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만드신 저를 왜 무너뜨리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두 손이 저를 빚으시고 구석구석 온전히 만드셨는데, 당신은 저를 삼켜 버리십니다」(8절). 욥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이 이제 자신을 무너뜨리고 계신다고 느낍니다. 그에게는 창조와 파괴가 같은 손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기 10장의 가장 깊은 질문은 하나님이 자신을 왜 고통스럽게 하시는가를 넘어, 처음부터 왜 자신을 만드셨는가에 이릅니다.
앞 장에서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분쟁을 공정하게 판정해 줄 사람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이유로 침묵하지 않습니다. 10장에서는 오히려 하나님께 직접 말을 걸어, 자신을 만드신 목적과 지금 겪는 고통 사이의 모순을 묻습니다.
이 장은 하나의 긴 기도이자 항의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자신을 유죄로 판정하지 말고 다투시는 이유를 알려 달라고 요청합니다(1–7절). 이어 자신을 빚고 보살피셨던 하나님의 손을 기억합니다(8–12절). 하지만 그 기억은 곧 하나님이 처음부터 자신을 심판하려 하셨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말로 바뀝니다(13–17절). 마지막에는 자신의 탄생을 되돌아보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잠깐의 쉼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청합니다(18–22절).
제 잘못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먼저 유죄로 만들지는 마십시오
「나는 내 삶이 지긋지긋하네. 내 탄식을 쏟아 놓겠네. 쓰라린 마음으로 말하겠네.」욥기 10:1 · 본디새김
그는 지금 자신이 차분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쓰라린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말을 멈추지는 않습니다.
이어지는 2절에서 욥은 말의 상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겠네. 『저를 유죄로 판정하지 마십시오. 무엇 때문에 저와 다투시는지 알려 주십시오.』」욥기 10:2 · 본디새김
「유죄로 판정하다」는 누군가를 악하거나 유죄인 사람으로 판정한다는 법정의 의미를 가집니다. 욥은 하나님께 무조건 자신이 옳다고 선언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기회도 없이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처럼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욥은 앞서 친구들에게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6:24). 이제는 하나님께 같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한 충고나 책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질문에서 욥은 자신이 얼마나 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지 드러냅니다.
「『억누르시고, 당신 손으로 애써 만드신 것을 내치시고, 악인들의 꾀 위에는 빛을 비추시는 것이 당신에게 좋습니까?』」욥기 10:3 · 본디새김
「당신에게 좋습니까?」라는 질문이 날카롭습니다. 욥은 단순히 왜 이런 일을 하시는지 묻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하나님께 좋은 일이 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당신 손으로 애써 만드신 것」은 문자적으로 손바닥들의 수고, 곧 손으로 애써 이루어 낸 것을 가리킵니다. 욥은 자신을 단순히 하나님이 소유하신 물건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수고하여 만드신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더욱 절박해집니다. 왜 자신의 손으로 애써 만드신 것을 스스로 내치십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지금 욥이 경험하는 고통 사이의 깊은 충돌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대하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보시는 분입니까?
욥은 이어서 하나님의 눈과 시간을 문제 삼습니다.
「『당신에게 살로 된 눈이 있습니까?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십니까?』」욥기 10:4 · 본디새김
이 질문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묻는 단순한 신체적 질문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제한된 시야를 가지신 분이냐고 묻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직접 알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행동과 여러 정황을 살펴야 합니다. 때로는 오랜 조사와 질문을 거쳐야 비로소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한계를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욥의 허물을 찾으시고 그의 죄를 캐물으시는 것처럼 행동하십니까?
