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언약을 깨뜨린 백성과 위협받는 예언자

예레미야 11장은 언약에 관한 하나님의 선언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예언자를 살해하려는 음모가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유다와 예루살렘 전체의 불순종을 다루다가, 끝에서는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까지 등장합니다. 국가적인 언약 파기와 한 사람을 향한 살해 위협이 같은 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11장 전반부에서 여호와야훼는 백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면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라.」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자기들에게 들려오는 통로 자체를 막으려 합니다.

언약을 거부하는 일이 결국 언약을 전하는 사람을 제거하려는 일로 발전합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711장 본문 읽기 →

언약의 시작은 명령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예레미야 11:1–5 본문 →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언약의 말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백성에게 전해야 할 첫 선언은 뜻밖에도 저주입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이 언약의 말들을 듣지 않는 사람은 저주받는다.』」예레미야 11: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신명기 27:26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는 율법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이 저주받는다고 선언하며, 백성은 「아멘」으로 응답해야 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뿐 아니라 그 약속 안에서 살아야 할 백성의 책임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저주에 관한 말만 전달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언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쇠를 녹이는 용광로에서 이끌어 낸 날 그들에게 명령한 언약이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에 따라 그 말들을 실행해라. 그러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예레미야 11:4 · 본디새김

여기서 「쇠를 녹이는 용광로」는 이집트에서 겪었던 압제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신명기 4:20에서도 같은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은 명령을 잘 지켰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구출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다음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순서는 출애굽기에서도 확인됩니다. 여호와야훼는 먼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시고(출애굽기 12–14장), 이후 시내산에서 언약의 말씀을 주십니다(출애굽기 19–24장).

따라서 「내 목소리를 듣고 ... 실행해라」라는 명령은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얻어 내기 위한 거래 조건이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에 어울리는 관계를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것은 언약의 중심에 있는 약속입니다. 같은 관계의 약속이 레위기 26:12에도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가 바라시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명령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분께 속한 백성,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이는 너희 조상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내가 맹세한 것을 오늘처럼 이루려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멘, 여호와야훼.」예레미야 11:5 · 본디새김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땅에서 백성은 언약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아멘」은 앞서 선포된 말에 동의하고 그것이 참됨을 인정하는 응답입니다. 예레미야는 언약의 복뿐 아니라 불순종에 따르는 저주까지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대답합니다.

신명기 27장에서 온 백성이 응답해야 했던 그 아멘을, 이제 예레미야가 홀로 말하는 장면처럼 읽힙니다.

거듭 말씀하신 하나님, 거듭 듣지 않은 백성

예레미야 11:6–10 본문 →

여호와야훼가 나에게 말했다.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이 모든 말을 외쳐라. 『이 언약의 말들을 듣고 실행해라.』」예레미야 11:6 · 본디새김

여기서는 「듣고 실행해라」라는 두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으십니다. 들은 말씀이 삶에서 실행되기를 요구하십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에게 엄히 경고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거듭 경고하며 내 목소리를 들으라고 했다.』」예레미야 11:7 · 본디새김

「부지런히 거듭」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님의 경고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경고한다는 동사를 강조하여 반복하고, 일찍부터 거듭 말씀해 오셨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8절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저마다 자기 악한 마음의 고집을 따라 걸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언약의 모든 말이 그들에게 닥치게 했다. 내가 실행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이 실행하지 않은 말들이다.』」예레미야 11:8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대비됩니다.

하나는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마음의 고집을 따라 걸어가는 길입니다.

언약을 깨뜨린 책임은 추상적인 국가라는 집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마음의 고집을 따라 살아간 결과가 모여 국가적인 불순종이 되었습니다.

백성은 언약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언약의 말씀이 그들에게 닥치게 하셨습니다.

백성이 자기 삶에서 이루기를 거부한 말씀이 이제 심판의 현실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은 사람이 무시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의 길을 거부한 이들에게도 그 언약에 담긴 경고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것이 신명기 28장이 복과 저주를 함께 선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9절에서는 갑자기 「음모」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나에게 말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서 음모가 드러났다.」예레미야 11:9 · 본디새김

그러나 여기서는 구체적인 비밀 조직이나 정치적 모의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10절은 그 음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옛 조상들의 죄악으로 돌아갔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적 배반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이름이 함께 등장하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두 왕국의 역사는 달랐지만,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함께 언약을 깨뜨린 백성으로 지목하십니다.

백성이 의지할 수 있는 과거의 신분이나 역사적 전통이 현재의 불순종을 감추어 주지는 못합니다.

기도를 들으시던 하나님이 듣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

예레미야 11:11–14 본문 →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가져오겠다. 그들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어도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예레미야 11:11 · 본디새김

7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백성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8절에서는 백성이 듣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1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같은 말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앞선 절들이 보여 주듯, 하나님의 심판은 반복된 경고와 지속적인 거부 뒤에 선포됩니다. 이제 백성이 직면할 것은 자신들이 깨뜨린 언약의 결과입니다.

