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돌아올 수 없는 사람에게 돌아오라 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장은 한 가지 법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내보냈고, 그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면, 첫 남편이 다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의 배경에는 신명기 24:1–4가 있습니다. 그 규정에 따르면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뒤에는, 두 번째 혼인 관계가 끝나더라도 첫 남편이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을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재결합이 땅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3장은 바로 그 규정을 떠올리게 하면서, 이스라엘이 한 남자가 아니라 수많은 상대와 관계를 맺었다고 고발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여호와야훼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입니까?
이 장은 배신이 얼마나 심각한지 축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배신을 고발하시는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할 길도 여십니다.
돌아올 수 있느냐는 질문과 돌아올 생각이 없는 사람
3장 첫머리에서 여호와야훼는 신명기의 이혼 규정을 떠올리게 하십니다.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한 남자가 자기 아내를 내보내고, 그 여자가 그를 떠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면, 그가 다시 그 여자에게 돌아가겠느냐? 그 땅이 철저히 더럽혀지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는 많은 벗들과 음행하고도 내게 돌아오겠다는 것이냐?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1 · 본디새김
따라서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배신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보여 줍니다. 단순히 잠시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상대들에게 자신을 맡김으로써 관계의 근본을 훼손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경우에도 첫 혼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 된다면, 수많은 상대를 따라간 이스라엘은 얼마나 더 심각한 상태입니까?
이어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에게 눈을 들어 언덕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벌거벗은 언덕들을 보아라. 너와 동침한 일이 없는 곳이 어디 있느냐? 너는 광야의 아라비아 사람처럼 길가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네 음행과 네 악으로 땅을 더럽혔다.」예레미야 3:2 · 본디새김
언덕들은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던 장소와 연결됩니다. 높은 곳과 나무 아래에서 이루어진 우상숭배는 앞 장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지나간 곳마다 배신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이스라엘은 관계를 깨뜨린 아내의 모습으로 의인화됩니다. 따라서 여기의 성적 표현은 일차적으로 공동체의 종교적 배신을 고발하는 언어입니다. 실제 혼인 관계에서 상처받은 사람에게 동일한 상황을 적용하거나, 배신당한 배우자에게 재결합을 요구하는 규범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3절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소나기가 그치고 봄비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창녀의 이마를 하고 부끄러워하기를 거부했다.」예레미야 3:3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농경 생활에서 계절에 맞는 비는 생존과 직결되었습니다. 특히 봄비는 곡식이 자라는 시기에 중요했습니다. 신명기 11:13–17에서도 여호와야훼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과 비가 그치는 심판이 연결됩니다.
「창녀의 이마」라는 표현에서 이마는 얼굴에 드러나는 뻔뻔함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태도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의 고발은 행동에서 마음의 상태로 옮겨 갑니다.
이스라엘은 잘못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일을 잘못이라고 인정할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여호와야훼를 향해 친밀한 말을 건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이렇게 부르지 않았느냐? 『제 아버지, 당신은 제 젊은 시절의 벗입니다.』」예레미야 3:4 · 본디새김
이 말만 따로 읽으면 아름다운 신앙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다음 절은 그 말의 실제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가 영원히 노여움을 품겠습니까? 끝없이 간직하겠습니까?』 보아라, 너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악한 일들을 저질렀고, 기어이 해냈다.」예레미야 3:5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분이 노여움을 거두시기를 바라면서도 자신들이 하던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와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을 바꾸지 않은 채 여호와야훼의 노여움만 끝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마지막의 「내게 돌아오겠다는 것이냐?」는 히브리어에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의 쇼브는 「돌아오다」라는 뜻을 지니지만, 이 문장의 끝에서 의문으로 읽을 수도 있고 돌아오라는 요청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의 법적 반문과 연결하여 질문으로 옮겼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감히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긴장이 강조됩니다. 반대로 돌아오라는 요청으로 이해하면, 심각한 배신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회복의 부르심이 들리는 셈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12절 이후에는 실제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언니의 멸망을 보고도 배우지 못한 동생
6절에서 장면과 대상이 바뀝니다.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돌아선 이스라엘이 한 일을 보았느냐? 그녀는 높은 산마다 올라가고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마다 가서, 거기서 음행했다.」예레미야 3: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요시야 시대에 주어졌습니다. 그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뒤였습니다. 열왕기하 17장은 북왕국의 멸망을 설명하면서 다른 신들을 섬긴 일과 여호와야훼의 경고를 듣지 않은 일을 주요 원인으로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에게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 돌아선 이스라엘에게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같은 움직임의 방향이 뒤집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녀가 이 모든 일을 하고 나면 내게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를 배신한 그녀의 자매 유다가 그것을 보았다.」예레미야 3:7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떠난 뒤 마침내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셨다는 형이상학적 진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인간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기대와 실망의 언어로 배신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돌아선 이스라엘이 간음한 그 모든 일 때문에 나는 그녀를 내보내고 이혼 증서를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나를 배신한 그녀의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않고 가서 자기도 음행하는 것을 보았다.」예레미야 3:8 · 본디새김
북왕국의 멸망과 유배가 혼인 관계의 파기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가 고발하시는 대상은 북왕국에서 남왕국으로 옮겨 갑니다.
