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확신

욥기 11장에서 가장 주목할 말은 초파르의 입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입을 여셔서」 「지혜의 숨겨진 것들을 알려 주시기를 바라네」라는 말입니다.

고통받는 욥에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핏 좋은 소망처럼 들립니다. 욥 자신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호소를 들어 주시고,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설명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파르의 말에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바라면서도,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는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입을 여시면 욥의 숨겨진 죄가 드러날 것이고, 욥은 자신이 지금보다 더 큰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작 하나님이 욥을 어떻게 판단하시는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역설이 욥기 11장을 관통합니다.

초파르는 욥의 세 친구 가운데 세 번째로 발언합니다. 그는 앞선 친구들의 논쟁을 들었고, 욥이 하나님께 제기하는 질문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질문이 깊어질수록 초파르의 대답은 더욱 단호해집니다. 그는 고난의 원인을 함께 묻기보다, 욥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부터 문제 삼습니다.

그의 연설은 세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욥의 말을 헛된 변명으로 몰아붙이고(2–6절),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 없다고 강조한 뒤(7–12절), 욥이 회개하면 밝고 안전한 삶을 되찾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13–20절).

이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초파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입니다. 욥기 독자는 이미 1–2장에서 욥의 재난이 친구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1:6–12; 2:1–7). 그러나 초파르는 그 사정을 모릅니다. 문제는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모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이름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데 있습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11장 본문 읽기 →

욥의 고백을 변명으로 바꾸다

욥기 11:1–4 본문 →

초파르는 처음부터 질문을 쏟아 냅니다.

「그 많은 말에 대답이 없어야 하겠나? 입술만 놀리는 사람이 옳다고 인정받겠나?」욥기 11:2 · 본디새김

여기서 초파르가 문제 삼는 것은 욥의 주장만이 아닙니다. 욥이 계속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욥은 재난을 당한 뒤 침묵하다가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했고(3장), 친구들의 권면에 대답했으며(6–7장), 하나님께 직접 호소했습니다(9–10장). 그 과정에서 그의 말은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긴 말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과 자신이 믿어 온 하나님의 공의 사이에 생긴 틈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초파르는 그것을 ‘입술만 놀리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초파르에게 욥의 말은 진실을 담은 증언이 아니라, 말솜씨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욥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자세히 살피기 전에, 그 질문의 정당성부터 부정합니다.

「자네의 헛말이 사람들을 잠잠하게 하겠나? 자네가 비웃어도 자네를 부끄럽게 할 이가 없겠나?」욥기 11:3 · 본디새김

앞에서 욥이 실제로 한 일은 자신에게 내려진 판단이 고통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항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초파르에게는 그 항의가 조롱으로 들립니다.

그렇게 들리는 이유는 친구들의 신앙적 확신이 욥의 질문으로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설명이 모든 경우에 적용된다고 믿는다면, 욥의 고통을 죄의 결과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순간 그 설명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초파르는 자신의 설명을 재검토하기보다 욥의 태도를 공격하는 길을 택합니다.

「자네는 『제 가르침은 순수하고, 저는 당신 눈에 깨끗했습니다』라고 말했네.」욥기 11:4 · 본디새김

이것은 초파르가 전하는 욥의 말이지, 욥의 발언을 그대로 반복한 인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욥은 분명 자신이 악인이라는 판단에 항의했습니다. 10장 7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이 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욥이 주장한 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죄도 없다는 완전무결함이라기보다, 지금 겪는 파멸을 설명할 만한 악행을 자신이 저질렀다는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욥은 9장 20–21절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토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려 해도 자기 말이 도리어 자신을 정죄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복잡한 고백을 초파르는 단순한 자기 확신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초파르는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 한다고 받아들입니다.

서로 대답하려는 질문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지혜를 누가 알고 있는가

욥기 11:5–6 본문 →

초파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자네에게 입을 여셔서,」 「자네에게 지혜의 숨겨진 것들을 알려 주시기를 바라네. 참된 지혜는 두 겹이기 때문이네. 하나님께서 자네 허물의 일부를 잊어 주신다는 것을 알게.」욥기 11:5–6 · 본디새김

초파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입을 여시고, 감추어진 지혜를 알려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가 정확히 어떻게 ‘두 겹’이라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혜에 인간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참된 지혜가 인간의 이해보다 훨씬 풍성하다는 강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파르가 이 표현을 사용하는 목적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그는 욥이 자신의 처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지혜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말하려 합니다.