「『당신의 나날이 사람의 나날 같고, 당신의 세월이 사내의 나날 같아서,』」 「『제 허물을 찾으시고, 제 죄를 캐물으십니까?』」욥기 10:5–6 · 본디새김
여기서 욥은 시야의 한계에 이어 시간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조사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증거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묻고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처럼 짧은 세월을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인간처럼 수사하실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질문의 의도는 7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제가 유죄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당신 손에서 건져 낼 이가 없는데도 말입니다.』」욥기 10:7 · 본디새김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결백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평생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정당화할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주장에는 독자가 알고 있는 사실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욥기 1:1과 2:3에서 욥은 온전하고 올곧은 사람으로 소개되었으며, 하나님 자신도 그의 온전함을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욥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장면을 본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항의에는 독자가 이해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동시에 7절 후반부는 그의 절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 사실이 자신을 구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한다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괴롭게 하신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는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욥은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발견합니다.
왜 정성껏 만드신 것을 다시 무너뜨리십니까?
「『당신의 두 손이 저를 빚으시고 구석구석 온전히 만드셨는데, 당신은 저를 삼켜 버리십니다.』」욥기 10:8 · 본디새김
이제 욥은 자신의 몸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산이나 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살과 뼈, 피부와 힘줄을 이야기합니다. 9장에서 욥은 하나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10장에서는 그분의 손이 자기 몸을 어떻게 만드셨는지 기억합니다.
우주를 흔드시는 하나님의 손이 자신처럼 작은 인간을 정성스럽게 빚으셨다는 사실이 욥에게는 더 이상 놀라운 위로만은 아닙니다. 바로 그 손이 자신을 무너뜨리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8절의 「빚으시고」는 형태를 만들고 빚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만드셨는데」는 하나님이 욥을 실제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합니다. 욥은 두 동작을 나란히 놓으면서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창조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문장은 뜻밖의 말로 끝납니다. 「당신은 저를 삼켜 버리십니다.」 만드시는 손과 삼키시는 행동이 한 문장 안에서 충돌합니다.
정성껏 만드신 것을 왜 파괴하십니까?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지켜 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진흙에서 먼지로
「『부디 저를 진흙처럼 만드셨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런데 저를 먼지로 되돌리실 것입니다.』」욥기 10:9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땅의 먼지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창세기 3:19에서는 인간이 결국 먼지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욥은 이 두 장면을 자신의 삶 안에 나란히 놓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먼지로 되돌리실 것이라고 느낍니다.
「진흙」은 토기장이가 다루는 진흙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면 「먼지」(עָפָר)는 창세기 2:7과 3:19에서도 사용되는 낱말입니다. 두 표현은 관련되어 있지만 강조점은 다릅니다.
진흙은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료입니다. 토기장이의 손에서 그릇이 되는 물질입니다. 반면 먼지는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서 형체를 갖춘 존재가 되었다가 다시 아무런 형체도 없는 먼지로 돌아가는 과정을 바라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는 시편 103:14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인간의 연약한 형편을 아시고,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긍휼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그 기억을 요청합니다.
‘저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은 여기서 인간을 향한 책임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돌아봐 달라고 호소합니다.
젖이 치즈가 되고 몸이 만들어지기까지
욥은 자신의 탄생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저를 젖처럼 쏟아 치즈처럼 굳히셨지 않습니까?』」 「『피부와 살을 제게 입히시고, 뼈와 힘줄로 저를 엮으셨습니다.』」욥기 10:10–11 · 본디새김
이 두 절은 성경에서 인간의 신체 형성을 묘사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먼저 액체인 젖이 치즈처럼 굳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고대 사람들에게 젖이 응고되어 형태를 갖추는 과정은 익숙한 현상이었습니다. 욥은 이를 생명이 모태 안에서 형체를 이루는 과정에 비유합니다.
이 표현을 현대 발생학에 관한 정확한 지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욥은 인간의 몸이 만들어지는 신비를 당시의 일상적인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 형태가 없던 것이 하나님의 손길 아래 구체적인 몸을 갖추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어지는 11절은 두 가지 다른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옷을 입히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엮는 일입니다. 몸은 마치 누군가 정성스럽게 옷을 입힌 것처럼 완성됩니다. 뼈와 힘줄은 서로 연결되어 몸의 구조를 이룹니다. 욥은 그 복잡한 결합을 엮는 행위로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몸을 단순한 물질 덩어리로 보지 않는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몸은 빚어지고, 굳어지고, 입혀지고, 엮인 존재입니다. 그 과정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고 욥은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묘사를 앞서 2장에서 소개된 욥의 상태와 함께 읽으면 깊은 대조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피부와 살을 입혀 주셨던 그 몸이 지금은 상처로 덮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뼈와 힘줄로 엮어 주셨던 그 몸이 지금은 고통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합니다.