자매라는 비유는 두 왕국이 본래 한 백성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왕국은 갈라졌지만, 여호와야훼와의 관계에서 서로 무관한 민족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언니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긴 결과가 무엇인지 역사 속에서 목격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도 나를 배신한 그녀의 자매 유다는 온 마음으로 내게 돌아온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만 돌아왔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10 · 본디새김
북왕국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왕국은 돌아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시야 시대에는 실제로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열왕기하 22–23장에 따르면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었고, 왕은 언약을 새롭게 하며 여러 우상숭배의 시설을 제거했습니다.
예레미야 3:10이 그 개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진정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시야 시대라는 배경에서 이 말씀을 읽으면 중요한 긴장이 드러납니다.
겉으로 종교적 정비가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이 곧 공동체 전체의 진정한 돌아옴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내게 말했다. 「배신한 유다에 비하면, 돌아선 이스라엘이 자신을 더 의롭게 드러냈다.」예레미야 3:11 · 본디새김
북왕국이 실제로 의로운 나라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북왕국의 심각한 죄가 이미 고발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두 나라를 비교한 판정입니다.
유다는 북왕국이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보고도 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은 돌아온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유다의 문제는 경고를 듣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경고를 알고도 자신은 안전하다고 여긴 데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의 판정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유다가 더 큰 책임을 지고 있다는 말씀 뒤에, 여호와야훼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외치게 하십니다.
북쪽을 향해 들리는 부름 — 「돌아와라」
「가서 북쪽을 향해 이 말들을 외쳐라. 이렇게 말해라. 『돌아선 이스라엘아, 돌아와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나는 너희에게 얼굴을 찌푸리지 않겠다. 나는 인자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나는 영원히 노여움을 품지 않겠다.』」예레미야 3:12 · 본디새김
북왕국은 이미 멸망했습니다.
그 백성의 일부는 아시리아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습니다(열왕기하 17:6). 그러므로 북쪽을 향해 외치라는 명령은 단순히 이웃 나라를 향해 설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흩어진 백성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관계의 단절은 이미 선언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가 영원히 노여움을 품지 않으시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영원히 노여움을 품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장면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 말씀과 함께 요구되는 응답에 있습니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이 계속 악을 행하면서 용서를 기대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돌아오라고 부르시며 그들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다만 네 죄악을 인정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반역했고,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마다 낯선 자들에게로 이리저리 발길을 돌렸다. 너희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13 · 본디새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기 일로 인정하라는 요구입니다.
이스라엘이 그저 불행한 처지를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처지에 이르렀는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3장 앞부분의 거짓된 돌아옴과 참된 돌아옴을 나누는 기준입니다.
「『돌아선 자녀들아, 돌아와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너희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성읍에서 한 사람씩, 씨족에서 두 사람씩 데려다가 시온으로 데려오겠다.』」예레미야 3:14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다른 상대들에게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여전히 그들과 맺은 관계의 당사자이심을 밝히십니다.
이 표현은 돌아오는 사람의 수가 많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성읍에서 한 사람, 한 씨족에서 두 사람이라는 작은 수를 제시합니다. 이는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 모으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심판을 통과한 뒤 남은 사람들이 많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도 암시합니다.
나라가 무너졌고, 백성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흩어짐이 여호와야훼의 부르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돌아온 백성이 어떤 공동체를 이루게 될지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내가 너희의 남편이기 때문이다」에 사용된 동사는 바알(בָּעַל)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에는 남편이 되거나 주인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남편이시라는 뜻으로도, 그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가지신 주이시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남편」으로 옮긴 것은 이 장 전체의 혼인과 이혼 비유에 잘 어울립니다.
