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43장
이 장의 자리 · 34–45장 · 무너지는 예루살렘
이집트까지 따라온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부정할까요?
예레미야 43장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레미야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이 받아들이기 싫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유다에 머물면 그들을 세우고 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집트로 가면 피하려던 재앙이 따라올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제 43장은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선택했는지 보여 줍니다.
이야기는 두 장면으로 나뉩니다. 앞부분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이집트로 이동합니다(1–7절). 뒷부분에서는 그들이 도착한 이집트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말씀과 상징행동을 통해 그 선택의 의미를 드러내십니다(8–13절).
두 장면을 연결하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말씀을 거부하고 떠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만드는 사람들
43장은 예레미야가 말을 마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모든 말,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그를 그들에게 보내어 전하게 한 이 모든 말을 다 말했을 때,예레미야 43:1 · 본디새김
이러한 반복은 예레미야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전하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신 말씀을 다 전했습니다. 앞 장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응답을 한마디도 감추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42:4). 이제 그 약속이 지켜졌습니다.
문제는 전달된 말씀의 내용입니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사람이 예레미야에게 말했다. 「당신은 거짓을 말하고 있소.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당신을 보내어 『그곳에 몸붙여 살려고 이집트로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하게 한 것이 아니오.」예레미야 43:2 · 본디새김
이러한 태도는 예레미야서에서 반복되어 온 문제와 연결됩니다. 유다의 지도자들과 예언자들 사이에서는 무엇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두고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예레미야 28장에서 하나냐는 예레미야와 정반대되는 미래를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선포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신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의 뜻을 서로 다르게 주장한 것입니다.
다만 이 장에서 독자는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할 근거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42장에서는 실제로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고 기록했고(42:7), 그 말씀이 이집트행을 금했습니다. 따라서 43:2의 주장은 본문이 보여 준 사실과 충돌합니다.
더구나 서술자는 이 반박에 참여한 사람들을 「오만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들의 발언에 대한 이야기의 평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바룩을 끌어들입니까?
바룩이 배후에 있다는 주장
「오히려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당신을 부추겨 우리에게 맞서게 하고 있소. 우리를 칼데아 사람들의 손에 넘겨, 그들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게 하려는 것이오.」예레미야 43:3 · 본디새김
예레미야 36장에서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말을 두루마리에 기록했고,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그 말씀을 백성에게 읽어 주었습니다(36:4–10). 여호야김 왕이 두루마리를 불태운 뒤에도 예레미야의 말을 다시 기록했습니다(36:32). 바로 이 때문에 바룩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거나 유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에 남으라는 말씀을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음모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바룩이 그러한 계획을 세웠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도자들의 고발이지, 서술자가 인정한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종교 지도자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조종할 수도 있으며, 누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예레미야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는 사실이 먼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기에 그 출처를 부정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자신들의 안전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이집트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수정하는 대신,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을 자신들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말로 만들어 버립니다.
돌아왔던 사람들이 다시 떠나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거짓이라고 선언한 뒤, 자신들이 원하던 길을 선택합니다.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과 모든 백성은 유다 땅에 머무르라는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다.예레미야 43: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지도자들이 예레미야의 말이 거짓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서술자는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지도자들의 주장과 본문의 판단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은 유다의 남은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쫓겨가 있던 모든 민족 가운데서 유다 땅에 몸붙여 살려고 돌아온 사람들이었다.예레미야 43:5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한 귀환이 아닙니다. 그들은 고향에서 다시 살기를 원했습니다. 폐허가 된 땅이지만, 그곳에 정착하여 삶을 이어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다시 유다를 떠납니다.
5절은 요하난과 군 지휘관들이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고 말합니다. 이어 6절은 그들 가운데 누가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왕의 딸들, 그리고 그달랴와 함께 남겨졌던 사람들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와 바룩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본문은 공동체 전체의 불순종을 말하지만, 모든 개인이 똑같은 의도를 품었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정치적 결정을 내렸을 리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와 바룩은 이집트행을 반대하는 말씀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의 결정과 그 결정에 따라 이동한 사람들의 책임을 모두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어떤 방식으로 동행하게 되었는지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물리적인 강제로 끌려갔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집트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그 결정을 지지했다는 증거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곳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지만, 그 판단 때문에 백성은 다시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3:1–4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양 떼를 흩어지게 하고 돌보지 않는 목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문맥은 주로 유다의 통치자들과 관련되지만, 43장에서도 지도자의 판단이 백성을 흩어지게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분만으로 그들을 이끄는 행위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도자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의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책임 있게 살펴야 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이집트에 들어가 타흐판헤스까지 갑니다.
앞 장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걸어갈 길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 실제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길과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도 다시 들려온 말씀
이집트에 도착한 뒤 이야기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타흐판헤스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예레미야 43:8 · 본디새김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유다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유다를 떠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집트에 와서도 여전히 예언자입니다.
