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스물세 해의 경고, 일흔 해의 지배

예루살렘에서 결혼식이 사라집니다.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아침마다 곡식을 갈던 맷돌이 멈춥니다. 밤이 되어도 집 안에는 등불이 켜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5장이 보여 주는 멸망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재앙의 규모가 아닙니다. 그 재앙이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는 스물세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왔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거듭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말씀의 내용도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백성은 왜 심판받습니까? 그리고 그 심판을 수행하는 강대국 역시 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까?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1025장 본문 읽기 →

스물세 해 동안 같은 말을 전한 예언자

예레미야 25:1–7 본문 →

요시야의 아들인 유다 왕 여호야김 사 년째에 유다의 온 백성에 관해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이다. 그해는 바벨론 왕 느부갓레차르의 일 년째였다.예레미야 25:1 · 본디새김

일반적인 역사 연대에 따르면 기원전 605년 무렵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는 고대 근동의 국제 질서가 크게 바뀌던 때입니다. 아시리아의 세력이 쇠퇴한 뒤 이집트와 바벨론이 패권을 놓고 경쟁했고, 바벨론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했습니다. 예레미야 46:2도 이 전투를 여호야김 사 년째의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유다의 입장에서는 어느 강대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될 것인지가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국제 정세를 설명하는 대신 지난 스물세 해를 돌아봅니다.

「아몬의 아들인 유다 왕 요시야 십삼 년째부터 오늘까지, 이 스물세 해 동안 여호와야훼의 말이 내게 임했다. 나는 부지런히 거듭 너희에게 말했지만, 너희는 듣지 않았다.」예레미야 25:3 · 본디새김

요시야 십삼 년째는 예레미야 1:2에서도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시작한 때로 기록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예언자가 자신의 오랜 사역을 돌아보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부지런히 거듭」(⁨שָׁכַם⁩)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의 독특한 관용구를 반영합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행동이 부지런하고 끈질긴 활동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4절에서는 같은 표현이 하나님에게 적용됩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종인 예언자들을 모두 너희에게 부지런히 거듭 보냈지만, 너희는 듣지 않았고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예레미야 25:4 · 본디새김

예레미야가 거듭 말한 까닭은 하나님이 거듭 예언자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보내셨습니다. 예언자들은 계속 전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계속 듣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동을 바꾸는 의미에서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했다. 『제발 너희는 저마다 자기의 악한 길과 너희 행실의 악함에서 돌아서라. 여호와야훼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예로부터 영원토록 준 땅에서 살아라.』」예레미야 25:5 · 본디새김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는 요청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백성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신 땅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거나 그들에게 절하지 마라. 너희 손으로 한 일로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해를 입히지 않겠다.』」예레미야 25:6 · 본디새김

여기서 「너희 손으로 한 일」은 문맥상 우상숭배와 관련된 인간의 제작물이나 행위를 가리킵니다. 예레미야 10:3–5에서도 사람이 손으로 만들어 세운 우상들이 비판받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그 행동이 결국 자신들에게 해를 가져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희 손으로 한 일로 나를 화나게 하여 스스로 해를 입었다.』」예레미야 25:7 · 본디새김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이 풍요와 안정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결과가 정반대였다고 선언합니다.

스물세 해라는 시간은 단순히 예레미야가 얼마나 오래 활동했는지를 보여 주는 숫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끈질기게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그 말씀을 거절했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바벨론 왕을 「내 종」이라고 부르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25:8–9 본문 →

이제 8절에서 심판의 이유가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예레미야 25:8 · 본디새김

그 결과가 뒤따릅니다.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 북쪽의 모든 씨족들을 데려오고, 내 종인 바벨론 왕 느부갓레차르에게도 사람을 보내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들을 이 땅과 그 주민들과 둘레의 이 모든 민족을 치러 오게 하겠다. 나는 그들을 남김없이 멸하고, 경악거리와 비웃음거리와 영원한 폐허로 만들겠다.』」예레미야 25:9 · 본디새김

느부갓레차르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율법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다윗의 후손도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느부갓레차르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그가 유다와 주변 민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쓰이는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벨론 왕이 여호와야훼를 참되게 섬겼다거나 그의 행실이 도덕적으로 옳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12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죄악을 심판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나라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심판을 이루신다고 해서, 그 나라의 모든 행동을 승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10:5–15에서도 아시리아가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도구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그 왕의 교만과 악한 의도가 심판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벨론을 데려오시는 이유는 단순히 유다를 군사적으로 패배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한 삶과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멸망은 다음 절에서 아주 일상적인 장면으로 묘사됩니다.