욥에게 자신의 육체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게 하는 증거인 동시에, 그 창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지만, 바로 그 몸에서 지금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셨던 숨
「『제게 생명을 주시고 호의를 베푸셨으며, 당신의 보살핌이 제 숨을 지켰습니다.』」욥기 10:12 · 본디새김
「호의」(חֶסֶד)는 사랑과 자비, 신실한 호의를 나타내는 중요한 낱말입니다. 욥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단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호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두려운 심판자만은 아니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호의를 경험했다고 기억합니다. 자신의 숨이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지켜졌다고 고백합니다.
「보살핌」은 살피고 돌보거나 감독하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앞서 7:18에서 욥이 하나님이 자신을 아침마다 살피신다고 항의했던 말과 같은 어근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살피심은 욥의 기억 속에서 생명을 지켜 주는 돌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감시처럼 느껴졌습니다.
12절에서 욥은 하나님의 보살핌이 자신의 숨을 「지켰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4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지켜보신다」고 말합니다.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같은 지킴이 한쪽에서는 생명을 보호하는 행동이 되고, 다른 쪽에서는 허물을 놓치지 않고 감시하는 행동이 됩니다.
욥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셨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을 살리던 그 관심이 왜 이제는 자신을 정죄하는 감시처럼 느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대조를 이해하면 13절의 갑작스러운 전환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는 장면은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이사야 64:8에서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이자 토기장이로 고백하며, 자신들은 모두 그분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18:1–6에서는 하나님이 토기장이의 작업을 통해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설명하십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자기 뜻대로 다루듯, 하나님께도 자기 백성을 다루실 권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 10장은 같은 창조의 이미지를 다른 방향에서 사용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본문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권한과 주권을 강조합니다. 반면 욥은 그분의 손으로 빚어진 피조물의 자리에서 질문합니다. 두 관점은 서로를 단순히 부정하지 않습니다. 창조주에게는 피조물을 다스리실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실을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손에서 만들어진 피조물이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도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고통은 욥기에서 쉽게 하나의 설명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숨겨진 계획이었습니까?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당신 마음속에 숨겨 두셨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속뜻이었음을 저는 압니다.』」욥기 10:13 · 본디새김
여기서 욥의 말은 갑자기 어두워집니다.
그는 조금 전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드시고 보살피셨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일 뒤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어떤 뜻이 숨겨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앞에서 말한 창조와 생명의 선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14–17절에서 묘사할 하나님의 엄중한 감시와 심판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후자의 읽기에서는 욥의 말이 이런 뜻이 됩니다.
‘저를 정성스럽게 만드시고 보살피셨지만, 당신 마음속에는 저를 죄인으로 다루실 계획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까?’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처음부터 욥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욥이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알아냈다고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욥이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께 던지는 해석과 항의를 기록합니다.
실제로 욥은 하나님의 마음속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것이 당신의 속뜻이었음을 저는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의 혼란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지금 경험하는 고통 때문에 과거에 받았던 사랑과 돌봄까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한때 은혜로 이해했던 행동이 이제는 감추어진 의도가 있는 행동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현재의 고통이 과거의 기억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 장에는 「알다」(יָדַע)라는 동사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신이 유죄가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13절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숨겨진 속뜻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두 앎의 성격은 다릅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고난에 합당한 잘못이 없다는 욥의 주장입니다. 이는 욥기를 시작하는 서술과 일정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금과 같은 고통을 겪게 하려는 뜻을 처음부터 숨겨 두셨다는 욥의 해석입니다.
