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59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하나님이 일어서십니다
이사야 59장은 하나님의 손과 귀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일까요? 귀가 무거워져서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시는 것일까요?
본문은 두 질문을 모두 부정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에 있습니다.
그런데 장의 중간에 이르면 더욱 심각한 사실이 밝혀집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정의가 사라졌고, 진실이 거리에서 쓰러졌으며, 죄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 상황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진 것이 아니다
보아라, 여호와야훼의 손이 구원하지 못할 만큼 짧아진 것도 아니고, 그의 귀가 듣지 못할 만큼 무거워진 것도 아니다.이사야 59:1 · 본디새김
‘손이 짧아졌다’는 표현은 실제 신체의 길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이루어 낼 능력이 부족해졌다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질문이 민수기 11:23에도 나옵니다. 광야에서 많은 사람에게 고기를 먹일 수 있을지 모세가 의문을 제기하자,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손이 짧아졌느냐고 물으십니다. 두 본문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되었다는 인간의 판단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9장에서는 능력뿐 아니라 듣는 일도 함께 언급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문제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지만 원하는 응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2절은 전혀 다른 대답을 제시합니다.
오히려 너희의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들이 너희에게서 그의 얼굴을 가려 그가 듣지 않게 했다.이사야 59:2 · 본디새김
죄는 단순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동의 목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구절을 모든 고난이나 기도 응답의 지연이 반드시 그 사람의 특정한 죄 때문이라는 일반 법칙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59장은 구체적으로 정의가 무너지고 폭력과 거짓이 퍼진 공동체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희 손바닥은 피로 더럽혀졌고, 너희 손가락은 죄악으로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했고, 너희 혀는 불의를 중얼거린다.이사야 59:3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함께 고발합니다. 손은 폭력을 행하고, 입은 거짓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마음속에 감추어진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고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구원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로 더럽혀진 인간의 손이 문제입니다.
독뱀의 알과 거미줄 — 악이 만들어 내는 것들
4절은 법정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정당하게 소송을 제기하는 이가 없고, 진실하게 변론하는 이도 없다. 그들은 헛된 것을 믿고 빈말을 하며, 해악을 잉태하고 악을 낳는다.이사야 59:4 · 본디새김
소송과 변론은 원래 억울한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고 분쟁을 정의롭게 해결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절차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공동체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해야 하는 자리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갑자기 출산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해악을 잉태하고 악을 낳는다.’ 악이 하나의 행동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임신과 출산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이어지는 두 이미지로 발전합니다.
그들은 독뱀의 알을 부화시켰고, 거미줄을 짠다. 그들의 알을 먹는 이는 죽을 것이며, 짓눌린 알이 터지면 독사가 나온다.이사야 59:5 · 본디새김
독뱀의 알과 거미줄은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활동입니다. 독뱀은 알을 낳고, 거미는 줄을 짭니다. 사람들 역시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이 이미지는 앞서 나온 ‘해악을 잉태하고 악을 낳는다’는 표현을 구체화합니다. 악은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다시 새로운 악을 만들어 냅니다.
이어지는 거미줄의 이미지에는 조금 다른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거미줄은 옷이 되지 못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몸을 가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악한 행위이며, 그들은 손으로 폭력을 행한다.이사야 59:6 · 본디새김
거미줄은 매우 정교하게 짜인 구조물입니다. 거미는 많은 수고를 들여 그것을 만듭니다. 그러나 거미줄로 사람의 몸을 덮는 옷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거짓과 불의로 이루어진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 놓아도, 그것으로 자신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쌓아 온 행위는 자신을 가릴 만한 옷이 되지 못합니다.
구부러진 길 위에서는 평안에 이를 수 없다
7–8절에서는 사람들의 발과 길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발은 악을 행하러 달려가고, 무고한 이의 피를 쏟는 데 서두른다. 그들의 생각은 악한 생각이며, 그들의 큰길에는 파괴와 파멸이 있다.이사야 59:7 · 본디새김
처음에는 손과 입이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발과 생각까지 등장합니다. 사람의 행동과 말, 움직임과 의도가 모두 악으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마지못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데 적극적이고 빠릅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는 정의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길을 구부려 놓았고, 그 길을 걷는 이는 누구도 평화를 알지 못했다.이사야 59:8 · 본디새김
사람들은 누구나 안전하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 실제로 평화에 이르는 길인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불의한 소송, 거짓말, 폭력, 무고한 피를 흘리는 행동을 통해서는 공동체의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길을 다른 사람들도 걷게 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죄가 개인의 도덕적 실패를 넘어 사회적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9절부터는 뜻밖에도 그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남의 죄를 말하던 자리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다
9절에서 말하는 주체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너희’와 ‘그들’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언자가 사람들의 죄를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저희’라는 말이 들립니다.
