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42장

이 장의 자리 · 34–45장 · 무너지는 예루살렘

뜻을 물었지만 이미 길을 정한 사람들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응답이 오더라도 순종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응답을 전한 뒤, 그들이 이미 순종하지 않았다고 선언합니다.

아직 그들이 이집트에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 어떤 행동을 했다는 기록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들의 잘못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앞 장에서 이스마엘에게 납치되었던 백성은 요하난에게 구출되었지만,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떠나려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길을 실행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찾아옵니다.

42장은 길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고 싶은 길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응답 앞에 서는 이야기입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642장 본문 읽기 →

무엇이든 따르겠다는 약속

예레미야 42:1–6 본문 →

이 장은 모든 군 지휘관과 요하난, 여사냐, 그리고 작은 이부터 큰 이까지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에게 다가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표현이 거듭 등장합니다. 군 지휘관들만 찾아온 것도 아니고, 지도자 몇 사람만 대표로 문의한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공동체 전체가 이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유다의 정치적 질서는 거의 무너졌습니다. 왕도 없고, 바벨론이 임명한 그달랴도 살해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군사 지휘관들의 판단만으로 결정하지 않고 예언자를 찾아갑니다.

그들이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말했다. 「부디 저희의 간청을 받아 주십시오. 저희를 위해, 이 남은 사람들 모두를 위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기도해 주십시오. 당신이 저희를 직접 보시는 대로, 많던 저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예레미야 42:2 · 본디새김

바벨론의 침공과 예루살렘의 함락, 유배와 살인 사건을 거친 뒤 그들의 수는 실제로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한때 많은 사람이 살던 유다에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려 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말했다. 「들었소. 내가 여러분의 말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기도하겠소. 여호와야훼가 여러분에게 대답하는 모든 말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겠소. 여러분에게 한마디도 감추지 않겠소.」예레미야 42:4 · 본디새김

백성은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지만, 예레미야는 「여러분의 하나님」이라고 돌려줍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 개인의 하나님만이 아니십니다. 바로 그들을 출애굽시키고 이 땅으로 인도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묻는 문제는 남의 하나님에게 조언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어 백성도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라고 말합니다(42:6). 이 호칭의 변화만으로 그들에게 진정한 회개가 일어났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화는 분명하게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전면에 드러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저희에게 저희가 걸어갈 길과 저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기를 바랍니다.」예레미야 42:3 · 본디새김

이것은 포괄적인 질문입니다. 특정한 선택을 승인해 달라는 형식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는 형식입니다.

「좋든 나쁘든, 저희가 당신을 보내어 여쭙는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순종하겠습니다.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저희가 잘되도록 하겠습니다.」예레미야 42:6 · 본디새김

여기서 ‘좋든 나쁘든’은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좋은 명령이나 나쁜 명령을 내리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듣기에 좋은 대답이든 불편한 대답이든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여호와야훼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인이 되셔도 좋다고 맹세합니다(42:5).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걸고 자신들의 약속이 진실하다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완전한 순종의 약속이지만, 그들의 마음까지 그 약속과 일치하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백성은 무엇이든 따르겠다고 약속했고, 예레미야는 무엇이든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양쪽 모두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만으로 그들이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그와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흘 뒤에 찾아온 뜻밖의 약속

예레미야 42:7–12 본문 →

열흘이 지나자 여호와야훼의 말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예레미야 42:7 · 본디새김

백성은 당장 생존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바벨론이 언제 보복할지 모릅니다. 이집트로 가려면 움직여야 하고, 유다에 남으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즉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왜 열흘이 걸렸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열흘 동안 백성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레미야가 자신의 판단을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발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응답을 기다렸고, 말씀이 임한 뒤에야 백성을 다시 불렀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신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세우고 심으시는 하나님

「『너희가 이 땅에 계속 머문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허물지 않으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켰기 때문이다.』」예레미야 42:10 · 본디새김

그들에게 유다 땅은 더 이상 평온한 고향이 아닙니다. 수도는 파괴되었고, 성전은 불탔으며, 그들을 보호하던 그달랴는 살해되었습니다. 바벨론 군인들까지 죽임당했으므로 제국의 보복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가장 떠나고 싶어 하는 땅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를 민족들과 나라들 위에 세워 뽑고 허물고 멸하고 무너뜨리며, 또한 세우고 심게 하셨습니다(1:10). 예레미야가 전해야 했던 말씀에는 심판과 회복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의 많은 부분에서 유다는 뽑히고 무너지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실제로 파괴되었고 백성은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 반대의 일을 약속하십니다.

