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58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이사야 58장은 이상한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고 싶어 하고, 의로운 판결을 구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합니다. 금식까지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들이 금식하는 동안에도 일꾼들은 억압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먹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굶주린 이에게 빵을 나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몸을 낮추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괴롭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을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금식을 폐지하시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 행위를 사회봉사로 바꾸라고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 방식과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어떻게 서로 모순되는지를 폭로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순이 해결되는 자리에서 뜻밖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날마다 찾는 사람들의 반역
본문은 예언자에게 주어지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목청껏 외쳐라. 억누르지 마라. 뿔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반역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들을 알려라.」이사야 58:1 · 본디새김
뿔나팔은 사람들을 모으거나 위험을 알리고 중요한 사건을 선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예언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뿔나팔처럼 높여 백성의 죄를 드러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고발의 대상을 여전히 ‘내 백성’, ‘야곱의 집’이라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외부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나를 찾고, 내 길들을 알기 원한다. 의를 행하고 자기 하나님의 정의를 저버리지 않은 민족처럼, 그들은 내게 의로운 판결들을 청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이사야 58:2 · 본디새김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처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실제로 의를 행하고 정의를 지키는 민족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의를 행하고 정의를 저버리지 않은 민족처럼 행동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 사이에 있습니다.
‘의로운 판결’을 구하는 사람들이 일상에서는 정의를 저버립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길을 고집합니다.
이 대조는 이사야 1:11–17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많은 제물과 기도를 문제 삼으시면서, 악행을 멈추고 정의를 구하며 억압받는 사람을 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의 손과 삶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이사야 58장은 이 문제를 금식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금식을 보지 않으시는가
3절에서 백성은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저희가 금식했는데 왜 당신은 보지 않으십니까? 저희 자신을 괴롭게 했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아라, 너희는 금식하는 날에도 원하는 일을 찾고, 너희 일꾼들을 모두 몰아붙인다.」이사야 58:3 · 본디새김
자신들이 종교적 의무를 수행했으므로 하나님도 응답하셔야 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지 않으신다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금식하는 날에 무엇을 하는지 이미 보고 계십니다.
금식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종교적 절제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계속 노동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보아라, 너희는 다투고 싸우려고 금식하며, 악한 주먹으로 때리려고 금식한다. 너희 목소리가 높은 곳에 들리게 하려면 오늘처럼 금식해서는 안 된다.」이사야 58:4 · 본디새김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께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목소리가 어떤 삶에서 나오고 있는지를 문제 삼으십니다.
1절에서는 예언자에게 목소리를 뿔나팔처럼 높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4절에서는 금식하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높은 곳에 들리게 하려고 합니다. 예언자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백성의 목소리는 하나님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것입니다.
본문은 기도의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간절한지만으로 그 기도가 하나님께 합당한지를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골풀처럼 숙인 머리
5절에서 하나님은 금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 묘사하십니다.
「내가 선택하는 금식이 이런 것이겠느냐? 사람이 제 자신을 괴롭게 하는 날이겠느냐? 골풀처럼 제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를 펴 놓고 재를 깔아 놓는 것이겠느냐? 너는 이것을 금식이라, 여호와야훼가 기꺼이 받아들이는 날이라 부르겠느냐?」이사야 58:5 · 본디새김
고개를 숙이는 자세와 실제 삶이 서로 어긋났기 때문에 그 자세가 문제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몸을 낮추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자기 몸은 괴롭게 하면서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한 종교적 행위에 ‘금식’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름이 아니라 그 행위의 실질을 물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금식은 슬픔과 애도, 죄에 대한 회개,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레위기 16:29–31에는 속죄일에 자신을 괴롭게 하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58:3의 ‘저희 자신을 괴롭게 했는데’라는 표현도 이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사야 58장의 금식이 특정한 속죄일 의식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골풀은 가늘고 유연하여 쉽게 구부러지는 식물입니다. 머리를 골풀처럼 숙였다는 표현은 금식하는 사람이 몸을 깊이 굽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굵은 베와 재는 애도와 회개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금식
6절은 5절의 질문을 그대로 받아 반전시킵니다.
