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욕심에서 오는 다툼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야고보서 4장에는 서로 전혀 다른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과 다투는 사람입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시샘하고 싸웁니다. 두 번째는 형제자매를 헐뜯고 판단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장사할 계획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느 도시로 갈지, 얼마나 머물지, 어떻게 돈을 벌지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한 사람은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비판적인 말을 하며, 또 다른 사람은 미래를 계획할 뿐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세 사람에게서 같은 문제를 발견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며, 아직 오지 않은 내일까지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 사람 모두 자신이 실제로 차지하고 있지 않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장에는 그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욕심을 채워 주는 도구가 아니십니다. 율법을 주시고 사람을 판단하시는 유일한 재판관이시며, 인간의 생명과 내일이 그분의 뜻 아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한 단어로 대답합니다.

낮아짐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인간을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며, 자신 앞에서 낮아지는 사람을 높이십니다.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104장 본문 읽기 →

공동체의 전쟁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야고보서 4:1–3 본문 →

여러분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다툼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여러분 몸 안에서 자기 즐거움을 채우려는 욕심들이 싸우기 때문이 아닙니까?야고보서 4:1 · 두루새김

바로 앞 장의 마지막 문장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 가운데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쟁과 다툼이 등장합니다. 평화를 이야기하던 야고보가 그 평화를 무너뜨리는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전쟁」과 「다툼」은 단순한 의견 차이나 가벼운 논쟁을 가리키는 말보다 강합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실제 전쟁에 사용하는 말로 묘사합니다. 실제 무장 충돌이 벌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서로를 적처럼 대하는 심각한 대립입니다.

그런데 그는 갈등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뜻밖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상대방의 잘못도, 서로 다른 주장도, 사회적 환경도 아닙니다. 「자기 즐거움을 채우려는 욕심들」입니다.

원문의 낱말은 쾌락이나 즐거움을 뜻하는데, 두루새김은 이 자리에서 「자기 즐거움을 채우려는 욕심들」(ἡδονή)이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야고보는 모든 즐거움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다투는 사람들이 자기만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싸우기」(στρατεύομαι)로 옮긴 동사는 군사 활동이나 전쟁 수행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공동체의 전쟁을 설명하다가, 그 전쟁을 일으키는 욕심도 마치 몸 안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는 세력처럼 묘사합니다.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뒤에 사람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다툴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로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런 갈등 속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욕심이 그 다툼을 더 크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실을 밝히려는 마음과 자신이 이기고 싶은 마음은 서로 다릅니다. 공동체를 바로 세우려는 바람과 자신의 영향력을 지키려는 욕심도 같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런 동기들이 겉으로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정의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상대방이 자신에게 굴복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겉으로 드러난 갈등을 넘어, 갈등을 이어 가게 하는 욕심의 문제를 보게 합니다.

이제 그는 그 욕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짧고 거친 문장들로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탐내지만 갖지 못합니다. 살인하고 시샘하지만 손에 넣지 못합니다. 다투고 전쟁을 벌입니다. 여러분이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4:2 · 두루새김

욕심은 계속 움직이지만 원하는 결과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살인하고」라는 말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그만큼 극단적인 말로 욕심과 시샘이 지닌 파괴성을 고발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행동을 설명하는 문장 사이에 예상 밖의 말이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기도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기도만 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다음 절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자기 즐거움을 채우는 데 써 버리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4:3 · 두루새김

어떤 사람은 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구하지만 잘못 구합니다. 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싸우고, 잘못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마저 자신의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기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구하는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뜻을 내려놓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설득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형식은 같을 수 있지만,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다릅니다.

다만 야고보는 구하지 않거나 잘못 구하는 특정한 기도들을 비판하는 것이지, 모든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반드시 잘못된 욕심 때문이라는 보편적인 법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관심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써 버리려는 욕심이 공동체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뒤틀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야고보는 매우 충격적인 호칭을 사용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살인하고」는 실제로 죽이는 행위를 뜻하는 동사입니다. 이를 다른 사람을 마음속으로 미워하거나 말로 인격을 죽이는 행위에 대한 과장된 표현으로 읽는 견해가 있고, 문자적인 살인이나 실제 폭력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본문만으로 수신자들이 실제 살인을 저질렀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단지 나쁜 말을 했다는 뜻으로 약화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친구인가, 세상의 친구인가

야고보서 4:4 본문 →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임을 모릅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야고보서 4:4 · 두루새김

앞에서는 전쟁과 다툼을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간음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왜 야고보는 공동체 안의 시샘과 다툼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간음이라고 부릅니까?

