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인사와 시련 속의 지혜

시험 속에서 무엇이 태어나는가

야고보서 1장을 읽으면 처음에는 서로 다른 교훈들이 빠르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련을 기뻐하라는 말이 나오고, 지혜를 구하라는 권면이 뒤따릅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욕심과 죄의 관계, 말을 조심하라는 권면이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거울을 보는 사람의 이야기와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돌보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장을 자세히 읽으면, 흩어져 있는 듯한 권면들을 하나로 묶는 질문이 드러납니다.

사람은 무엇에 이끌려 살아갑니까? 그리고 그 삶은 마침내 무엇을 낳습니까?

야고보는 두 가지 탄생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낳습니다(1:15).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1:18).

하나는 죽음을 낳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삶입니다.

이 대조를 발견하면 야고보서 1장의 권면들이 새롭게 읽힙니다. 시련을 견디는 일, 지혜를 구하는 일, 부유함을 바라보는 관점, 말을 삼가는 일, 약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서로 무관한 행동 지침의 목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삶의 출발점은 사람의 결심이 아니라, 사람을 새롭게 낳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101장 본문 읽기 →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보내는 기쁨의 인사

야고보서 1:1 본문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야고보가,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야고보서 1:1 · 두루새김

야고보는 자기 이름에 아무런 직함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종」(δοῦλος)으로 옮긴 원문의 말은 자유롭게 고용된 일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한 노예를 가리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권위를 설명하는 대신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존경받는 교사가 아니라, 야고보가 자신의 삶을 바쳐 섬기는 주님으로 소개되십니다.

야고보서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거의 없고, 예수님의 이름도 1:1과 2:1에서만 분명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리에서 시작되고, 뒤따르는 권면들은 그 주님께 속한 사람들의 삶을 다룹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는 두 가지로 읽힙니다. ‘흩어짐’은 본래 이스라엘 땅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므로, 실제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열두 지파라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 전체에 적용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독자들은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와 약속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들에게 건네는 첫마디에는 뜻밖의 연결이 있습니다.

「인사합니다」(χαίρω)로 옮긴 원문의 말은 기쁨을 뜻하는 어근에서 나온, 당시 통용되던 정해진 편지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기쁨」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일상적인 인사말에 담긴 기쁨이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요구되는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전통적으로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자 예수님의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와 같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갈라디아서 1:19; 사도행전 15:13). 다만 편지 자체는 저자가 누구인지 더 밝히지 않습니다. 실제 야고보가 직접 작성했다는 견해와 후대에 그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모두 있으며, 언제 쓰였는지도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험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이유

야고보서 1:2–4 본문 →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을 온전히 기쁜 일로 여기십시오.야고보서 1:2 · 두루새김

이 말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거스릅니다. 시련이 닥치면 사람은 괴롭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기뻐하십시오」라고만 말하지 않고 「기쁜 일로 여기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여기다’는 어떤 것을 판단하거나 평가한다는 뜻으로, 고통을 즐거운 감정으로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라 시련의 의미를 새롭게 판단하라는 요청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거치면서 참고 견디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3 · 두루새김

시련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참고 견디는 힘이 자라날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시험을 거치면서」(δοκίμιον)로 옮긴 원문의 말은 시험하는 과정 또는 시험을 통해 확인된 참됨을 가리킬 수 있는데, 어느 쪽으로 읽든 중심에는 믿음이 실제로 확인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그 믿음이 이어지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시련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믿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만 시련을 겪는 모든 사람이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고 견디는 힘이 제 역할을 끝까지 다하게 하십시오. 이는 여러분이 온전하고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되어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4 · 두루새김

참고 견디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기를 버티는 일이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견디는 힘이 이루어야 할 일과 그 결과로 자라날 사람을 설명할 때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두루새김은 각각 「제 역할을 끝까지 다하게」와 「온전하고」로 옮겼습니다. 이 단어는 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목적에 이르고 충분히 갖추어진 성숙한 상태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야고보는 비현실적인 완벽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편안한 순간에만 작동하고 어려운 순간에는 사라진다면, 그 믿음은 아직 삶 전체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온전함은 믿음과 실제 삶 사이의 간격이 줄어드는 성숙입니다.

