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혀를 다스리는 일
같은 입에서 나오는 찬미와 저주
사람은 말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거룩하신지,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름다운 말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입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모욕하며 저주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모순을 한 가지 질문으로 드러냅니다. 「샘의 같은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3:11) 같은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과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사람을 저주하는 말이 나온다면, 그 사람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야고보서 3장은 혀에 대한 경고로 시작하지만 지혜에 대한 설명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말과 재갈, 배의 키와 불씨가 등장합니다. 마지막에는 시샘과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욕심,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와 평화 가운데 맺는 열매가 등장합니다.
주제가 갑자기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야고보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줍니다. 이어서 그 말이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밝히고, 마지막에는 그런 말이 흘러나오는 마음의 근원까지 내려갑니다.
혀의 문제는 결국 그 사람을 다스리는 지혜가 어디에서 왔는가의 문제입니다.
선생이 되려는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말의 무게를 아는 일이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너도나도 선생이 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듯이, 가르치는 우리는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3:1 · 두루새김
야고보는 왜 혀에 관한 긴 설명을 선생에 대한 경고로 시작합니까?
선생은 말을 사용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설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따라서 선생의 말은 그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야고보가 선생을 경계하는 이유는 가르치는 일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일이 다른 사람의 삶을 움직일 수 있는 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선생이라는 지위는 더 높은 자리를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엄한 심판」을 부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여러분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우리는」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을 다른 선생들 위에 세워 놓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따르는 책임 안에 자기 자신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로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말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온몸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야고보서 3:2 · 두루새김
여기서도 「우리는 모두」입니다. 그 역시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이 문장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단정이 아닙니다. 말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성숙인지를 보여 줍니다. 「온전한」(τέλειος)은 1:4에 등장했던 낱말과 같은 말로, 목적에 이른 성숙함, 충분히 갖추어진 온전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성숙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매우 작은 것을 제시합니다.
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어느 정도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옵니다. 순간적인 감정과 판단, 욕망과 두려움이 말에 드러납니다.
「온몸도 다스릴 수 있는」이라는 표현은 혀를 단순히 몸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혀를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삶 전체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다스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제 야고보는 그 관계를 눈앞에 그려 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경고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지위와 관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알고 해석하는 능력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3:6–12에서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존경받는 호칭을 얻으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를 비판하시며, 제자들이 모두 형제이고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야고보서 3장의 선생에 대한 경고와 부드럽고 겸손한 지혜의 요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다만 3:1만으로 이 편지를 받는 공동체에 실제로 선생 자리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가르치려는 열망보다 먼저 그 책임의 무게를 생각하라는 요청입니다.
작은 재갈과 작은 키가 거대한 몸을 움직인다
우리가 말을 우리 뜻대로 따르게 하려고 그 입에 재갈을 물리면, 말의 몸 전체도 원하는 쪽으로 이끌게 됩니다.야고보서 3:3 · 두루새김
말은 사람보다 크고 강한 동물입니다. 사람이 그 몸 전체를 힘으로 붙잡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입에 물린 작은 재갈은 말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작은 부분이 커다란 전체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배도 보십시오. 그렇게 큰 배가 거센 바람에 밀려도, 아주 작은 키로 방향이 바뀌어 조종하는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야고보서 3:4 · 두루새김
이번에는 말보다 훨씬 큰 배입니다. 거센 바람이 배를 밀지만, 작은 키가 배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배는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지만, 키를 잡은 사람이 그 배를 어디로 보낼지 결정합니다.
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혀도 몸의 작은 부분이지만 큰일을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얼마나 큰 숲을 태우는지 보십시오.야고보서 3:5 · 두루새김
여기까지 읽으면 혀는 재갈이나 키처럼 삶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도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불씨는 다릅니다.
작은 불씨는 숲을 다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숲 전체를 집어삼킵니다. 말과 배의 비유에서는 작은 것이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있었지만, 불씨의 비유에서는 작은 것이 전체를 파괴할 가능성이 드러납니다.
혀의 힘은 그 크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혀가 무엇을 움직이게 만드는지에서 드러납니다.