그 배경은 구약의 예언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관계는 여러 예언서에서 혼인 관계로 묘사됩니다. 호세아 2장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연인들을 찾아가는 아내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존재들이 다른 연인들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든 삶의 근원이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호세아가 고발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형식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맡기는 배신입니다. 야고보의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도 이런 언약 관계에서의 불충실함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는 여성 복수형이 사용되지만, 이것은 공동체의 여성들만을 비난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해야 할 공동체 전체를 불충실한 아내에 빗대어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 대신 선택한 대상은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나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실한 삶과 맞서는 가치와 욕심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투고,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여기며, 자신의 만족과 성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친구가 되지 말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두는 것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2장과 연결되는 낱말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23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다고 말했습니다. 4:4에서 「세상의 친구」(φίλος)가 되려는 사람을 가리킬 때도 원문에서 같은 「친구」라는 낱말이 사용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했기에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4장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기도하며, 세상의 친구가 되려 합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삶의 선택을 결정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세상의 욕심이 삶의 선택을 결정합니다.

야고보는 친구라는 친밀한 관계의 말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같은 편에 서기를 원합니까?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이유는, 단지 세상을 지나치게 좋아해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충성의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되려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감정적 흔들림보다 의지적인 선택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의 우선순위에서는 다른 주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처럼 심각한 배신을 고발한 다음,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시는지 말합니다. 그 대목은 이 장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6:24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두 본문이 동일한 문장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경쟁하는 다른 주인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하실 만큼 간절히 원하신다는 말

야고보서 4:5 본문 →

아니면 성경이 아무 뜻 없이 말한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만큼 간절히 원하신다」라고 말합니다.야고보서 4:5 · 두루새김

이 절은 문장이 짧지만, 원문의 해석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먼저, 현재 알려진 구약 본문 가운데 야고보가 인용한 문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이것은 출처를 찾지 못했다는 작은 문제가 아니라 문장 자체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또 하나는 누가 누구를 간절히 원하는가입니다. 두루새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만큼 간절히 원하신다고 읽을 수도 있고, 우리 안에 살게 된 인간의 영이 시샘에 이끌려 갈망한다고 읽을 수도 있으며, 영을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제안되어 왔습니다. 첫째 읽기라면 5절은 4절의 언약 관계에서의 불충실함과 긴밀하게 이어져, 하나님은 자신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마음이 다른 대상에게 향하는 일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인간의 영으로 읽으면 5절은 앞에서 설명한 욕심과 시샘의 문제를 요약하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불확실한 절에서 너무 많은 신학적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한 구절을 근거로 성령의 본질이 시기심이라고 주장하거나, 하나님이 인간과 같은 방식의 질투에 지배되신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인간의 영에 관한 해석만이 옳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뒤의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인간의 시샘과 욕심을 대립시키고 있으며, 그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려 합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처를 두고는 야고보가 특정한 구약 구절을 인용한 것인지, 여러 성경 본문의 생각을 요약한 것인지, 혹은 「성경이 말한다」는 표현을 6절의 인용과 연결해야 하는지 논의됩니다. 읽기가 갈리는 데에는 문법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영」에 해당하는 토 프뉴마는 형태상 주격과 대격이 같아, 주어인지 목적어인지 형태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또 두루새김이 「질투하실 만큼」으로 옮긴 부분의 의미를 어떻게 연결하느냐도 해석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번역은 가능한 주요 해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지만, 다른 읽기가 문법적으로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야고보서 4:6 본문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들에게 맞서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야고보서 4:6 · 두루새김

이 짧은 문장은 4장의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의 욕심과 다툼, 잘못된 기도, 하나님과의 불충실한 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곧바로 심판과 멸망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무엇보다 큰 은혜입니까? 정확히 무엇과 비교하는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문맥에 따라 인간의 강한 욕심과 시샘보다 큰 은혜, 하나님을 향한 불충실함 속에서도 주어지는 은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묘사한 인간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인간의 욕심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은혜가 아닙니다. 야고보가 곧바로 인용하는 성경은 잠언 3:34입니다. 이번에는 인용의 출처가 분명합니다.

