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인사와 시련 속의 지혜

시험 속에서 무엇이 태어나는가

야고보서 1장을 읽으면 처음에는 서로 다른 교훈들이 빠르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험을 기뻐하라는 말이 나오고, 지혜를 구하라는 권면이 뒤따릅니다. 갑자기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등장하더니, 욕망과 죄의 관계를 설명하고, 말을 조심하라고 권합니다. 마지막에는 거울을 보는 사람의 이야기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장을 자세히 읽으면, 흩어져 있는 듯한 권면들을 하나로 묶는 질문이 드러납니다.

사람은 무엇에 이끌려 살아갑니까? 그리고 그 삶은 마침내 무엇을 낳습니까?

야고보는 두 가지 탄생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욕망은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낳습니다(1:15).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1:18). 두 절의 마지막 탄생을 표현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같습니다.

하나는 죽음을 낳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삶입니다.

이 대조를 발견하면 야고보서 1장의 권면들이 새롭게 읽힙니다. 시험을 견디는 일, 지혜를 구하는 일, 부유함을 바라보는 관점, 말을 삼가는 일, 약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서로 무관한 윤리 목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삶의 출발점은 사람의 결심이 아니라, 사람을 새롭게 낳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101장 본문 읽기 →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보내는 기쁨의 인사

야고보서 1:1 본문 →

편지는 짧은 인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야고보가,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기쁨을 빕니다.야고보서 1:1 · 본디새김

야고보는 자기 이름에 아무런 직함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노예는 자유롭게 고용된 일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권위를 설명하는 대신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존경받는 교사로 소개되지 않으십니다. 야고보가 자신의 삶을 바쳐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야고보서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거의 없고, 예수님의 이름도 1:1과 2:1에만 명시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언급이 적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권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편지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리에서 시작되고, 뒤따르는 권면들은 그 주님께 속한 사람들의 삶을 다룹니다.

수신자는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입니다. ‘흩어짐’은 본래 이스라엘 땅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 전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실제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열두 지파라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 전체에 적용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야고보는 독자들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약속 안에서 이해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들에게 건네는 첫마디는 뜻밖입니다.

「기쁨을 빕니다」는 당시 통용되던 정형적인 편지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기쁨」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일상적인 인사말이었던 기쁨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요구되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전통적으로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자 예수님의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와 동일시됩니다(갈라디아서 1:19; 사도행전 15:13). 다만 편지 자체는 저자의 신원을 더 밝히지 않습니다. 실제 야고보가 직접 작성했다는 견해와 후대에 그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모두 존재하며, 저작 시기도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사말의 그리스어는 카이레인(χαίρω), 다음 절의 기쁨은 카라(χαρά)입니다.

시험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이유

야고보서 1:2–4 본문 →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을 맞닥뜨릴 때에 그것을 온통 기쁨으로 여기십시오.야고보서 1:2 · 본디새김

이 말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거스릅니다. 시험이 닥치면 사람은 괴롭고 두렵습니다.

야고보는 「기뻐하십시오」라고만 말하지 않고 「기쁨으로 여기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여기다’는 어떤 것을 판단하거나 평가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야고보는 고통을 즐거운 감정으로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의미를 새롭게 판단하라고 요청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거치는 일이 견딤을 빚어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3 · 본디새김

시험이 기쁨의 이유가 되는 것은 시험 자체가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견딤이 자라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거치는 일」이 과정을 가리키든 시험으로 확인된 참됨을 가리키든, 중심에는 믿음이 실제로 검증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그 믿음이 지속되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시험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믿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시험을 겪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더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이어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온전하고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되어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도록, 견딤은 온전한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야고보서 1:4 · 본디새김

견딤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기를 버티는 일이 아닙니다. 견딤이 자신의 일을 끝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반복되는 「온전한」은 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목적에 이르고 충분히 갖추어진 성숙한 상태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야고보는 비현실적인 완벽주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편안한 순간에만 작동하고 어려운 순간에는 사라진다면, 그 믿음은 아직 삶 전체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온전함은 믿음과 실제 삶 사이의 간격이 줄어드는 성숙입니다.

4절은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도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지혜가 모자란 사람이 있거든」으로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온전함을 이야기하자마자 아직 온전하지 못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결핍을 짚습니다.