한마디는 사람을 설득하고 격려하며,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한마디가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사람들 사이에 의심을 일으키고, 공동체 전체를 갈라놓을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에서 경고에 집중합니다. 그 힘을 가볍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혀의 파괴력을 가장 어두운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혀는 어떻게 삶 전체에 불을 지르는가
혀는 불입니다. 우리 몸의 한 부분인 혀에는 온갖 악이 모여 있습니다.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삶 전체에 불을 지릅니다. 그 혀를 불타게 하는 것은 지옥입니다.야고보서 3:6 · 두루새김
야고보서 3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강렬한 구절입니다.
원문에서는 혀를 ‘불의의 세상’이라고 부르며, 두루새김은 이를 「혀에는 온갖 악이 모여 있습니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혀 하나에 인간의 악이 집중되어 드러나는 것처럼 묘사하는 강한 표현입니다. 거짓말과 헐뜯는 말, 모욕과 저주, 교만과 시샘이 혀를 통해 나타나고,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부추기는 일도 말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말의 피해는 듣는 사람에게만 미치지 않습니다. 「온몸을 더럽히고」라는 말은 말하는 사람 자신도 자신의 말로 더럽혀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말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동안 자신의 삶도 망가뜨립니다.
「삶 전체」로 옮긴 원문 표현은 문자적으로 ‘생겨남의 바퀴’ 또는 ‘탄생의 바퀴’에 가깝습니다. 이 드문 표현은 한 사람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이어지는 삶의 과정, 세대를 이어 계속되는 인간의 삶 전체, 고대의 운명이나 생명이 되풀이된다는 생각 등으로 읽혀 왔습니다. 그럼에도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혀의 파괴력이 순간적인 말실수 하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의 삶을 오랫동안 망가뜨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말의 결과가 새로운 말과 갈등을 낳으면서 피해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삶 전체에 불을 지릅니다」는 그런 전면적인 파괴를 드러냅니다.
마지막 표현은 더욱 무겁습니다.
「그 혀를 불타게 하는 것은 지옥입니다.」 「지옥」으로 옮긴 원문 단어는 게헨나(γέεννα)로, 유대교와 신약의 언어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혀의 악은 단순히 사회적 불편이나 예절을 어기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악의 영역과 연결됩니다.
이 마지막 부분의 해석에는 논의가 있습니다. 게헨나가 혀를 파괴적인 불로 타오르게 하는 근원이라는 읽기가 일반적이며, 두루새김도 이를 따랐습니다. 반면 혀 자체가 게헨나의 불, 곧 심판을 받는 대상으로 묘사된다는 해석도 제안되었습니다. 원문의 문법에서 혀가 불붙는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표현이 신학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야고보는 사람이 말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파괴의 크기를 가볍게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되려는 사람이 자기 말의 책임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제 야고보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와 그 능력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골짜기를 가리키는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구약에서 그곳은 우상숭배와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와 관련하여 비판받는 장소이며, 예레미야 7:31–32에서는 심판의 장소로 묘사됩니다. ‘생겨남의 바퀴’라는 표현은 정확한 의미에 논의가 있으며,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삶의 과정으로 읽는 해석이 널리 사용됩니다. 고대의 운명이나 되풀이되는 생명 사상과 연결하려는 견해도 있지만, 야고보가 어떤 특정한 우주관이나 윤회 사상을 가르치려 했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세상의 동물은 길들이면서 자기 혀는 길들이지 못하는 인간
실제로 사람은 온갖 종류의 들짐승과 새, 기어 다니는 동물과 바다에 사는 동물을 길들이며, 지금까지 길들여 왔습니다.야고보서 3:7 · 두루새김
야고보가 나열한 동물들을 보면 창세기 1장이 떠오릅니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을 닮게 지으시고 물고기와 새, 가축과 땅의 생물들을 다스리도록 하십니다. 야고보의 목록은 창세기의 목록과 종류가 겹치고, 바로 다음 절에서 인간이 다스리는 능력을 문제 삼기 때문에, 창조 이야기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읽을 근거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곧바로 예상과 반대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을 부르는 독으로 가득합니다.야고보서 3:8 · 두루새김
인간은 자신보다 크고 강한 동물을 길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입속에 있는 작은 혀 하나는 완전히 길들이지 못합니다.