언약궤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예루살렘
여호와야훼가 약속하시는 회복은 먼저 지도자들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내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겠다. 그들이 지식과 분별로 너희를 먹일 것이다.』」예레미야 3:15 · 본디새김
목자는 백성을 다스리고 돌보는 지도자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예레미야 2:8에서는 목자들이 여호와야훼에게 반역했다고 고발되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새로운 목자들의 특징은 힘이나 군사적 능력이 아닙니다.
그들은 백성을 먹여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먹인다는 것은 실제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행동을 빌려,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지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유지하는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며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23:1–4에서도 확장됩니다. 그곳에서는 양 떼를 흩어 버린 목자들이 책망을 받고,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양 떼를 모아 다시 목자들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6절에서 회복의 모습은 더욱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날들에 너희가 그 땅에서 불어나고 번성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야훼의 언약궤를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고, 그것을 기억하지도 않으며, 찾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만들어지지도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3:16 · 본디새김
언약궤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25:10–22에서 여호와야훼는 궤를 만들도록 명령하시고, 그 위의 속죄판 위에서 모세를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열왕기상 8:6–11에서는 언약궤가 성전의 지성소에 놓이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여호와야훼의 왕좌라고 부를 것이다. 모든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받들어 그곳으로,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기들의 악한 마음의 고집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3:17 · 본디새김
언약궤가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것은 여호와야훼의 임재와 통치를 나타내는 거룩한 장소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의 통치를 드러내는 방식이 특정한 거룩한 물건에 집중되지 않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펼쳐질 새로운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은 언약궤의 역사적 행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장차 회복될 공동체에서 그 물건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중심성을 갖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회복은 잃어버린 과거의 모든 것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과거의 거룩한 상징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의 모습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민족적 경계 안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른 민족들도 여호와야훼의 통치를 인정하는 미래가 그려집니다.
이 장에서 반복되었던 문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다른 곳으로 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회복의 미래에서는 사람들의 내면적 방향도 달라집니다.
겉으로만 여호와야훼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집을 따라 걷던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예레미야 31:31–34에서 예고되는 새 언약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가르침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장의 회복은 아직 그 새 언약의 모든 내용을 설명하지 않지만, 이미 외적인 종교적 형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날들에 유다 집안이 이스라엘 집안과 함께 갈 것이다. 그들은 북쪽 땅에서 함께 와서, 내가 너희 조상에게 유산으로 준 땅에 이를 것이다.』」예레미야 3:1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서로의 잘못을 보면서도 같은 길을 걸었던 두 자매였습니다. 이 회복은 개인들의 마음만 변하는 일이 아닙니다. 분열된 백성이 다시 함께하는 공동체적 회복입니다.
예레미야 1:15에서는 북쪽 왕국들의 왕들이 예루살렘 성문 앞에 자신들의 왕좌를 놓을 것이라고 예고되었습니다. 외국의 왕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위세를 드러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3:17에서는 예루살렘이 여호와야훼의 왕좌라고 불립니다.
두 장면은 예루살렘이 누구의 통치 아래 놓이는가라는 문제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아버지라고 불러 주기를 바라셨던 하나님
19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다시 친밀한 관계의 언어로 바뀝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아들들 가운데 두고, 너에게 탐스러운 땅, 민족들의 무리 가운데 아름다운 유산을 줄까?』 나는 네가 나를 네 아버지라 부르고, 나를 따르다가 돌아서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예레미야 3:19 · 본디새김
여기서는 남편과 아내의 비유 대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전면에 나옵니다.