그것은 지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다」의 그리스어는 헤게오마이(ἡγέομαι), 「온전한」은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입니다. 「시험을 거치는 일」에 해당하는 도키미온(δοκίμιον)은 시험하는 과정 또는 시험을 통해 확인된 참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주시지만, 사람은 두 마음으로 흔들린다

야고보서 1:5–8 본문 →

여러분 가운데 지혜가 모자란 사람이 있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에게 주어질 것입니다.야고보서 1:5 · 본디새김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는 지식의 양이나 문제 해결 능력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겪는 사람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하나님께 충실한 선택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서의 지혜는 잠언의 지혜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잠언 2:6은 지혜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말하고, 잠언 3:5–6은 자기 판단에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가르칩니다.

야고보는 지혜를 구하라는 명령보다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더 풍성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도움을 구할 때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거나 이전에 실패했던 문제를 다시 가져가면 책망받을까 염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의 결핍을 모욕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에게 지혜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다만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리고 이리저리 쓸리는 바다 물결 같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6 · 본디새김

이 말은 마음속에 질문이나 불확실성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뜻일까요?

두 동사는 모두 수동적인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물결은 스스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외부의 힘에 따라 밀리고 쓸립니다. 8절은 그 사람을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두 영혼을 가진’이라는 구성을 지닌 말로, 마음이 두 방향으로 갈라진 사람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문맥에서 문제 되는 의심은 단순한 지적 질문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마음과 다른 의지처를 붙들려는 마음 사이에서 갈라지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물론 6절의 의심에는 실제 불신이나 확신의 부족도 포함될 수 있으므로, 모든 의심을 충성심의 분열로만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8절의 「두 마음」과 「모든 길에서 흔들립니다」는 야고보의 관심이 순간적인 생각보다 삶의 방향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나누지 않고 주시는 분인데, 사람은 마음을 나누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요구하는 믿음은 모든 미래를 확실히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지혜를 하나님이 주실 수 있다는 신뢰 속에서 그분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그 믿음이 가장 쉽게 흔들리는 영역 가운데 하나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돈과 사회적 지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마음을 품은」의 그리스어는 딥쉬코스(δίψυχος)입니다.

낮은 사람은 높아지고, 높은 사람은 시든다

야고보서 1:9–11 본문 →

낮은 자리에 있는 형제는 자기가 높아진 것을 두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낮아진 것을 두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는 풀꽃처럼 지나가 버릴 것이니 말입니다.야고보서 1:9–10 · 본디새김

두 문장은 서로의 말을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랑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한 근거를 찾는 일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자랑의 근거를 반대로 놓습니다. 낮은 사람은 자신의 가난이나 사회적 비천함을 최종적인 신분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에게는 세상이 부여한 지위보다 높은 존귀함이 있습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은 자신을 높여 주는 재산과 명성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10절의 부유한 사람이 공동체 안의 부유한 신자인지, 공동체 밖의 부유한 사람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9절에는 「형제」라는 표현이 있지만 10절에는 그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 문장과의 대구를 강조하면 신자에게 주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고, 뒤에 등장하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2:6–7; 5:1–6)와 연결하면 외부의 부유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풀꽃처럼 지나가 버릴 것」이라는 비유는 분명합니다. 태양이 떠올라 뜨거운 열기를 내리쬐면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집니다.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 이미지는 이사야 40:6–8과 가까이 연결됩니다. 이사야서에서 풀과 꽃은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 문맥에서 이스라엘은 포로 생활과 역사적 격변 속에 있으며, 예언자는 인간의 덧없음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선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야고보는 이 이미지를 부유한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재산은 인간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지만 인간 자체를 영원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11절 끝에서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가는 길에서」 시듭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과 계획을 진행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시들어 갑니다. 재산을 늘리고, 사업을 확장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그 길도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유함 자체가 모든 경우에 죄라는 선언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부유함을 자신의 최종적인 안전과 가치의 근거로 삼는 생각을 뿌리에서 흔듭니다.