맷돌이 멈추고 등불이 꺼진 땅

예레미야 25:10–11 본문 →

「『나는 그들에게서 환희의 소리와 기쁨의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을 없애겠다.』」예레미야 25:10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성벽이 무너지는 모습이나 군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이 살아가던 일상의 소리와 빛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순서는 공동체의 축제에서 가정의 삶으로 시선을 좁혀 가는 것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소리는 새로운 가정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결혼식은 사람들이 미래를 기대하며 함께 기뻐하는 자리입니다. 그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잔치를 벌일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미래를 기뻐할 수 있는 삶의 질서를 잃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맷돌 소리는 더 평범합니다.

곡식을 갈아 음식을 준비하는 소리입니다. 특별한 축제 때가 아니라 평소의 가정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등불 빛 역시 그렇습니다.

밤이 되어도 집 안에서 사람들이 생활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와 빛이 모두 사라집니다.

나라의 멸망이란 왕이 왕좌를 잃고 성읍이 적군에게 넘어가는 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음식을 준비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고, 결혼을 축하하며, 다음 세대를 기다리는 평범한 삶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이 온 땅이 폐허와 경악거리가 되고, 이 민족들은 일흔 해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길 것이다.』」예레미야 25:11 · 본디새김

바벨론의 지배가 본격화된 때부터 그 제국의 몰락까지로 보는 읽기가 있고, 유다의 멸망과 귀환 및 회복에 초점을 맞추는 읽기도 있습니다. 숫자를 상징적인 기간으로 읽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25장 자체가 강조하는 것은 계산의 출발점보다 그 기간에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을 섬길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스물세 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해 온 과거를 돌아보게 합니다.

일흔 해는 그 거절의 결과로 겪게 될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이 민족들은 일흔 해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길 것이다」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숫자를 모든 유다 사람이 정확히 일흔 해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살다가 귀국한다는 뜻으로 곧바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바벨론에 대한 종속과 유다 사람들의 포로 생활은 서로 관계되어 있지만, 동일한 시점에 시작하여 동일한 시점에 끝난 단일 사건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도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지배와 유배는 여러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최종 함락 이전에도 유배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예레미야 29:10에서도 하나님은 바벨론을 위한 일흔 해가 차면 유배민을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흔 해의 구체적인 시작과 끝을 어느 역사적 사건에 정확히 대응시킬 것인지는 구별해서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바벨론도 심판받습니다

예레미야 25:12–14 본문 →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민족에게 그들의 죄악을 물어 벌을 내리고, 칼데아 사람들의 땅에도 벌을 내리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그곳을 영원히 황폐한 곳으로 만들겠다.』」예레미야 25:12 · 본디새김

여기서 바벨론의 심판은 단순히 하나님의 계획에서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내려지는 처분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벌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민족과 강대한 왕들이 그들마저 종으로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손으로 한 일대로 그들에게 갚겠다.』」예레미야 25:14 · 본디새김

지배하던 자가 지배받는 자가 되는 역전입니다.

어떤 제국은 여러 나라를 지배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이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자신들의 정당성에 대한 증거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강한 자가 이겼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패배한 유다의 잘못을 물으시는 동시에 승리한 바벨론의 잘못도 물으십니다.

「『내가 그 땅을 두고 한 모든 말을 그 땅에 이루겠다.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두고 예언한,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모든 말이다.』」예레미야 25:13 · 본디새김

히브리어 성경의 배열에서는 여러 민족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이 예레미야 46–51장에 모여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와 심판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독자는 하나님이 유다뿐 아니라 여러 민족의 역사까지 다스리시는 분임을 더욱 뚜렷하게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잔 하나를 건네십니다.

이제 장면이 말로 된 선언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상징적 행동으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역사적으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지배는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바벨론 정복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25:12의 「영원히 황폐한 곳」이라는 표현을 바벨론 도시가 기원전 539년에 즉시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도시의 쇠퇴는 더 긴 역사적 과정을 거쳤습니다. 또한 칠십인역 예레미야는 민족들에 대한 예언을 히브리어 성경과 다른 자리에 배치하여, 이 단락 뒤에 이어 놓습니다. 두 본문 전승의 배열은 다르지만, 유다의 심판에서 여러 민족의 심판으로 시야가 확대된다는 연결은 공통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건네신 포도주 잔

예레미야 25:15–17 본문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내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 손에서 이 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아라. 내가 너를 보내는 모든 민족에게 그것을 마시게 하여라.」예레미야 25:15 · 본디새김

성경에서 포도주 잔은 때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신 운명이나 몫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시편 75:8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손에 잔이 있고 악인들이 그 잔의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사야 51:17에서도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셨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25장에서는 그 잔이 유다를 넘어 여러 민족에게 전달됩니다.