「그러므로 정의는 저희에게서 멀어졌고, 의는 저희에게 이르지 못합니다. 저희가 빛을 기다리지만, 보십시오, 어둠뿐입니다. 밝음을 기다리지만 캄캄한 곳들을 걸어 다닙니다.」이사야 59:9 · 본디새김
이것은 공동체의 탄식이자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누가 이 말을 대표하여 하고 있는지는 본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예언자가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고백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공동체 자체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고발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외부에서 드러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 잘못이 가져온 현실을 자신들의 말로 인정합니다.
특히 9절 첫머리의 ‘그러므로’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정의가 멀어진 현실을 단순히 억울한 불행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앞서 묘사된 죄와 그 현실을 연결합니다.
한낮인데도 벽을 더듬는 사람들
「저희는 눈먼 이들처럼 벽을 더듬고, 눈이 없는 이들처럼 더듬습니다. 한낮에도 땅거미가 진 때처럼 비틀거렸고, 기운찬 이들 가운데서 죽은 이들 같습니다.」이사야 59:10 · 본디새김
이것은 앞에서 ‘평화의 길을 알지 못했다’는 말씀을 새로운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판단하는 능력 자체가 무너진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사야에는 빛과 어둠의 이미지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특히 이사야 42:16에서 하나님은 눈먼 이들을 알지 못하던 길로 인도하시고, 그들 앞의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59장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상태가 고백됩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11절에서는 시각적인 이미지가 소리로 바뀝니다.
「저희 모두 곰처럼 으르렁거리고, 비둘기처럼 거듭 신음합니다. 정의를 기다리지만 없고, 구원을 기다리지만 저희에게서 멀어졌습니다.」이사야 59:11 · 본디새김
곰의 으르렁거림과 비둘기의 신음은 서로 다른 소리입니다. 하나는 거칠고 크며, 다른 하나는 낮고 반복적입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소리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공동체의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합니다.
「저희의 반역들이 당신 앞에 많아졌고, 저희의 죄들이 저희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반역들이 저희와 함께 있고, 저희는 저희의 죄악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사야 59:12 · 본디새김
여기서는 4절에서 등장했던 법정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납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진실하게 소송하거나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죄 자체가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합니다.
‘저희의 반역들이 저희와 함께 있고’라는 표현도 의미가 깊습니다. 죄는 과거에 끝난 사건처럼 멀리 사라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져온 책임과 결과가 현재의 삶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저지른 죄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바른 삶인지는 깨닫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고백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13절에서 그 죄는 더욱 분명하게 열거됩니다. 하나님을 거슬러 반역했고, 하나님을 따르던 데서 돌아섰고, 억압과 배반을 말했고, 마음에서 거짓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4절에서 해악을 잉태하고 악을 낳는다고 했던 표현이 13절에서는 마음에서 거짓말을 잉태하고 내뱉는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처음에는 사회의 죄를 고발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제는 공동체가 스스로 인정하는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더 이상 남의 일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 마지막의 ‘기운찬 이들 가운데서 죽은 이들 같습니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의 뜻이 분명하지 않아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기운찬 이들 가운데서’라고 읽으면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들만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대조가 생깁니다. 반면 어둡거나 황폐한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으면 앞에 나온 한낮과 땅거미의 대비가 계속됩니다. 어느 쪽이 원래 의도에 가까운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진실이 광장에서 쓰러진 사회
12–13절에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 사람들은 14절에서 공동체 전체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정의는 뒤로 밀려났고, 의는 멀리 서 있습니다. 진실이 광장에서 비틀거렸고, 올곧음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사야 59:14 · 본디새김
정의와 의, 진실과 올곧음이 사람처럼 등장합니다. 추상적인 가치들이 실제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행동을 당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도시의 광장과 성문 주변은 사람들이 모이고, 소식을 주고받으며, 공적인 문제가 논의되는 장소였습니다. 이사야는 진실이 개인의 마음속에서만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적인 공간에서 진실이 비틀거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정의와 진실이 단순히 실현되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마치 그 사회에 들어오려고 해도 들어올 수 없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진실은 사라졌고, 악에서 돌아서는 이는 약탈당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보았고, 정의가 없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사야 59:15 · 본디새김
‘약탈당한다’는 표현은 악에서 돌아서는 사람이 오히려 희생당하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이 피해를 입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올바르게 행동하려는 선택이 그를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하는 사회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길을 구부려 놓았습니다. 그 길을 벗어나려는 사람조차 피해를 입습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개인적으로 바르게 살겠다는 결심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의를 지켜 주어야 할 관계와 제도 자체가 무너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무너뜨린 정의를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현실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하나님이 무장하십니다
16절은 이 장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문장입니다.
