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혀를 다스리는 일
같은 입에서 나오는 찬미와 저주
사람은 말로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거룩하신지,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름다운 언어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입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모욕하며 저주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모순을 「샘이 같은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뿜겠습니까?」(3:11)라는 한 가지 질문으로 드러냅니다. 이 질문은 말을 조심하라는 교훈보다 훨씬 깊습니다. 같은 입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말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을 저주하는 말이 나온다면, 그 사람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야고보서 3장은 혀에 대한 경고로 시작하지만 지혜에 대한 설명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말과 재갈, 배의 키와 불꽃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시샘과 이기심,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와 평화의 열매가 등장합니다.
주제가 갑자기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야고보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줍니다. 이어서 그 말이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밝힙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런 말이 흘러나오는 마음의 근원까지 내려갑니다.
혀의 문제는 결국 그 사람을 다스리는 지혜가 어디에서 왔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사람을 다스립니까, 아니면 시샘과 이기심이 사람을 다스립니까?
선생이 되려는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말의 무게를 아는 일이다
나의 형제 여러분, 우리가 더 엄한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가 선생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서 3:1 · 본디새김
야고보는 왜 혀에 관한 긴 설명을 선생에 대한 경고로 시작합니까?
선생은 말을 사용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설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따라서 선생의 말은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야고보가 선생을 경계하는 이유는 가르치는 일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일이 다른 사람의 삶을 움직일 수 있는 만큼 무거운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더 엄한 심판」이라는 표현도 선생이라는 지위가 더 높은 영적 신분을 보장한다는 말이 아니라, 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가르치려는 열망보다 먼저 그 책임의 무게를 생각하라는 요청입니다.
야고보는 「여러분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엄한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을 다른 선생들 위에 세워 놓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따르는 책임 안에 자기 자신도 포함합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로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말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으면, 그는 온몸에도 재갈을 물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야고보서 3:2 · 본디새김
여기서도 「우리는 모두」입니다.
야고보는 가르치는 사람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역시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뒤의 문장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단정이 아니라, 말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성숙인지를 보여 줍니다. 「온전한」은 1:4에 등장했던 것과 같은 단어로, 목적에 이른 성숙함, 충분히 갖추어진 온전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성숙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매우 작은 것을 제시합니다.
혀입니다.
왜 하필 혀입니까?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어느 정도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옵니다. 순간적인 감정과 판단, 욕망과 두려움이 말에 드러납니다.
야고보는 말을 다스리는 능력이 사람 전체를 다스리는 능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온몸에도 재갈을 물릴 수 있다」는 표현은 혀를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혀를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삶 전체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다스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제 야고보는 그 관계를 눈앞에 그려 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경고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지위와도 관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알고 해석하는 능력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3:6–12에서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호칭을 얻으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를 비판하시며, 제자들이 모두 형제이며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선생에 대한 경고와 온유한 지혜의 요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3:1만으로 수신 공동체에 실제로 선생 자리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작은 재갈과 작은 키가 거대한 몸을 움직인다
우리가 말들이 우리를 따르게 하려고 그 입에 재갈을 물리면, 그 온몸까지 돌려 세웁니다.야고보서 3:3 · 본디새김
말은 사람보다 크고 강한 동물입니다. 사람이 말의 몸 전체를 힘으로 붙잡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입에 물린 작은 재갈은 말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작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부분이 커다란 전체의 움직임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다음 비유는 그 규모를 더 크게 만듭니다.
보십시오, 배들도 그렇습니다. 배들은 그렇게 큰 데다 거센 바람에 밀려 가는데도, 키를 잡은 이의 뜻이 향하는 곳으로 아주 작은 키에 돌려 세워집니다.야고보서 3:4 · 본디새김
바람은 배의 크기에 비해 엄청난 외부의 힘을 가합니다. 그런데 작은 키가 배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배는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지만, 키를 잡은 사람이 그 배를 어디로 보낼지 결정합니다.
혀도 마찬가지입니다.
혀도 그와 같아서 작은 지체인데 대단한 것을 뽐냅니다.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숲을 태우는지 보십시오.야고보서 3:5 · 본디새김
여기까지 읽으면 혀는 재갈이나 키처럼 사람의 삶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도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비유가 급격하게 바뀝니다.
그러나 불꽃은 다릅니다.
작은 불꽃은 숲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숲 전체를 집어삼킵니다. 말과 배의 비유에서는 작은 것이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있었지만, 불꽃의 비유에서는 작은 것이 전체를 파괴할 가능성이 드러납니다.
