들이 선택한 길에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즉시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그들의 행동이 옳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의’와 행위를 드러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의 의를 인정하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이어서 그 행위들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 네가 모아 놓은 것들이 너를 구하게 해 보아라. 바람이 그것들을 모두 쓸어 가고, 한낱 입김이 가져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게 피하는 이는 땅을 물려받고, 내 거룩한 산을 차지할 것이다.」이사야 57:13 · 본디새김

‘모아 놓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들인지는 제한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의지했던 신들과 권력과 보호 수단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또 다른 길이 열립니다.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높은 산을 찾아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산이 주어집니다. 이사야 56:7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에게 결합한 이방인들을 자신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거룩한 산은 단순히 특정한 고지대를 소유한다는 뜻보다 하나님이 받아들이시고 함께하시는 자리에 속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산을 차지하는 길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경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열립니다.

높고 거룩한 분이 낮아진 사람과 함께하신다

이사야 57:14–16 본문 →

13절의 약속 뒤에는 길을 닦으라는 명령이 들립니다.

그리고 그가 말할 것이다. 「쌓아 올려라, 쌓아 올려라. 길을 닦아라. 내 백성의 길에서 걸림돌을 치워라.」이사야 57:14 · 본디새김

이제 새로운 길이 마련됩니다. 이번에는 사람이 더 많은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지나갈 길에서 장애물을 치우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높고 드높으며 영원히 거하는 이, 그 이름이 거룩한 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짓눌리고 영이 낮아진 이와도 함께 거한다. 낮아진 이들의 영을 살리고, 짓눌린 이들의 마음을 살리려는 것이다.」이사야 57:15 · 본디새김

여기서 말하는 낮아짐은 단순히 예의 바르게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강함을 내세울 수 없을 만큼 낮아진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낮아진 사람은 앞서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은 낮아진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높고 거룩하시면서도 짓눌린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함께하십니다. ‘함께 거한다’는 표현 뒤에는 두 번의 ‘살린다’는 목적이 이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회복을 위한 행동입니다.

「내 앞에서 영과 내가 만든 숨결들이 쇠약해질 것이므로, 내가 영원히 다투지는 않으며, 끝없이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57:16 · 본디새김

하나님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끝없는 분노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아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생명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아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에서 누가 이 말을 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다른 목소리가 등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장면은 이사야 40:3에서 광야에 여호와야훼의 길을 준비하라는 요청을 떠올리게 합니다. 62:10에서도 백성을 위해 길을 마련하고 돌을 치우라는 명령이 다시 나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높고 드높으며 영원히 거하는 이’라고 밝히십니다. 이사야 6:1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이 나타나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높고 드높다’는 표현은 앞서 7절에서 우상숭배가 이루어지던 높은 산을 묘사할 때 사용된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이사야 66:1–2에서도 하나님은 하늘이 자신의 보좌이고 땅이 발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겸손하고 말씀 앞에서 떠는 사람을 돌아보시겠다고 하십니다. 16절의 ‘숨결’은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장면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의 길을 보았지만, 그를 고쳐 주겠다

이사야 57:17–19 본문 →

앞에서 하나님은 낮아진 사람을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그 낮아진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가 부당한 이익을 얻은 죄 때문에 내가 분노하여 그를 쳤고, 내 얼굴을 숨기고 분노했다. 그런데 그는 등을 돌려 제 마음의 길로 걸어갔다.」이사야 57:17 · 본디새김

앞부분에 길게 묘사되었던 우상숭배의 죄는 이제 ‘부당한 이익’이라는 구체적인 사회적 죄악과 만납니다. 이것은 56:11에서 지도자들이 저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고발과 직접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신앙적 배신과 이익을 탐하는 사회적 행위가 같은 문제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나오는 인간의 반응은 회개가 아닙니다.

고통이 반드시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심판을 경험했다고 해서 반드시 자기 길을 돌아보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의 길들을 보았지만 그를 고쳐 주겠다. 그를 이끌고, 그와 그를 위해 슬퍼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되돌려 주겠다.」이사야 57:18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죄를 정확히 보시면서도 회복을 향해 행동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에서 나타납니다.