3:4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를 「제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도 그분의 뜻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가 기대하신 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호칭에 걸맞은 관계였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단지 이름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에게서 생명을 얻었고, 누구의 돌봄 속에 살아왔는지를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관계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20절에서 다시 배신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자가 제 짝을 배신하듯,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도 나를 배신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20 · 본디새김
앞에서 회복의 미래가 길게 펼쳐졌지만, 이스라엘이 실제로 저질렀던 일을 여호와야훼는 지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배신이 분명히 드러난 자리에서 회복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용서는 잘못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를 다시 세울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문장 구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라는 물음은 실제 방법을 묻는 질문으로도,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감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민족들의 무리 가운데 아름다운 유산」을 이루는 여러 낱말의 관계도 한 가지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자녀의 자리에 두고, 아름다운 땅을 유산으로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같은 언덕에서 들리는 다른 소리
벌거벗은 언덕들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스라엘 자손이 울며 애원하는 소리였다. 그들이 자기들의 길을 굽게 하고,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잊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3:21 · 본디새김
앞에서 벌거벗은 언덕들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기던 장소였습니다. 3:2에서 여호와야훼는 그 언덕들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이스라엘이 여러 상대와 음행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장소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 장소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바뀌었습니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길을 정당화했습니다. 자신들은 더럽혀지지 않았고 죄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돌아선 자녀들아, 돌아와라. 내가 너희의 돌아섬을 고쳐 주겠다.」 「보십시오, 저희가 당신께 왔습니다. 당신이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이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3:22 · 본디새김
이 말은 이스라엘의 배신을 단지 법적으로 용서하는 문제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방향 자체를 치유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같은 길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앞부분과 달리 여호와야훼의 노여움을 빨리 거두어 달라는 말이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 누구에게 돌아와야 하는가가 중심이 됩니다.
「참으로 언덕들에서 이는 산들의 소란은 헛됩니다. 참으로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이스라엘의 구원이 있습니다.」예레미야 3:23 · 본디새김
산과 언덕에서 이루어진 우상숭배가 자신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말은 2장에서 살아 있는 물의 샘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물을 찾던 이스라엘의 행동과 대조됩니다.
「그 수치가 저희 젊은 시절부터 저희 조상들의 수고로 얻은 것을 먹어 치웠습니다. 그들의 양 떼와 소 떼,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먹어 치웠습니다.」예레미야 3:24 · 본디새김
이것은 이스라엘의 배신이 단순히 마음속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잘못된 삶은 공동체가 쌓아 온 것을 파괴하고, 다음 세대의 삶까지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저희 수치 속에 눕겠습니다. 저희 치욕이 저희를 덮게 두겠습니다. 저희와 저희 조상이 저희 젊은 시절부터 오늘까지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죄를 지었고,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3:25 · 본디새김
3:3에서 이스라엘은 부끄러워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부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변명하는 대신, 자신들이 부끄러운 일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2장 첫머리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젊은 시절 사랑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젊은 시절부터 여호와야훼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관계에는 여호와야훼가 베푸신 사랑과 돌봄이 있었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오랜 불순종도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불순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는 「돌아선 자녀들」과 「너희의 돌아섬」이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고치다」라는 동사가 결합합니다. 이 주제는 예레미야 24:7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백성에게 자신을 아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 마음으로 여호와야훼께 돌아올 것입니다. 여기서 「언덕들에서 이는 산들의 소란」이라는 표현은 원문의 구조가 분명하지 않아 해석이 갈립니다. 언덕들과 산들을 하나의 소란스러운 장면으로 볼 수도 있고, 두 대상을 나란히 놓은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수치」에 해당하는 보셰트(בֹּשֶׁת)는 수치심이나 치욕을 뜻합니다. 구약에서는 이 낱말이 우상이나 바알을 경멸적으로 가리키는 표현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것이 단순히 추상적인 수치심을 의인화한 것인지, 수치스러운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모든 자녀가 특정한 우상에게 실제로 제물로 바쳐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서 다른 곳에는 자녀 희생에 대한 고발이 등장하지만(예레미야 7:31; 19:5), 여기서는 수치가 공동체의 삶과 소유를 삼켜 버렸다는 고백이 중심입니다. 본문은 이 대답이 어느 시점에 누구에 의해 실제로 드려졌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북왕국의 포로들이 이미 모두 회개했다는 역사적 보고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언의 흐름 속에서 여호와야훼의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을 보여 주는 고백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은 다음 장의 시작에서도 확인됩니다. 예레미야 4:1–4에서는 돌아옴과 마음의 변화가 여전히 요구됩니다.
맺음 — 언덕에서 다시 들린 목소리
처음에는 돌아올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돌아오라는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관계를 파괴한 것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다시 열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벌거벗은 언덕에는 아직 수치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걸어온 길도, 그 길에서 저지른 잘못도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언덕에서 들리는 소리는 달라졌습니다.
한때 다른 신들을 부르던 곳에서,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부르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