여호와야훼의 통치는 유다 땅의 경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다고 해서 그분이 말씀하실 수 없게 된 것도 아닙니다.
유다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지만, 여호와야훼는 예언자들을 거듭 보내셨습니다(7:25–26; 25:3–4). 거듭 말씀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언제나 용서나 회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판단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이제 그들이 도망쳐 온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구체적인 형태를 갖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큰 돌들을 가져다가 파라오의 집 입구에 있는 회반죽 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하필 돌을 숨기는가?
돌을 숨기는데, 그 행동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해야 합니다.
여기서 숨겨진 것은 돌 자체이지만, 숨기는 행동은 공개됩니다. 따라서 이 행위는 무언가를 감추려는 실용적인 작업이라기보다, 사람들이 보고 기억해야 할 상징행동입니다.
예레미야가 숨기는 돌은 곧 이어질 예언을 눈으로 보여 주는 물건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을 피해 이집트로 왔습니다. 이집트의 왕과 군사력이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왕의 집 입구를 바벨론 왕의 왕좌가 놓일 자리로 지목하십니다.
그들이 피난처라고 생각한 권력의 중심에 다른 왕의 통치가 들어서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타흐판헤스는 이집트 동부의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 있었던 도시로 이해됩니다. 예레미야 2:16에서는 놉과 타흐판헤스의 사람들이 유다를 해치는 장면이 언급됩니다. 그 구절은 이집트에 대한 의존이 유다에게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책 앞부분의 경고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전의 경고가 이 장의 사건을 직접 예고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같은 도시가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43:9에는 말벤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벽돌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관계가 있으며, 벽돌을 찍는 틀이나 벽돌로 만들어진 시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읽기는 벽돌 틀과 관련된 시설을, 다른 읽기는 벽돌이 깔린 바닥이나 네모난 뜰을 생각합니다. 본디새김은 후자의 방향으로 「네모난 뜰」이라고 옮겼습니다. 정확한 구조물의 형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파라오의 집 앞에 놓일 바벨론 왕의 왕좌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내 종인 바벨론 왕 느부갓레살을 데려오겠다. 내가 숨겨 둔 이 돌들 위에 그의 왕좌를 놓겠다. 그는 그 돌들 위에 자기 차일을 펼칠 것이다.』」예레미야 43:10 · 본디새김
바벨론 왕을 부르시는 분
바벨론 왕이 여호와야훼를 경건하게 섬기는 신자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25:9과 27:6에서도 하나님은 바벨론 왕을 자신의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문맥에서 느부갓레살은 하나님의 역사적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바벨론 왕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동일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권력에서 벗어나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왕을 자신이 데려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느부갓레살은 여호와야훼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를 사용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예레미야가 숨겼지만 하나님이 숨겼다고 말씀하신다
9절에서는 예레미야가 직접 돌들을 숨기도록 명령받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내가 숨겨 둔 이 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돌을 옮기고 숨기는 사람은 예레미야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명령하시고 그 의미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자신의 말씀에 따라 행한 행동을 자신이 행한 일로 말씀하십니다.
상징행동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일을 눈에 보이도록 미리 드러내는 것입니다.
왕좌와 차일이 의미하는 것
느부갓레살의 왕좌가 돌들 위에 놓이고, 그 위에 차일이 펼쳐진다는 말은 단순히 바벨론 왕이 그 장소를 방문한다는 뜻보다 강합니다. 왕좌는 왕의 권위와 통치를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왕의 차일 역시 그가 머무는 왕권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나타냅니다.
바벨론의 권력이 이집트 왕권의 공간을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왕이 이집트까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파라오의 통치 아래 안전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공간에 바벨론 왕의 왕좌가 놓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을 숨기는 작은 행동 하나가 그들의 정치적 판단 전체를 뒤집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이 따르는 마소라 본문의 읽기에서는 그 행위의 주체가 여호와야훼로 표현됩니다. 원문의 이 차일을 가리키는 단어는 매우 드물어서 구체적인 형태를 확정하기 어렵지만, 이 문맥에서는 왕좌 위에 펼쳐지는 왕실의 덮개나 차일로 이해됩니다. 물론 43장은 그 일이 이미 실제로 일어났다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고합니다. 이 구절만으로 느부갓레살이 실제로 그 돌들 위에 왕좌를 설치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집트도 재앙을 막아 주지 못한다
이제 상징행동의 의미가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그가 와서 이집트 땅을 칠 것이다. 죽음에 넘겨질 자는 죽음에, 포로로 넘겨질 자는 포로로, 칼에 넘겨질 자는 칼에 넘겨질 것이다.』」예레미야 43:11 · 본디새김
특히 「죽음에 넘겨질 자는 죽음에」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 문장은 예레미야 15:2에서 유다에게 선언되었던 심판의 언어와도 닮아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죽음과 칼과 굶주림과 포로살이에 넘겨질 사람들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심판의 대상이 이집트 땅으로 확대됩니다.