4절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라고 말하고, 바로 다음 절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으로 이어집니다. 야고보는 온전함을 이야기하자마자 아직 온전하지 못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게 부족한 것을 짚습니다.

그것은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주시지만, 사람은 두 마음으로 흔들린다

야고보서 1:5–8 본문 →

여러분 가운데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구하는 사람은 지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1:5 · 두루새김

시련을 겪는 사람에게는 지식의 양보다 상황을 이해하고 바르게 살아갈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하나님께 충실한 선택인지 가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잠언의 전통(잠언 2:6; 3:5–6)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지혜를 구하라는 명령보다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더 풍성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도움을 구할 때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 꾸지람을 들을까 염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무라지 않으십니다」라는 말처럼,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의 부족함을 모욕하지 않으십니다. 지혜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다만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야고보서 1:6 · 두루새김

이 말은 마음속에 질문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뜻일까요? 원문에서 물결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두 동사는 모두 외부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8절은 그 사람이 「두 마음을 품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글자 그대로 ‘두 영혼을 가진’이라는 짜임을 지닌 말입니다.

따라서 문맥에서 문제 되는 의심은 단순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마음과 다른 의지처를 붙들려는 마음 사이에서 갈라지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물론 6절의 의심에는 실제 불신이나 확신의 부족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8절의 「두 마음」과 「하는 일마다 흔들리는 사람」은 야고보의 관심이 순간적인 생각보다 삶의 방향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나누지 않고 주시는 분인데, 사람은 마음을 나누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요구하는 믿음은 모든 미래를 확실히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필요한 지혜를 하나님이 주실 수 있다는 신뢰 속에서 그분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그 믿음이 가장 쉽게 흔들리는 영역 가운데 하나인 돈과 사회적 지위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낮은 사람은 높아지고, 높은 사람은 시든다

야고보서 1:9–11 본문 →

낮은 처지에 있는 형제자매는 자신이 높아진 것을 자랑하십시오. 반대로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낮아진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유한 사람도 풀꽃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9–10 · 두루새김

두 문장은 서로의 말을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랑은 자신이 남보다 뛰어난 근거를 찾는 일입니다. 그러나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가난이나 낮은 지위를 최종적인 신분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에게는 세상이 부여한 지위보다 높은 존귀함이 있습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은 자신을 높여 주는 재산과 명성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해석이 갈립니다. 9절에는 「형제자매」라는 표현이 있지만 10절에는 그 말이 없어서, 10절의 부유한 사람이 공동체 안의 신자인지 밖의 사람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두 문장이 짝을 이루는 구성을 강조하면 신자에게 주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고, 뒤에 등장하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2:6–7; 5:1–6)와 연결하면 외부의 부유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야고보의 비유는 분명합니다. 「해가 뜨거운 열기와 함께 떠오르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그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집니다.」 재산은 안정감을 줄 수 있지만 인간 자체를 영원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11절 끝에서 부유한 사람은 「자기 일을 하는 가운데」 시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늘리고 사업을 확장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시들어 갑니다. 이것은 부유함 자체가 모든 경우에 죄라는 선언과는 다르지만, 부유함을 자신의 최종적인 안전과 가치의 근거로 삼는 생각을 뿌리에서 흔듭니다.

