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예레미야를 부르심

무너질 성읍 앞에 세워진 사람

예레미야 1장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성읍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입니다. 왕과 제사장이 있고, 성벽과 성문을 갖춘 유다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이 성읍에 적들이 몰려와 성문 앞에 왕좌를 놓고 성벽을 포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5).

다른 하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성읍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예레미야 한 사람을 가리켜 만들었다고 하신 「요새 성읍」입니다(1:18).

예레미야가 전해야 할 말은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것이고,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예레미야 자신은 무너지지 않는 성읍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무거운 사명을 받은 사람의 첫 대답은 자신에게는 말할 능력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예레미야 1장은 위대한 예언자가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발견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아는 사람을 여호와야훼가 어떻게 부르시고, 그의 입에 말을 넣으시며, 적대적인 세상 앞에 세우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71장 본문 읽기 →

이미 결말을 알고 시작하는 이야기

예레미야 1:1–3 본문 →

예레미야서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다. 그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제사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예레미야 1:1 · 본디새김

아나돗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있는 제사장들의 성읍입니다. 여호수아 21:18에도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읍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2:26–27에서는 솔로몬이 제사장 아비아타르를 이곳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사장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예배와 성소의 질서를 지키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로 그 예배 공동체의 잘못을 고발하게 됩니다. 실제로 뒤에 가면 아나돗 사람들마저 그의 예언을 막으려 합니다(예레미야 11:21).

여호와야훼의 말은 요시야가 왕이 된 지 십삼 년째에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열왕기하 22:3에 따르면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한 사건은 요시야 통치 십팔 년째의 일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부르심은 그 유명한 율법책 발견보다 앞섭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요시야의 시대에 시작되어 여호야김을 거쳐 시드기야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책의 첫머리는 그 기간의 끝을 이렇게 밝힙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시대에도 그 말이 임했고,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의 통치 십일 년째가 끝날 때까지, 곧 다섯째 달에 예루살렘이 유배되어 갈 때까지 이어졌다.예레미야 1:3 · 본디새김

이제부터 예레미야가 선포할 심판의 말들은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 들립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경고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말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첫머리는 사건이 모두 끝난 자리에서 과거를 돌아보도록 독자를 이끕니다.

그렇다고 예레미야의 활동이 예루살렘의 유배와 함께 완전히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40–44장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의 활동도 기록합니다. 1:3은 예언자의 일생을 끝까지 정리한 문장이라기보다,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중심 사건을 향해 책의 첫 장면을 배치한 것입니다.

1절은 「예레미야의 말」로 시작했지만, 2절은 「여호와야훼의 말」이 그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4절부터는 예레미야가 직접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한 책은 그 사람에게 임한 여호와야훼의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들려주는 책이 됩니다.

태어나기 전에 주어진 사명,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

예레미야 1:4–8 본문 →

여호와야훼의 첫 말씀은 예레미야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여호와야훼가 그에게 무엇을 하셨는지를 밝힙니다.

「내가 너를 배 속에서 빚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했다. 내가 너를 민족들을 위한 예언자로 세웠다.」예레미야 1:5 · 본디새김

예레미야가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기 전에, 여호와야훼는 이미 그에게 맡길 일을 정해 두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의 직업과 미래가 같은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일반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본문은 특별히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소명을 다룹니다. 그가 앞으로 마주할 반대와 고통 때문에 자신의 부르심을 의심할 때, 그 사명이 순간적인 결심이나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출신이고, 그의 활동 중심지도 유다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의 사명은 자기 민족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유다뿐 아니라 여러 왕국과 민족의 운명까지 다룰 것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46–51장에는 여러 민족을 향한 말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반응은 뜻밖에도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말했다. 「아, 주 여호와야훼, 보십시오. 저는 말할 줄 모릅니다. 저는 어리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6 · 본디새김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왕과 고관들을 향해서도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로 그 일에 자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4:10에서 모세 역시 자신은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두 장면에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언어적 능력을 문제로 제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의 말하기 능력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저는 어립니다』라고 말하지 마라. 내가 너를 보내는 모든 이에게 가고,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예레미야 1:7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받은 말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언자의 권위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권위의 한계를 정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말할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할 책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를 구해 내려고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1:8 · 본디새김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예레미야를 두렵게 할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은 출애굽기 3:12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임재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근거가 인간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알았다」는 정보를 아는 데에도 쓰이지만, 문맥에 따라 관계와 선택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19에서 여호와야훼가 아브라함을 두고 사용하신 표현이나 아모스 3:2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하신 말씀도 이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았다」를 곧바로 「사랑했다」라는 한 가지 뜻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1:5는 이어서 「거룩하게 구별했다」와 「예언자로 세웠다」를 따로 말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예레미야를 아셨다는 사실과 그를 특별한 사명을 위해 구별하셨다는 사실이 서로 연결되면서도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입술에 닿은 손과 나라들을 움직이는 말