혀의 힘은 그 크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혀가 무엇을 움직이게 만드는지에서 드러납니다.
한마디는 사람을 설득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한마디가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사람들 사이에 의심을 일으키고, 공동체 전체를 갈라놓을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아직 선한 말의 가능성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경고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혀의 파괴력을 가장 어두운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혀는 어떻게 삶 전체에 불을 지르는가
혀도 불입니다. 이 혀는 불의의 세상으로서 우리 지체 가운데 자리를 잡고,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며, 게헨나에 의해 불이 붙습니다.야고보서 3:6 · 본디새김
야고보서 3장에서 가장 난해하면서도 강렬한 구절입니다.
야고보는 혀를 불의한 행동을 하는 도구라고 부르지 않고 「불의의 세상」이라고 부릅니다. 혀 하나에 인간의 불의가 집중되어 드러나는 것처럼 묘사하는 강한 수사적 표현입니다. 거짓말과 중상, 모욕과 저주, 교만과 시샘이 혀를 통해 나타나고,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선동하는 일도 말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말의 피해는 듣는 사람에게만 미치지 않습니다. 「온몸을 더럽히고」라는 말처럼 말하는 사람 자신도 자신의 말로 더럽혀집니다. 사람은 말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동안 자신의 삶도 훼손합니다.
「삶의 수레바퀴」는 드문 표현이어서 정확한 의미에 논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문맥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의미가 있습니다.
혀의 파괴력은 순간적인 말실수 하나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오랫동안 훼손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말의 결과가 새로운 말과 갈등을 낳으면서 피해가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삶의 수레바퀴에 불이 붙는다는 묘사는 그런 전면적인 파괴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 표현은 더욱 무겁습니다. 「게헨나에 의해 불이 붙습니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골짜기를 가리키는 이름에서 유래했고, 유대교와 신약의 언어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야고보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혀의 악이 단순히 사회적 불편이나 예절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악의 영역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이 수동 표현이 게헨나를 혀에 불을 붙이는 근원으로 말하는지, 혀가 게헨나의 불, 곧 심판을 받는 대상이라는 뜻인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혀는 작지만 삶 전체를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되려는 사람이 자기 말의 책임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야고보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와 그 능력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삶의 수레바퀴」는 그리스어 트로코스 테스 게네세오스로, 문자적으로는 ‘생겨남의 바퀴’ 또는 ‘탄생의 바퀴’에 가깝습니다. 한 사람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이어지는 삶의 과정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널리 사용되고, 세대를 이어 계속되는 인간의 삶 전체로 보는 해석, 고대의 운명이나 순환적인 생명관과 연결하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어떤 특정한 우주론이나 윤회 사상을 가르치려 했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게헨나는 구약에서 우상숭배와 자녀 희생 제사와 관련하여 비판받는 장소이며, 예레미야 7:31–32에서는 심판의 장소로 묘사됩니다. 마지막 수동 표현은 게헨나가 혀를 파괴적인 불로 점화하는 근원이라는 읽기가 일반적이고, 혀 자체가 심판을 받는 대상으로 묘사된다는 해석도 제안되었습니다. 문법적으로 혀가 불붙는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표현의 신학적 방향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세상의 동물은 길들이면서 자기 혀는 길들이지 못하는 인간
들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바다에 사는 것의 온갖 종류가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또 길들여져 왔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3:7 · 본디새김
야고보가 열거한 동물들을 보면 창세기 1장이 떠오릅니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물고기와 새, 가축과 땅의 생물들을 다스리도록 하십니다. 야고보의 목록은 창세기의 목록과 종류가 겹치고, 바로 다음 절에서 인간의 통제 능력을 문제 삼기 때문에 창조 이야기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읽을 근거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곧바로 예상과 반대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혀는 사람 가운데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을 부르는 독으로 가득합니다.야고보서 3:8 · 본디새김
인간은 자신보다 크고 강한 동물을 길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입속에 있는 작은 혀 하나는 완전히 길들이지 못합니다.
야고보는 이 대비로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지식을 많이 쌓고 남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능숙해지면 자신의 말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을 다루는 능력은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1절의 선생에 대한 경고가 다시 의미를 얻습니다. 선생은 많은 것을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이 자기 혀를 온전히 길들였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죽음을 부르는 독」은 구약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140:3은 악한 사람들의 말을 뱀의 독에 비유하고, 바울은 로마서 3:13에서 그 표현을 인용하여 인간의 죄를 설명합니다. 독은 작은 양이 몸 안으로 들어가도 생명을 해칠 수 있습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짧은 모욕이나 근거 없는 비난은 말한 사람에게는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과 관계에는 오랫동안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먼저 더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저주하다
우리는 그것으로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을 찬미하고, 또 그것으로 하나님을 닮은 모습대로 된 사람들을 저주합니다.야고보서 3:9 · 본디새김
야고보서 3장의 중심적인 문장입니다.