더 어려운 표현은 ‘허물의 일부를 잊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의 해석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이 욥의 죄 가운데 일부를 기억하지 않으시거나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초파르의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는 찬양이 아닙니다. 욥이 지금 겪는 고통은 죄에 대한 정당한 보응이며, 하나님은 오히려 욥이 받아야 할 벌의 일부를 면해 주고 계시다는 뜻이 됩니다. 욥은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초파르는 그 고통조차 죄에 비하면 가볍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여기서 초파르가 말하는 하나님의 자비는 욥에게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 자비의 전제가 욥에게 확인되지 않은 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다면 초파르 자신도 그 지혜를 완전히 알 수 없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내용을 사실상 미리 결정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은 인간의 교만을 낮추어야 합니다. 초파르에게서는 오히려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히브리어 미 이텐은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는 관용 표현입니다. 본디새김이 5–6절을 하나의 소망으로 연결한 것은 이러한 문법적 관계를 반영합니다. ‘두 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플라임(⁨כֶּפֶל⁩)은 문자적으로 이중성이나 배가됨을 나타냅니다.

하늘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은 하나님

욥기 11:7–9 본문 →

초파르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크기를 묘사합니다.

「자네가 하나님을 샅샅이 알아낼 수 있겠나? 전능자의 끝에까지 닿을 수 있겠나?」욥기 11:7 · 본디새김

여기서 ‘샅샅이 알아낸다’는 표현은 탐구하거나 조사하여 그 깊은 실체에 도달하려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초파르는 하나님이 인간의 조사와 분석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네 방향의 이미지가 펼쳐집니다.

「하늘처럼 높은데, 자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스올보다 깊은데, 자네가 무엇을 알 수 있겠나?」 「그것은 길이로는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네.」욥기 11:8–9 · 본디새김

하늘과 스올은 위와 아래의 극단을 이루고, 땅과 바다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광대한 공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 모든 경계를 넘어섭니다. 이것은 정교한 공간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시적 표현입니다.

이 말 자체는 욥기에서 낯선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욥도 비슷한 고백을 이미 했습니다. 욥은 9장 4–10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인간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초파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욥이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진리가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이 고난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있습니다.

욥에게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크기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크고 지혜로운 분이시라면, 왜 자신이 겪는 고난을 설명해 주시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사정을 밝힐 길이 없습니까?

반면 초파르에게 같은 진리는 욥의 질문을 중단시킬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크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처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질문할 수 없다는 뜻과 같지 않습니다. 욥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전체를 파악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 그 뜻을 묻는 일입니다.

초파르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설명하지만, 욥이 그 위대한 하나님께 말하려는 이유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차이는 욥기 후반부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28장은 지혜가 어디에서 발견되는지를 묻고, 인간이 아무리 깊이 탐색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힙니다(28:12–28).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지혜의 길로 제시됩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자신에 관해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42:7–8). 이것은 친구들이 말한 모든 문장이 거짓이었다는 뜻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욥의 모든 질문과 주장이 그대로 승인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그의 인식에도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십니다(38–41장). 따라서 욥기는 어느 한쪽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한계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렇다면 초파르는 무엇을 아는가

욥기 11:10–12 본문 →

10절에서 초파르의 묘사는 공간의 크기에서 하나님의 행동으로 옮겨 갑니다.