그렇다면 시련 속에서 끝까지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금 더 깊이

풀과 꽃의 이미지는 이사야 40:6–8과 가까이 연결됩니다. 이사야서에서 풀과 꽃은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포로 생활과 역사의 큰 변화 속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예언자는 인간의 덧없음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선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야고보는 이 이미지를 부유한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시험은 어떻게 죽음으로 이어지는가

야고보서 1:12–16 본문 →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거쳐 인정받으면 생명의 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관입니다.야고보서 1:12 · 두루새김

2–4절이 참고 견디는 힘이 사람을 온전하게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했다면, 12절은 끝까지 견디는 사람에게 약속된 생명을 보여 줍니다. 「생명의 관」은 승리나 영예를 상징하는 관의 이미지입니다. 생명으로 이루어진 관인지, 생명을 상으로 주는 관인지는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중심은 생명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받는 사람은 단순히 시련을 잘 참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도, 다른 대안이 없어서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견딤은 고집과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둡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시험에 빠뜨리는 분도 하나님입니까?

유혹을 받을 때 아무도 「하나님께서 나를 유혹하십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유혹당하실 수 없는 분이시고, 그분 자신은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13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앞의 시련과 여기의 유혹을 같은 말로 표현하지만, 초점이 달라져 두루새김은 이 자리에서 「유혹」이라는 말을 씁니다. 같은 어려움 속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도 있고, 욕심에 따라 악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둘을 엄격히 분리하기보다, 시련 속에서 생기는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욕심에 끌려가 미끼에 걸리면서 유혹을 받습니다.야고보서 1:14 · 두루새김

욕심은 사람을 끌어내고 미끼로 유혹하는 힘처럼 그려집니다. 처음에는 마음 안의 움직임이 사람을 끌어당기고, 사람은 그 욕심이 약속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욕심이 삶의 선택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 욕심은 아이를 배어 죄를 낳습니다. 죄는 다 자라서 죽음을 낳습니다.야고보서 1:15 · 두루새김

보통 탄생은 새 생명의 시작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탄생이 거듭될수록 죽음이 가까워집니다.

죄는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해 행동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사람을 파괴하는 결과에 이릅니다. 야고보는 사람을 괴롭히는 모든 외부 상황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지만, 자신의 악한 선택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핑계 삼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라고 짧게 경고합니다. 이 말은 다음 문단을 여는 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시험은 믿음이 확인되는 시련을 가리킬 수도 있고, 악으로 이끌리는 유혹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22:1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말하지만, 그 이야기에서 초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는가에 있습니다. 야고보서 1:13–15가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악으로 유혹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이 구별은 두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같은 표현이 쓰인다는 긴장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습니다. 또 집회서 15:11–20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경고하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죄를 명령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데, 야고보서 1:13과 매우 가까운 주제와 표현입니다. 다만 직접 인용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죄가 죽음을 낳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셨다

야고보서 1:17–18 본문 →

좋은 것과 온전한 선물은 모두 위에서, 곧 빛들의 아버지께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함도, 움직임에 따라 생기는 그림자도 없습니다.야고보서 1:17 · 두루새김

하나님은 사람을 악으로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빛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늘의 빛들, 곧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신 창조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해와 달과 별은 빛을 비추지만 움직여서 빛과 그림자의 위치가 바뀌고, 계절에 따라 낮의 길이도 변합니다. 그러나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는 그런 변화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11절에서는 해가 떠올라 풀을 말리고 꽃을 시들게 했습니다. 본문이 두 장면의 대비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함께 읽으면 지어진 세계의 변덕스러움과 창조주의 한결같으심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사람은 시들고 환경은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덕스럽게 선과 악을 번갈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제 야고보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을 말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우리를 그분이 만드신 것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18 · 두루새김

이 한 문장이 1장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15절에서 죄는 다 자라 죽음을 「낳습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두 절에는 낳다, 출산하다를 뜻하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 아포퀴오(ἀποκυέω)가 서로 다른 형태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주어와 결과가 정반대입니다.

| 1:15 — 욕심에서 시작된 길 | 1:18 —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길 | | --- | --- | | 욕심이 아이를 밴다 | 하나님이 뜻하신다 | | 욕심이 죄를 낳는다 |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다 | | 죄가 죽음을 낳는다 | 우리는 그분이 만드신 것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된다 |

이 대조 덕분에 야고보서의 권면은 단순히 도덕을 강조하는 말로 읽히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욕심을 완벽하게 통제해서 스스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 일은 우연이나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일어났습니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욕심과 달리, 생명을 낳으시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진리의 말씀」으로 이루셨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복음과 연결하여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에베소서 1:13에서도 진리의 말씀은 구원의 복음과 연결되며, 베드로전서 1:23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새로운 탄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1:18 자체는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담겨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편지의 첫머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으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새로운 탄생을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구원의 현실과 분리할 이유도 없습니다.