「그들은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할 것이다. 내가 그들 사이에 보내는 칼 때문이다.」예레미야 25:16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계획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전쟁과 재난 속에서 질서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잔은 단순히 심리적인 혼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으로 인해 나라들이 겪게 될 실제적인 파괴와 혼란을 상징합니다.

나는 여호와야훼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 여호와야훼가 나를 보낸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했다.예레미야 25:17 · 본디새김

여러 민족의 운명을 하나님의 잔을 마시는 행위로 표현하는 예언적 상징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3장에서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꾸몄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예언자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잔이 맨 처음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첫 번째로 잔을 마시는 성읍

예레미야 25:18–26 본문 →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고관들에게 마시게 했다. 그들을 오늘날처럼 폐허와 경악거리와 비웃음거리와 저줏거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예레미야 25:18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므로, 그 말씀을 거절한 책임이 있습니다.

19절부터는 잔이 여러 민족에게 전달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 블레셋의 여러 성읍, 에돔과 모압과 암몬, 두로와 시돈, 아라비아의 여러 집단, 엘람과 메대, 북쪽의 왕들이 이어집니다. 이 명단에는 유다 주변의 나라들뿐 아니라 더 멀리 떨어진 지역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북쪽의 모든 왕들 하나하나에게, 또 지면 위에 있는 세상의 모든 왕국에 마시게 했다. 세삭 왕은 그들 뒤에 마실 것이다.예레미야 25:26 · 본디새김

본문의 언어는 한 지역의 분쟁에서 온 세상의 민족들을 향한 심판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을 당시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동일한 방식으로 바벨론의 지배를 경험했다는 역사적 목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언어로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의 범위를 선언합니다.

세삭 왕은 바벨론 왕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은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바벨론도 잔을 마십니다.

잔은 유다에서 시작하여 바벨론에서 끝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예외가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에 사용된 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25장의 첫머리는 여호야김 사 년째라는 과거의 연대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은 예루살렘이 이미 폐허와 조롱의 대상이 된 상황을 바라보는 표현처럼 들립니다. 이 문장이 예레미야의 선포 당시 그대로의 표현인지, 이후에 말씀을 기록하거나 정리하는 과정에서 붙은 회고적 표현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레미야서가 예언의 말씀들을 반드시 사건이 발생한 시간순으로 배열한 책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면 이러한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히 짐리와 같은 이름은 어느 집단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세삭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문자 치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를 마지막 글자로, 둘째 글자를 끝에서 둘째 글자로 바꾸는 방식을 흔히 ‘아트바시’라고 부릅니다. 이 방식에 따라 ‘바벨’, 곧 바벨론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자음을 바꾸면 ‘쉰-쉰-카프’라는 자음이 됩니다. 이를 ‘세삭’으로 읽습니다. 예레미야 51:41에서도 세삭과 바벨론이 서로 대응하는 위치에 등장하여 이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왜 바벨론을 이러한 이름으로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단순한 암호명이나 문학적 표현으로 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용 이유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시기를 거부해도 피할 수 없는 잔

예레미야 25:27–29 본문 →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라.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 『마셔라. 취하고 토하고 쓰러져라. 너희는 내가 너희 가운데 보내는 칼 때문에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예레미야 25:27 · 본디새김

앞에서 포도주가 중심을 잃게 하는 심판의 상징이었다면, 여기서는 그 결과가 더욱 생생하게 표현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그처럼 이 민족들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심판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들이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부하면,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라.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반드시 마실 것이다.』」예레미야 25:28 · 본디새김

여기서 잔을 마시는 일이 개인적인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일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판결이 실행된다는 의미가 중심입니다. 이것을 모든 시대의 모든 전쟁에서 항복하거나 저항하는 선택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예레미야를 통해 구체적으로 선포된 심판의 불가피성을 말합니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는 성읍에서부터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는데, 너희가 정녕 벌을 면하겠느냐? 너희는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온 땅의 모든 주민을 치도록 칼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5:29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라면 하나님이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그곳의 불의를 덮어 주지는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읍도 심판받는다면, 다른 민족들도 자기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바벨론 제국의 세력 확대라는 정치적 사건을 넘어섭니다. 여호와야훼가 모든 민족과 송사를 벌이시는 장면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이 온 땅과 송사를 벌이신다

예레미야 25:30–33 본문 →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예언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여호와야훼가 높은 곳에서 포효하고, 자신의 거룩한 거처에서 소리를 낼 것이다. 자신의 목장을 향해 크게 포효하고, 포도를 밟는 자들처럼 함성을 내며 온 땅의 모든 주민을 향해 외칠 것이다.』」예레미야 25:30 · 본디새김

여기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포효는 사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 25장의 마지막 절에서도 하나님은 젊은 사자처럼 자신의 은신처를 떠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30절의 포효와 38절의 사자 이미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포도주 잔이 여러 민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포도를 밟는 사람들의 함성이 심판의 장면에 나타납니다. 포도주와 관련된 두 이미지가 서로 이어지면서 민족들이 겪을 심판을 강조합니다.