「내가 선택하는 금식은 이것이 아니냐? 악의 족쇄를 풀고, 멍에의 끈들을 풀고, 짓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모든 멍에를 끊어라.」이사야 58:6 · 본디새김
족쇄와 멍에는 사람을 묶고 자유를 제한하는 도구입니다. 특히 멍에는 짐승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거나 일을 시킬 때 사용하는 도구이므로, 예언서에서는 억압적인 지배와 부담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이사야 9:4에서도 하나님이 백성의 무거운 멍에를 꺾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금식은 억눌린 사람의 처지를 조금 더 견딜 만하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를 억압하는 속박 자체를 풀어 주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행하던 금식은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금식은 다른 사람의 몸에서 고통을 거두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억압을 행하는 사람만을 향한 명령일 수도 있고, 억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공동체 전체를 향한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단순히 개인적으로 친절하게 행동하라는 권면보다 강한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을 짓누르고 있는 관계와 관행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이미지가 달라집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빵을 떼어 나누고, 떠도는 가난한 이들을 집으로 들이는 것이 아니냐? 벌거벗은 이를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이사야 58:7 · 본디새김
6절이 억압의 사슬을 끊는 일이라면, 7절은 결핍된 삶을 채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사랑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다른 곳에서 빵을 구해 오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가진 빵을 나누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자신의 소유와 타인의 필요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을 만들라는 요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드릴 것을 준비하면서도 옆에 있는 사람의 굶주림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두 행동을 분리해서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항의하던 사람들
3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보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벌거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금식을 보시는지에 온통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곤궁함을 보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이어지는 ‘네 혈육을 외면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여기서 ‘혈육(בָּשָׂר)’에 해당하는 표현은 자기 몸에서 나온 친족이나 가까운 혈연관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원문 자체가 모든 인류를 동일하게 ‘혈육’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낯선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자신과 가까운 관계 안에 있는 사람도 외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돌본다고 말하면서 가족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가족을 돌본다는 이유로 낯선 가난한 사람을 밀어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새벽처럼 빛이 터져 나올 것이다
8절에서 분위기가 크게 바뀝니다.
「그러면 네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고, 네 회복이 속히 싹틀 것이다. 네 의가 네 앞에서 걸어가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네 뒤를 지킬 것이다.」이사야 58:8 · 본디새김
‘네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온다’는 말은 단순히 조금씩 밝아진다는 표현보다 강합니다. 어둠을 가르고 새로운 빛이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개인의 질병이 반드시 낫는다는 보장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약속을 듣는 대상은 공동체이며, 앞에서 다루어진 문제도 사회적 관계와 정의의 붕괴입니다. 따라서 회복은 무너진 공동체의 삶이 다시 온전해지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이사야 58장은 회복된 공동체의 삶을 이처럼 하나님의 보호 아래 이어지는 여정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네 의’는 사람이 선행으로 쌓아 올린 공로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단어는 올바른 삶을 나타내면서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과 회복의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의롭게 보이는 종교적 행동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실제로 이웃을 살리는 삶과 하나님의 회복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그때 네가 부르면 여호와야훼가 대답하고, 네가 도와 달라고 외치면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네가 네 가운데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악한 말을 없애고,」 「굶주린 이에게 네 자신을 내어 주고 고통받는 이를 배부르게 한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떠오르고, 네 암흑이 한낮처럼 될 것이다.」이사야 58:9–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3절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더 강한 종교적 행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억압을 멈추고 굶주린 사람을 돌보는 길에서 자신이 응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선행을 하면 언제나 원하는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거래의 공식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 주는 예언적 약속입니다.
앞 장인 이사야 57:18에서 하나님은 잘못된 길을 걸어온 사람을 고치시고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58장은 그 회복이 공동체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사야 59:1–2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하시거나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거나 응답할 능력이 없으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인간의 죄가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뒤를 지킨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뒤에서 모으고 보호한다는 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52:12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백성의 앞에서 가시고 뒤에서 보호하신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14:19에서는 이스라엘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뒤로 옮겨 그들을 보호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 이 표현은 자신이 여기에 있으며 상대방에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22:1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도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괴롭게 하던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 주라고 하시다
9절 후반부터 하나님은 다시 구체적인 조건들을 말씀하십니다.