「첫 열매」는 수확에서 먼저 얻은 열매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몫이기도 했습니다(신명기 26:1–11). 그래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낳으신 사람들이 그분이 지으신 세계 안에서 따로 구별된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으로도, 그 뒤에 이어질 더 큰 수확의 시작을 알린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18절만으로 그 수확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완성되는지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새롭게 낳으신 목적은 개인의 마음속 변화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께 속한 삶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이 바뀝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모습

야고보서 1:19–21 본문 →

내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누구나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와 화내기는 천천히 해야 합니다.야고보서 1:1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인간관계에 관한 훌륭한 조언으로 자주 읽히고, 실제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말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선언 바로 뒤에 놓고, 21절에서는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먼저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19–20절은 인간관계의 말과 분노를 직접 다루므로, 듣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로만 한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듣기 전에 무엇을 대답할지 생각하고, 일어난 일을 다 알지 못하면서 화를 냅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삶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20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삶」(δικαιοσύνη)으로 옮긴 원문의 표현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의로운 질서,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 등 여러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인간의 분노가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이루는 적절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자신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잘못된 일을 보고 분노할 이유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느끼는 것과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삶을 이룬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사람의 감정적인 확신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온갖 더러움과 넘쳐 나는 악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야고보서 1:21 · 두루새김

「벗어 버리고」에는 옷을 벗는 듯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절의 중심 명령은 「받아들이십시오」이고, 그것도 이미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미 심어진 것을 어떻게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18절을 기억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을 새롭게 낳으셨고, 그 말씀은 이미 그들의 삶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말씀을 거스르는 태도를 버리고, 그 말씀이 삶을 빚어 가도록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응답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응답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야고보는 그 태도를 「온순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온순함은 나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정말 받아들였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야고보는 거울 하나를 가져옵니다.

거울을 보고도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사람

야고보서 1:22–25 본문 →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듣기만 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서 1:22 · 두루새김

왜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일일까요? 우리는 때때로 안다는 사실을 이미 실천한 것처럼 여깁니다. 어떤 잘못이 왜 잘못인지 설명하면서도 그 잘못을 계속 저지를 수 있고, 사랑에 관한 가르침에 깊이 감동하고도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야고보서 1:23 · 두루새김

고대의 거울은 닦은 금속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비유의 핵심은 거울이 얼마나 선명했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모습을 보고도 돌아서면 곧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립니다.야고보서 1:24 · 두루새김

거울을 보는 목적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인데, 본 직후 잊어버린다면 거울을 본 일이 아무런 효과도 남기지 못한 셈입니다. 말씀도 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어떤 삶으로 부름받았는지를 보게 합니다. 그러나 그 발견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말씀을 듣는 행위는 삶에 변화를 남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온전한 율법을 자세히 살펴보고 계속 따르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실천하는 가운데 복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1:25 · 두루새김