앞에서는 혀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칠 수 있는지 설명했다면, 이제는 그 해악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보여 줍니다. 왜 이것이 일관성 없는 행동을 넘어 신학적인 모순이 됩니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닮은 모습대로 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6–27에서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야고보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고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만을, 신앙이 깊은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닮은 모습대로 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존귀함은 그 사람이 호감을 주는지, 나와 의견이 같은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창조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를 공격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비판이나 책망이 금지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실제로 잘못을 지적하고 불의를 책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행동을 분별하고 비판하는 일과,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멸시하고 저주하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 두 가지가 같은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야고보서 3:10 · 본디새김
야고보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마땅한 일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분노하고 잘못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런 모순을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일부로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제 자연에서 세 가지 예를 듭니다.
샘이 같은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뿜겠습니까?야고보서 3:11 · 본디새김
나의 형제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있습니까? 짠물도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야고보서 3:12 · 본디새김
세 장면에는 공통된 원리가 있습니다. 무엇이 나오는가는 그것을 내는 근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입은 왜 그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을 내놓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말은 하나님을 찬미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대하는 마음에는 저주가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입에서 나오는 표현만 바꾸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고,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13절에서 갑자기 지혜가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야고보는 혀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고 전혀 다른 주제로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혀를 움직이는 더 깊은 근원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어떤 신학적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여기서 야고보의 논점은 분명합니다. 창세기 9:6에서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행위가 금지되는 근거로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사실이 제시됩니다. 야고보는 같은 창조 신학을 사람의 말에 적용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33–37에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는 그 열매로 드러나며 사람의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야고보서 3장의 샘과 나무, 혀와 지혜의 관계는 이 가르침과 매우 가깝지만, 그 유사성이 야고보가 마태복음의 문면을 직접 사용했다는 사실까지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왜 온유한가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식견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은 지혜에서 나오는 온유함으로 아름답게 처신하여 자기 행위를 보여야 합니다.야고보서 3:13 · 본디새김
이 질문은 1절의 선생에 대한 경고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선생이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혜롭고 식견이 있는」이라는 두 표현은 지식의 소유와 그 지식을 활용하는 통찰력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다시 행위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가 아니라 지혜와 행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지혜가 있다면 그 지혜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요구하는 행동은 「지혜에서 나오는 온유함」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논쟁에서 상대방을 이기는 사람, 다른 사람의 오류를 빠르게 지적하는 사람, 복잡한 문제를 자신 있게 설명하는 사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지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온유함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온유함은 자기 의견이 없거나 잘못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합당하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혀는 작은 지체이면서 대단한 것을 뽐냅니다. 그러나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크게 드러내는 말보다 온유한 행동으로 지혜를 보여 줍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은지 아는 능력만이 아니라, 옳은 것을 어떤 방식으로 행해야 하는지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온유함은 지혜가 부족하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온유함과 정반대되는 지혜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말하면서 진리를 거스를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쓴 시샘과 편을 짓는 이기심이 있다면, 우쭐대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마십시오.야고보서 3:14 · 본디새김
야고보는 혀의 문제를 설명하다가 이제 그 근원을 「여러분의 마음」이라고 명시합니다. 사람의 말은 마음과 무관하게 입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공동체를 갈라놓는 말의 배후에는 시샘과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시샘」(ζῆλος)으로 옮긴 말은 문맥에 따라 열심이나 열정이라는 긍정적인 뜻으로도, 시기나 질투라는 부정적인 뜻으로도 쓰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여기에 「쓴」이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과 인정을 기뻐하지 못하고, 자신이 더 높아지기를 바라며 상대를 경쟁자로 보는 마음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편을 짓는 이기심」은 자신의 이익이나 지위를 추구하는 경쟁적 태도, 파당을 만드는 이기적 야심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표현을 개인적인 감정 문제로만 좁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마음이 공동체의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1절의 선생이라는 주제가 다시 의미를 얻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진리를 말한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정말로 다른 사람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데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고 경쟁자를 무너뜨리는 데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야고보는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가르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참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실제 마음과 행동에서는 그 지혜를 부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도 지혜를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하고 혼에 속하며 귀신의 성질을 띤 것입니다.야고보서 3:15 · 본디새김
야고보는 이런 태도를 부족한 지혜나 미숙한 지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출처와 성격을 지닌 지혜라고 말합니다.