멍에를 없애는 것은 앞서 나왔던 억압의 문제를 다시 받습니다. 손가락질과 악한 말은 사람을 비난하고 모욕하거나 적대하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손가락질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의 몸짓인지는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악한 말과 함께 놓여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깎아내리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질을 나누면서도 상대방을 모욕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면서도 그 사람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복은 단지 물건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가는 일이 아닙니다. 관계 속에서 사람의 존엄이 회복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3절에서 백성은 ‘저희 자신을 괴롭게 했는데’라고 말했습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굶주린 이에게 네 자신을 내어 주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1절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 자신을 메마른 곳에서도 배부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데 집중했던 신앙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신앙으로 바뀌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다시 채워 주십니다.
이것이 단순히 음식의 나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빵을 나누는 일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그 사람 자신이 고통받는 사람을 향해 움직이는 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끝없이 소진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11절에서 그를 지속적으로 돌보시고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삶과 같지 않습니다.
물이 끊이지 않는 동산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한층 풍성해집니다.
「여호와야훼가 너를 늘 이끌고, 메마른 땅에서도 너를 배부르게 하며, 네 뼈들에 힘을 줄 것이다. 너는 물이 넉넉한 동산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이사야 58:11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환경에서 물은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비가 부족한 계절이나 메마른 지역에서 물이 있는 동산은 특별한 생명력을 지닌 장소입니다.
앞에서 그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고통받는 사람을 배부르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가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받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을 나누어 준 만큼 물질적인 부를 더 많이 얻게 된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메마른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지탱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샘의 풍요는 그 순간 표면에 얼마나 많은 물이 보이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물이 계속 솟아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한 번의 도움을 주고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늘 이끌고’라는 표현이 보여 주듯, 지속적인 인도와 공급을 약속하십니다.
무너진 틈을 막는 사람들
12절에서 시야가 개인의 삶에서 공동체 전체로 넓어집니다.
「네게서 나온 이들이 오래된 폐허들을 다시 세우고, 너는 대대로 내려온 기초들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너는 무너진 틈을 막는 이, 사람이 살도록 길들을 되살리는 이라 불릴 것이다.」이사야 58:12 · 본디새김
이러한 표현은 전쟁과 파괴를 겪은 땅이나 도시의 회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61:4에서도 오래된 폐허를 다시 세우고 무너진 성읍을 회복시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왜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나누고 억압받는 사람을 풀어 주라는 명령 뒤에 도시 재건의 약속이 나올까요?
본문은 그 사이의 모든 사회적 과정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장면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공동체의 회복을 건물을 다시 세우는 일과 사람들의 삶을 바로잡는 일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도시는 건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곳에 사람이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하고,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어 마지막 표현은 ‘거주하기 위해’라는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람이 거주하는 길’을 나타내는 말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회복된 길과 사람들의 거주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오직 사회관계 회복의 은유로만 이해하면 실제 폐허를 다시 세우는 약속이 희미해집니다. 반대로 물리적인 재건만을 생각하면 그 앞에서 이어진 정의와 돌봄의 명령을 놓치게 됩니다.
무너진 공간이 다시 세워지고, 그 공간 안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네게서 나온 이들’이라는 표현은 회복의 영향이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지금의 삶이 바뀌면 그 뒤를 잇는 사람들도 오래된 폐허를 다시 세우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들의 이름은 얼마나 오래 금식했는지에 따라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들로 인해 무엇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는지에 따라 주어집니다.
금식 이야기 끝에 왜 안식일이 등장하는가
12절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사야 58장은 사회적 정의와 돌봄을 가르치는 장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마지막에 새로운 주제를 꺼냅니다.
안식일입니다.