그렇다면 시험 속에서 끝까지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시드는 풀꽃에서 시들지 않는 약속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시험은 어떻게 죽음으로 이어지는가

야고보서 1:12–16 본문 →

시험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는 단련을 거쳐 인정받은 뒤에 생명의 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관입니다.야고보서 1:12 · 본디새김

이것은 2절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견딤이 사람을 온전하게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 끝까지 견디는 사람에게 약속된 생명을 보여 줍니다. 「생명의 관」이 생명으로 이루어진 관인지, 생명을 상으로 주는 관인지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이 문맥에서 중심은 생명이라는 약속입니다.

약속을 받는 사람은 단순히 시험을 잘 참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견딤은 고집과 다릅니다.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도, 다른 대안이 없어서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견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둡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시험에 빠뜨리는 분도 하나님입니까?

시험을 받을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악에 시험받으실 수 없는 분이고, 그분 자신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13 · 본디새김

같은 시험이라는 말이 이어지지만 초점이 달라졌습니다. 2–12절은 시험을 겪는 믿음이 어떻게 견딤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폈고, 13–15절은 사람이 어떻게 시험 속에서 죄로 이끌리는지를 다룹니다.

성경에서 시험은 믿음이 검증되는 시련을 가리킬 수도 있고, 악으로 이끌리는 유혹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같은 어려움 속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도 있고, 욕망에 따라 악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둘을 엄격한 두 사건으로 분리하기보다, 시련 속에서 죄가 발생하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나오고 미끼에 걸려 시험을 받습니다.야고보서 1:14 · 본디새김

욕망은 사람을 끌어내고 미끼로 유혹하는 힘처럼 그려집니다. 본문이 주목하는 것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욕망이 사람을 사로잡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마음 안의 움직임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끌어당기고, 사람은 그 욕망이 약속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욕망이 삶의 선택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이 과정을 출산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다음에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는 다 자라 죽음을 낳습니다.야고보서 1:15 · 본디새김

보통 탄생은 새 생명의 시작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탄생이 거듭될수록 죽음이 가까워집니다.

죄는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시작해 행동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사람을 파괴하는 결과에 이릅니다. 야고보는 죄를 금지된 행동의 목록으로 설명하지 않고, 사람이 어떤 욕망을 키우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악한 욕망의 출처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사람을 괴롭히는 모든 외부 상황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악한 선택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핑계 삼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속지 마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이라고 짧게 경고합니다. 이 말은 다음 문단을 여는 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2:1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서 시험의 초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는가에 있습니다. 야고보서 1:13–15가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악으로 유혹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이 구별은 두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같은 시험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긴장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습니다. 야고보의 말은 유대 지혜 전통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집회서 15:11–20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경고하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죄를 명령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1:13과 매우 가까운 주제와 표현이지만, 집회서를 직접 인용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죄가 죽음을 낳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셨다

야고보서 1:17–18 본문 →

온갖 선한 베풂과 온전한 선물은 다 위에서 오는 것이고, 빛들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옵니다. 그분에게는 달라짐도 없고 방향이 바뀌면서 드리워지는 그림자도 없습니다.야고보서 1:17 · 본디새김

하나님은 사람을 악으로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 선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빛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늘의 빛들, 곧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신 창조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천체들은 빛을 비추지만 움직입니다. 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면서 빛과 그림자의 위치가 바뀌고, 계절에 따라 낮의 길이도 변합니다.

그러나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는 그런 변화에 종속되지 않으십니다.

11절에서는 해가 떠올라 풀을 말리고 꽃을 시들게 합니다. 17절에서는 그 빛의 근원이 되는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이 변함없이 선한 것을 베푸십니다. 본문이 두 장면의 대비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함께 읽으면 피조 세계의 변덕스러움과 창조주의 신실함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사람은 시들고 환경은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덕스럽게 선과 악을 번갈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뜻하시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를 그분이 지으신 것들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18 · 본디새김

이 한 문장이 1장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15절에서 죄는 다 자라 죽음을 「낳습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같은 동사인데, 주어와 결과가 정반대입니다.

