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차별과 행함

믿음은 누구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가

야고보서 2장은 교회에 들어온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한 사람은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가난하고 옷도 더럽습니다. 사람들은 첫 번째 사람에게 좋은 자리를 내어 주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서 있거나 발판 아래에 앉으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이 장면을 통해 교회의 예절이나 환대의 기술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주님이신데, 왜 여러분은 사람의 영광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까?

이 장에는 두 종류의 믿음이 등장합니다. 앞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을 차별하는 믿음이 문제 됩니다. 뒷부분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믿으면서도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믿음이 문제 됩니다. 둘 다 믿음의 내용을 입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믿음이 실제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종교 규칙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들이 이미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이 이미 주신 율법, 그리고 그들이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1장 마지막에서 말씀을 행하는 삶을 말했던 야고보는 이제 그 행함이 가장 먼저 드러나야 할 자리, 곧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갑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102장 본문 읽기 →

영광의 주님을 믿으면서 화려한 옷에 마음을 빼앗기다

야고보서 2:1–4 본문 →

나의 형제 여러분, 사람을 겉모습에 따라 차별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곧 영광의 주를 믿는 그 믿음을 지니지 마십시오.야고보서 2:1 · 본디새김

첫 문장부터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합니다.

하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곧 영광의 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겉모습」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2:8에서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바로 다음 절에서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또 다른 영광을 등장시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번쩍이는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오는데,야고보서 2:2 · 본디새김

「번쩍이는 옷」과 「영광의 주」를 나란히 읽어 봅니다. 두 표현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다르지만, 공동체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먼저 반응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장신구와 의복은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두 사람의 재산을 조사하지 않습니다. 모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볼 수 있는 외양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 외양만으로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번쩍이는 옷을 입은 사람을 눈여겨보고 「그대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대는 거기 서 있으십시오. 아니면 내 발판 아래에 앉으십시오」 한다면,야고보서 2:3 · 본디새김

두 사람에게 건네는 말은 문법적으로 같은 명령형입니다. 그리스어에서는 두 문장 모두 강조된 「그대는」(σύ)으로 시작합니다.

차별은 말투의 격식보다 지정된 장소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좌석을 배분하는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두 사람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공간으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아무런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공동체가 누구를 귀하게 여기는지 드러납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판정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서 갈라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악한 생각을 품은 재판관이 된 것이 아닙니까?야고보서 2:4 · 본디새김

「갈라진 것」은 두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지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므로, 믿음과 판단이 서로 다른 기준을 따르며 마음이 갈라졌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 차별적인 구분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며, 실제로 두 사람을 서로 다른 자리로 갈라 놓은 장면이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야고보의 질문은 두 문제와 모두 관련되지만, 문법적으로 어느 쪽을 직접 말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표현이 더 날카롭습니다. 「악한 생각을 품은 재판관」. 사람들은 그저 자리를 안내했을 뿐, 누구의 죄를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관점에서는 자리를 지정하는 순간 이미 판단이 이루어졌습니다.

좋은 자리를 누구에게 내어 줄 것인가의 문제는, 사실 누구에게 존귀함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차별의 본질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기도 전에 겉모습을 근거로 그의 가치를 판정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판단의 기준은 영광의 주님이 아니라 화려한 옷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는 사회적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믿는지와 직접 충돌하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영광의 주」라는 표현은 그리스어에서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리스도의 영광을 강조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절의 「모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쉬나고게는 일반적으로 ‘모임’을 뜻하지만, 유대인의 회당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이 단어로 명시적으로 부르는 사례로는 야고보서 2:2가 특별하며, 5:14에서는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릅니다. 이런 언어 사용은 야고보서의 유대적 배경을 보여 주지만, 이 단어 하나만으로 그들의 모임이 실제 유대 회당 건물에서 이루어졌는지, 편지가 정확히 어느 시대에 작성되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을 공동체가 업신여기다

야고보서 2:5–7 본문 →

들으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을 믿음에는 부유한 이들로, 또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를 물려받을 이들로 고르신 것이 아닙니까?야고보서 2:5 · 본디새김

야고보는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을 제시합니다.

핵심은 가난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세상이 부여하는 가치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재산도 영향력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믿음에는 부유한 이들」로 고르셨습니다.

부요함의 기준이 바뀝니다.