앞의 사람은 보고 떠났습니다. 뒤의 사람은 자세히 살펴보고 계속 따릅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의 감동보다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를 주는 온전한 율법」은 언뜻 서로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율법은 명령과 의무를, 자유는 그런 의무에서 벗어난 상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원문에서 자유와 율법의 관계는 하나님의 율법이 자유를 가져온다는 뜻, 자유로운 백성의 삶을 정하는 율법이라는 뜻,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이해된 율법이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원문은 그 관계를 한 가지로 설명하지 않지만, 이 율법을 살펴보고 계속 따르며 실천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음 장에서 야고보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고(2:8), 이 율법을 따라 심판받을 자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라고 권합니다(2:12). 따라서 여기서 자유를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상태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자유는 말씀을 듣고도 욕심에 끌려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자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실천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낳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들을 낳으셨다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실천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출발점이 아니라, 그 생명이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 사실을 매우 구체적인 장소에서 확인하게 합니다. 사람의 입과 고통받는 이웃의 삶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대목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뚜렷하게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7:24–27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과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바위 위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으로 대조하십니다. 야고보는 집 대신 거울을 사용하지만, 두 장면은 들은 말씀이 실제 삶의 토대가 되었는지를 똑같이 묻습니다. 다만 직접적인 인용이라기보다 주제가 이어지는 모습이며, 야고보가 마태복음의 기록을 직접 사용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연결은 편지 첫머리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 가르침을 존경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기는 일과 관련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종교란 무엇인가

야고보서 1:26–27 본문 →

자신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섬김은 헛됩니다.야고보서 1:26 · 두루새김

「섬김」(θρησκεία)으로 옮긴 원문의 말은 종교적 예식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실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종교적 행위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자기 평가가 실제 삶과 어긋날 수 있음을 지적하고, 그 대표적인 증거로 혀를 듭니다.

19절에서 말하기를 천천히 하라고 했던 권면이 이제 돌아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고 분노에 찬 말로 상처를 입힌다면, 그 섬김은 자신의 삶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속이는」이라는 표현은 22절의 자신을 속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도, 혀를 다스리지 않는 사람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는 섬김은 이렇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찾아가 돌보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깨끗이 지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27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족과 집안의 보호는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보호자를 잃은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은 경제적으로나 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기 쉬웠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특별히 돌보아야 할 사람들로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약한 사람을 돕는 일은 착한 사람이 선택해서 하는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으시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그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찾아가 돌보고」(ἐπισκέπτομαι)로 옮긴 원문의 말은 찾아가 살피고 돌본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멀리서 안타까운 마음을 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상대방이 처한 어려움 속으로 직접 다가가 필요를 살피는 행동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와 함께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깨끗이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물러나는 일처럼 보이지만, 야고보는 그렇게 나누지 않습니다. 고통 속으로 찾아가면서도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고 하므로, 이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끊거나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세상’은 뒤에 하나님과 대립하는 욕심과 가치관에 연결됩니다(4:4). 자신을 깨끗이 지킨다는 것은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교만과 탐욕과 차별에 물들지 않는 삶입니다. 세상은 부유한 사람을 높이고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기 쉽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그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2:22–24는 남편을 잃은 여자들과 고아를 학대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0:18은 하나님께서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고 말하고, 이사야 1:17도 그들의 권리를 돌보는 일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낳으신 생명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야고보서 1:1–27 본문 →

야고보서 1장의 여러 권면을 지나고 나면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일관된 흐름이 드러납니다. 시련은 사람을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게 할 수도, 죄로 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은 모두 자신의 가치를 무엇에 두는지 질문받습니다. 들은 말씀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속이는 일로 끝날 수 있습니다. 4절의 「온전하고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은 고난이나 의심이나 분노를 한 번도 겪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실제 행동이 갈라지지 않은 사람이며, 그 반대편에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청을 인간의 의지력만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읽으면 1장의 가장 중요한 문장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고 아낌없이 주십니다.

이 선언들이 먼저 나온 뒤에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라는 권면이 이어집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죽음을 낳는 길 맞은편에, 자신의 뜻으로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길이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두려움과 욕심만을 따라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를 구하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분노를 삼가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모든 설명을 거창한 종교적 장면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예배의 장소나 신학적 논쟁의 자리 대신,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보여 줍니다. 그들 곁으로 누군가 찾아갑니다. 그들의 형편을 살피고 돌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생명이,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이르는 모습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