| 1:15 — 욕망에서 시작된 길 | 1:18 —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길 |

| 욕망이 잉태한다 | 하나님이 뜻하신다 |

| 욕망이 죄를 낳는다 |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다 |

| 죄가 죽음을 낳는다 | 우리는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다 |

이 대조는 야고보서의 권면을 단순한 도덕주의로 읽지 않도록 해 줍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통제해서 스스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 일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나 외부의 강제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뜻하시어」, 곧 하나님 자신의 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뜻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욕망과 달리 생명을 낳으시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진리의 말씀」으로 이루셨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복음과 연결하여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에베소서 1:13에서도 진리의 말씀은 구원의 복음과 연결되며, 베드로전서 1:23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새로운 탄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1:18 자체는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담겨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편지의 첫머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야고보가 말하는 새로운 탄생과 구원하는 말씀을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구원의 현실과 분리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낳으신 목적은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는 수확에서 먼저 얻은 열매로,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진 것이며 동시에 수확 전체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낳으신 사람들이 그분의 피조 세계 안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으로, 또한 그들 뒤에 이어질 더 큰 수확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18절만으로 그 수확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완성되는지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새롭게 낳으신 목적은 개인의 내면 변화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께 속한 삶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바뀝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하게 됩니까?

조금 더 깊이

15절과 18절의 동사는 아포퀴오(ἀποκυέω), 곧 낳다, 출산하다라는 동사로, 두 절에 서로 다른 형태가 쓰였습니다. 「첫 열매」에 해당하는 아파르케(ἀπαρχή)는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몫이기도 했습니다(신명기 26:1–11).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모습

야고보서 1:19–21 본문 →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야고보서 1:1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인간관계에 관한 훌륭한 조언으로 자주 읽히고, 실제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말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선언 바로 뒤에 놓고, 21절에서는 「심어진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먼저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19–20절이 인간관계의 말과 분노를 직접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듣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로만 한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달라져야 합니다.

세 가지 권면은 인간이 자신을 중심에 놓는 습관을 거스릅니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듣기 전에 무엇을 대답할지 생각하고, 때로는 아직 일어난 일을 다 알지 못하면서 분노합니다.

사람의 성냄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20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의로운 질서,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 등 여러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적어도 인간의 분노가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이루는 적절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자신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잘못된 일을 보고 분노할 이유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느끼는 것과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사람의 감정적인 확신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온갖 더러움과 넘쳐 나는 악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목숨을 구원할 수 있는 그 심어진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야고보서 1:21 · 본디새김

「벗어 버리고」에는 옷을 벗는 듯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절의 중심 명령은 「받아들이십시오」입니다. 그런데 이미 심어진 것을 어떻게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18절을 기억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을 새롭게 낳으셨고, 그 말씀은 이미 그들의 삶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말씀을 거스르는 태도를 버리고, 그 말씀이 자신들의 삶을 형성하도록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응답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응답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그 태도를 야고보는 「온유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온유함은 나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정말 받아들였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야고보는 거울 하나를 가져옵니다.

거울을 보고도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사람

야고보서 1:22–25 본문 →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이가 되십시오.야고보서 1:22 · 본디새김

야고보가 비판하는 것은 듣는 것 자체가 아니라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자기기만일까요? 말씀을 들으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안다는 사실을 이미 행한 것처럼 여깁니다.

어떤 잘못이 왜 잘못인지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잘못을 계속 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에 깊이 감동하고도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간격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에 자기가 타고난 얼굴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23 · 본디새김

고대의 거울은 닦은 금속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은 거울이 얼마나 선명했는지가 아니라 거울을 보고 돌아선 뒤의 행동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기를 들여다보고는 가 버렸고, 곧 자기가 어떠했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야고보서 1:24 · 본디새김

사람이 거울을 보는 목적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 직후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잊어버린다면, 거울을 본 일이 아무런 효과도 남기지 못한 셈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은 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어떤 삶으로 부름받았는지를 보게 합니다. 그러나 그 발견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말씀을 듣는 행위는 삶에 변화를 남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유의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거기 머문 사람, 곧 듣고 잊어버리는 이가 아니라 일을 행하는 이가 된 사람, 그는 자기 행함에서 복이 있을 것입니다.야고보서 1:25 · 본디새김

앞의 사람은 보고 떠났습니다. 뒤의 사람은 들여다보고 머물렀습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의 감동보다 그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의 온전한 율법」은 언뜻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율법은 명령과 의무를, 자유는 그런 의무에서 벗어난 상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표현에서 자유와 율법은 서로 적대하는 개념으로 놓이지 않습니다.