가난 자체가 자동으로 구원의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장의 초점은 믿음의 부요함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낮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의 가치 체계를 뒤집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독자들이 자기 행동의 모순을 직접 보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이들이 바로 그 부유한 이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이들도 그들이 아닙니까?야고보서 2:6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신 사람을 공동체가 수치스럽게 대했습니다.

이 말은 부유한 사람 전체가 악하다는 일반론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경제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난한 신자들을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수신자들이 알고 있는 현실을 근거로 호소합니다. 그런데 공동체는 자신들을 억누르는 권력에는 굽실거리면서, 정작 함께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본문은 그 심리를 직접 해설하지 않지만, 부와 권력이 존중을 얻는 사회 속에서 믿는 사람들조차 그 기준을 내면화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7절에서 야고보는 문제를 다시 신앙의 중심으로 가져옵니다.

여러분에게 붙여진 그 아름다운 이름을 모독하는 이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야고보서 2:7 · 본디새김

「그 아름다운 이름」은 문맥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에게 존귀함을 주는 이름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후원자의 이름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이름의 존귀함보다 세상에서 권세 있는 사람의 인정에 더 크게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부와 지위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대신한다면, 공동체는 자기가 누구에게 속했는지 잊어버린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복음 6:20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고, 마태복음 5:3에서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두 본문의 강조점은 같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이나 권력을 근거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6절의 소송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빚이나 재산과 관련된 분쟁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특정 사건을 확정할 자료는 본문에 없습니다. 7절의 표현이 세례 때 그 이름을 부르거나 고백한 관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세례 의식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왕의 율법은 좋은 자리에 앉은 사람만 사랑하라고 하지 않는다

야고보서 2:8–11 본문 →

여러분이 성경에 적힌 대로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라는 그 왕의 율법을 참으로 지킨다면, 여러분은 잘하고 있습니다.야고보서 2:8 · 본디새김

야고보는 차별을 비판하면서 갑자기 율법을 인용합니다.

그가 인용한 것은 레위기 19:18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9:15는 재판에서 가난하다고 편들거나 권세 있다고 우대하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하라고 명령합니다. 야고보가 2장에서 다루는 두 가지 문제, 곧 사람을 지위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이미 레위기 19장에 함께 놓여 있습니다.

이 연결을 발견하면 야고보가 왜 좌석 배정이라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를 율법 위반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을 나와 동등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겉모습에 따라 한 사람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낮추는 행위는 이웃 사랑의 계명과 충돌합니다.

「왕의 율법」은 왕에게 속한 율법이라는 뜻으로도, 왕답거나 으뜸가는 율법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웃 사랑이 공동체의 삶을 판단하는 중심 기준으로 제시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여기서 독자들이 예상하기 어려운 논증을 시작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고도 한 가지에서 걸려 넘어지면, 그 모두에 대해 죄의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야고보서 2:10 · 본디새김

이 말은 작은 잘못 하나를 저지르면 가장 끔찍한 죄를 저지른 것과 도덕적으로 완전히 똑같아진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읽으면 야고보가 왜 다음 절을 덧붙였는지 놓치게 됩니다.

「간음하지 마라」고 말씀하신 분이 「살인하지 마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간음하지 않아도 살인한다면, 그대는 율법을 어긴 자가 된 것입니다.야고보서 2:11 · 본디새김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계명의 종류보다 계명을 주신 분이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간음과 살인은 그 피해와 결과가 다르지만, 어느 계명을 어기든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권위를 거스릅니다. 따라서 10절의 요점은 모든 죄의 무게가 동일하다는 데 있지 않고, 다른 계명을 잘 지킨다는 사실로 특정한 불순종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논증을 처음의 좌석 장면에 적용해 봅니다. 어떤 공동체는 살인이나 간음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성경의 권위도 열심히 가르치면서, 가난한 사람을 낮은 자리에 세워 두고 부유한 사람에게만 존귀함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을 금하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이 같은 분이라면, 이웃을 차별하는 문제를 사소하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잘 지키는 계명을 근거로, 지키지 않는 계명을 무시할 권리를 얻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왕의 율법」의 두 읽기에는 각각 문맥상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말했으므로, 왕의 나라를 물려받을 사람들이 지켜야 할 율법이라는 연결이 자연스럽습니다. 한편 이웃 사랑이 율법 가운데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의미도 문맥에 잘 어울립니다. 이 두 해석 중 하나만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심판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자비다

야고보서 2:12–13 본문 →

자유의 율법으로 심판받을 사람답게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하십시오.야고보서 2:12 · 본디새김