「땅에 속하고」라는 말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와 대조됩니다. 땅에 있는 모든 지식이나 인간의 합리적 사고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지혜의 성격을 지니지 않은 지혜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혼에 속하며」는 자연적인 인간 생명에 속한 것, 하나님의 영에 의해 형성된 삶과 대비되는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귀신의 성질을 띤」은 어떤 사람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진단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시샘과 이기심을 지혜라고 부르는 태도가 하나님의 지혜와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성격을 지닌다는 강한 평가입니다. 세 형용사는 모두 이른바 지혜라고 주장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규정하지만, 차례대로 점점 더 타락하는 세 단계라고 해석할 문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야고보가 그 지혜를 어떻게 판별하는지는 다음 절에 나옵니다.
시샘과 편을 짓는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나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3:16 · 본디새김
8절에서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었습니다. 16절에서 시샘과 이기심은 「혼란」을 낳습니다. 두 표현은 불안정과 무질서를 나타내는 같은 어근 계열에 속합니다. 혀의 통제 불가능성을 설명하던 언어가 공동체의 무질서를 설명하는 언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혀가 걷잡을 수 없이 움직이는 일과 공동체가 혼란에 빠지는 일 사이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말의 배후에 시샘과 이기심이 있다면, 말은 사람들을 서로 이해하게 하기보다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려 하고, 자신의 편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한다면 그 공동체에는 혼란이 생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각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성경을 잘 알고, 더 바르게 판단하고, 더 정확한 신학을 가졌다고 확신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런 주장의 진위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자신감이나 논쟁 능력만 보지 않고, 그 지혜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보라고 합니다.
지혜의 진실성은 자신이 얼마나 옳다고 주장하는지가 아니라, 그 지혜가 어떤 삶과 관계를 만들어 내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무엇이 다릅니까?
조금 더 깊이
「우쭐대지 말고」에 쓰인 동사는 2:13에서 자비가 심판보다 우위에 서서 우쭐댄다고 할 때 쓰인 동사와 같습니다. 자비는 심판 앞에서 자랑하지만, 이기적인 야심은 진리 앞에서 자랑할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혼에 속하며」는 그리스어 프쉬키코스에서 왔으며, 고린도전서 2:14와 유다서 19절에서도 관련된 대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3:15 자체에서 영과 혼의 구성에 관한 체계적인 인간론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와 대조되는 지혜의 성격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상대방을 이기는 것보다 평화를 이루는 데 관심을 둔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깨끗하고, 그다음에 평화롭고 너그럽고 남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비와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편을 가르지 않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습니다.야고보서 3:17 · 본디새김
이 덕목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두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하나님이 지혜를 아낌없이 주신다는 선언(1:5)과, 온갖 선한 베풂과 온전한 선물이 위에서 내려온다는 말씀(1:17)을 떠올리게 합니다. 야고보는 지혜로운 삶을 인간이 자신의 성격을 다듬어 얻는 성과로 설명하지 않고, 그 근원을 하나님께 둡니다.
사람이 자기 혀조차 온전히 길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설명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혀를 자동으로 통제해 주신다는 약속으로 바꾸어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인간의 자제력에 대한 자신감만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만들어 내는 삶으로 독자의 시선을 이끕니다.
그 지혜의 첫 번째 성격은 「깨끗함」입니다.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 상태로, 겉으로 점잖고 예의 바르다는 뜻이 아니라 시샘과 이기심, 속임수가 뒤섞이지 않은 지혜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평화롭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지혜는 다툼을 일으키는 데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고 평화로운 관계를 추구합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일을 묵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진실을 포기한 평화를 추구하지 않지만,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거칠게 대하는 태도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깨끗함과 평화로움이 함께 나타납니다.
「남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며」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설득에 응할 수 있으며, 합당한 요청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여겨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는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듣고, 합당한 근거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유부단함이나 원칙의 부재가 아닙니다. 진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자비와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에서 자비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응답하는 태도이고, 선한 열매는 그 지혜가 실제로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이 숲을 태우는 불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던 야고보는 이제 지혜가 선한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파괴하는 힘과 생산하는 힘이 대조됩니다.