세우겠습니다. 심겠습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 24:6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과도 거의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유배된 사람들을 다시 돌보시고 세우며 심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유다에 남은 사람들에게 그 땅에 머문다면 세우고 심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단순히 유다에 남아 있다는 지리적 조건만으로 보장되지 않으며, 바벨론에 끌려갔다고 해서 불가능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24장의 유배민에게도, 42장의 남은 백성에게도 회복의 주체는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다만 42장에서는 그 약속이 머무르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린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키셨다

하나님은 유다의 멸망을 다른 존재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예레미야서가 앞서 선포했듯이, 그것은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 심판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다시 세우고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미 일어난 재앙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나타내시며, 그 백성을 계속 허무는 대신 다시 세우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예레미야 18:7–10에서 제시된 원칙과도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는 한 민족을 뽑고 무너뜨리겠다고 말씀하셨더라도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내리려던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키겠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복을 약속받은 민족이라도 악을 행하면 그 복에 대해 뜻을 돌이키실 수 있습니다.

42장에서는 이미 심판이 일어난 뒤에도 회복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였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가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 이유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를 두려워하지 마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너희를 구원하고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 내려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42:11 · 본디새김

그런데 그 근거는 바벨론이 더 이상 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벨론이 보복할 능력이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구원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시겠다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함께하여 건져 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8). 또한 그들이 예레미야와 싸우더라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19). 이제 비슷한 약속이 남은 백성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힘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 힘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하여금 자비를 입게 할 것이니, 그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고 너희 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예레미야 42:12 · 본디새김

앞 문맥에 따르면 「그」는 바벨론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바벨론 왕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는 흐름입니다.

백성은 바벨론 왕의 손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를 피해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왕이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권력도 하나님의 자비가 이루어지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론 제국 자체를 선한 나라라고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제국의 권력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있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니함티(⁨נָחַם⁩)는 나함 동사의 니팔형으로, 문맥에 따라 ‘후회하다’, ‘마음을 바꾸다’, ‘뜻을 돌이키다’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완료형입니다. 앞으로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하시겠다는 말만이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행하신 재앙을 두고 하나님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표현합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이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후회나 뜻을 돌이킴이라는 표현을 아무런 의미 없는 수사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너희 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라는 표현에는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유다 땅에 있는데 왜 다시 돌려보내겠다고 하십니까? 바벨론 왕이 그들을 각자의 거주지로 돌아가 살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또는 한때 땅을 떠나게 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귀환을 말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구체적인 경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집트가 약속하는 안전

예레미야 42:13–14 본문 →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방향을 바꿉니다.

첫 번째 부분이 유다 땅에 머물 때 주어질 약속이었다면, 이제는 그 말씀을 거부하고 이집트로 가려 할 때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이집트를 선택하려는 이유를 직접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우리는 이집트 땅으로 들어가겠다. 그곳에서는 전쟁도 보지 않고 뿔나팔 소리도 듣지 않으며 빵이 없어 굶주리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겠다』 하고 말한다면,」예레미야 42:14 · 본디새김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무너졌습니다. 포위된 성읍에서는 기근이 심해졌습니다(예레미야 52:6).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암살과 납치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그들에게 전쟁의 나팔 소리는 단순한 군사 신호가 아닙니다. 또다시 죽음과 굶주림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 점에서 이집트는 단순한 외국 땅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는 안전한 삶의 모습입니다.

당시 이집트는 실제로 중요한 정치적 세력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지배 아래 놓인 사람들이 이집트로 가면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해 가능한 선택입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는 전쟁과 굶주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예상입니다. 반면 유다 땅에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갈등은 단순히 유다와 이집트 가운데 어느 나라가 더 안전한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들이 계산한 안전 가운데 무엇을 신뢰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의 생존 전략은 신앙의 문제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는 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집트는 그들의 조상이 종살이하던 곳이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거기서 해방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후손들은 약속의 땅을 떠나 이집트로 들어가려 합니다. 신명기 28:68은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 닥칠 심판 가운데 하나로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다시 이집트로 돌려보내시는 상황을 언급합니다. 예레미야 42장은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로 향하는 길이 언약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피하려던 재앙이 따라온다

예레미야 42:15–18 본문 →

하나님은 이집트행의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그곳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따라잡고, 너희가 걱정하는 굶주림이 그곳 이집트에서 너희 뒤에 달라붙을 것이다. 너희는 그곳에서 죽을 것이다.』」예레미야 42:16 · 본디새김

백성의 기대와 하나님의 경고가 정확히 맞물립니다.

칼을 피하려고 가는 곳에서 칼이 따라잡습니다.

굶주림을 피하려고 가는 곳에서 굶주림이 달라붙습니다.

이것은 재앙을 마치 추격하는 존재처럼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위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면 안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피하려던 위험이 뒤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또한 14절과 16절에는 「그곳」이라는 장소 표현이 반복됩니다. 백성은 그곳에서 안전하게 살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얻으려는 안전은 그 자체로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 말은 모든 위험 회피가 불신앙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위험을 피해 이동하는 일이 정당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머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거부한 채 자신들이 선택한 길에 안전이 있다고 확신한다는 데 있습니다.