야고보는 이 비유로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지식을 많이 쌓고 남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능숙해지면 자신의 말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이 자기 혀를 온전히 길들였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여기서 1절의 선생에 대한 경고가 다시 의미를 얻습니다.
「죽음을 부르는 독」은 구약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140:3은 악한 사람들의 말을 뱀의 독에 비유하고, 바울은 로마서 3:13에서 그 표현을 인용하여 인간의 죄를 설명합니다. 독은 작은 양이 몸 안으로 들어가도 생명을 해칠 수 있습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짧은 모욕이나 근거 없는 비난은 말한 사람에게는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과 관계에는 오랫동안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ἀκατάστατος)으로 옮긴 원문 낱말은 불안정하고 질서가 잡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며, 뒤의 16절에 나오는 「혼란」과 같은 뿌리를 가진 말입니다. 앞에서 혀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던 말이 뒤에서는 공동체의 무질서를 설명하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아직 그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더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저주하다
우리는 혀로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을 찬양하고, 또 그 혀로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사람들을 저주합니다.야고보서 3:9 · 두루새김
야고보서 3장의 중심적인 문장입니다.
이제 혀의 해악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충돌합니다. 왜 이것이 단순히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넘어 신앙과 모순이 됩니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창세기 1:26–27의 인간 창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야고보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고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만을, 신앙이 깊거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존귀함은 그 사람이 호감을 주는지, 나와 의견이 같은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으셨다는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존재를 공격하는 일입니다.
이 대목은 창세기 9:6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을 닮게 지으셨다는 사실이 사람의 피를 흘리는 행위를 금지하는 근거로 제시됩니다. 야고보는 같은 신앙의 이해를 사람의 말에 적용합니다. 사람의 몸을 해치는 것이 중대한 잘못이라면,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사람을 말로 저주하는 것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비판이나 책망이 금지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실제로 잘못을 지적하고 불의를 책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는 일과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멸시하고 저주하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야고보서 3:10 · 두루새김
야고보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마땅한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분노하고 잘못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런 모순을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일부로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제 자연에서 세 가지 예를 듭니다.
샘의 같은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야고보서 3:11 · 두루새김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있습니까? 짠물에서도 단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야고보서 3:12 · 두루새김
세 장면에는 공통된 원리가 있습니다. 무엇이 나오는가는 그것을 내는 근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입은 왜 그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을 내놓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대하는 마음에는 저주가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입에서 나오는 표현만 바꾸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13절에서 갑자기 지혜가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왜 온유한가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은 바르게 살면서, 지혜에서 나오는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행동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야고보서 3:13 · 두루새김
이 질문은 1절의 선생에 대한 경고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선생이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런 사람에게 누가 정말 지혜롭고 깨달음이 있는지 묻습니다.
그 기준은 「바르게 살면서」 「자신의 행동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입니다. 다시 행동이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믿음이 아니라 지혜와 행동의 관계입니다. 지혜가 있다면 그 지혜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행동은 「지혜에서 나오는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논쟁에서 상대방을 이기는 사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빠르게 지적하는 사람, 복잡한 문제를 자신 있게 설명하는 사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지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를 제시합니다.
이 태도는 자기 의견이 없거나 잘못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을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서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맞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혀는 몸의 작은 부분이면서 큰일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크게 드러내는 말보다 부드럽고 겸손한 행동으로 지혜를 보여 줍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은지 아는 능력이 아니라, 옳은 것을 어떤 방식으로 행해야 하는지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와 정반대되는 지혜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말하면서 진리를 거스를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마음속에 독한 시샘과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욕심이 있다면, 뽐내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마십시오.야고보서 3:14 · 두루새김
야고보는 혀의 문제를 설명하다가 이제 그 근원을 「여러분 마음속」이라고 밝힙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공동체를 갈라놓는 말이 나오는 배후에는 시샘과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욕심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시샘」(ζῆλος)으로 옮긴 원문 낱말은 문맥에 따라 열심이나 열정이라는 긍정적인 뜻으로도, 시기나 질투라는 부정적인 뜻으로도 쓰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에 ‘쓰다’는 뜻의 수식어를 붙였고, 두루새김은 이를 「독한」으로 옮겼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과 인정을 기뻐하지 못하고 상대를 경쟁자로 보는 마음입니다.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욕심」은 자신의 이익이나 지위를 추구하는 경쟁적인 태도, 편을 만드는 이기적인 야심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개인적인 감정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진리를 말한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다른 사람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데 있는지,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하고 경쟁자를 무너뜨리는 데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참된 지혜를 자랑하면서도 실제 마음과 행동에서는 그 지혜를 부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도 지혜를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속하고, 인간의 본성에 속하며, 귀신에게 속한 것입니다.야고보서 3:15 · 두루새김
야고보는 이런 태도를 부족한 지혜나 미숙한 지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서 오고 다른 성격을 지닌 지혜라고 말합니다.