「편을 가르지 않고」에 쓰인 아디아크리토스는 해석이 갈리는 단어입니다. 한쪽에서는 흔들림이 없고 의심이나 분열이 없는 상태로 보며, 이 해석은 1장에서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의 불안정함과 연결됩니다. 다른 쪽에서는 차별하거나 편을 가르지 않는 공정한 태도로 이해하며, 이 해석은 2장의 겉모습에 따른 차별 비판과 바로 앞의 파당을 만드는 이기심에 대한 경고와 잘 어울립니다. 본디새김은 후자를 선택했지만, 단어 자체의 의미가 논쟁 없이 확정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겉과 속이 다르지 않습니다」는 위선이 없고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경쟁자의 실패를 바라는 태도도, 온유하게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3장의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공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모순은 사람의 삶이 서로 다른 욕망과 기준에 이끌릴 때 나타납니다. 그 모순을 극복하는 길은 입에서 나오는 말을 조심하는 기술만이 아니라, 위에서 오는 지혜가 마음과 행동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마지막 절에서 그 결과를 농사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의의 열매는 평화 가운데 뿌려진다
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에게 평화 가운데 뿌려집니다.야고보서 3:18 · 본디새김
야고보는 혀를 불이라고 부르며 파괴의 이미지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놀라울 만큼 조용합니다.
누군가가 씨를 뿌립니다. 그것도 평화 가운데 뿌립니다. 그리고 그 씨는 의의 열매와 연결됩니다.
「의의 열매」는 의로운 삶이라는 열매를 뜻할 수도 있고, 의로움에서 비롯되는 열매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앞에서 설명한 지혜와 의로운 삶이 실제로 맺는 결과를 떠올리게 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에게」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위해 열매가 맺힌다는 뜻으로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씨를 뿌린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야고보가 강조하는 점은 분명합니다. 의로운 열매는 시샘과 이기심이 만들어 내는 혼란의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고, 평화를 이루는 삶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평화」라는 말은 한 문장 안에 두 번 등장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리고 평화 가운데 뿌려지는 열매. 평화는 최종적인 결과로만 등장하지 않고,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도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굴복시켜야 하고, 의로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툼과 적대감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의의 열매를 설명하면서 평화를 이루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이것을 갈등을 피하면 언제나 의로운 결과가 나온다는 약속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에는 필요한 대립과 어려운 결정이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의 대조는 선명합니다. 시샘과 이기심이 공동체를 움직이면 혼란과 악한 일이 생기고, 위에서 오는 지혜가 공동체를 움직이면 자비와 선한 열매, 평화를 이루는 삶이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의의 열매」는 그리스어 카르포스 디카이오쉬네스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에게」의 그리스어 여격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위해’로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 의해’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의 해석을 선택했으며, 그 경우 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결과나 유익으로 이해됩니다. 뒤의 해석을 따르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 가운데 씨를 뿌리는 행위자가 됩니다. 두 해석 모두 문법적 근거가 있으며, 실제 번역 전통에서도 양쪽이 사용됩니다. 마태복음 5:9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복 있는 사람이라 부르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야고보서 3:18은 그 선언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주제적 공통점이 있습니다.
혀의 문제는 결국 누구의 지혜로 살아가는가의 문제다
야고보서 3장을 처음 읽으면 혀를 잘 관리하라는 경고가 중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혀의 힘과 파괴력, 그 혀를 길들이지 못하는 인간을 보여 준 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혀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지혜로 들어가 그 지혜가 어디에서 오는지 묻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혀를 온전히 길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혀가 언제나 사람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첫 문장은 가르치는 사람의 숫자를 제한하라는 행정적인 지침이 아니라, 말로 다른 사람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움직이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말로 대하는가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지혜는 사람을 무조건 침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어떤 말이 필요한지, 어떤 말은 삼가야 하는지, 진실을 어떤 태도로 전해야 하는지 분별하게 합니다.
말은 여전히 작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말이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불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지혜의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장에서 불타는 숲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평화롭게 씨를 뿌리는 장면으로 끝냅니다. 불은 짧은 순간에 커다란 숲을 태웁니다. 그러나 씨는 조용히 땅에 들어가고, 당장 눈에 띄는 결과를 보여 주지 않으며,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샘과 이기심은 자신의 힘을 즉시 드러내려 합니다. 상대를 이기고,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 자신의 말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위에서 오는 지혜는 큰소리로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온유하게 행동하고 자비를 베풀며 평화를 이루어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선한 열매가 맺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3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누군가의 승리를 선언하는 외침도,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날카로운 말도 없습니다.
다만 평화 가운데 씨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불은 한순간에 숲을 태우지만, 평화는 조용히 의의 열매를 길러 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