처음에는 그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 자신이 심판받을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2절과 3절의 사람들은 누가 좋은 자리에 앉을 만한지 판단했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사람을 판정하는 권한을 당연한 것처럼 행사하지 말고,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는 존재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자유의 율법」은 1:25에 이미 등장했습니다. 이 율법과 자유의 관계를 하나의 방식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야고보는 자유와 심판을 모순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차별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할 책임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 모든 논증을 하나의 문장으로 모읍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심판보다 우위에 서서 우쭐댑니다.야고보서 2:13 · 본디새김

자비가 마치 사람처럼 등장해 심판을 향해 승리를 자랑합니다. 「우쭐댑니다」(κατακαυχάομαι)로 옮긴 말은 다른 무엇을 상대로 자랑하거나 우위를 과시하는 뜻을 지닙니다.

야고보는 자랑할 수 있는 것의 자리를 바꾸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화려한 옷과 금가락지가 사람의 존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부유함도 권력도 아니라 자비가 심판 앞에서 당당하게 섭니다.

이 말을 하나님의 심판이 자비에 의해 폐지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문장은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 자비 없는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심판의 현실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대하는 사람의 삶에 자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자비는 어떻게 베풉니까? 그저 상대방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품으면 됩니까?

야고보는 다음 장면에서 자비를 말하는 입과 자비를 행하는 손을 구별합니다.

따뜻하게 지내라고 말하면서 옷을 주지 않는 사람

야고보서 2:14–17 본문 →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보서 2:14 · 본디새김

야고보서 2장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대목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믿음과 행위, 그리고 구원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을 곧바로 추상적인 신학 논쟁으로 가져가면 야고보가 실제로 무엇을 묻는지 놓치기 쉽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행위가 없습니다.

따라서 14절은 어떤 종류의 믿음이든 행위라는 별도의 공로를 추가해야 구원받는다는 명제를 곧바로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행위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믿음이 구원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 믿음이」도 앞에서 묘사한 믿음을 받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어 관사 하나만으로 특정한 종류의 믿음이라는 해석이 완전히 확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한 장면을 보여 줍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그날의 양식이 모자란 처지인데,야고보서 2:15 · 본디새김

이 사람들에게 모자란 것은 사치품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에게 「평화로이 가십시오. 따뜻하고 배부르게 지내십시오」 하고 말하는데, 여러분이 그들에게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야고보서 2:16 · 본디새김

말 자체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덧붙은 한 문장, 「여러분이 그들에게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는다면」입니다. 따뜻하게 지내려면 옷이 있어야 하고, 배부르게 지내려면 음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만 하고 필요한 것을 주지 않습니다.

「평화로이 가십시오」라는 축복은 역설적으로 공허해집니다. 상대방은 여전히 춥고 배고픕니다.

믿음도 그와 같아서, 행위가 없으면 그 자체로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17 · 본디새김

우리는 흔히 행위가 믿음을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에는 타당한 부분이 있지만, 야고보는 여기서 증거가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믿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굶주린 사람이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따뜻해지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부재는 한 사람의 실제 고통 속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2장 앞부분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부유한 사람에게 줄 자리는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존귀한 자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건넬 말은 있었지만 필요한 물건을 주지 않았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옷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공동체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야고보가 묻는 것은 믿음에 관한 말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그 믿음이 다른 사람의 삶에 실제로 무엇을 가져다주느냐입니다.

귀신들도 믿고 몸서리친다

야고보서 2:18–20 본문 →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위가 있습니다.」 행위 없이 그대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도 내 행위로 내 믿음을 그대에게 보여 주겠습니다.야고보서 2:18 · 본디새김

이 대목은 가상의 반론자가 어디까지 말하고 야고보의 대답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확정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논증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서로 떼어 놓으려는 생각에 도전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선행이 있으므로 각자 자기 몫만 가지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면적인 것이어서 직접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을 보여 줄 것입니까?

그리고 야고보는 뜻밖의 예를 제시합니다.

그대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믿습니까? 잘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믿고 몸서리칩니다.야고보서 2:19 · 본디새김

「하나님이 한 분이시다」는 고백은 신명기 6:4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만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언약적 고백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귀신들도 그 사실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귀신들에게 구원하는 믿음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확한 신학적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믿음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귀신들은 그 사실에 두려움으로 몸서리치기까지 하지만, 그 반응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은 아닙니다.