12절에서는 또 하나의 반전이 나타납니다.

백성은 재앙이 닥치면 그동안 제물을 바쳤던 신들에게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들은 그들을 구하지 못합니다.

평소에 사람들은 다른 신들이 자신을 지켜 주고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그들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 그 신들은 아무런 구원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 수만큼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수치스러운 것에게 바치는 제단, 곧 바알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는 제단을 예루살렘의 거리 수만큼이나 많이 세웠다.」예레미야 11:13 · 본디새김

이는 정확한 제단 개수를 보고하는 통계라기보다, 우상숭배가 사회 전체에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언약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성읍들과 거리에는 다른 신들을 위한 제단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장소가 이미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장소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마라. 그들을 위해 부르짖음과 기도를 올리지 마라. 그들이 자기들에게 닥친 재앙 때문에 나를 부를 때 나는 듣지 않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1:14 · 본디새김

구약에서 예언자는 종종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을 위해 간구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출애굽기 32:11–14, 31–32). 예언자의 사명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일뿐 아니라, 백성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 아뢰는 일도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에게는 그 간구마저 금지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어떤 죄인에 대해서도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일반 원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언약을 지속적으로 거부해 온 유다에 관한 특정한 심판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금지 명령이 예레미야 7:16과 14:11에도 반복됩니다.

언약의 말씀을 거절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에 드리는 종교적 행동만으로 그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곧이어 성전과 제사에 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사랑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집에 있을 수 없는 이유

예레미야 11:15–17 본문 →

「내가 사랑하는 네가 많은 이들과 악한 음모를 꾸미는데, 내 집에서 무슨 볼일이 있느냐? 거룩한 고기는 네게서 떠나갈 것이다. 네가 악을 저지를 때면, 그때 너는 기뻐한다.」예레미야 11:15 · 본디새김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이 여전히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어지는 질문은 단순한 성전 출입 금지 명령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사랑을 받던 백성이 왜 자신의 집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배반하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성전은 언약의 백성이 여호와야훼를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곳을 찾으면서도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전에 들어오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삶에서는 언약을 깨뜨리면서 성전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어지는 「거룩한 고기」는 제사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가 거부하시는 것은 제사 제도 자체라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삶을 제사로 가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7:21–23에서 제사보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말씀과도 이어집니다.

16절에 이르면 장면이 바뀝니다.

「여호와야훼는 너를 무성한 올리브나무, 열매의 모양이 아름다운 나무라 불렀다. 크게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그 나무에 불을 질렀고, 그 가지들이 부러졌다.」예레미야 11:16 · 본디새김
「너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네게 재앙을 선언했다.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자기들에게 저지른 악 때문이다. 그들은 바알에게 제물을 태워 바쳐 나를 격분하게 했다.」예레미야 11:17 · 본디새김

그러므로 나무에 불이 붙고 가지가 부러지는 장면은 단순한 국가 멸망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심으시고 가꾸신 백성이 자기들의 악으로 심판을 맞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심으십니다. 그리고 심으신 나무에 재앙을 선언하십니다.

앞선 사랑의 행위가 뒤의 심판을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 때문에 심판이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심으신 백성이 불타는 나무로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가 잘려 나갈 위기에 처한 나무로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15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문법과 낱말의 연결이 어려워 해석이 갈립니다. 본디새김은 「많은 이들과 악한 음모를 꾸미는데」라고 읽고, 거룩한 고기가 그들에게서 떠나간다는 흐름으로 옮겼습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다르게 읽어, 서원과 거룩한 제물이 그들의 악을 없애거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특히 거룩한 고기가 떠나간다는 진술인지, 제사가 죄를 제거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인지가 달라집니다. 올리브나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익숙하고 중요한 나무였습니다. 올리브 열매와 기름은 일상생활과 경제, 예배에 쓰였습니다. 무성하고 열매가 아름다운 올리브나무는 풍요와 생명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호세아 9:10–16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열매 맺는 식물처럼 묘사하시다가 그들의 배반과 심판을 말씀하시는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백성이 선택한 불순종의 대조가 식물의 이미지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자신이 도살당할 어린양인 줄 몰랐던 예언자

예레미야 11:18–20 본문 →

18절에서 이야기의 시점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레미야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에 등장합니다.