욥기의 친구들도 그런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욥의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욥 역시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을 근거로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에 대해 단정적인 말을 합니다. 두 경우는 내용과 처지가 다르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정확히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제기합니다.
이 때문에 욥기 10장의 항의를 모두 올바른 신학적 결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항의를 잘못된 말이라고만 판단해서도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내리는 모든 해석이 옳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가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 자체는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죄를 지어도, 의로워도 벗어날 수 없다면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숨겨 두셨다고 생각하는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제가 죄를 지으면 저를 지켜보시고, 제 허물에 대해 저를 무죄로 여기지 않으십니다.』」욥기 10:14 · 본디새김
여기서 앞서 살펴본 「지키다」라는 동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욥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중요한 문학적 대조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보살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경험한 보살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감시가 더욱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서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다고 느끼는지 말합니다.
「『제가 유죄라면, 아, 제게 화가 있습니다. 제가 옳더라도 제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저는 수치로 가득합니다. 제 고통을 보십시오.』」욥기 10:15 · 본디새김
욥은 자신이 어느 쪽에 놓여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수치와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머리를 들다」는 단순한 신체 동작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수치와 억압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욥은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지만, 고통 때문에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15절 마지막의 「제 고통을 보십시오」는 또 하나의 전환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지나치게 살피신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보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하기 위해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괴로운지 보아 달라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시선을 없애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시는 방식이 달라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행동을 얼마나 위협적으로 느끼는지 보여 줍니다.
「『제 머리가 들리면 당신은 사자처럼 저를 사냥하시고, 거듭 저를 상대로 놀라운 일을 벌이십니다.』」욥기 10:16 · 본디새김
여기서 사자의 이미지는 해석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욥이 머리를 드는 모습과 사냥의 장면이 결합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사자 같은 사냥꾼으로 묘사하는지, 욥을 사냥당하는 사자에 빗대는지에는 문법적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하나님이 사자처럼 욥을 사냥하시는 쪽으로 읽었습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장면은 더욱 위협적으로 변합니다. 욥이 조금이라도 머리를 들려고 하면 하나님이 다시 자신을 사냥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놀라운 일」은 놀랍고 비범한 일을 행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바로 앞 장인 욥기 9:10에서 욥은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는 큰일과 셀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때는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능력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놀라운 일이 욥 자신을 향한 적대적 행동처럼 묘사됩니다.
보통 하나님의 놀라운 일은 찬양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욥은 지금 그 놀라운 능력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데 사용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작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크기 때문에 더 두렵습니다.
자신을 만든 하나님이 군대를 이끄시는 하나님이 되다
「『저를 대적하는 당신의 증인들을 새로 세우시고, 저를 향한 분노를 더하십니다. 군대가 교대로 저를 대적합니다.』」욥기 10:17 · 본디새김
이제 장면은 다시 법정으로 돌아옵니다. 「증인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법정에서 증인은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증인의 증언은 사람의 유죄나 무죄를 가리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증인이 아니라, 자신을 대적하는 증인들이 거듭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서 증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욥의 질병이나 친구들의 비난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증인들의 정체로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욥이 자신을 향한 고발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처럼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고발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고발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법정이 전쟁터로 변합니다.
「군대」(צָבָא)는 전쟁의 병력을 가리킬 수 있는 낱말입니다. 「교대로」라는 표현과 결합하면서 서로 다른 부대가 번갈아 공격해 오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욥에게 고통은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가 지나가면 다른 것이 찾아옵니다.
재산의 상실, 자녀들의 죽음, 몸의 질병, 친구들의 비난이 이미 그의 삶에 겹쳐졌습니다. 욥이 이 모든 사건을 17절의 군대와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밀려오는 공격이라는 이미지는 그가 겪는 현실과 잘 어울립니다.