「『요란한 소리가 땅끝까지 이르렀다. 여호와야훼가 민족들과 다툴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육체와 송사를 벌이고, 악인들을 칼에 넘겼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5:31 · 본디새김

예언서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이나 민족들을 상대로 죄를 고발하고 판결하시는 장면에 이 언어가 사용되곤 합니다. 예레미야 25:31도 그런 법적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군대를 움직여 다른 나라들을 정복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판결이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판결의 대상에는 바벨론 자신도 포함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라, 재앙이 민족에서 민족으로 뻗어 나가고, 큰 폭풍이 땅의 가장 먼 곳에서 일어날 것이다.」예레미야 25:32 · 본디새김

폭풍은 한곳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영향이 퍼져 나갑니다. 예레미야는 여러 민족에게 전쟁과 파괴가 확산되는 모습을 큰 폭풍으로 표현합니다.

그날에 여호와야훼에게 죽임을 당한 자들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애도받지도, 거두어지지도, 묻히지도 않을 것이다. 지면 위의 똥이 될 것이다.예레미야 25:33 · 본디새김

시신이 제대로 장사되지 못한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심각한 수치와 비극을 의미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묻어 주는 일은 공동체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중요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일조차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지면 위의 똥」이라는 표현은 매우 거칠지만, 죽은 사람의 몸이 아무런 존엄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다만 이 시적 표현을 역사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 시신이 쌓였다는 식으로 문자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심판의 광범위함과 그 참혹함을 극단적인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아직 마지막 장면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 장면에는 다시 목자들이 등장합니다.

도망칠 길이 사라진 목자들

예레미야 25:34–38 본문 →

목자들아, 울부짖고 소리쳐라. 양 떼의 힘센 자들아, 뒹굴어라. 너희가 도살당하고 흩어질 날들이 다 찼기 때문이다. 너희는 귀한 그릇처럼 떨어질 것이다.예레미야 25:34 · 본디새김

예레미야서에서 목자는 왕과 지도자를 가리키는 비유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목자들은 유다의 지도자들만으로 제한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온 세상의 민족들을 향한 심판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여러 나라의 왕들과 통치자들을 함께 가리키는 이미지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귀한 그릇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물건입니다. 깨지면 그 가치와 기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위가 높다는 사실이 그들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목자들이 도망칠 길이 사라지고, 양 떼의 힘센 자들이 벗어날 길이 사라질 것이다.예레미야 25:35 · 본디새김

목자는 양 떼를 위험에서 이끌어 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왕은 명령할 수 있습니다. 군대를 움직일 수 있고,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며,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그 권력이 자신을 반드시 구해 주지는 못합니다.

목자들이 외치는 소리, 양 떼의 힘센 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목초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5:36 · 본디새김

목초지는 목자와 양 떼가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그곳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목자가 돌보아야 할 삶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37절에서는 평온하던 목장들이 잠잠해집니다.

이 장에서 침묵은 평화의 표시가 아닙니다. 삶이 사라진 결과입니다.

그가 젊은 사자처럼 자기 은신처를 떠났다. 억압하는 자의 격노로, 그의 타오르는 분노로 그들의 땅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5:38 · 본디새김

오랫동안 선포되어 온 심판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억압하는 자의 격노」가 정확히 누구의 행동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억압하는 자를 가리키는 형태로 읽을 수 있지만, 다른 본문 전승과의 비교에서는 ‘억압하는 칼’ 또는 ‘압제자의 칼’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절의 모든 분노를 곧바로 하나의 주체에게 돌려서 설명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장면과 그 심판이 역사 속에서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겹쳐 있다고 보는 것이 신중합니다. 다만 앞뒤 문맥에서 사자처럼 은신처를 떠나시는 주체가 여호와야훼라는 사실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맺음말 — 맷돌 소리가 사라진 뒤에 들리는 소리

예레미야 25:1–38 본문 →

예레미야 25장의 비극은 하나님이 침묵하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비극은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 본문은 예레미야 시대 유다와 주변 민족들을 향해 선포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벨론이나 일흔 해를 오늘날 어떤 나라나 정치적 세력에 곧바로 적용할 근거는 없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젊은 사자가 자기 은신처를 떠납니다.

그 사자가 움직이기 전에 이미 오랫동안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자는 은신처를 떠났고, 목장들은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동안에도 그 말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으려 했던 말씀이 이제 그들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맷돌은 멈추었고 등불은 꺼졌습니다.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땅을 뒤흔드는 포효로 들려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