「그분이 지나가시며 가두시고, 모임을 소집하시면 누가 그분을 돌이키겠나?」욥기 11:10 · 본디새김

‘가두다’는 표현과 사람들을 모은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특히 재판이나 심문의 상황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여기서 소집되는 모임의 성격이 무엇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행동하시면 누구도 그 행동을 되돌릴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욥은 9장 11–12절에서 이미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셔도 그분을 알아볼 수 없고, 하나님이 무언가를 가져가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두 사람이 동일한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릅니다. 욥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에게는 그분의 행동을 이해할 길이 없다고 괴로워합니다. 초파르는 하나님의 행동을 막을 수 없으니 욥이 항의를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헛된 사람들을 아시기 때문이네. 악행을 보시고 어찌 분별하지 않으시겠나?」욥기 11:11 · 본디새김

히브리어 마지막 표현의 부정문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악행을 보시고도 알아차리지 못하시겠느냐는 반문으로 읽을 수 있고, 하나님이 특별히 숙고하실 필요조차 없이 악행을 알아보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문맥의 중심은 하나님에게서 사람의 악행을 숨길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인간이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은 감추어진 것까지 아신다는 사상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사무엘상 16:7; 시편 139:1–4).

그러나 초파르의 논리에는 빠진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악행을 아신다는 사실로부터 욥에게 지금의 재난을 일으킨 숨겨진 악행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초파르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말하면서, 사실상 자신도 욥의 죄를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12절에서는 욥을 향한 경멸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속 빈 사람이 분별을 얻겠지,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말이네.」욥기 11:12 · 본디새김

‘속 빈’은 본래 속이 비어 있거나 텅 빈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비유합니다. ‘분별을 얻다’는 ‘마음’을 뜻하는 말과 관련되어, 지각이나 이해력을 얻게 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들나귀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입니다. 초파르는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불가능한 상황을 내세워, 분별력 없는 사람이 스스로 지혜로워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비꼬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어 문장의 연결이 압축적이어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들나귀의 본성을 비교하는 방식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습니다.

앞에서 초파르는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식보다 훨씬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자기 자신도 겸손해져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욥을 분별력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이렇게 7–12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여 한 인간에 대한 모욕으로 끝납니다.

그 흐름 자체가 초파르의 지혜가 가진 문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었지만,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적게 알고 있는지는 살피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정하고 손을 펼치라는 요청

욥기 11:13–14 본문 →

초파르의 말투는 13절에서 달라집니다.

「자네가 마음을 굳게 정하고, 그분을 향해 손바닥을 펼친다면,」 「자네 손에 악행이 있거든 그것을 멀리 치우게. 자네 천막들에 불의가 깃들게 하지 말게.」욥기 11:13–1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욥을 꾸짖었지만 이제는 회복의 길을 가르칩니다.

마음을 굳게 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내면의 태도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손바닥을 펼친다는 것은 기도하거나 간구하는 자세를 나타냅니다. 손에서 악행을 멀리하고 천막에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개인의 행동뿐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생활 공간까지 바로잡으라는 요청입니다.

천막은 당시의 생활 세계에서 사람이 거주하고 가족과 재산을 돌보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초파르의 권면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죄를 뉘우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실제 생활에서 악행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권면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서는 일이 마음의 변화와 구체적인 행위의 변화를 함께 요구합니다(이사야 1:15–17). 손을 펴서 기도하면서도 그 손으로 악행을 계속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권면이 욥에게 주어지는 맥락에 있습니다.

초파르는 욥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제시하지 않습니다. 14절의 ‘악행이 있거든’이라는 표현도 문법적으로는 조건문입니다. 그러나 앞의 논리와 결합하면 욥의 재난이 감추어진 죄 때문이라는 전제가 사실상 깔려 있습니다.

이 권면을 받는 욥은 곤란한 자리에 놓입니다. 회개해야 할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 고난을 낳았다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지 고난이 끝나기를 바라며 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참된 회개라기보다 자신에게 내려진 판단에 굴복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독자가 아는 욥의 모습은 초파르가 상상하는 것과 다릅니다. 욥은 재난 이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려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자녀들을 위해 제사를 드릴 만큼 그들의 죄 문제에도 마음을 썼습니다(욥기 1:1, 1:5, 1:8).

물론 이것이 욥에게 어떠한 허물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 자신도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무죄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은 욥이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재난을 당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실제 잘못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일이지, 고난을 끝내기 위해 자신에게 없는 죄까지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초파르가 그 차이를 인정했다면, 욥에게 무엇을 회개하라고 말하기 전에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부터 더 오래 들었을 것입니다.