「땅에 속하고」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와 대조됩니다. 땅에 있는 모든 지식이나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이 악하다는 뜻은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지혜의 성격을 지니지 않은 지혜를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속하며」로 옮긴 말은 자연적인 인간 생명에 속한 것,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진 삶과 대비되는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귀신에게 속한」은 어떤 사람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다고 진단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시샘과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욕심을 지혜라고 부르는 태도가 하나님의 지혜와 근본적으로 반대된다는 강한 평가입니다.
시샘과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욕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3:16 · 두루새김
8절에서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었습니다. 16절에서 시샘과 욕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이 있습니다. 두 말은 불안정과 무질서를 나타내는 같은 뿌리의 말입니다. 혀가 걷잡을 수 없이 움직이는 일과 공동체가 혼란에 빠지는 일 사이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말의 배후에 시샘과 욕심이 있다면, 말은 사람들을 서로 이해하게 하기보다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려 하고, 편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한다면 그 공동체에는 혼란이 생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각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더 성경을 잘 알고, 더 정확한 신학을 가졌다고 확신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 사람의 자신감이나 논쟁 능력만 보지 않고, 그 지혜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보라고 합니다.
시샘과 편 가르기와 혼란을 만들어 내는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뽐내거나」로 옮긴 동사는 원문에서 2:13의 자비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할 때 쓰인 동사와 같습니다. 자비는 심판 앞에서 자랑하지만, 이기적인 야심은 진리 앞에서 자랑할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속하며」와 관련된 대비는 고린도전서 2:14와 유다서 19절에서도 볼 수 있지만, 야고보서 3:15 자체에서 영과 혼이 인간을 어떻게 이루는지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또 15절의 세 표현을 차례대로 점점 더 타락하는 세 단계라고 해석할 문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상대방을 이기는 것보다 평화를 이루는 데 관심을 둔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무엇보다 깨끗합니다. 또 평화롭고, 너그럽고, 남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비와 선한 열매로 가득합니다. 차별하지 않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습니다.야고보서 3:17 · 두루새김
이 성품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하나님이 지혜를 아낌없이 주신다는 선언(1:5)과, 온갖 좋은 것과 온전한 선물이 위에서 내려온다는 말씀(1:17)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이 자기 혀조차 온전히 길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 야고보는 지혜의 근원을 하나님께 둡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혀를 자동으로 다스려 주신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는 없지만, 야고보는 인간의 자제력에 대한 자신감 대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만들어 내는 삶으로 시선을 이끕니다.
「깨끗합니다」는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겉으로 점잖고 예의 바르다는 뜻이 아니라, 시샘과 이기심, 속임수가 뒤섞이지 않은 지혜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평화롭고」입니다. 이 지혜는 다툼을 일으키는 데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일을 눈감아 주지도 않습니다. 먼저 「무엇보다 깨끗합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진실을 포기한 평화를 추구하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거칠게 대하는 태도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남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며」(εὐπειθής)로 옮긴 말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설득에 응할 수 있으며, 합당한 요청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합당한 근거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고칠 수 있습니다. 원칙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비와 선한 열매로 가득합니다」에서 자비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응답하는 태도이고, 선한 열매는 그 지혜가 실제로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은 숲을 태우는 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지혜는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파괴하는 힘과 열매를 맺게 하는 힘이 대조됩니다.