정확한 지식도, 강렬한 종교적 반응도 그 자체로 하나님께 충실한 믿음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고백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고백은 참됩니다. 그러나 참된 내용을 고백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아간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어떤 모습입니까? 야고보는 이제 유대 신앙 전통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하나를 불러냅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그리스어 사본에는 현대적인 따옴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18절의 반론자의 말을 「나에게는 행위가 있습니다」에서 마치는 읽기가 있고, 18절 끝까지 반론이 이어진다고 보는 읽기도 있으며, 19절까지 포함하는 해석도 제안되어 왔습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위가 있습니다」에서 누가 어떤 입장을 대변하는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으므로, 이 문장을 두 사람의 역할이 명확히 정해진 대화로 재구성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 온전해졌는가

야고보서 2:21–24 본문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바쳐 올림으로써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야고보서 2:21 · 본디새김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의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단지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이 이어질 아들이었습니다(창세기 21:12).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산으로 올라가 제단을 만들고 이삭을 그 위에 놓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들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그를 멈춥니다(창세기 22:11–12).

창세기에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경외를 시험하는 이야기이며,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이 대신 제물로 바쳐집니다. 야고보는 이 사건에서 아브라함이 실제로 행동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있었고 그 행위로 믿음이 온전해졌다는 것을 그대는 봅니다.야고보서 2:22 · 본디새김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족했으므로 행위라는 별개의 자격을 추가하여 완성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함께 일하고 있었고」는 협력한다는 뜻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행위를 통해 믿음이 「온전해졌습니다」. 목적에 이르고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순종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헤아려졌다」고 말하는 성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불렸습니다.야고보서 2:23 · 본디새김

창세기 15:6은 아브라함이 아직 이삭을 얻지 못했을 때, 후손의 약속을 믿은 사건에 속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의 행동을 통해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후 삶에서 실제 순종과 함께 일하고 있었고, 창세기 22장의 결정적인 사건에서 온전해졌다는 설명입니다.

창세기 15:6은 미래를 예언한 문장이 아니라 서술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루어졌습니다」는 예언의 성취라기보다, 앞서 선언된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로움이 후속 사건 속에서 충분한 표현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 선언이 실제 순종으로 입증되었다는 설명이 있고, 의롭게 됨이 믿음의 지속적인 순종을 통해 완성되는 것으로 읽는 설명도 있습니다. 야고보의 문장은 어느 하나를 기술적인 신학 용어로 명시하지 않지만, 믿음과 행위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벗」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15:6에 직접 나오지 않고, 역대기하 20:7과 이사야 41:8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업무 수행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명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이며, 그 관계는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바울과 충돌하는가?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은 봅니다.야고보서 2:24 · 본디새김

바울은 로마서 3:28에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별개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논증하고, 로마서 4:2–5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창세기 15:6을 인용합니다. 같은 아브라함, 같은 성경 구절, 같은 ‘의롭게 되다’라는 동사가 등장하는데 결론은 서로 달라 보입니다.

흔히 두 가지 구별이 제시됩니다. 첫째, 상대하는 문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나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하고, 야고보는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을 비판합니다. 이 설명에는 상당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둘째, ‘의롭게 되다’의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의로운 지위를 선언하는 뜻으로도, 정당함을 드러내는 뜻으로도 쓰일 수 있어서, 바울은 의롭다고 인정받는 근거를, 야고보는 믿음의 진실성이 행위에서 드러나는 일을 말한다고 구별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별만으로 완전히 해결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며 그 사건을 창세기 15:6의 성취와 연결하고, 바울이 반대하는 행위를 의식적인 율법 준수로만 좁히는 것도 로마서 4:4의 보수와 은혜의 대조를 생각하면 조심해야 합니다. 반대로 두 저자가 같은 질문에 정반대의 답을 한다고 단순화하는 것도 문맥을 무시하는 해석입니다.

바울 자신도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중요한 것이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이는 2:22와 가까운 관점입니다. 그래도 두 저자는 서로 다른 질문과 논증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그 표현들 사이에는 실제로 해석해야 할 긴장이 남습니다.