유다 사람들이 피하려던 재앙이 자신들이 도착한 새로운 땅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집트로 들어온 모든 개인이 똑같은 방식으로 죽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명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집트 역시 전쟁과 포로살이와 죽음에서 자유로운 장소가 아님을 선언하는 심판의 언어입니다.
「『나는 이집트 신들의 집들에 불을 지를 것이다. 그는 그 신들을 불태우고 포로로 잡아갈 것이다. 목자가 자기 옷을 두르듯이 그는 이집트 땅을 제 몸에 두르고, 그곳에서 무사히 나갈 것이다.』」예레미야 43:12 · 본디새김
여기서도 10절과 비슷하게 주어가 바뀝니다. 처음에는 「나는」이라고 말씀하시는 여호와야훼가 행동의 주체이십니다. 이어서는 「그는」이라고 하여 바벨론 왕이 행동의 주체가 됩니다. 바벨론 왕은 이집트를 공격하지만, 그 사건은 여호와야훼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됩니다.
이집트에는 왕권과 밀접하게 연결된 신전과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신전을 불태우고 신들을 포로로 잡아간다는 표현은, 그 신들을 나타내는 신상과 숭배의 상징물들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정복자가 패배한 나라의 신상을 빼앗는 행위는 그 나라의 종교적 권위가 무너졌음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12절은 이집트의 패배를 뜻밖의 비유로 마무리합니다.
이집트는 유다 사람들에게 바벨론의 군사력을 피할 수 있는 강한 나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그 이집트가 바벨론 왕이 몸에 두르는 옷처럼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곳에서 「무사히」 나갑니다.
유다 사람들은 안전하게 살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예언에서 이집트를 안전하게 떠나는 인물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입니다.
그들의 계산과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랐는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때 「죽음」을 반드시 역병이라는 특정한 사망 원인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본디새김이 죽음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남긴 것은 원문이 가진 포괄적인 의미를 유지합니다. 출애굽기 12:12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의 모든 신들에게 심판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건과 예레미야 43장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지만, 두 본문에는 공통된 선언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는 여호와야훼의 통치보다 높지 않습니다. 12절의 비유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정복자가 이집트 땅을 손쉽게 자기 것으로 삼는 모습을 옷을 두르는 행동에 빗댄 것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목자가 옷에 붙은 것을 털어 내거나 깨끗이 하듯이 정복자가 이집트를 약탈한다는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본디새김은 옷을 몸에 두르는 형상을 보존했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거대한 나라를 마치 한 벌의 옷처럼 손쉽게 취한다는 대조가 두드러집니다.
태양의 집도 무너진다
이 장의 마지막 절은 또 다른 장소를 지목합니다.
「『그는 이집트 땅에 있는 벳세메스의 기둥들을 부수고, 이집트 신들의 집들을 불태울 것이다.』」예레미야 43:13 · 본디새김
본문에서 언급되는 기둥들은 이집트의 신전과 태양신 숭배를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기둥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신성하고 강력하다고 여겼던 장소조차 심판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파라오의 권력도, 이집트 신들의 권위도 유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절대적인 안전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유다만을 다스리는 지역의 신이 아니십니다. 유다를 심판하실 뿐 아니라, 바벨론 왕을 자신의 종이라고 부르시며, 이집트의 왕권과 신전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벳세메스는 유다에 있던 같은 이름의 도시가 아닙니다. 이곳은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와 관련된 도시 헬리오폴리스, 곧 성경에서 온이라고도 부르는 곳과 연결하여 이해됩니다(창세기 41:45). 칠십인역 역시 이 구절의 지명을 헬리오폴리스로 이해합니다. 이 도시는 이집트의 종교적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숨겨진 돌들이 말하는 것
사람들은 파라오의 집을 보고 안전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그 집 앞에 감추어진 돌들 위로 다른 왕의 왕좌가 놓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뜻이 자신들의 판단을 바꾸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43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그 말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장소를 옮기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임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현실을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듣지 않은 채, 눈에 보이는 힘만으로 미래를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장 마지막에 예레미야는 여전히 이집트에 있습니다.
그가 숨긴 돌들은 파라오의 집 입구의 회반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 돌들이 숨겨지는 모습을 보았고, 장차 그 위에 놓일 왕좌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눈앞에는 여전히 파라오의 집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바라보는 그 장소의 미래가 지금 보이는 모습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안전을 찾아 이집트에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바로 그 자리의 바닥 아래에 심판의 징표를 감추게 하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