이제 10장 전반부의 창조 이미지가 얼마나 멀리 변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욥을 빚으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어 그의 숨을 지키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에게 하나님은 죄를 조사하시는 분, 사냥꾼, 자신을 대적하는 증인을 세우시는 분, 끊임없이 군대를 보내시는 분처럼 경험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네 가지 객관적인 묘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경험이 창조와 보호의 기억에서 심판과 공격의 두려움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욥은 자신을 만드셨던 하나님이 왜 이제 자신과 싸우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탄생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찌하여 저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습니까? 제가 숨을 거두어 어떤 눈도 저를 보지 못했더라면,』」 「『저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되었을 것이고, 뱃속에서 무덤으로 옮겨졌을 것입니다.』」욥기 10:18–19 · 본디새김
욥의 말은 다시 탄생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앞부분과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8–12절에서 모태는 하나님의 정성스러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젖이 치즈처럼 굳고, 피부와 살이 입혀지고, 뼈와 힘줄이 엮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은 자신이 그 모태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왜 그렇게 만드신 뒤 세상으로 나오게 하셨는지 묻습니다. 여기에는 창조와 탄생 사이의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형체를 갖춘 것과, 그 생명을 실제 세상에서 살아 내는 것은 다릅니다. 욥은 자신의 생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지금 이토록 큰 고통을 겪는다면, 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질문은 욥기 3장에서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던졌던 질문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10장에서는 새로운 특징이 나타납니다. 3장에서 욥은 자신의 탄생과 관련된 날을 저주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직접 향해 자신을 모태에서 나오게 하신 이유를 묻습니다.
탄생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표현은 「어떤 눈도 저를 보지 못했더라면」입니다. 앞서 욥은 하나님에게 사람처럼 보는 눈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4절).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15절). 그런데 이제는 어떤 눈에도 보이지 않은 채 사라졌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욥에게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계속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자신을 수치스럽게 했습니다. 그는 이제 차라리 그런 시선 앞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뱃속에서 무덤으로 옮겨졌을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탄생과 죽음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결합합니다. 보통 인간의 삶은 모태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욥은 그 사이의 삶이 없었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모태에서 곧바로 무덤으로 옮겨졌더라면, 지금 겪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는 그가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삶을 상상하는 탄식입니다. 인간의 생명과 죽음에 관한 최종적인 결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얼마나 심각한 절망에서 나왔는지는 분명합니다. 욥은 단순히 현재의 처지가 불만족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지금의 고통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마지막 두 절에서 욥의 요청은 갑자기 작아집니다. 더 이상 탄생의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잠깐이라도 웃게 해 달라고 합니다.
죽음의 어둠으로 가기 전에 잠깐만 웃게 해 주십시오
「『제 나날이 얼마 안 되지 않습니까? 그만두시고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잠깐이라도 웃게 해 주십시오,』」욥기 10:20 · 본디새김
그는 지금 하나님께 장수나 번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되찾게 해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라도 자신을 내버려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만두시고」라는 표현은 무엇을 그만두라는 뜻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의 고발과 추궁, 반복되는 공격의 이미지에 비추어 보면, 욥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느끼는 하나님의 행동이 멈추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요청은 처음의 질문과 대조를 이룹니다. 처음에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유죄 판정의 이유를 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왜 자신을 만드신 뒤 이렇게 대하시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와서는 설명보다 잠깐의 안식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욥이 자신의 질문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설명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도 고통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문제의 답을 얻기 전에 당장 견뎌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그는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보내고 싶어 합니다.
그 변화는 하나님에 관한 질문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질문을 계속 품고 살아가야 하는 몸이 너무 지쳤기 때문입니다.
「웃게 해 주십시오」를 단순히 즐거운 기분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아블리가(בָּלַג)는 잠시 힘을 되찾거나 기운을 내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이를 「웃게 해 주십시오」로 표현했습니다.
욥이 바라는 것은 일시적인 회복입니다.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잠깐 숨을 고르고, 얼굴을 들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느낄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요청을 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절에 있습니다.