17절의 분노와 18절의 치유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벌을 취소한다는 말보다 풍성합니다. 잘못된 길을 따라 살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의 중단만이 아니라 삶 자체의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쳐 주겠다’는 약속 뒤에는 ‘이끌겠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그동안 그 사람은 자기 마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를 이끄시겠다고 하십니다. 변화는 단순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전처럼 자기 욕망에만 이끌려 걷지 않도록 새로운 인도를 받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로는 그 사람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를 위해 슬퍼하는 이들’에게도 위로가 돌아옵니다. 그의 죄와 상처가 혼자만의 일이 아니듯, 그의 회복 역시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평안의 말

입술의 열매를 만들어 내는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먼 데 있는 이에게도 가까이 있는 이에게도 평안, 평안이 있기를.」 「내가 그를 고쳐 주겠다.」이사야 57:19 · 본디새김

그러나 본문은 그 사람들을 특정 집단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평안의 선언이 멀고 가까운 거리를 모두 가로지른다는 점입니다.

이 장에서는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잘못된 길을 걸으며, 징계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회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앞에서 자신이 인간의 숨결을 만드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입술의 열매도 만들어 내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생명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상처 입은 삶을 고치시고, 그 삶에서 새로운 말이 나오게 하십니다.

회복의 약속이 반복되는 것은 평안이 단순한 인사말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그분이 실제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치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멀리 흩어진 사람들과 가까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졌던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56장에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장면과 함께 읽으면 그 범위를 더 넓게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입술의 열매’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사람의 입술에서 열매처럼 나온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 14:2–3에서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드리는 말과 입술의 제물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57:19의 문장에서는 하나님이 ‘평안, 평안’을 선언하신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분이 평안의 말을 만들어 내신다는 의미를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의 에베소서 2:17은 먼 데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평안을 전한다는 이사야 57:19의 표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화해를 설명합니다. 이는 이사야 본문의 언어가 후대에 확장되어 사용된 사례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7장 자체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신의 백성을 고치고 다시 인도하시겠다는 여호와야훼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왜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는가

이사야 57:20–21 본문 →

여기까지 읽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그 약속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뒤흔들리는 바다와 같다. 그 바다는 잠잠히 있을 수 없고, 그 물은 진창과 진흙을 밀어낸다.이사야 57:20 · 본디새김

그들은 지칠 때까지 길을 걸으면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손에 활력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며 계속 다른 대상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을 때에도 자기 마음의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움직일 수는 있지만 쉬지 못합니다.

2절에서 의인은 평안으로 들어가 자기 잠자리에서 쉽니다. 20절에서 악인은 바다처럼 뒤흔들리며 잠잠해지지 못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말했다.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이사야 57:21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잘못된 길을 걸어온 사람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을 계속 고집하는 것 자체가 평안이라고 선언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복을 원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악을 용납하신다는 말은 다릅니다.

여기서 ‘악인’을 반드시 회복의 가능성이 영원히 닫힌 특정 사람들의 명단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17–18절에서 하나님이 고치시겠다고 하신 사람도 이전에는 자기 마음의 길을 고집했습니다. 본문은 어떤 사람이 앞으로도 영원히 악인으로 남을지를 미리 판정하기보다, 악인의 길 자체에는 평안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48:22에도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 말씀이 57장의 마지막에 다시 놓임으로써, 구원의 약속을 들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정의와 거룩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이사야 57:1–21 본문 →

오히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죄를 심판하시는 행동과 상한 사람을 살리시는 행동에서 함께 드러납니다. 평안은 죄를 그대로 두고도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상처를 고치시고 잘못된 길에서 사람을 이끄실 때 이루어지는 회복입니다.

이사야 57장에는 마지막까지 두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끊임없이 뒤흔들리며 진창과 진흙을 밀어내는 바다입니다. 다른 하나는 걸림돌이 치워지고 다시 길이 마련되는 장면입니다.

그 길은 한때 잘못된 방향으로 멀리 걸어갔던 사람들을 위해 준비됩니다. 그들이 돌아오도록 하나님은 길을 닦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람들은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 애썼지만, 하나님은 낮아진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와 함께 거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이끄시는 길 위에서, 한때 쉬지 못하던 사람에게 새로운 말이 주어집니다. 「먼 데 있는 이에게도 가까이 있는 이에게도 평안, 평안이 있기를.」 「내가 그를 고쳐 주겠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