「자유의 율법」은 하나님의 율법이 자유를 가져온다는 뜻으로도, 자유로운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율법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고, 율법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문은 그 관계를 한 가지로 설명하지 않고, 이 율법을 들여다보고 머물며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음 장에서 야고보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고(2:8), 사람들이 「자유의 율법」을 따라 심판받을 자들처럼 말하고 행해야 한다고 권합니다(2:12). 따라서 여기서 자유를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상태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욕망에 끌려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자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7:24–27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과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대조하십니다. 한 사람은 반석 위에, 다른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야고보는 집 대신 거울을 사용하지만, 두 장면이 묻는 질문은 같습니다. 들은 말씀이 실제 삶의 토대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존경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기는 일과 관련됩니다.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을 서로 떼어 놓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행함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낳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들을 낳으셨다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행함은 그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출발점이 아니라, 그 생명이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 사실을 매우 구체적인 장소에서 확인하게 합니다. 사람의 입과 고통받는 이웃의 삶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7장과의 연결은 직접적인 인용이라기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야고보의 권면 사이의 뚜렷한 주제적 연결입니다. 야고보가 마태복음의 기록을 직접 사용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종교란 무엇인가

야고보서 1:26–27 본문 →

누구든지 자기가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고 도리어 자기 마음을 속인다면, 그 사람의 종교는 헛됩니다.야고보서 1:26 · 본디새김

‘종교’는 종교적 예식이나 경건의 실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종교적 행위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다만 종교적이라는 자기 평가가 실제 삶과 어긋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혀입니다. 19절에서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했던 권면이 이제 돌아옵니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고, 분노에 찬 말을 쏟아 내고, 자신의 언어로 사람을 상처 입힌다면 그 경건은 자신의 삶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속인다면」은 22절의 자기기만을 떠올리게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도, 혀를 다스리지 않으면서 경건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자신을 속입니다. 두 사람의 문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는 이것입니다 — 고아와 과부가 환난을 겪을 때에 찾아가 돌보는 것,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흠 없이 지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27 · 본디새김

고아와 과부는 우연히 선택된 사례가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족과 가구의 보호는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보호자를 잃은 고아와 남편을 잃은 과부는 경제적·법적 취약성에 놓이기 쉬웠습니다. 출애굽기 22:22–24는 과부와 고아를 학대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신명기 10:18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하며, 이사야 1:17도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돌보는 일을 요구합니다.

이 전통에서 약한 사람을 돕는 행위는 착한 사람의 선택적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그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찾아가 돌보는 것」은 찾아가 살피고 돌본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품거나 멀리서 좋은 뜻을 표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상대방이 처한 어려움 속으로 직접 다가가 필요를 살피는 행동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웃을 돌보는 것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흠 없이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물러나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렇게 나누지 않습니다. 고아와 과부의 환난 속으로 찾아가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고 하므로, 이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끊거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세상’은 뒤에 하나님과 대립하는 욕망 및 가치 체계와 연결됩니다(4:4). 이런 문맥에서 자신을 흠 없이 지킨다는 것은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교만과 탐욕과 차별에 동화되지 않는 삶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부유한 사람을 높이고 낮은 사람을 무시하기 쉽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그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깨끗한 경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종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트레스케이아(θρησκεία), 「찾아가 돌보는 것」은 에피스켑토마이(ἐπισκέπτομαι)입니다.

하나님이 낳으신 생명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야고보서 1:1–27 본문 →

시험, 부유함, 말씀 듣기를 지나는 동안 야고보는 사람의 삶이 하나로 통합되기를 요청했습니다. 4절의 「온전함」은 고난이나 의심이나 분노를 한 번도 겪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실제 행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지 않는 삶입니다. 그 반대편에 바다 물결처럼 흔들리는 「두 마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청을 인간의 의지력만으로 성취해야 한다고 읽으면 1장의 가장 중요한 문장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고, 말씀을 주셨고, 지혜를 구하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고 아낌없이 주십니다. 이 선언들이 먼저 나온 뒤에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하라는 권면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1장의 질문은 자신이 얼마나 종교적인 사람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낳고 있는가입니다.

야고보는 이 모든 설명을 거창한 종교적 장면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예배의 장소나 신학적 논쟁의 자리 대신, 환난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보여 줍니다.

그들 곁으로 누군가 찾아갑니다. 그들의 형편을 살피고 돌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 말씀을 가지고 실제 삶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생명이,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이르는 모습.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