그는 사람이 없음을 보았고, 나서는 이가 없다는 데 경악했다. 그의 팔이 그에게 승리를 가져왔고, 그의 의가 그를 떠받쳤다.이사야 59:16 · 본디새김
폭력을 행하는 사람도 있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죄를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무너진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일과 무너진 현실을 회복할 능력을 갖추는 일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광장에서 비틀거리고, 정의가 밀려나며, 악에서 돌아서는 사람이 약탈당하는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행동하십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손이 짧아지지 않았다고 했던 말씀이 여기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실제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나서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입고 싸우십니까
17절은 하나님을 전사처럼 묘사합니다.
그는 의를 갑옷처럼 입고, 머리에 구원의 투구를 썼다. 복수의 옷을 차려입고, 열정을 겉옷처럼 둘렀다.이사야 59:17 · 본디새김
이것은 실제 전쟁 장비를 자세히 묘사하려는 장면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과 성품으로 행동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비유입니다. 그 행동의 중심에는 정의를 바로 세우고 구원을 이루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6절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몸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거미줄은 옷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7절에서 하나님은 실제로 행동하실 수 있는 의와 구원의 옷을 입으십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악한 행위는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실제로 구원을 이루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를 또 다른 불의로 해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의로 무장하시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나서십니다.
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복수하십니까
그는 그들이 행한 대로, 그대로 갚을 것이다. 자기 대적들에게는 진노를, 자기 원수들에게는 보응을 돌려주고, 해안 땅들에게도 보응을 돌려줄 것이다.이사야 59:18 · 본디새김
그동안 사람들은 무고한 피를 흘렸습니다. 정의가 밀려났고, 진실이 사라졌으며, 악에서 돌아서는 사람이 약탈당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은 단지 고통받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정의를 무너뜨리는 악에 대해 판단하고 행동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이유 없는 분노가 아닙니다. 그들이 실제로 행한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인간이 자신의 적에게 보복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그분의 의와 구원에 연결된 행동입니다.
또한 ‘해안 땅들’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심판이 한 공동체의 내부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에서 해안 땅들은 종종 먼 민족들과 지역들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42:4에서도 해안 땅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다리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나서는 이’로 옮긴 히브리어 마프기아(mapgîaʿ)는 누군가를 위해 개입하거나 중재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 간구하거나 중보하는 행위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을 특별히 중보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정의가 무너진 사회를 길게 묘사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상황에 개입하여 바로잡을 사람이 없다는 넓은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장면은 이사야 63:5와 매우 가깝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도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보시고, 자신의 팔로 구원을 이루십니다. 17절의 장면은 이사야 11:5에서 의와 신실함을 허리띠처럼 두르는 왕의 모습도 떠올리게 합니다. 에베소서 6:14–17에서도 의의 갑옷과 구원의 투구가 등장합니다. 이사야 59:17에서 하나님이 직접 입으셨던 무장의 이미지가 신자들의 삶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9장 자체에서는 먼저 하나님이 의와 구원의 전사로 등장하신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하라는 명령이 이 장의 중심은 아닙니다.
강물처럼 몰려오시는 하나님
서쪽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해 뜨는 쪽에서는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이다. 그가 좁은 물길로 몰려오는 강물처럼 올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숨결이 그 강물을 몰아간다.이사야 59:19 · 본디새김
‘서쪽’과 ‘해 뜨는 쪽’은 세계의 넓은 범위를 나타내는 방향 표현입니다. 앞에서는 정의가 한 공동체 안에서 무너져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먼 곳까지 알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물길로 몰려오는 강물은 강한 힘과 속도, 압도적인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의 능력은 강물처럼 압도적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여호와야훼의 이름과 영광을 알게 됩니다.