「네가 안식일에 네 발을 거두어 내 거룩한 날에 네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며, 여호와야훼의 거룩한 날을 귀한 날이라 부르고, 그날을 귀하게 여겨 네 길로 다니는 것과 네가 원하는 일을 찾는 것과 말을 하는 것을 삼간다면,」이사야 58:13 · 본디새김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일이고, 안식일은 일상적인 노동을 멈추고 거룩한 시간을 지키는 일입니다. 왜 두 주제가 하나의 장에 놓였을까요?
이 연결을 이해하는 열쇠는 ‘원하는 일’이라는 표현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금식하는 날에도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찾는다고 꾸짖으셨습니다. 13절에서는 안식일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금식에서 드러났던 문제, 곧 하나님께 속한 날마저 자기 욕구와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는 문제가 안식일에 관한 말씀에서도 다루어집니다.
다만 여기서 ‘원하는 일’을 모든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제한 없이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자신의 용무나 사업, 추구하는 활동을 가리킬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 그 범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58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몰아붙이면서까지 자신의 일을 계속하는 태도가 이미 문제로 제시되었습니다.
안식일은 그러한 태도에 제동을 거는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왜 다른 사람의 쉼과 연결되는가
출애굽기 20:8–11에서는 안식일을 창조와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것처럼, 이스라엘도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5:12–15에서는 안식일의 의미가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경험과 연결됩니다. 자신뿐 아니라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가축, 거류민까지 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명기 5:14는 종들도 자기 자신처럼 쉬게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합니다.
금식하는 날에도 일꾼들을 몰아붙이던 사람들이 안식일에는 다른 사람의 쉼을 존중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자기 혼자 종교적 휴식을 누리는 날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내려놓고,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도 쉴 수 있도록 하는 날입니다.
금식과 안식일은 이 지점에서 만납니다.
금식은 나의 욕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안식일은 나의 일과 생산이 다른 사람의 쉼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억지로 지키는 날이 아니라 기쁨이라 부르는 날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며.’
안식일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할 날로 묘사됩니다. 금식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행위를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쁨이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물론 금식과 안식일은 목적이 다르므로 두 행위를 단순하게 반대 개념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장 전체에서 고통을 만들어 내는 잘못된 경건과 생명을 살리고 기쁨을 누리게 하는 참된 신앙 사이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고통을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13절 마지막에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간다면’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에 자신의 일상적인 욕망과 활동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 속한 시간의 의미를 존중한다는 전체 방향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에서 여호와야훼 안의 기쁨으로
14절에서 안식일에 관한 명령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그때 너는 여호와야훼 안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다.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들 위로 타고 가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유산으로 너를 먹이겠다.」 여호와야훼의 입이 말했기 때문이다.이사야 58:14 · 본디새김
안식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삶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기쁨을 빼앗으려고 안식일을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일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기쁨으로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높은 곳들 위로 타고 가게 하겠다’는 약속이 이어집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32:13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땅의 높은 곳들 위로 다니게 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높은 곳은 여기서 안전과 승리, 땅을 누리는 복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이어지는 ‘야곱의 유산’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과 땅의 기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언약 안에서 약속된 삶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먹지 않는 데서 시작한 이야기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약속으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말을 하는 것을 삼간다면’이라는 표현을 안식일에는 일절 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앞에 자신의 길로 다니는 일과 원하는 일을 찾는 일이 함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용무나 사업에 관한 말을 삼가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헛된 말이나 부적절한 말 일반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원문에는 금지되는 말의 범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무엇을 회복시키는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는 종교적 열망이 이웃의 삶을 회복시키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 하나님과의 관계와 공동체의 삶이 함께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들이는 조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삶을 기뻐하시며 어떤 공동체를 회복시키려 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장의 시작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고 있었습니다. ‘왜 당신은 보지 않으십니까?’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오히려 그들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누구의 고통을 알아주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바꾸어 그 말씀에 응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알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의 임재를 알려 주십니다.
그 약속 뒤에 펼쳐지는 마지막 풍경에는 더 이상 재와 굵은 베만 놓여 있지 않습니다. 물이 넉넉한 동산이 있고, 끊이지 않는 샘이 있습니다. 무너진 틈이 막히고 오래된 길이 다시 열립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돌아와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의 끝에는 굶주림이 아니라, 다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