「『제가 가서 돌아오지 못할 곳, 어둡고 죽음의 그늘이 있는 땅으로 떠나기 전에 말입니다.』」욥기 10:21 · 본디새김
욥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느낍니다. 「돌아오지 못할 곳」은 죽음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가 묘사하는 것은 죽음의 모든 상태에 관한 체계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지금의 삶에서 죽음으로 들어가면 다시 익숙한 삶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는 그곳을 어둠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 그 어둠은 더욱 깊어집니다.
「『칠흑처럼 어둡고, 죽음의 그늘이 있고 질서가 없으며, 빛조차 칠흑 같은 땅입니다.』」욥기 10:22 · 본디새김
욥은 어둠을 한 번만 말하지 않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죽음의 그늘, 질서의 부재, 빛조차 어둠이 되는 세계를 연달아 묘사합니다.
「질서가 없으며」(סֶדֶר)에 쓰인 낱말은 질서나 배열을 가리킵니다. 욥은 자신이 향한다고 생각하는 곳을 아무런 질서도 없는 땅으로 묘사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사물들이 구별됩니다. 낮과 밤이 있고, 움직이는 방향이 있고, 익숙한 장소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상상하는 어둠의 땅에서는 그런 질서조차 사라집니다.
마지막 표현 「빛조차 칠흑 같은 땅」은 그 땅이 내는 빛으로도, 그곳에서 빛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빛이 어둠을 이기거나 밝히지 못한다는 역설적인 장면이 남습니다.
보통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빛조차 어둠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욥기 10장의 처음을 돌아보면 문학적 흐름이 드러납니다. 처음에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몸을 정성스럽게 만드셨다고 말했습니다. 진흙을 빚으시고, 젖을 굳히시고, 피부와 살을 입히시고, 뼈와 힘줄을 엮으셨습니다. 그 과정은 형태를 갖추고 생명이 질서를 이루어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모든 질서가 사라진 세계를 묘사합니다.
욥기 10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생명의 질서를 주셨다는 기억에서 출발해, 그 질서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 끝부분은 히브리어에서 빛나는 행위의 주체를 어떻게 이해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땅이 빛을 낸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그곳에서 빛나는 것조차 어둠과 같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이 장면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창조 세계에 질서를 세우시는 모습과 대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혼돈과 어둠 가운데 질서와 생명이 나타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반면 욥기 10장의 마지막은 질서와 생명을 얻었던 사람이 다시 어둠과 무질서의 세계로 사라진다고 느끼는 장면입니다. 두 본문 사이에 직접적인 인용이 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와 질서라는 주제에서 뚜렷한 대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항의
욥기 10장을 하나로 묶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욥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르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지으셨고,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만드셨으며, 자신의 숨을 지켜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을 만드신 분이 자신을 이렇게 대하신다면, 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평가할 수 있는 더 높은 권위를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욥은 자신의 피조물 됨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지금 겪는 고통에 대한 설명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침묵의 이유가 아니라 질문의 근거가 됩니다.
욥기 10장의 처음에서 욥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손을 기억합니다. 진흙을 빚으시던 손입니다. 젖처럼 형태 없던 것을 굳히시고, 피부와 살을 입히시고, 뼈와 힘줄을 엮으시던 손입니다. 그 손은 욥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살핌은 그의 숨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은 같은 하나님께 자신을 왜 무너뜨리시는지 묻습니다.
그는 답을 얻지 못합니다.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도,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은 자신이 곧 향하게 될 것이라고 느끼는 어둠의 땅으로 향합니다. 그곳은 질서가 없는 곳입니다. 빛조차 어둠과 구별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곳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소원을 남깁니다. 「제가 잠깐이라도 웃게 해 주십시오.」
욥은 자신이 왜 만들어졌는지 묻다가, 이제 자신에게 남은 짧은 시간만이라도 편히 지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그분의 손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만은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바로 그 손을 향해 호소합니다.
한때 자신에게 생명을 주셨던 그 손이, 이제 잠시라도 자신을 놓아주시기를.
욥은 아직 어둠의 땅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살아 있고, 고통받고,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점점 작아집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