고난이 흘러간 물처럼 기억될 것이라는 약속

욥기 11:15–17 본문 →

초파르는 회개의 결과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그립니다.

「그러면 자네는 흠 없이 얼굴을 들고, 굳게 서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네.」욥기 11:15 · 본디새김

고대의 언어에서 얼굴을 든다는 것은 수치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뜻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욥은 10장 15절에서 자신의 고통과 수치 때문에 의롭다 해도 머리를 들 수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초파르는 그에게 다시 얼굴을 들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조건은 초파르가 요구하는 회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네는 괴로움을 잊고, 흘러간 물처럼 그것을 기억할 것이네.」욥기 11:16 · 본디새김

물이 흘러가고 난 뒤에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이전의 물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난도 그렇게 지나가고, 언젠가는 과거의 일로 떠올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욥이 잃은 것을 생각하면 이 말은 단순한 위로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욥은 재산뿐 아니라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몸에는 병이 생겼고, 이전의 삶은 무너졌습니다(1–2장). 초파르의 말은 그 모든 고통이 언젠가 흘러간 물처럼 기억될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욥에게 필요한 것이 단순히 고통을 잊는 일인지는 묻지 않습니다.

특히 자녀들의 죽음은 상황이 좋아진다고 해서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원하는 것은 괴로운 기억을 지워 주겠다는 보장보다, 왜 그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께 묻고 대답을 듣는 것입니다.

「자네 삶은 한낮보다 밝게 솟아오르고, 어두워져도 아침 같을 것이네.」욥기 11:17 · 본디새김

원문의 두 번째 문장은 문법과 어휘에 어려움이 있어, 어둠이 아침처럼 된다는 읽기와 밝게 빛난다는 방향의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전체 이미지가 회복된 삶의 밝음이라는 점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욥은 10장 마지막에서 자신이 향하게 될 곳을 어둠과 깊은 그늘로 묘사했습니다(10:21–22). 반면 초파르는 욥의 미래가 아침과 한낮의 빛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이 어둠을 이야기하자 초파르는 빛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용하는 빛과 어둠은 서로 다른 질문에 속해 있습니다. 욥의 어둠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듯한 경험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습니다. 초파르의 빛은 올바른 행동을 하면 다시 복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초파르가 제시하는 미래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미래가 욥의 현재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런 순서로 일하시리라는 보장도 본문 안에서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약속이 아니라 초파르가 욥에게 한 약속입니다.

그 차이를 잊으면 초파르의 말이 마치 하나님의 판결처럼 들리게 됩니다.

아무도 겁주지 않는 밤

욥기 11:18–19 본문 →

초파르의 약속은 마지막으로 밤의 평안에 이릅니다.

「자네는 희망이 있어 안심하고, 살펴본 뒤 안전하게 누울 것이네.」욥기 11:18 · 본디새김

‘살펴본 뒤’는 본디새김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변을 살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땅을 파는 실제 행동을 떠올리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뒤에 이어지는 ‘안전하게 누울 것’이라는 표현은 분명합니다. 초파르는 욥이 더 이상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중요한 것은 욥에게 밤이 특별히 고통스러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7장 4절에서 밤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뒤척이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7장 13–14절에서는 잠자리가 자신을 위로하기를 바라지만 꿈과 환상마저 두려움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초파르가 약속하는 평안한 밤은 바로 욥이 간절히 원하지만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네가 몸을 눕히면 겁줄 이가 없고, 많은 사람이 자네에게 호의를 구할 것이네.」욥기 11:19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종류의 안전이 함께 나타납니다. 첫째는 신체적인 안전입니다. 누워 있을 때 공격하거나 위협할 사람이 없습니다. 둘째는 사회적인 회복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욥에게 호의를 구할 만큼 그의 지위와 관계가 회복됩니다.

앞에서 욥은 가족과 종들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던 사람이었습니다(1:3). 초파르의 약속은 단지 병이 낫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욥이 잃어버린 안정된 삶과 사회적 위치를 되찾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 모든 약속에는 진실한 신앙이 바랄 만한 좋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고난이 끝나고, 두려움 없이 잠들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하찮은 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복들이 반드시 어떤 회개 행위의 대가로 즉시 주어진다는 것은 또 다른 주장입니다.