예레미야 1:9–10 본문 →

여호와야훼는 이제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손을 뻗어 내 입에 댔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넣었다.」예레미야 1:9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예레미야의 앞선 고백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넣으신 것은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내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사명에서는 무엇보다 그가 전할 말의 출처가 중요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웠다. 뿌리째 뽑고 허물며, 멸망시키고 무너뜨리며, 짓고 심게 하려는 것이다.」예레미야 1:10 · 본디새김

「뿌리째 뽑고」와 「심게」는 농사의 언어입니다. 나무나 식물을 뿌리째 제거하거나 새로운 것을 심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반면 「허물며」와 「짓고」는 건축의 언어입니다.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실제로 왕국을 뿌리째 뽑거나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군대를 거느리지도 않고 왕좌에 앉지도 않습니다.

그의 임무는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호와야훼는 그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언자의 정치적 지위를 말한다기보다, 그가 전하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왕국들의 권세보다 높은 권위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여섯 동작의 마지막은 「짓고 심게」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8:7–10에서 여호와야훼는 어떤 민족에게 파괴를 선언하셨더라도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거두실 수 있고, 반대로 세우고 심겠다고 말씀하신 민족도 악을 행하면 그 복을 거두실 수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따라서 심판의 선포를 회개의 가능성과 무관한 기계적 운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예레미야 31:28에서는 뽑고 허무는 데 깨어 지켜보셨던 여호와야훼가 장차 짓고 심는 일에도 깨어 지켜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무너뜨리시는 것과 여호와야훼가 새롭게 세우시는 것은 서로 무관한 두 행동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서는 그 둘을 한분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다룹니다.

그러나 그 회복에 이르기 전에, 예레미야는 먼저 무너져야 할 것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비슷한 장면이 이사야 6:6–7에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타오르는 숯이 예언자의 입술에 닿으며 죄가 씻기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레미야 1장에서는 입에 말을 넣어 주시는 일이 중심입니다.

아몬드나무 가지 — 깨어 있는 것은 누구인가

예레미야 1:11–12 본문 →

예레미야의 부르심이 끝나자 새로운 장면이 열립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 내게 임했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 나는 말했다. 「저는 아몬드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예레미야 1:11 · 본디새김

이것은 평범해 보이는 환상입니다. 하늘의 군대나 거대한 짐승, 기이한 성전이 아니라 나뭇가지 하나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잘 보았다. 내가 내 말을 이루려고 깨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12 · 본디새김

예언의 성취를 보증하는 분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상황을 조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 자신이 말씀을 이루려고 지켜보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넣으셨다면, 그 말씀을 이루시는 일도 여호와야훼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거부할 것입니다. 왕과 제사장들은 그를 반대할 것입니다. 눈앞의 상황은 그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말씀을 이루시는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첫 번째 환상이 그 말씀의 확실성을 보여 주었다면, 두 번째 환상은 그 말씀이 예고하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한국어 번역에서는 두 문장의 관계가 즉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소리의 연결이 있습니다. 「아몬드나무」는 샤케드이고, 「지켜보다」는 쇼케드입니다. 두 단어는 자음이 같고 발음도 매우 비슷합니다. 예레미야가 본 샤케드를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신 쇼케드가 설명합니다. 아몬드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일찍 꽃을 피우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직 다른 나무들이 겨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때 먼저 꽃을 피우는 특성과, 깨어 지켜본다는 말의 연결이 잘 어울립니다.

끓어오르는 솥 — 재앙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레미야 1:13–16 본문 →

여호와야훼는 다시 물으십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 두 번째로 내게 임했다. 「네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 나는 말했다. 「저는 끓어오르는 솥을 보고 있습니다. 그 입구는 북쪽 반대편을 향해 있습니다.」예레미야 1:13 · 본디새김

첫 번째 환상이 정적이었다면, 두 번째 환상은 움직임과 위험을 느끼게 합니다. 불 위에서 솥이 끓고 있습니다. 그 안의 것이 곧 넘쳐흐를 듯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북쪽에서 재앙이 터져 나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예레미야 1:14 · 본디새김

고대의 전쟁에서 침략은 단순히 군대가 국경을 넘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적군은 성읍을 포위하고, 식량 공급을 끊고, 성벽을 무너뜨리고, 주민들을 사로잡아 갈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1:15는 바로 그러한 포위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보아라, 내가 북쪽 왕국들의 모든 씨족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들이 와서 저마다 자기 왕좌를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그 둘레의 모든 성벽을 향해, 유다의 모든 성읍을 향해 놓을 것이다.」예레미야 1:15 · 본디새김

왕좌는 통치와 판결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외국 왕국들의 왕좌가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놓입니다. 본래 유다의 통치 질서가 작동해야 할 자리에서 침략자들이 위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문은 고대 성읍에서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통로일 뿐 아니라 공적인 일들이 처리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문 앞에 적들의 왕좌가 놓인다는 이미지는 유다의 정치적 주권이 위협받는 장면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예레미야 1장은 특정 왕국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를 계속 읽으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심판의 중요한 집행자로 등장합니다(예레미야 25:9). 실제로 열왕기하 25장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읍을 함락시키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의 설명은 군사적 위협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한 그 모든 악행에 대해 그들에게 내 판결을 내리겠다.」예레미야 1:16 · 본디새김

특히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이라는 표현은 우상숭배의 모순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 자기보다 높은 존재로 여기고 그 앞에 엎드립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이사야 44:9–20에서도 길게 전개됩니다. 나무를 베어 일부는 땔감으로 쓰고 일부는 신상으로 만드는 사람의 모순을 지적하는 대목입니다.