칼과 굶주림과 역병

17절에서는 재앙이 세 가지로 확대됩니다. 칼, 굶주림, 역병입니다. 이 세 가지는 예레미야서에서 거듭 등장하는 심판의 언어입니다(14:12; 21:9; 24:10). 예루살렘에 내려졌던 재앙이 이집트로 가는 사람들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유다의 멸망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다면 심판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유다에 머물라는 말씀을 따르면 세우고 심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반대로 그 말씀을 거부하고 이집트로 가겠다면 심판이 있다는 경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그들을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선택 앞에 놓인 두 길을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오. 『내 분노와 격노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쏟아졌듯이, 너희가 이집트로 들어갈 때 내 격노가 너희에게 쏟아질 것이다. 너희는 저주의 맹세거리와 경악의 대상과 저주거리와 모욕거리가 될 것이다. 너희는 이곳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예레미야 42:18 · 본디새김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직접 경험했거나 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추상적인 위협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현실을 가져올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생명을 잃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고 놀라고 저주의 말에 끌어다 쓰며 모욕하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24:9과 29:18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앞서 유다에게 선언된 심판이 이제 이집트행을 선택하는 남은 백성에게 다시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저주의 맹세거리와 경악의 대상과 저주거리와 모욕거리」에는 두 종류의 저주 표현이 포함됩니다. 히브리어 알라(⁨אָלָה⁩)는 맹세와 저주의 관계를 포함하는 말로, 저주를 담은 맹세나 저주의 맹세거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반면 클랄라는 보다 직접적으로 저주를 뜻합니다.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왜 이미 불순종했다고 말하는가?

예레미야 42:19–21 본문 →

42장의 가장 날카로운 장면은 마지막 경고에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전합니다.

「유다의 남은 이들이여, 여호와야훼가 여러분에게 『이집트로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했소.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경고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 두시오.」예레미야 42:19 · 본디새김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독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목숨을 해치는 잘못을 저질렀소. 여러분이 나를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보내면서 『저희를 위해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기도해 주십시오.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하는 말을 모두 그대로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저희가 행하겠습니다』 하고 말했기 때문이오.」예레미야 42:20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설명하면서 처음 예레미야를 찾아왔던 일을 되짚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 달라고 했고, 어떤 대답이 오더라도 따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바로 그 일이 잘못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것이 잘못인가?

물론 하나님께 기도를 요청했다는 사실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요청에 담긴 약속과 그들이 실제로 받아들이려는 선택 사이의 불일치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대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길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들이 원하는 길과 다르게 나타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완료형으로 선언된 불순종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소. 그가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어 전하게 한 모든 말에도 순종하지 않았소.」예레미야 42:21 · 본디새김

예레미야의 말은 그들의 실제 이동보다 그들의 응답 태도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분명히 주어진 뒤에는 다른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제는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들은 말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42:20의 히브리어 표현 히트에템 브나프쇼테켐은 해석에 약간의 여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길을 그르쳤다는 의미로도, 자신의 마음을 속였다는 의미로도 이해됩니다. 본디새김의 「자기 목숨을 해치는 잘못을 저질렀소」는 잘못된 판단이 결국 자기 생명을 해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을 살린 번역입니다. 어떤 번역은 이 구절에서 속임의 성격을 더 강하게 드러냅니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거짓 맹세를 한 것인지,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면서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길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죄를 단순히 계획된 거짓말이라고만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21절의 「순종하지 않았소」(⁨שָׁמַע⁩)에 해당하는 동사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41장 마지막에서 그들은 이집트로 가려고 했지만 아직 출발을 마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42장에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다음 이집트로 이동했다는 사건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완료형을 근거로 그들이 이미 이집트 국경을 넘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가 그들의 이전 발언에 있었는지, 예레미야가 그들의 현재 태도를 알아본 것인지, 혹은 예언자적 확신에 따라 선언한 것인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은 자리에서 끝나는 이야기

예레미야 42:1–22 본문 →

42장의 마지막 절은 처음의 간청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예레미야 42장이 드러내는 가장 깊은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놓지 못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분명히 알아 두시오. 여러분이 들어가 몸붙여 살고 싶어 하는 바로 그곳에서 여러분은 칼과 굶주림과 역병으로 죽을 것이오.」예레미야 42:22 · 본디새김

그들의 소망이 놓인 장소와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된 장소가 같아집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예레미야는 모든 경고를 마쳤습니다. 백성은 아직 그 앞에 있습니다. 그들의 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 있고, 마음에는 이집트로 가고 싶은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길을 알려 달라고 찾아온 사람들 앞에 이제 두 길이 분명하게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응답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과연 그 말씀을 따를 것인지는 아직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