야고보서 2장 자체로 돌아오면 핵심은 뚜렷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실제 순종과 결코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행동은 일상적인 선행의 전형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특별합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혀 다른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조금 더 깊이

두 편지 사이의 직접적인 문학적 의존 관계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바울의 특정 편지를 읽고 반박한 것인지, 믿음과 행위에 관한 널리 퍼진 주장을 비판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22절의 「함께 일하고 있었고」는 그리스어 쉬네르게오에서, 24절의 「의롭게 되다」는 디카이오오에서 왔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이 같은 자리에 서다

야고보서 2:25 본문 →

창녀 라합도 마찬가지로, 심부름꾼들을 맞아들이고 다른 길로 내보냄으로써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야고보서 2:25 · 본디새김

아브라함 다음에 라합이 등장한다는 것은 뜻밖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립니다. 반면 라합은 여리고에 살던 이방 여성이며 창녀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두 사람을 같은 논증의 증인으로 세웁니다.

2장 앞부분에서 야고보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차별하는 공동체를 비판했습니다. 이제 존귀한 조상과 사회적으로 멸시받을 수 있는 여성을 나란히 세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실재를 판단할 때 사회적 지위가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물 선택에서도 드러납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라합은 여리고 왕이 찾는 두 사람을 숨겨 줍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 2:9–11에 나타납니다. 라합은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여호와야훼께서 하늘 위와 땅 아래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합니다. 19절에서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믿는다고 했듯이, 라합 역시 여호와야훼가 참 하나님이심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라합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면 여리고의 왕보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고, 실제 위험을 무릅쓰고 심부름꾼들을 숨겨 다른 길로 빠져나가게 돕습니다. 야고보는 라합의 신학적 언어를 분석하지 않고,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제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소중한 아들을 바치는 자리까지 나아갔고, 라합은 자기 도시의 왕에게 맞서 심부름꾼들을 보호했습니다. 물론 두 사건의 성격과 도덕적 질문은 서로 다르며, 야고보가 라합의 모든 행동을 윤리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닙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례가 아브라함에게만 해당한다면, 누군가는 그것이 위대한 조상에게만 가능한 순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라합이 같은 자리에 등장함으로써 그런 생각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야고보가 두 사람에게서 발견한 공통점은 그들의 신분이 아니라, 믿음이 실제 선택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서 11:31도 라합을 믿음의 사례로 제시하며, 라합이 심부름꾼들을 평화롭게 맞아들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야고보는 같은 사건을 행위의 관점에서 말합니다. 성경은 라합의 믿음과 행동을 서로 경쟁하는 두 설명으로 제시하지 않고, 둘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명합니다.

영이 없는 몸, 행위가 없는 믿음

야고보서 2:26 본문 →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이, 행위가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2:26 · 본디새김

야고보는 긴 논증을 아주 짧은 비유로 끝냅니다.

「영」은 문맥상 몸에 생명을 있게 하는 영 또는 생명의 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상세한 인간론을 전개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몸에서 생명이 사라졌을 때의 상태입니다. 손과 발이 있고 겉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과 비슷할 수 있지만, 생명이 없다면 그 몸은 죽은 것입니다.

행위 없는 믿음에도 믿음의 언어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도, 올바른 신학적 지식도, 자신이 믿는 사람이라는 확신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위가 없다면 야고보는 그 믿음을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비유를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가 행위 자체를 믿음에 생명을 만들어 넣는 독립적인 힘이라고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22절에서 이미 믿음이 행위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고 말했으므로, 이 비유는 살아 있는 믿음이 행위와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선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믿음의 행함

야고보서 2:1–26 본문 →

이 장의 처음과 끝을 나란히 놓아 보면 야고보가 무엇을 문제 삼는지 선명해집니다. 처음에 등장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의 재산과 지위를 더 크게 보았습니다. 나중에 등장한 사람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굶주린 형제나 자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자신이 믿는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님으로 믿는다면 세상의 영광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믿음과 무관하게 쌓아 올리는 도덕적 업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장에서 직접적인 논증의 주제로 등장하지 않으므로, 야고보가 명시적으로 전개하지 않은 구속론을 본문에 덧씌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한 야고보는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차별을 버리라고 권합니다. 그의 윤리는 그리스도 신앙에 덧붙여진 별도의 도덕 강령이 아니라, 그 고백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교회 안에서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자리를 내어 주면서, 공동체에 돌려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에게는 무심하지 않습니까?

숨이 떠난 몸은 아무리 형태가 온전해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살아 있다면, 처음 장면의 가난한 사람은 더 이상 발판 아래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에게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헐벗은 형제나 자매는 따뜻하게 지내라는 인사를 듣고 떠나는 데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몸에 필요한 것을 건넬 것입니다.

믿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그 믿음이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필요한 것을 건네는 손에서 드러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