잠언 3장의 본래 문맥은 지혜로운 삶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신뢰하고, 자신의 지혜만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라는 권면이 이어집니다. 그 문맥에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힘을 지나치게 믿으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 배우며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이 잠언을 인간의 욕심과 갈등을 다루는 상황에 적용합니다. 자기 욕심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툴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까지 이루려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배우기보다 하나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따라서 낮아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 일입니다.

야고보는 은혜가 자기 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성취로 은혜를 사들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그 낮아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여러 명령으로 풀어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잠언 3:34는 하나님께서 거만하게 조롱하는 사람들을 조롱하시지만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의 인용은 칠십인역의 표현과 가깝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야고보서 4:7–10 본문 →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십시오. 마귀에게 맞서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야고보서 4:7 · 두루새김

야고보의 독자들은 서로를 상대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고보는 그들이 진정으로 맞서야 할 대상이 마귀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싸우고 있었지만, 야고보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에게 맞서라고 합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들에게 「맞서시고」, 7절에서 신자들은 마귀에게 「맞서십시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원문의 동사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상대에게 대항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어느 편에 서서 누구에게 맞설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심을 정당화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맞서시는 교만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악한 유혹에 저항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다만 야고보는 공동체의 모든 다툼을 마귀가 직접 조종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1절에서 갈등의 근원을 사람 안의 「자기 즐거움을 채우려는 욕심들」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7절은 인간의 책임을 마귀에게 떠넘기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에는 악에 맞서는 태도가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약속을 들려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야고보서 4:8 · 두루새김

세상의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라고 했던 야고보가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사람에게도 돌아갈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심판만 선언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감정을 회복하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지는 명령들이 그 의미를 보여 줍니다. 손과 마음이 나란히 등장하는데, 손은 사람이 실제로 행하는 일과, 마음은 그 행동의 동기와 방향과 관련됩니다.

여기서 손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잘못된 행동을 멈추면서도 마음속으로 여전히 같은 욕심을 품을 수 있고, 반대로 마음이 깨끗하다고 주장하면서 실제 행동은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동의 변화와 마음의 깨끗함을 둘 다 요구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라는 호칭은 1장으로 이어집니다. 1장에서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바람에 밀리는 바다 물결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도 마음의 방향이 갈라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4장에서는 그 문제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면서 세상의 친구가 되려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과 싸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기도의 목적은 자기 즐거움을 채우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요청은 마음속의 나쁜 생각 몇 가지를 없애라는 뜻을 넘어, 하나님과 다른 주인 사이에서 갈라진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라는 요청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회개할 때의 감정까지 다룹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기쁨을 침울함으로 바꾸십시오.야고보서 4:9 · 두루새김

1장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기쁨을 침울함으로 바꾸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절에 모두 같은 「기쁨」(χαρά)이라는 낱말이 쓰였지만, 두 장면의 상황은 다릅니다.

1장에서 기쁨은 시험을 겪는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의 성숙을 바라보며 취하는 태도였습니다. 4장에서 기쁨은 죄와 불충실함을 가볍게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돌이켜야 할 대상입니다. 기쁨 자체가 죄가 아니라, 무엇을 두고 기뻐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과 싸우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즐거움은 회개해야 할 현실을 가리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슬픔은 우울한 감정을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그에 알맞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단락의 결론이 나옵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야고보서 4:10 · 두루새김

하나님께 복종하는 일, 마귀에게 맞서는 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 죄를 슬퍼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삶으로 묶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 등장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그분이 높이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야고보는 그 낮아짐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약속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예언자들의 호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스가랴 1:3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에게 돌아오면 자신도 그들에게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시고, 말라기 3:7에도 비슷한 호소가 등장합니다. 야고보가 그 구절들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언약을 떠난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공유합니다. 손과 마음은 시편 24:3–4를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산에 오르고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느냐는 물음에 시편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는데, 야고보는 그 이미지를 공동체 안의 욕심과 다툼을 바로잡는 권면으로 사용합니다. 9절에서 두루새김이 「바꾸십시오」로 옮긴 동사는 원문에서 수동 명령형이라,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를 문장에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절을 인간이 스스로 슬픈 감정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심리적 명령으로만 좁혀서는 안 됩니다. 10절은 누가복음 18:9–14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바리새파 사람과 자비를 구하는 세리의 비유를 맺으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는 가르침과 같은 신앙의 역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야고보가 누가복음의 기록을 직접 인용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빌립보서 2:5–11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높이셨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4:10을 이 그리스도 찬가에서 직접 인용한 것으로 볼 근거는 없지만,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낮아짐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웃을 판단하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야고보서 4:11–12 본문 →

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판단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판단한다면,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야고보서 4:11 · 두루새김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고 했던 야고보가 이제 형제자매를 헐뜯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일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곳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헐뜯다」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 표현이 언제나 거짓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을 말하면서도 상대방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말하는 경우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근거 없는 소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헐뜯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를 판단하는 것과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 어떻게 같은 일이 될 수 있을까요?