「차별하지 않고」로 옮긴 아디아크리토스(ἀδιάκριτος)는 해석이 갈리는 단어입니다. 한쪽에서는 흔들림이 없고 의심이나 분열이 없는 상태로 보는데, 1장에서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의 불안정함과 연결됩니다. 다른 쪽에서는 차별하거나 편을 가르지 않는 공정한 태도로 보는데, 2장의 겉모습에 따른 차별 비판과 바로 앞의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욕심에 대한 경고와 잘 어울립니다. 두루새김은 후자를 선택했고 문맥상 충분히 설득력 있지만, 단어 자체의 의미가 논쟁 없이 확정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겉과 속이 다르지 않습니다」는 위선이 없고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경쟁자의 실패를 바라거나, 부드럽고 겸손하게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3장의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공합니다.
어떻게 같은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올 수 있습니까? 사람의 삶이 서로 다른 욕망과 기준에 이끌릴 때 그런 모순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제시하는 길은 단순히 말을 조심하는 기술이 아니라, 위에서 오는 지혜가 마음과 행동을 빚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 가르친다면, 그의 말은 자신의 지위를 뽐내는 수단보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마지막 절에서 그 결과를 농사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의로운 삶의 열매를 맺을 씨는 평화 가운데 뿌려진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평화 가운데 의로운 삶의 열매를 맺을 씨를 뿌립니다.야고보서 3:18 · 두루새김
야고보는 혀를 불이라고 부르며 파괴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놀라울 만큼 조용합니다.
누군가가 씨를 뿌립니다. 그것도 평화 가운데 뿌립니다. 그리고 그 씨는 의로운 삶의 열매와 연결됩니다.
「의로운 삶의 열매」는 말 그대로 옮기면 ‘의의 열매’로, 의로운 삶이라는 열매를 뜻할 수도 있고 의로움에서 비롯되는 열매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앞에서 설명한 지혜가 실제로 맺는 결과를 떠올리게 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으로 옮긴 원문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 의해’로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위해’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해석을 따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옮겼고, 뒤의 해석을 따르면 의의 열매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결과나 유익이 됩니다. 두 해석 모두 문법적 근거가 있으며, 어느 쪽이든 의로운 열매는 시샘과 욕심이 만드는 혼란의 방식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삶과 연결됩니다.
한 문장 안에 「평화」가 두 번 나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리고 평화 가운데 뿌려지는 씨. 평화는 결과로만이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도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진리를 지키려면 상대방을 굴복시켜야 하고, 의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다툼과 적대감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의로운 열매를 평화를 이루는 방식과 묶습니다. 이것을 갈등을 피하면 언제나 의로운 결과가 나온다는 약속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에는 필요한 대립과 어려운 결정이 따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5:9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복 있는 사람이라 부르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야고보서 3:18은 그 선언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주제적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12:33–37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무와 열매로 사람의 말이 마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하시며, 사람의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한다고 하십니다. 야고보서 3장의 샘과 나무, 혀와 지혜의 관계는 이 가르침과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그 닮은 점이 야고보가 마태복음의 표현을 직접 사용했다는 사실까지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혀의 문제는 결국 누구의 지혜로 살아가는가의 문제다
야고보서 3장은 혀를 잘 다스리라는 경고로 시작하지만, 혀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지혜로 내려가 그 지혜가 어디에서 오는지 묻습니다. 사람이 자기 혀를 온전히 길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혀가 사람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도나도 선생이 되지 말라는 첫 경고도 결국, 말로 다른 사람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움직이는 지혜가 시샘과 욕심에서 오는지 위에서 오는지 먼저 살피라는 부름입니다.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사람을 어떻게 말로 대하는가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와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지혜는 사람을 무조건 침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어떤 말이 필요한지, 어떤 말은 삼가야 하는지, 진실을 어떤 태도로 전해야 하는지 분별하게 합니다. 내 말을 통해 공동체에 평화와 자비가 자라납니까, 아니면 더 깊은 의심과 편 가르기가 생겨납니까?
말은 여전히 작습니다.
불은 짧은 순간에 커다란 숲을 태웁니다. 그러나 씨는 조용히 땅에 들어가고, 당장 눈에 띄는 결과를 보여 주지 않으며, 열매를 얻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야고보서 3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누군가의 승리를 선언하는 외침도,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날카로운 말도 없습니다.
다만 평화 가운데 씨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불은 한순간에 숲을 태우지만, 평화는 조용히 의로운 삶의 열매를 길러 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