초파르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믿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선하심이 반드시 특정한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하나로 합쳐진 것입니다.

그 결과 욥에게는 고난을 견디는 일에 더해, 회복되지 않는 자신의 삶이 곧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여겨질 위험까지 생깁니다. 그러한 설명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자신의 고난뿐 아니라 그 고난이 계속되는 이유까지 책임지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살펴본 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하파르(⁨חָפַר⁩)는 기본적으로 땅을 파거나 무엇인가를 찾아 조사하는 뜻을 지닙니다. 문장의 자세한 의미는 불확실합니다.

마지막에 남는 두 종류의 희망

욥기 11:20 본문 →

초파르는 밝은 미래를 약속한 뒤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악인들의 운명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눈은 쇠하고, 그들에게서 피할 길은 사라지며, 그들의 희망은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것뿐이네.」욥기 11:20 · 본디새김

이 문장에는 세 가지 상실이 있습니다. 악인은 앞을 볼 능력도, 위험에서 벗어날 길도, 미래를 기대할 근거도 잃습니다.

18절에서 초파르는 욥에게 희망이 있으므로 안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0절에서는 악인들의 희망을 죽음과 연결합니다. 초파르가 생각하는 길은 둘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안전과 밝은 미래가 있고, 악인에게는 탈출할 길이 없는 파멸이 있습니다.

이 대조는 욥을 향한 사실상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욥은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을 바랐습니다. 3장에서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탄식했고, 6장 8–9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끝내 주시기를 소망했습니다. 10장에서도 삶에 대한 깊은 절망을 드러냈습니다.

그런 욥에게 초파르는 악인들의 마지막 희망이 죽음뿐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20절은 직접적으로 욥을 악인이라고 부르는 문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선 비난과 회개의 촉구를 함께 읽으면, 욥이 잘못된 길을 계속 고집할 경우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 경고하는 기능을 합니다.

여기서 초파르의 연설은 처음과 이어집니다. 처음에 그는 욥의 말을 ‘헛말’이라고 규정했고, 마지막에는 악인의 희망이 헛되이 끝날 것을 선언합니다.

결국 욥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좁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을 멈추고 초파르가 제시한 죄의 해석을 받아들이거나, 악인의 결말을 경고받는 것입니다.

초파르에게는 욥이 실제로 결백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을 가능성이 고려되지 않습니다.

맺음 — 한낮의 빛을 약속하는 사람 앞에서

욥기 11:1–20 본문 →

욥기 11장의 초파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는 주장도 옳습니다. 하나님이 악행을 아신다는 말도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권면에도 진리가 있으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평안을 주실 수 있다는 소망 역시 정당합니다.

초파르의 잘못은 이러한 진리들을 욥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자신이 욥의 숨겨진 죄를 알고 있는 것처럼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욥의 모든 고난을 죄에 대한 형벌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회복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욥이 자신의 권면에 따르면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옳은 진리를 말하는 것과 그 진리를 지금 이 사람에게 올바르게 적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초파르는 하나님의 지혜가 헤아릴 수 없다고 고백했지만, 그 고백이 자신의 확신을 제한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초파르의 연설에는 아름다운 장면이 많습니다. 한낮보다 밝게 솟아오르는 삶, 흘러간 물처럼 지나가는 괴로움, 두려움 없이 편안히 눕는 밤, 호의를 구하며 찾아오는 사람들. 욥이 잃어버린 것들이 그 장면 속에 하나씩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장면을 말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욥을 향한 진정한 이해를 찾기 어렵습니다.

초파르는 하나님이 입을 여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초파르가 들려주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내리신 판결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판결입니다.

연설이 끝나면 욥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자녀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병든 몸도 낫지 않았으며, 고난의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초파르는 욥에게 언젠가 두려움 없이 누울 수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욥 앞에 있는 것은 편안한 침상이 아니라,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조차 알려 주지 않으면서 그 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친구입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지혜를 가장 크게 외친 사람이, 그 지혜 앞에서 가장 먼저 침묵해야 할 순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