2장에서 야고보는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 계명, 곧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사람은 자기 판단에 따라 어떤 이웃은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고 결정합니다. 그 순간 그는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어떻게 적용할지 자신의 기준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11절 끝에는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과 「재판관」의 대조가 있습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 아래에 서 있습니다. 반면 율법을 판단하는 재판관은 자신이 그 명령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물론 이것이 선과 악을 가려내거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야고보 자신도 공동체의 죄와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니, 그가 모든 도덕적 판단을 금지한다면 자신의 편지 자체가 모순이 됩니다. 문제는 이웃을 헐뜯고 죄인으로 몰아세우면서 자신이 그 사람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판정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태도입니다.

야고보는 이 논증을 한층 더 밀고 나갑니다.

율법을 주시는 분이자 재판관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을 판단하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야고보서 4:12 · 두루새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모든 사정을 알지 못하고, 그 사람의 마음과 미래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그 사람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는 분이며, 율법의 최종적인 권위가 그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앞의 여러 설명보다 훨씬 강합니다. 야고보는 그 사람들의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설명하지 않고,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인가요?

여러분이 율법을 주었나요?

여러분에게 사람을 구원하거나 멸망시킬 권한이 있나요?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인간은 종종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사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권한을 대신 행사하려는 자리로 옮겨 갑니다. 야고보는 그 자리가 인간의 자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다음 단락과 의외의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 사람 다음에, 자신의 내일을 결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대목은 마태복음 7:1–5와도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를 경계하시면서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살피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 역시 모든 분별을 없애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한 채 남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내일을 이미 가진 것처럼 말하는 사람

야고보서 4:13–14 본문 →

자, 「우리는 오늘이나 내일 저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지내며 장사해 돈을 벌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십시오.야고보서 4:13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앞의 다툼과 헐뜯음에 관한 이야기보다 훨씬 평범해 보입니다. 오늘날에도 익숙한 사업 계획입니다.

언뜻 보기에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미래를 계획하는 일은 책임 있는 삶의 일부입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준비를 하고,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고려하며, 예상되는 이익을 계산하는 일 자체가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사람을 향해 강하게 말합니다. 왜일까요?

그가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일들은 모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에서는 그 미래가 마치 이미 확보된 것처럼 들립니다. 문제는 계획을 세운다는 사실이 아니라, 계획된 미래를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이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4:14 · 두루새김

야고보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과, 자신의 생명이 어떤 상태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함께 놓습니다. 사람은 사업의 성공 여부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사업을 할 내일의 생명 자체가 자신에게 주어질지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미래의 결과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미래를 맞이할 자신의 생명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안개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한동안 눈앞의 풍경을 가득 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오래 이어지지 않고, 잠시 뒤에는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야고보는 인간의 삶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한계가 얼마나 크고 다른 분께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은 오늘 살아 있으니 내일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사업이 잘되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야고보는 그 확신이 얼마나 약한지 드러냅니다.

그의 계획이 반드시 실패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계획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최종적인 판단 권한을 행사하려 합니다. 내일을 장담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미래의 확실성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한계를 잊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한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안개」로 옮긴 낱말은 수증기나 안개, 연기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인간의 덧없음은 구약의 지혜 문학과 시편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시편 39:5–6은 인간의 날들이 짧고 사람이 한낱 입김과 같다고 말하고, 시편 144:4도 사람을 입김에, 그의 날들을 지나가는 그림자에 비유합니다. 이 본문들은 인간의 삶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게 하며, 야고보는 같은 주제를 장사 계획을 세우는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면

야고보서 4:15–16 본문 →

여러분은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면 우리는 살아서 이 일이나 저 일을 할 거야.」야고보서 4:15 · 두루새김

인간의 생명과 행동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뜻 아래 있습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면」이라는 조건이 어디까지 걸리는지는 사본에 따라 읽기가 갈립니다. 살아 있음과 이 일이나 저 일을 하는 것 모두가 주님의 뜻에 달린 결과라고 읽을 수도 있고, 주님의 뜻과 우리가 살아 있음을 함께 조건으로 보고 할 일만 그 결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읽든 야고보의 중심 메시지는 같습니다.