19절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숨결은 21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영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심판의 장면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언약의 약속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 후반의 히브리어는 해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가 좁은 물길로 몰려오는 강물처럼 올 것이다’로 읽으면 여호와야훼 자신이 강물처럼 힘차게 오시는 모습이 됩니다. 반면 히브리어 차르(ṣār)를 ‘적’이나 ‘대적’으로 이해하면 원수가 강물처럼 밀려오지만 여호와야훼의 영이 그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여호와야훼에게서 오는 진노가 거센 강물처럼 임하는 방향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하나의 장면으로 확정해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루아흐(rûaḥ)는 문맥에 따라 바람, 숨결, 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강물을 움직이는 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 절에서 같은 단어가 다시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이 백성 위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시온에 구속자가 옵니다
19절의 강물 같은 장면 뒤에 새로운 선언이 이어집니다.
「시온에 구속자가 올 것이다. 야곱 가운데 반역에서 돌아서는 이들에게 올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이사야 59:20 · 본디새김
구속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단순히 문제를 관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의 삶을 되찾아 주기 위해 관계 안으로 들어와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구속자로 불리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야 41:14, 43:14, 44:6 등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버려진 존재처럼 대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되찾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십니다.
13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던 데서 돌아섰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는 반역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두 구절 모두 ‘돌아선다’는 움직임을 사용하지만 방향이 다릅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에게서 돌아섰습니다.
20절에서는 반역에서 돌아섭니다.
죄의 방향으로 움직였던 사람이 이제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만 스스로 정의를 회복할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구원을 이루시고, 그 구속은 반역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함께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5:25에서는 가난 때문에 땅을 팔게 된 사람을 위해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되찾는 제도가 설명됩니다. 룻기 4장에서도 친족의 책임과 기업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 59:20의 히브리어 문장은 구속자가 반역에서 돌아서는 이들에게 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돌아서는 주체를 사람들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구속자가 시온을 위해 와서 야곱에게서 불경건함을 돌이키게 한다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하나님의 구속 행위가 사람들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미가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59장의 전체 흐름에서는 둘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로마서 11:26–27에서 바울은 이사야 59:20–21의 구속자와 언약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다만 바울의 인용은 히브리어 본문의 표현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구속자가 ‘시온에서’ 온다는 표현 등을 통해 자신의 논증 안에서 재구성합니다. 이는 이사야의 약속을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에 연결하는 신약의 해석입니다.
거짓을 말하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십니다
이사야 59장은 마지막 절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과 맺는 계약은 이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네 위에 있는 내 영과 내가 네 입에 둔 내 말들은 이제부터 영원히 네 입에서, 네 자손의 입에서, 네 자손의 자손의 입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이사야 59:21 · 본디새김
여기서 ‘계약’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언어와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영과 말씀을 통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3절에서 사람들의 입술은 거짓을 말했습니다.
4절에서 사람들은 헛된 것을 믿고 빈말을 했습니다.
13절에서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거짓말을 잉태하여 내뱉었습니다.
14–15절에서는 진실 자체가 광장에서 비틀거리고 사라졌습니다.
거짓으로 가득했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게 하시는 것, 이것이 이 장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회복입니다.
이사야 51:16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사람의 입에 두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4:3에서는 자신의 영을 후손에게 부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59:21은 이러한 약속들을 한자리에 모은 듯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네 입’, ‘네 자손의 입’, ‘네 자손의 자손의 입’이라는 반복은 그 약속의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영이 계속해서 백성 가운데 머무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은 먼저 ‘그들과 맺는 계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곧이어 ‘네 위에 있는 내 영’, ‘네 입에 둔 내 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에서 여기의 ‘너’는 남성 단수입니다. 하나는 공동체 전체를 한 사람처럼 불러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는 시온이나 이스라엘을 한 인물처럼 부르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므로 가능한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을 받은 특정한 인물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과 영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본문은 그 인물이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인물을 확정하여 이 구절을 설명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왜 직접 나서셔야 했습니까
하나님은 구원할 능력이 없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막고 있던 죄를 드러내시고, 아무도 바로잡지 못하는 현실에 직접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의의 책임을 요구하시면서도, 인간의 능력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59장의 마지막에서 그 구원은 무기나 승리의 환호가 아니라 말씀의 약속으로 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손이 피로 더럽혀져 있었고, 입술은 거짓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팔로 구원을 이루시고, 자신의 말씀을 그들의 입에 두겠다고 하십니다. 그 입에서 거짓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그 말씀이 자녀와 손자녀의 입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진실이 사라진 세상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