이어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밝힙니다. 그 음모를 그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가 그것을 자신에게 보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저는 도살당하러 끌려가는 길든 어린양 같았습니다. 그들이 저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저는 몰랐습니다. 『나무를 그 열매와 함께 없애 버리자. 그를 산 자들의 땅에서 잘라 내어, 그의 이름이 더는 기억되지 않게 하자.』」예레미야 11:19 · 본디새김

「길든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야생의 동물처럼 위험을 경계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에게 익숙하고 순하게 길러진 동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예언자였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치는 위험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 장면은 예언자를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는 초인적인 인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속을 수 있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나무입니다.

그들은 나무뿐 아니라 열매까지 없애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이 더는 기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라는 사람을 제거하고, 그가 남길 흔적까지 지우려 합니다.

11:16–17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심으신 나무가 심판을 맞습니다. 그런데 11:19에서는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나무처럼 잘라 버리려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내리시는 심판과, 그 백성이 하나님의 예언자에게 가하려는 폭력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는 사람을 심판하려는 것입니다.

20절에서 예레미야는 직접 복수에 나서지 않고 여호와야훼께 자신의 송사를 맡깁니다.

「올바르게 재판하시고 콩팥과 마음을 살피시는 만군의 여호와야훼여, 당신이 그들에게 보복하시는 것을 제가 보게 해 주십시오. 제 송사를 당신께 드러내 놓았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1:20 · 본디새김

음모는 은밀하게 진행되었고 예레미야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의 보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아무런 분노나 보복의 감정이 없는 평온한 기도로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가해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당한 일을 여호와야훼 앞에 드러내 놓고, 올바르게 재판하시는 분께 판단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고난을 당하는 신앙인의 기도가 언제나 평온하거나 감정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과 다릅니다. 예레미야는 상처와 분노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자기 송사의 최종 판단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그 열매와 함께」(⁨לֶחֶם⁩)로 옮긴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그것의 빵과 함께」라는 독특한 말입니다. 여기서 ‘빵’은 먹을거리나 나무가 맺는 소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 자체가 이례적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해석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 열매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본문은 명확하게 해설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남길 말씀과 사역의 열매, 혹은 그에게서 이어질 모든 것을 없애려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콩팥과 마음」은 고대 히브리어의 인간 이해에서 사람의 깊은 내면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마음은 생각과 의지에 관련되고, 콩팥도 사람의 감정과 깊은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예레미야는 단지 외적인 행동만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숨겨진 동기까지 살피시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예언자의 고향 아나돗에서 들려온 위협

예레미야 11:21–23 본문 →

21절은 앞서 밝혀진 음모의 주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나돗 사람들입니다.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입니다. 예레미야 1:1은 그가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가운데 속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예레미야를 해치려는 사람들은 먼 나라에서 온 적군이나 낯선 외부인이 아닙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네 목숨을 노리며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라. 그러면 네가 우리 손에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아나돗 사람들에 관해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예레미야 11:21 · 본디새김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살아남을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그 조건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더는 예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면 자신의 소명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원한이나 감정적 다툼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공격의 대상은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입니다. 왜 아나돗 사람들이 그토록 예레미야의 예언을 싫어했는지는 이 장에 자세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그들을 벌하겠다. 젊은이들은 칼에 죽고, 그들의 아들딸은 굶주림에 죽을 것이다.」예레미야 11:22 · 본디새김

여기서 칼과 굶주림은 전쟁과 그에 따르는 재난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러한 재앙은 언약을 어긴 백성이 맞을 수 있는 결과로 신명기 28장에서도 등장합니다.

본문은 그 자녀들이 어떤 개인적인 죄를 저질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이 겪을 고난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 별도의 논증을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예언은 공동체에 닥칠 파괴적인 재앙을 가족과 다음 세대에 이르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들에게는 남은 자가 없을 것이다」라는 선언 역시 매우 무겁습니다. 다만 이것을 아나돗이라는 성읍의 모든 주민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역사적 진술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에서 심판의 직접적인 대상은 예레미야의 목숨을 노리는 아나돗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수행하다 위협받는 예레미야의 송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언약의 파기와 예언자의 고난이 만나는 자리

예레미야 11:1–23 본문 →

처음에 여호와야훼는 백성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향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전달하는 예레미야에게 침묵하라고 요구합니다.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저버렸고, 그 관계를 회복하도록 경고하는 목소리마저 거부합니다.

물론 오늘날 어떤 사람의 모든 종교적 주장이나 비판을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여호와야훼의 부르심과 말씀을 받은 예언자로 등장하며, 그 권위를 현대의 어떤 인물에게도 무조건 옮길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임에도 실제로 살해 위협을 받습니다. 그의 사명은 안전한 자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11장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화려한 성전이나 수많은 제단이 아닙니다.

고향 사람들에게서 죽음의 위협을 받는 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자기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나무처럼 잘라 없애려고 한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제 송사를 당신께 드러내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려 하는 순간에도, 그는 그 목소리를 들으시고 올바르게 재판하실 분께 자신의 송사를 맡기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