우리의 계획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생명 자체가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미래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계획한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오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면」이라는 문구를 입에 붙이는 것만으로 야고보의 명령을 다 지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절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허풍을 떨며 자랑합니다. 그런 자랑은 모두 악합니다.야고보서 4:16 · 두루새김

문제는 허풍, 곧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미래를 이미 소유한 것처럼 말하는 태도입니다. 모든 사업 계획 앞에 「주님께서 뜻하시면」을 붙이더라도, 여전히 자신의 능력과 계획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면 야고보가 비판하는 문제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문구를 말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계획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야고보의 권면은 모든 일이 운명에 달렸으니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상인은 장사하며, 사람은 내일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뿌린 씨가 반드시 원하는 만큼 열매를 맺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고, 장사를 한다고 반드시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생명 자체가 주어진 선물입니다.

자신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과 자신의 계획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다릅니다. 앞의 사람은 책임 있게 준비할 수 있지만, 뒤의 사람은 하나님까지 자신의 계획에 맞추려 합니다. 야고보는 그 오만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자신의 논증을 예상 밖의 방향으로 넓힙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에도 신의 뜻이나 허락을 전제로 미래를 말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야고보의 표현이 말의 형식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조건의 범위가 갈리는 것은 사본 차이 때문입니다. 채택된 원문에서는 두 미래 동사가 함께 조건에 따른 결과를 나타내고, 살아 있음을 조건에 넣는 읽기는 「살다」를 가정법으로 쓴 다른 원문에서 나옵니다. 누가복음 12:16–21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둔 뒤 더 큰 창고를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자기 자신에게 편안히 쉬며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 밤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재산을 계산할 수 있었지만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야고보서 4장과 이 비유는 직접적인 인용 관계로 확정할 수 없지만, 인간의 계획과 재산이 생명의 불확실성을 없애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가까운 주제를 다룹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죄다

야고보서 4:17 본문 →

그러므로 해야 할 좋은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야고보서 4:17 · 두루새김

이 문장은 독립적인 격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므로」라는 말로 앞의 논증과 이어져 있습니다. 내일을 장담하는 사람은 앞으로 무엇을 할지 길게 설명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는 외면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주님의 뜻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고도 여전히 허풍을 떨며 자랑한다면, 그는 알고 있는 바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그보다 더 넓은 의미도 지닙니다.

우리는 죄를 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부당한 이익을 얻는 일처럼 적극적으로 저지르는 잘못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중립적인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2장에서 어떤 사람은 헐벗고 굶주린 형제자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습니다. 그 사람을 직접 해치지는 않았지만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고, 야고보는 그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사람이 가능한 모든 좋은 일을 빠짐없이 하지 않으면 언제나 똑같은 죄의 책임을 진다는 끝없는 요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의 문장은 실제로 알고 있는 좋은 일과 그것을 하지 않는 책임을 연결합니다. 따라서 적용할 때에도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책임과 기회가 주어졌는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고, 거짓말하지 않았고,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해야 할 좋은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사람

야고보서 4:1–17 본문 →

야고보서 4장을 처음부터 다시 바라보면, 전쟁을 벌이는 사람,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사람, 형제자매를 헐뜯는 사람, 내일을 장담하는 사람이 모두 자신의 자리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욕심을 위해 싸우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헐뜯고 판단하며,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일을 자기 소유처럼 자랑한다면, 모두 해야 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 한계 앞에서 절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장의 한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에게 맞서시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가까이 가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며, 자신 앞에서 낮아지는 사람을 높이십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말하는 낮아짐은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안개는 아침에 잠깐 나타납니다. 그 순간에는 들판과 산을 덮고 눈앞의 풍경을 가득 채우지만, 해가 떠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고 지금 선택하지만, 그 삶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지 못합니다.

내일을 자기 것처럼 붙잡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주어진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

야고보가 보여 주는 낮아짐은 그런 모습입니다.

안개처럼 짧은 삶을 사는 사람도,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좋은 일을 알고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