예레미야 1장에서는 이 문제가 유다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다른 것에 자신을 맡긴 백성이 이제 정치적·군사적 무력함에 직면하게 됩니다.

본문이 침략을 여호와야훼의 심판이라고 해석한다고 해서, 침략하는 왕국의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레미야서 후반부에서는 바벨론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예레미야 50–51장).

여호와야훼는 여러 민족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지만, 어느 민족의 권력을 무조건 정당화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성읍 전체를 뒤흔들 심판을 한 젊은 예언자가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깊이

솥의 방향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문장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은 솥의 입구가 북쪽 반대편을 향한다고 옮겼지만, 원문의 표현을 솥이 북쪽에서 기울어져 있는 모습 등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원문만으로 솥의 구체적인 모양과 방향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여호와야훼의 설명은 재앙이 시작되는 방향을 분명히 밝힙니다.

성벽이 무너질 때, 한 사람이 성벽이 된다

예레미야 1:17–19 본문 →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니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해라. 그들 때문에 겁에 질리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겁에 질리게 하겠다.」예레미야 1:17 · 본디새김

「허리를 동여매고」는 움직이거나 일할 준비를 갖추는 행동입니다. 긴 옷자락을 정리하고 즉시 행동할 수 있도록 몸을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예레미야가 받은 사명은 이제 실제 행동을 요구합니다.

앞에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약속과 격려가 주어졌습니다. 이번에는 경고가 덧붙습니다.

여기에는 위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도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함께하심은 예레미야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상관없다는 무조건적인 면책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엄중한 경고 뒤에 뜻밖의 선언이 이어집니다.

「보아라, 나는 오늘 너를 온 땅에, 곧 유다의 왕들과 그 고관들과 그 제사장들과 이 땅의 백성에게 맞서는 요새 성읍과 쇠기둥과 청동 성벽들로 만들었다.」예레미야 1:18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성벽 안으로 피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자신을 성벽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군사적 방어 수단을 갖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에게 성읍과 같은 견고함을 약속하십니다.

백성이 의지하는 실제 성벽은 무너질 수 있지만,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도록 세우신 사람은 그 말씀을 버리지 않는 한 사명을 계속 감당하도록 붙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적대적인 외국인들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인 자기 민족 전체가 그와 대립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지도자인 제사장도, 국가를 다스리는 왕도, 공동체를 이루는 백성도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너와 싸우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너를 구해 내려고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1:19 · 본디새김

예레미야 20:1–2에서는 제사장 바스훌이 그를 때리고 차꼬에 채웁니다. 예레미야 38:6에서는 사람들이 그를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습니다. 그러므로 1:19의 약속을 그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약속은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갈등 속에서 그를 구해 내시는 여호와야훼의 함께하심입니다.

예레미야는 박해를 당하고, 외로움을 호소하며, 자신이 맡은 사명의 무게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예레미야 20:7–9에는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억누를 수 없는 예언자의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은 결국 그가 맡은 말씀을 없애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레미야 개인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구해 내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15:20–21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거기서도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를 견고한 청동 성벽으로 만들겠다고 하시며, 사람들이 그와 싸우겠지만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부르실 때 주신 약속이 그의 사역 한복판에서 다시 확인되는 것입니다.

맺음 — 아몬드나무 가지와 청동 성벽

예레미야 1:1–19 본문 →

예레미야 1장을 읽고 나면 두 장면이 오래 남습니다. 하나는 아몬드나무 가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청동 성벽입니다. 첫 번째 장면은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장면은 그 말씀을 맡은 사람이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장은 특별한 역사적 시기에 특정한 사람을 예언자로 세우시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거나, 자신이 선택한 일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맡은 말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그 말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지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거나 반대를 모두 박해라고 해석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지닌 권위의 근거는 개인적 확신이 아니라 그에게 임한 여호와야훼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일어나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아직 서 있고, 왕들은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며,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맞서도록 부름받은 사람에게 여호와야훼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나는 오늘 너를 온 땅에, 곧 유다의 왕들과 그 고관들과 그 제사장들과 이 땅의 백성에게 맞서는 요새 성읍과 쇠기둥과 청동 성벽들로 만들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성읍을 향해, 여호와야훼가 세우신 한 사람이 말씀을 들고 일어서려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